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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언언 Jun 27. 2022

어느 날 엄마가 말했다“보육원에 보내려 그랬는데”

인도 바라나시


어느 날 엄마가 말했다.


“내가 너희 셋 맡을 때, 사람들이 다 말렸어. 여자 혼자 애 셋 키우기 힘드니까 몇 명은 보육원 보내라고. 내가 너희 셋 모두 키운다고 해서 지금 같이 사는 거야.”


그때부터였을까. 나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내가 태어나서 엄마를 불행하게 하는구나. 10대 소녀에게 너무 가혹한 일이었다. 나를 낳은 엄마가 나를 키우면서 당신의 인생을 후회하는 걸 보는 일이란.


_세계여행을 떠날 수 있었던 이유

인생의 출발점이 0이라고 한다면 나의 인생은 시작부터 불리했다. 내 인생은 -100에서 시작된 것 같았다. 내가 9살이 채 되지 않았을 때 아빠의 잦은 폭행으로 엄마는 집을 나갔고, 아직 한글도 떼지 못한 두 동생의 엄마는 내가 되어야만 했다. 아무리 울어도 집 나간 엄마는 돌아오지 않았다.

엄마 없는 불쌍한 애 딱지가 붙은 지 몇 년, 갑자기 엄마가 돌아왔다. 이제 행복할 줄만 알았는데 아빠의 변함없는 폭력으로 부모님은 결국 이혼했고 완벽한 남이 되었다.

그래도 이제부터 엄마와 살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엄마는 낮에 신학대학을 다니고 저녁에는 아르바이트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밤늦게 엄마가 퇴근할 때까지 퀴퀴한 반지하에서 방을 치우고 어린 두 동생을 먹이고 챙기는 일은 맏이인 내 몫이었다.

그 당시 집 현관문에는 손바닥 크기의 동그란 신문 구멍이 있었다. 애들 셋밖에 없다는 걸 알았는지 매일 저녁 누군가 신문 구멍에 손을 넣어 신발을 훔쳐 가고, 초인종을 누르고 도망가고, 현관문을 쾅쾅쾅 두드리며 기괴한 소리를 질렀다. 나도 무서운데 엉엉 우는 막내와 둘째를 달래주느라 같이 울지도 못했다.

하루는 여름에 날이 더워 창문을 열어놓고 있는데 창문 밖에서 부스럭 소리가 났다. 사람이 다니지 않는 마당 뒤편이었다. 밖은 컴컴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정말 사람이 있으면 어쩌지, 화장실에 가는 척 자연스럽게 방을 나왔다. 그리고 부엌에서 저녁을 하고 있던 엄마에게 귓속말을 했다. 엄마는 야구 방망이를 들고 뛰쳐나갔고 “야!” 하는 소리가 있은 지 한참 후에 돌아왔다. 알고 보니 어떤 남자가 밤마다 창문 밖에서 쭈그리고 앉아 나를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뒷마당에 똥까지 싸놓으면서. 그 이후로 나는 종종 악몽을 꾼다. 머리가 사마귀처럼 생긴 사람이 창문에 매달려 잠든 나를 쳐다보는 꿈.


어느 날 엄마가 보육원 이야기를 꺼냈을 때, 아빠와 만난 것을 후회한다고, 시간을 되돌린다면 절대 만나지 않을 거라고 말했을 때, 감히 묻지 못했다. 엄마가 아빠를 만나지 않았으면 나도 태어나지 못했던 건지, 엄마는 우리가 태어난 게 후회스러운 건 지 말이다. 나를 보육원에 보내지 않은 엄마에게 감사했다.


“너희들 때문에 내가 재혼도 안 하는 거야.”


그나마 자매 중에 나이가 많은 내가 공감해주길 바라서였을까. 엄마는 유독 나를 붙들고 그런 말을 많이 했다. 엄마가 여자로서 행복한 인생을 포기하고 이렇게 고생하는 게 모두 내 탓인 것 같아 남몰래 울었다. 내가 미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아빠에게 당했던 육체적 학대는 사라졌지만 엄마에게 당하는 심리적 학대와 정서적 방치가 나를 조금씩 갉아먹었다. 내가 태어난 게 잘못이 아니라 나에게 죄책감을 심어주던 엄마의 말이 틀렸다는 것은 어른이 된 지 한참 후에야 알았다.


한 부모 가정이 으레 그렇겠지만 우리 집도 참 가난했다. 하루는 밥 먹자는 나의 말에 엄마가 대답이 없었다. 한참을 배고프다고 떼쓰다가 주린 배를 껴안고 잠이 들었다. 그날 저녁 쌀이 떨어졌고 쌀을 살 형편이 못됐다는 사실은 나중에 알게 되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고등학교 시절, 학원은커녕 문제집 살 형편도 못되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투잡, 쓰리잡까지 뛰어가며 돈을 벌었다. 그러나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가난과 고생은 털어지지 않는 얼룩이요, 밑 빠진 독이었다. -100에서 시작한 인생은 100을 더해도 0밖에 안되었다. 부모 잘 만나 여유롭게 시작한 사람을 만나면 절망했고 부러워했다. 고난이 내게 유익이라는 말을 생각하며 밤마다 녹초가 된 몸으로 하늘을 바라보며 울었다. 어떻게 고난이 유익할 수 있을까, 이 가난이 끝나긴 하는 걸까.


오늘에서야 깨닫는다. -100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잃는 것이 두렵지 않다. 처음부터 없었던 것에 결핍을 느끼지 않으니까. 가난은 내게 새로운 모험을 할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결과가 보장되지 않은 낭떠러지로 내 인생을 몰고 가면서, 어쩌면 나도 저 새처럼 하늘을 날 수 있는 날개가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나의 한계는 내가 정하는 거니까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일단 해보자고 생각했다.

세계여행을 떠나기로 하고 포기한 안정적인 수입과 이뤄놓은 경력이 아깝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그러나 돈이나 성공, 안정적인 삶을 유지하는 조건들은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었다. 빈손으로 시작했기에 이뤄놓은 모든 것은 하늘의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언제든 다시 가질 수 있는, 소중하지만 사소한 것들. 힘들게 쌓은 탑을 흩어 버리고 다시 0이 되어도 -100에서 걸어온 나를 두렵게 할 수 없다.

그러니 가지지 못한 것을 생각하며 좌절할 필요는 없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 고난에도 장점이 있다. 셀 수 없이 넘어지면서 무릎과 마음엔 흉이 남았어도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나는 법을 배웠으니까.

고난이 내게 무슨 유익인지 하늘을 향해 묻던 어린 나에게 이제야 답을 한다. 어려운 날을 견딘 네 덕분에 오늘의 내가 꿈을 이루고 있음을, 그러니 조금만 힘들고 많이 웃기를. 따뜻한 포옹과 응원을 담아.



에세이 <어차피 오늘이 그리워진다> 본문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출간 기념 연재는 매주 월요일 브런치로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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