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덴의 영화읽기 36] <중경삼림> & <타락천사>
왕가위가 돌아왔다. 사실 그는 떠난 적이 없다. 그가 신작을 선보이든 그렇지 못했든 늘 그의 작품은 영화 팬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었으니. 그래서 첫 문장을 다시 고쳐 써본다. 왕가위의 작품들이 새롭게 돌아왔다고.
영화감독 왕가위가 본인의 과거 작품들을 직접 4K 화질로 리마스터링하여 관객들을 찾았다. 이번 재개봉은 과거의 왕가위 팬들에겐 향수이자 청춘일테고 그의 이름과 작품을 처음 접한 세대들에겐 1990년대의 홍콩이라는 과거의 시공간을 현재의 질료로 체험해보게 되는 신선한 기회가 될 것이다. 본고를 시작으로 몇 차례에 걸쳐 재개봉한 왕가위의 작품들을 함께 읽어보려 한다.
1997년 7월 1일
19세기 중후반에 걸쳐 벌어진 영국과 당시 청나라의 제 1,2차 아편전쟁에서 청나라는 처참히 패배했다. 이는 국제질서의 재편이었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을 읽은 유럽인들에게 아시아의 대제국들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동경했던 그들이 자신들에게 고개를 조아리게 됐다. 그것도 고작 마약 때문에. 청나라의 몰락으로 서구 열강들은 너도나도 아시아로 몰리기 시작했다. 이른바 제국주의의 시대가 열렸고 이를 상징하는 가장 큰 사건이 바로 영국이 홍콩을 소유해버린 일이다. 문서 상으로는 홍콩을 99년간 임차하기로 약조했지만 당시 영국인들에게 99년이라는 시간은 무기한을 의미했을 것이다. 그렇게 1898년 홍콩에는 유니온 잭(영국의 국기)이 걸렸다.
시간이 흘러 정확히 99년 뒤인 1997년. 홍콩은 결국 다시 중국으로 반환이 됐다. 한 세기 동안 홍콩이라는 공간은 영국과 중국 본토의 교집합이었다. 서양식 가치관과 중국식 문화가 융합되었던 곳이 이제 다시 중국의 사회주의 체제로 편입된 것이다. 1997년 7월 1일에 홍콩 반환이 예고되어 있음을 몇 해 전부터 미리 인지하던 홍콩인들은 달라지게 될 벤다이어그램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영화 <중경삼림>과 <타락천사>를 통해 찾아보려한다.
임청하의 퇴장
1994년에 개봉했고 국내에는 이듬해에 공개된 <중경삼림>은 2부 구성의 작품이다. 임청하와 금성무가 축이 되어 1부를, 양조위와 왕비가 2부를 끌고 나간다. 우선 1부의 시작부터 왕가위 필름의 인장이라고도 일컬어지는 핸드헬드 촬영과 스텝프린팅 기법으로 추격전이 묘사된다. 흔들리는 화면과 번잡스러운 거리. 혼돈의 홍콩이다.
1부에서 임청하가 분한 역할은 영국의 탈을 쓴 홍콩을 상징한다. 금발의 가발을 쓰고 레인코트를 입은 여인의 행색은 흡사 언제 비가 올지 몰라 늘 코트를 입는 노랑머리의 영국인과도 같다. 그녀의 직업은 마약 밀매업자이다. 그리고 그녀의 손과 발이 되어주는 행동책들은 인도인들이다. 영국인이 인도를 앞세워 청나라에게 아편을 강매하는 모습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금성무가 맡은 뱃지넘버 223의 경찰은 작중 4월 1일에 실연을 당한다. 만우절 거짓말일 것이라며 그는 현실을 부정한다. 스스로에게 한 달의 기간을 주며 이 사태를 두고보려 한다. 그래서 그는 한 달 후인 1994년 5월 1일이 유통기한인 파인애플 통조림을 모으는데 천착한다. 그 때 나온 가장 유명한 <중경삼림> 속 대사. “사랑에도 유통기한이 있다면 내 사랑은 만년으로 하고 싶다.” 영국과 동행해온 홍콩의 유통기한이 얼마 남지 않아 보임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1994년 5월 1일이란 작중 날짜는 실제 홍콩이 반환되기로 약속된 1997년 7월 1일을 빗댄 날짜임이 분명하다.
1부의 마지막. 마약밀매상(임청하)은 영국인으로 추정되는 자신의 보스가 운영하는 바(bar)로 돌아와 그를 죽인다. 그리고 노란 가발을 벗어던지며 스크린에서 유유히 사라진다. 공교롭게도 <중경삼림>이 배우 임청하의 은퇴작이고 1부의 마지막에 임청하가 사라지는 장면이 그녀를 스크린에서 볼 수 있었던 마지막 장면이기도 하다. 그녀가 떠나는 날 길에 널부러진 그녀의 보스와 가발. 그리고 카메라는 그 옆에 함께 버려져있는 깡통에 새겨진 유통기한을 비춘다. 1994년 5월 1일. 홍콩의 유통기한은 끝이 난 것이다.
California Dreamin’과 몽중인
2부는 1부와 사뭇 톤이 다르다. 밝고 경쾌하다. 그럼에도 어딘가 한구석에는 그림자가 드리워져있다. 2부에서는 경찰 번호 663을 맡은 양조위가 등장한다. 경찰 663도 1부에서 경찰 223(금성무)이 늘 들르던 테이크아웃 전문 식당 ‘Midnight Express(미드나잇 익스프레스)’의 단골이다. 그리고 663 역시 223과 마찬가지로 여자친구로부터 이별을 종용당한다.
2부의 양조위가 맡은 역할은 당시의 홍콩인들을 대변한다. 그렇다면 양조위가 분한 경찰 663을 떠난 여자친구는 영국이 될 것이다. 이 추측의 힌트는 늘 663이 퇴근하며 미드나잇 익스프레스에서 여자친구를 위해 샐러드를 사갔는데 하루는 가게의 사장이 생선튀김(피쉬 앤 칩스)을 살 것을 제안했고 다음 날 여자친구의 반응이 좋았다고 하는 데서 얻을 수 있다. ‘피쉬 앤 칩스(Fish&Chips)’가 영국을 대표하는 음식이라는 걸 관객들이 잘 알고 있을 것이라는 왕가위 감독의 계산이었을 것이다.
왕비가 맡은 페이라는 역은 경찰 223과 663의 단골가게인 미드나잇 익스프레스에서 일하는 점원이다. 사장의 사촌동생이기도 하다. 페이는 경찰 663이 마음에 든다. 다만 티를 내지 않을 뿐이다. 하루는 663이 실연을 당했음을 알게 되고 일련의 사건으로 663의 집 열쇠까지 얻게 된다. 그때부터 페이는 마치 우렁각시처럼 또는 스토커처럼 몰래 663의 집을 드나들게 된다. 페이는 663의 집에서 전 여자친구의 흔적을 하나하나 지워나간다. 페이의 물건들로 대신 채워진 집에 돌아온 663은 내 집이 내 집 같지가 않음을 느낀다. 경찰 663이 홍콩인을 대변하고 그를 버리고 떠난 여인이 영국이라 한다면 663의 집은 홍콩이라 볼 수 있다. 페이는 홍콩에서 영국을 지우고 새로운 것들을 채워나간다. 이미 변화를 맞기 시작한 홍콩의 모습이다. 그리고 흘러나오는 음악 California Dreamin’과 夢中人(몽중인). <중경삼림>의 2부를 관통하는 두 곡의 제목에는 공교롭게도 ‘꿈’이라는 단어가 들어있다. 이미 홍콩의 변화는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 변화의 종착점이 어디인지는 알 수 없다. 변화의 끝은 아직 현실이 아닌 꿈의 영역인 것이다.
질주하는 홍콩
원래 <중경삼림>은 3부 구성의 영화였다고 한다. 하지만 러닝타임이 너무 길어질 것을 우려한 왕가위는 세 번째 이야기를 별개로 떼어내고 살을 더 붙여 독립된 한 편으로 만들어내는데 그게 바로 <타락천사>다. <중경삼림>이 개봉하고 채 1년이 되지 않아 공개되었다.
<타락천사>에서는 두 남자와 세 여자가 서로 얽혀있다. 그리고 <타락천사>도 <중경삼림>과 같이 젊은 남녀의 유사 연애를 드러내지만 그 속엔 역시나 홍콩이라는 도시의 운명을 녹여냈다. 우선 여명이 맡은 황지민은 킬러다. 그는 늘 스스로의 결정을 위임한다. 만사가 귀찮다. 킬러에겐 정확한 시간과 장소에서 죽여야 할 사람이 정해져 있다. 그가 결정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방아쇠를 당기기만 하면 된다. 이제 곧 반환이 될 홍콩을 여명의 캐릭터에 대입시켰을 때 홍콩은 영국이든 중국이든 어딘가의 결정에 따라 움직이게 되는 비주체적인 자아가 되는 셈이다. 그 킬러의 방을 찾아와 청소를 해주는 파트너가 있다. 이가흔이 맡은 파트너 역할은 흡사 <중경삼림> 2부의 페이와도 같다. 홍콩으로 대변되는 킬러 황지민의 어질러진 방을 치워주는 것은 역시나 과거를 씻어내는 홍콩의 모습일 것이다. 그리고 <중경삼림>의 마약밀매자(임청하)처럼 금발 머리를 하고서 맥도날드에서 처음 등장한 베이비(막문위)는 영국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녀는 황지민에게 다가가 우리가 예전에 만난 적이 있다고 말한다. 영국에 의해 자본주의화 되었던 홍콩의 환유이다. 하지만 킬러 황지민은 그녀를 만난 기억이 없다고 말한다. 이미 홍콩은 과거를 잊은 것일까.
금성무는 <중경삼림>에 이어 <타락천사>에도 등장하는데 동명의 다른 캐릭터 하지무를 연기한다. <중경삼림> 속 하지무는 뱃지넘버 223의 경찰인데 <타락천사> 속 하지무는 죄수번호 223의 범죄자다. <타락천사>의 하지무를 홍콩으로 치환해 영화를 읽어봐도 여러 장면들이 새롭게 보인다. 작중 하지무는 말을 하지 못한다. 이는 반환 여부에 대해 아무런 입장을 내비치지 못 하는, 발언권이 상실된 홍콩이다. 영화 말미에 하지무는 아버지를 하늘나라로 떠나보낸다. 홀로 남게 된 하지무는 아무도 없는 거리에서 어딘가를 향해 오토바이로 질주를 한다. 영국을 떠나보내고 본토를 향해 달려가는게 아닐까하는 홍콩의 모습이 중첩되는 대목이다. 그리고 이내 엔딩 크레딧이 올라온다. 왕가위 감독이 90년대 중반 떠나보낸 그때의 홍콩은 현재 어디로 도착해있을까.
홍콩 엑소더스(Exodus)
2021년의 홍콩을 바라보자. 중국으로 예편된 홍콩은 지난 2019년 중국 정부의 ‘범죄인 인도 법안’에 반대하며 시위에 나섰고 이는 곧 홍콩의 민주주의를 사수하려는 운동으로 이어졌다. 이에 중국 정부는 2020년 7월 ‘홍콩 보안법’을 속행한다. 홍콩 보안법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국가 분열,국가 전복,테러 활동,외국 세력과의 결탁을 최고 무기징역형으로 처벌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이에 영국 정부는 1997년 홍콩 반환 이전에 태어난 홍콩인들에게 BNO(British National Overseas,영국해외시민) 여권을 발급하기 시작했다. 홍콩 보안법으로부터 홍콩을 보호하겠다는 영국 정부의 의지인 것이다. 1997년 7월 1일, 중국은 홍콩을 영국으로부터 반환받는 대신에 조건부로 홍콩에 두 개의 정치체제가 공존할 수 있는 ‘일국양제(一國兩制)’를 제안했고 이를 50년간 유지하기로 양국은 협의했다. 원칙적으로는 2047년이 되어야만 홍콩은 온전히 중국의 통치 하에 들어가게 되는 셈이다. 이에 영국 정부는 위기에 빠진 홍콩에 손을 내밀었고 실제로 영국의 문호 개방이 시작되고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2021년 2월에만 벌써 홍콩 시민 5천여 명이 여권 발급을 신청한 상태라고 한다. 이에 대해 중국 정부는 영국 정부에 내정 간섭을 금한다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왕가위의 영화 속 시점에서 30여 년이 가까이 흐른 홍콩은 아직도 혼돈이다. 왕가위가 떠나보낸 홍콩의 여정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보인다. 그래서 여전히 유효한 그때의 물음들이 리마스터링되어 다시 돌아온 게 아닐까. 대답은 영화관과 그 언저리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