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덴 Feb 16. 2021

<오즈의 마법사>를 우주로 옮겨본다면?

[고덴의 영화읽기 35] K-스페이스 오페라의 서막 <승리호>

연일 화제다. 지난 5일 공개 이후 영화 팬들의 입에 가장 자주 오르내리는 작품은 단연코 <승리호>다. <승리호>가 개봉이 아니라 공개가 되었다고 한 이유는 넷플릭스에서 최초로 선보여졌기 때문이다. 이제는 넷플릭스와 왓챠같은 OTT 서비스를 통해 관객들과 처음 만나는 작품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이 역시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뉴 노멀(New Normal)'이리라.

     

<승리호>는 국내 관객들 사이에서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화제다. 실제로 전 세계 넷플릭스 사용자들의 콘텐츠 조회를 통계로 나타낸 순위에서도 <승리호>는 가장 상단에 놓여있다. 영화산업의 기준이 새로이 정립되고 있는 이 시기와 호응하며 공개된 <승리호>의 정체는 예상보다 새롭고 유의미했다.   

  

우주를 배경으로 한 한국 영화가 처음 선보여진 점에서부터 그러하다. 여기에서 '한국 영화'라는 것은 산업적 측면에서의 소속을 의미한다. 예술 작품 그 자체에 국적성을 부여하는 것이 아님을 미리 전제하고 작품 속으로 들어가본다.



기시감에서 기대감으로

     

작품의 시공간 설정은 다음과 같다. 2092년의 지구. 작중 지구는 생태적인 의미에서도 사회적인 분위기에서도 망가질 대로 망가진 환경이다. 아주 멀게만은 느껴지지 않는 근미래에 우리가 살고있는 행성 지구가 황폐화되어 있다는 설정. 이미 작품의 출발은 디스토피아다. 익히 우리가 봐왔던 헐리우드의 '스페이스 오페라(우주를 배경으로 한 서사)'들이 설정한 세계관과 출발이 크게 다르지 않다. 기시감은 안정감을 줄 순 있어도 기대감을 주기는 어렵다. 하지만 속단은 말자. 이제 막 영화가 시작됐으니.     


계속해서 삶을 영위하기에 지구에는 희망이 없어보인다. 그래서 UTS사는 유토피아를 꿈꿔본다. 이른바 화성으로의 '테라포밍(Terra지구+Forming형성, 지구 외의 다른 행성에 생태계를 조성해 지구화하는 것)'을 기획한다. 지구에서 선별된 상위 5%의 사람들만이 새 유토피아 화성으로 갈 수 있다. 영화 속 세계가 아닌 현실 세계에서도 화성으로의 대이주를 꿈꾸는 기업인이 있으니 이 설정이 그렇게 황당하게만 여겨지지 않는다.     


그리고 등장하는 우리의 주인공들. '승리호'라는 이름의 한 우주선에서 동고동락하는 네 캐릭터들의 생업은 우주의 쓰레기를 치우는 청소부다. 직업을 보아 당연히 선택된 상위 5%의 시민들은 아닐 테니 화성으로는 가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날이 갈수록 부채만 늘어간다. 하부 구조의 노동자들의 삶이 녹록지 않은 것은 저 멀리 우주에서도 마찬가지다.     


비루하기 짝이 없는 날들의 연속. 어느 날 주인공들은 우주를 유영하고 있는 듯한 또는 난파된 듯한 선체를 강탈해와 해체한다. 그런데 그 안에서 별안간 인기척이 느껴진다. 유치원생 정도 되는 여자아이가 안에 있었다. 우선 아이를 승리호로 들인다. 아이의 부모에게 돌려주면 어느 정도 사례는 받지 않을까하는 따위의 농반진반 한담을 늘어놓는 중 켜지는 TV 방송. 화면에서는 몸 속에 수소폭탄을 내장한 안드로이드 '도로시'의 얼굴이 공개됐다. 우리의 주인공들은 아연실색. 유일하게 남은 마지막 재산 승리호 안으로 들인 귀여운 꼬마가 수소폭탄 로봇이었을 줄이야. 기시감으로만 점철될 뻔했던 이야기가 기대감의 영역으로 전이되기 시작한다.



'도로시'의 등장, 알레고리의 완성


이후의 전개는 이제 관객들의 몫이다. 더 이상의 스토리에 대한 언급은 아직 작품을 보지 못한 독자들에겐 스포일러가 될 것이고, 이미 관람을 마친 독자들에겐 사족이 될 것이다. 그래서 지금부터는 이 영화를 다른 작품과 함께 읽어보려 한다.    

 

작중에서 도로시란 이름이 처음 등장하는 순간 떠오르는 하나의 이야기. 어딘가로 버려진 소녀가 처음 보는 개성 강한 캐릭터들과 낯선 곳에서 조우하며 시작되는 이야기. 그 소녀의 이름도 마침 공교롭게 도로시. 그렇다. <오즈의 마법사>다. 이 발상이 추측과 착각의 영역으로 치부되기 전에 얼른 보충 설명이 들어가야할 것만 같다.     


<오즈의 마법사>에서 도로시는 거대한 토네이도에 휩쓸려 '오즈'라는 이름의 미지의 나라에 떨어지고 그 곳에서부터 걸어서 에메랄드 도시로 가게된다. 도시로 향하는 길에서 도로시는 사람처럼 뇌를 갖고픈 허수아비와 심장을 얻길 원하는 양철 나무꾼을 만난다. 그리고 겁쟁이 사자까지 만나며 오즈 원정대가 완성된다. 데칼코마니처럼 똑같이 찍어낸 그림은 아니지만 상황은 매우 유사하다. <승리호>의 도로시도 무언가에 휩쓸려 난파된 우주선에서 등장한다. 도로시가 만난 네 명의 승리호 선원들 중 하나는 배우 유해진이 분한, 사람이 되고픈 안드로이드 '업동이'다. 허수아비와 양철 나무꾼에 대응이 되는 캐릭터인 셈이다. 그리고 험상궂은 외모와 달리 네 명 중 가장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배우 진선규가 맡은 '타이거 박'의 이름은 오즈 원정대의 겁쟁이 사자에 대응하기 위해 작명되었을 확률이 높다.     


그리고 <오즈의 마법사>의 주인공들은 오즈라는 나라를 통치하는 마법사를 만나러 간다. 오즈의 절대자이자 전지전능한 마법사라 불리는 이에 대응하는 <승리호> 속 인물은 화성으로의 테라포밍을 기획하는 기업 UTS의 회장이다. 오즈의 마법사가 아닌 우주의 마법사 역시 승리호를 타고 있는 이들과 조우하게 될 운명인 것일까.     


그럼 <승리호>의 구조는 왜 <오즈의 마법사>와 비슷해 보일까. 그 이유를 추론해보기 위해서는 <오즈의 마법사>가 담고있는 함의를 생각해보면 된다. <오즈의 마법사>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공간은 19C 말 미국사회의 경제 체제를 상징한다. 당시 미국 사회에는 은(銀)을 화폐로 삼는 은본위제도를 지지하던 중산층들과 상대적으로 가치가 더 큰 금(金)을 기준으로 삼는 금본위제도를 지지한 상류층과의 충돌이 있었다. <오즈의 마법사>에서 도로시가 은색 구두(영화에서는 빨간 구두)를 신고 노란(황금빛) 벽돌 길을 걸어가서 최고권력자 마법사를 만난다는 점이 당시 사회를 보여주는 상징 중 하나이다. 오즈(Oz)라는 가상 공간의 이름도 금을 세는 단위인 온스의 약자 oz에서 나온 것이다. 즉 <승리호>가 이런 구조를 띤 것은 어찌보면 우주 액션 활극을 표방하면서도 거대한 자본이 지배하는 세상과 맞서는 소시민들의 저항이라는 알레고리를 내포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현실의 우리를 비추는 또 하나의 알레고리

     

<승리호>가 공개되고 나서 관객들의 평은 대체로 우호적이다. 하지만 아쉬운 목소리도 분명 존재한다. 그 영역은 역시나 기존 스페이스 오페라들이 떠오를 수밖에 없는 기시감과 클리셰의 영역일 것이다. 미장센의 측면에서는 <승리호>가 구현한 우주 세상의 저잣거리와 뒷골목은 리들리 스콧의 1982년 작품 <블레이드 러너>와 유사했고 우주선들이 활공하는 우주의 분위기는 일본 애니메이션 <카우보이 비밥>과 도상적으로 매우 닮아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그리고 우주선 내에서 일어나는 인물들 간의 합은 마블 영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를 떠올리게 만든다.      


그럼에도 <승리호>는 성공적인 영화다. CG와 같은 기술적 성취만큼은 전에 한국 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수준이다. <그래비티>와 <인터스텔라> 이후 스페이스 오페라 장르에 대한 관객들의 기대감은 아주 높게 상향 평준화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우주를 얼마나 잘 구현해냈는가의 시각효과 측면에서는 더욱 예민한데 비록 레퍼런스의 흔적은 많았지만 <승리호>는 관객들의 우려를 잠재울 정도로 높은 퀄리티로 우주를 그려내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서두에 언급했던 작품의 국적성과 연결될 수 있는 지점으로서, <승리호>가 산업적 태생은 한국이지만 서사에서는 한국이라는 국가의 특수성을 인장으로 쓰지 않았다는 점도 탁월했다. 승리호의 선원들이(한국인들이) 초국적 연대를 주도하긴 했으나 종국의 스포트라이트를 독식하지 않으려 했던 점이 그 근거라고 볼 수 있다. 자칫 각본이 그 지점을 놓쳤다면 영화 <아마겟돈>의 결말처럼 오로지 미국만이 이 세계를 구할 수 있다거나 중국의 <유랑지구>처럼 위대한 중화사상만이 전 지구적 문제를 해결한다는 시쳇말로 '국뽕 영화'가 재생산되었을 확률이 높았을 것이다.     


결국 국뽕 영화의 수렁에 빠지지 않은 <승리호>는 영화 바깥으로 나와 어쩌면 끝날 기미가 좀처럼 보이지 않는 코로나 시대의 관객들에게 디스토피아의 비관 속에서도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의 초국적 연대와 신뢰가 주는 희망을 보여준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이 위기를 결국에는 헤쳐나갈 우리들의 모습을 미리 예견한 또 하나의 알레고리일지도 모른다.



매거진의 이전글 <우리들>에 이어 <우리집>, '나'가 아닌 '우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