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화네 심야 포차
(문에 달린 종이 울린다.) 딸랑. (주방의 커튼을 손으로 치우며) "어서 오세요. 편한 자리에 앉으세요~, 뭐 드릴 까요?"
(수건으로 식탁을 닦으면서 얼굴을 슬쩍 살핀다.)"표정이 꼭 조개 같네요. 누가 억지로 열려고 해도 절대 안 열리겠네요. 오늘 참 많이 비렸나 봅니다."
"몇 개월 전의 저의 모습을 보는 거 같네요."
"메뉴 고를 기운도 없어 보이니, 조개탕 좋아하세요? 따뜻한 국물 마시면 나아질 거예요. 잠시만 기다려봐요"
(주방을 향하는 묵직한 발걸음. 뚜벅. 뚜벅) "술은... 알아서 꺼내 마셔요. 냉장고 맨 윗줄에 투명한 놈이 오늘 같은 국물에는 제격이니까."
"사는 게 참 그렇죠. 남들 눈치 보느라. 그놈의 사회적 가면 하나씩 쓰고 사느라 정작 내 속은 배터리가 나간 핸드폰처럼 시커멓게 꺼져가는 줄 모르고.."
(주방에서 주섬주섬 냄비를 꺼낸다.) "조개들도 보면 꼭 다른 조개들은 열이 받으면 활짝 입을 여는 조개가 있으면, 어떤 조개는 아무리 열을 주어도 입을 열지 않는 조개들이 있어요. 마치 우리들 같지 않아요?"
(불 켜는 소리가 들린다. 타다닥. 타다닥.) "껍질을 열어야 속이 보일 텐데, 껍질 때문에 속이 안보이잖아요?"
(칼로 재료를 써는 소리가 들린다. 탁. 탁.) "껍질이 되게 단단하다고 생각하는 데, 잘 부서지는 게 조개껍질이에요. 참 아이러니 하죠? 연약한 속을 지키기 위한 껍질이 금방 부서진다는 게."
"우리랑 같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연약한 속을 지키려다가 껍질이 깨져버린 조개가 참 우리 같다는 생각을 해요. 그게다 안이 너무 물러서 그래요. 부서질 걸 알면서도 버티는 거죠. 우리들처럼. 무른다는 건 약하다는 게 아니라, 아직 살아있다는 증거거든요."
(냄비에 칼로 재료들을 밀어 넣는다.) "한국 사람인데 매운 거 못 먹는 건 아니죠? 이럴 때는 칼칼하게 따뜻한 국물에 소주 한잔이면 속을 달래줄 거예요, 금방 되니깐 속 버리게 소주 먼저 먹지 마세요."
(주방에 얼굴만 빼꼼 내밀면서 말을 한다.) "근데 저녁은 먹고 온 거예요? 밥 잘 챙겨 먹어요. 다 먹고살자고 하는 건데, 밥을 잘 먹어야 힘도내서 뭐든 하죠. 밥을 안 먹으니 그렇게 힘이 없는 거예요"
"밥도 같이 줄까요? 아니다. 그러지 말고"
(손을 비비며 주변을 두리번 거린다. 쌀을 푼다.)
"밥도 먹어요."
"맛있는 국물에, 시원한 소주에, 따뜻한 밥 한 공기 이보다 좋은 시간이 어디 있을까요. 딱 지금뿐이에요."
(물소리가 들린다. 쏴아아.) "다 먹고살자고 하니, 이렇게 따뜻한 밥 한 끼 먹는 게 참 힘들죠?"
"저도 그랬어요. 밥도 먹지도 못하고 여린 속을 지키기 위해 껍질이 깨져가면서도 원래 다들 그렇게 사니깐 그게 맞다고 생각했던 날들이 있었어요."
(밥솥에 취사 버튼을 누른다. 띡.) "참 어릴 때는 밥 한 공기가 이렇게 먹기 힘들다는 생각을 못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흰쌀밥이 먹기가 이렇게 힘들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니깐요?"
(요리에 집중한 나머지 잠깐의 침묵이 생긴다.) ".........."
(취사가 완료되어 흰 연기가 밥솥에서 나오기 시작한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밥솥을 보니 제 지나간 그때가 보이더군요. 추운 겨울 남몰래 입김 대신 뜨거운 눈물이 흐르던 날이."
(보글보글 끓는 조개탕을 식탁에 놓는다) "자, 조개탕 나왔습니다."
"금세 소주 반 병을 비우셨네, 속 버린다니깐 참. 얼른 국물 한 숟가락 떠봐요."(숟가락을 쥐어준다.)
(기대하는 눈으로 바라본다.)"칼칼하니 시원하게 속이 풀릴 거예요"
"저도 많이 깨졌어요. 남들 눈에는 어떻게 보일지는 모르겠지만요. 사실은 제가요. 원래부터 요리를 하는 사람이 아니었어요. 저도 남들처럼 비린내가 참 심했던 사람이었어요. 전혀 안 그래 보이죠?"
(조개탕 국물을 한 숟가락을 뜨고, 먹는다.) "크으~"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경비원 일도 몇 년 동안 주말, 휴일 없이, 추운 겨울에 흰 입김이 나오고 손과 발을 덜덜 떨면서 아무도 없는 건물을 지키며 주간, 야간 근무하면서도 열심히 해도 무시도 당해 봤고요. 사지 멀쩡한데 왜 이런 일을 하는지 저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그분들이 저를 쳐다보는 표정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어요. 자신들이 더 위에 있다는 표정. 아래에서 위로 움직이는 서늘한 눈동자. 물건을 훑어보는 듯한 표정. 저도 그들과 같은 사람인데 말이죠. 그 표정에 저는 고개 숙이면서 인사를 할 수밖에 없었죠. 뭐... 제 일이니깐 가면을 써야 했죠."
(투명한 소주병을 들어 뚜껑을 연다.) "조개껍질을 단단하게 다물고 있는 것처럼 저도 빳빳한 경비복을 입으면서 안의 무른 속살이 들킬까 봐 얼마나 숨이 막히게 단추를 채웠죠."
(빈 잔을 채워주고, 술잔을 따른다.) "짠~" (잔을 들어, 투명한 잔을 부딪힌다.)
"어쩌겠어요. 살아남기 위해서 연약한 속을 지키기 위해서 껍질이라고 내어줘야 한다는 건 알고 있잖아요?"
(한잔을 마신다.)
"아으~ 써~"(표정이 구겨진다.)
"인생이 그래요. 쓰디쓴 걸 알면서도 삼켜야 할 때가 있죠. 그래도 혼자 마시는 것보다 낫지 않습니까?"
(한잔, 두 잔을 말없이 비우며 비워진 술잔을 바라본다.) "......."
(술병을 정리하며 툭 던지듯) "밤이 깊었네요. 이제 그만 일어나요. 내일 또 그 무거운 껍질 뒤집어쓰고 전쟁터로 가야 할 텐데, 잠이라도 깊이 자야지."
(손님을 문밖까지 배웅하며) "오늘 흘린 눈물이 나, 그 단단하게 닫아걸었던 마음... 여기 포장마차 바닥에 다 쏟아놓고 가요. 내가 내일 아침에 물청소하면서 싹 쓸어버릴 테니까."
(가게 안으로 돌아와 텅 빈 술잔을 정리하며, 혼잣말처럼)
"단단한 걸 뱉어내야만 고소해지는 삶도 있는 법."
"다음 주엔 그 오묘한 '오징어 입' 한 접시 내어드릴게요. 뱉어야 살 것 같은 날에 다시 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