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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니 코치 Sep 22. 2019

미국에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

왜 악재는 한 번에 몰려올까?

  더 큰 세계를 알아보고 싶다는 뜻을 품은 이후로 2년 동안 해외 해외 노래를 부르다가 드디어 미국에 왔다. 그런데 왜 생각만큼 행복하진 않은 걸까? 나 역시 다른 사람들처럼 해외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기대가 있었던 것 같다. 한국만 벗어나면 모든 것에서 자유롭고 즐겁게 살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달콤한 환상 말이다. 그러나 그런 환상은 외이도염과 함께 무참히 깨졌다.


  원래도 귀 안쪽 피부가 예민하긴 했는데 이래저래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던 4월에 오른쪽 귀에서 느낀 찌릿한 통증은 뭔가 예사롭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삽시간에 악화되더니 곧 턱을 벌리기도 힘들 정도로 아파왔다. 인터넷에 검색해보니까 심한 외이도염은 청력 상실을 부를 수도 있단다. 큰일이다 싶어서 얼른 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상대가 미국 병원이다 보니 돈걱정부터 들었다. 일단 보험사에 전화해서 포틀랜드에 있는 이비인후과 중에 어떤 곳이 그나마 가격이 저렴하고 보험 처리가 되는지 알아봐야 했다. 3번의 전화 연결 끝에 예약 없이 진료받을 수 있는 얼전 케어가 가장 낫겠다고 판단해서 가서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쓰고 기다리니 1시간쯤 지난 후에 진료실로 날 불렀다. 의사가 들어와서 내 귀를 한 5초 정도 보더니 진찰서를 써주고 마트에 있는 약국에서 약을 타가라고 했다. 이렇게나 빨리 진료가 끝났다는 것에 놀라면서도 당시에 진료비가 하나도 청구되지 않아서 웬 떡이지 했는데 나중에 보험으로 커버된 것을 제외하고도 100불이나 청구되었다. 한국에서 외이도염 치료받으러 10번은 갈 수 있는 돈을 5초 진료 한 방에 써버린 것이다. 거기다 약값은 따로 냈다. 미국은 듣던 대로 정말 무시무시한 나라다. 그 이후로 병원 근처에 다신 얼씬도 하기 싫어서 귀는 손도 대지 않았다.


  약국에서 처방받은 강력한 항생제를 먹으니 부작용 때문인지 복용 후 며칠 동안 기분이 이상하게 안 좋고 우울했다. 그리고 그때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내가 손꼽아 기다렸던 캐나다 워홀에 최종 불합격되었다는 통보 이메일이 날아왔다. 이유는 내가 현재 미국에 거주 중이기 때문이란다. 가끔 외국에서 지원해서 떨어지는 경우가 있지만 그보다 더 많은 합격 소식이 들리기에 나도 예왼 아닐 것이라 철석같이 믿고 계획을 다 짜 놨는데 이렇게 뒤통수를 맞게 될 줄은 정말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캐나다 측에 몇 번이나 재고해달라는 메일을 보냈지만 결국은 신청비도 환불되어 완전한 불합격이었다. 믿기지 않고 믿기도 싫었지만 언제 될지도 모르는 워홀을 다시 신청해서 인비테이션 받을 때까지 기다리고 서류, 건강 검진서, 바이오메트릭스 제출까지 또다시 긴긴 과정을 감당해야 할 현실을 마주하니 마음이 마치 심해에 내린 닻처럼 무겁고 깊게 가라앉았다.


  거기에 엎친데 덮친 격으로 호스트들도 나를 힘들게 했다. 내가 치료받으러 포틀랜드에 간 사이에 나에게 말도 없이 내 방에 들어와 방문 공사를 진행한 것이다. 오래된 방문이 문을 여닫을 때마다 삐걱댄 게 거슬렸던지 아예 끝부분을 몇 센티 정도 갈아버렸다. 덕분에 내 방엔 먼지가 소복이 쌓였고 내가 탁자 위에 놔둔 노트북에도 고스란히 먼지가 들어갔다. 말을 해줬다면 미리 치워놨을 텐데 왜 도대체 말을 안 하고 멋대로 진행한 건지 아직도 이해가 안 간다. 내 방에 허락 없이 들어와서 큰 공사를 진행한 것도 이미 충분히 기분 나쁜데 거기다 그들이 여행을 가서 집을 비울 동안 제발 친구를 집에 데려오지 말라고 내 침대 위에 친절히도 놔둔 쪽지까지 발견하자 완전히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그 날 미국에서 1년 치 울 것을 다 운 것 같다.

  나는 그들이 싫어하는 것을 알기에 그들이 없을 때 허락 없이 친구를 데려온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고 항상 조심했으며 크게 사고를 일으킨 것도 없었다. 마침 저 날은 내가 카드 지갑을 잃어버려서 더 이상 최악일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도 함께 사는 호스트마저 저렇게 내 방에 함부로 들락날락거리면서 피해를 끼치는 것을 보니 정말이지 온 세상이 날 잡아줄 손 하나 없이 집어삼키는 시커먼 어둠 같아 보였다.


  내 사례보다 훨씬 더 심각한 문제를 겪고 있는 사람들도 많아서 내가 감히 뭐라 단언할 순 없지만 해외 생활은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언어도 완벽하게 통하지 않는 상태에서 바로 옆에서 가족처럼 도와줄 사람도 없이 혼자 모든 것을 헤쳐나가야 하는 것. 누군가 내가 가장 약해져 있을 때를 노리고 무너뜨리려고 단단히 작정한 것 같아도 벗어날 수가 없는 것. 나는 남들에 비해 훨씬 수월하게 미국 생활을 했다고 생각하는데도 저 때 기억은 떠올리기도 싫을 만큼 너무너무 힘들었다. 최소 일주일은 매분 매초 온 세상에 나 혼자인듯한 외로움과 괴로움, 우울함을 견뎌야 했다.


  모든 것이 그렇듯 시간이 지나자 워홀 낙방의 충격에서 서서히 벗어나고 지갑도 찾았으며 보스의 부모님이라 어쩔 수 없이 호스트와 어찌어찌 대화로 잘 풀긴 했지만 모든 것이 정상 궤도에 오르기 전까지는 정말이지 내면이 물에 젖은 종잇장처럼 너덜너덜했다. 저럴 때 만약 금전적으로 타격을 입는 일이라도 생긴다면? 말로 다 할 수 없는 괴로움일 것이다. 


  저런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아주 조금 더 성숙해지고 성장한 것 같지만 역시 대가가 너무 컸다.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은 경험이었다. 내 나라에서 모국어 하는 것이 얼마나 큰 권력이었는지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리고 왜 해외 생활하다가 돌연 다 접고 돌아오는지도 이해하게 되었다. 이런 미치고 팔짝 뛸 일들이 한꺼번에 일어나서 한계점에 다다르면 해외고 나발이고 그냥 돌아오는 거다. 그래서 누가 혼자서 해외 생활 오래 했다고 하면 다시 돌아보게 된다. 엄청난 의지와 정신력의 소유자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나는 과연 그럴 수 있는 사람인지 물어보게 된다. 대답을 하려면 좀 더 살아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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