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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니 코치 Aug 25. 2019

길거리에서 쓰러진 날

그래도 앰뷸런스는 부르지 마세요

  삼 일 전에 먹은 고춧가루 폭탄 된장찌개가 화근이었다. 된장찌개 몇 번 끓여봤다고 자만했던 것이 문제였을까, 간을 보고 왠지 고소한 참기름을 한 두 방울 떨어뜨리면 더 맛있어질 거 같다는 욕심에 조금만 넣는 것이 실수로 들이부어버리고 말았다. 아까운 참기름도 참기름이지만 된장도 얼마 남지 않아 아껴먹고 있는 판국에 한 솥 가득 끓인 것을 버리게 생겼으니 나의 심정은 참담하기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지루한 시골 생활에 유일한 낙인 요리를 망쳐버렸다는 자괴감과 함께 이번 끼니에 대한 나의 부푼 기대감은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한 끼 한 끼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최대한 맛있게 먹을 수 있도록 노력해온 나로서는 온갖 재료가 다 들어간 된장찌개를 그대로 버린다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이제는 정체를 알 수 없게 된 느끼한 기름 국을 어떻게든 살려보겠다고 고춧가루를 폭탄처럼 투하하고 그도 모자라 고추장과 고추를 팍팍 넣어서 완전히 십이지장행 지옥 특급열차를 만들어버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맛은 그리 나쁘진 않았고 먹고 나서 하루 뒤에도 괜찮길래 결국 그걸 혼자 반 넘게 마셨다.


  그리고 사건은 오늘 아침 출근길에 터졌다. 그 뒤로도 냄비밥을 보관할 지퍼백이 부족해서 밥 대신 쫄면과 비빔면으로 때웠더니 위장이 완전히 파업을 한 것이다. 어쩐지 아침부터 이상하게 손발이 차갑고 오한이 느껴지더라니. 평소에도 에어컨을 세게 트는 집이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집을 나섰는데 나온 지 채 5분이 되기도 전에 현기증이 나면서 온몸에 식은땀이 흘렀다. 전부터 위장이 가끔 이렇게 한 번씩 심하게 뒤집힌 적이 있어서 낯선 상황은 아니었지만 머나먼 타지의, 그것도 길거리에서 벌어지니 너무나 무서웠고 주위에 아무도 없어서 도움을 요청할 수도, 집까지 다시 되돌아갈 수도 없었다. 곧 이명과 함께 배에 엄청난 통증을 느끼고 눈 앞이 캄캄해지며 온 몸에 힘이 풀려서 체면이고 뭐고 길거리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 왜 나는 이렇게 겉으로는 건장한데 자꾸 저혈압으로 픽픽 쓰러질까 의문이 들었다. 어쨌든 그렇게 숨을 헐떡거리면서 쓰러져있으니 차 몇 대가 지나가고나서야 동네 주민인 듯한 남자가 나를 발견하고 말을 걸어왔다. 탈진해서 손 하나 까딱할 수도 없었지만 앰뷸런스를 부를까요? 라는 그의 말에 식겁해서 "노!! 암 파인! 노 앰뷸런스!"를 외쳤으니 미국엔 비싼 앰뷸런스를 못 불러서 죽는 사람도 있다는 루머가 사실일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바로 노란 액체를 토하기 시작했다. 괜찮다는 애가 갑자기 구토를 하니 지나가던 그 남자분은 얼마나 당황스럽고 놀라셨을까. 그에게 집이 바로 저 앞이니 데려다 달라고 부탁해서 차에 탔는데 이제는 눈 앞이 아예 안 보이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그냥 주소를 불러줬고 집까지 가는 짧은 길에서도 중간에 내려서 토를 한 번 하고 다시 탔다. 집이래서 내렸는데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겠고 토는 한 번 더 해야겠고 정말이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이대로 영원히 눈이 안 보이는 것은 아닐까 잠깐 두려웠지만 다행히 다시 서서히 앞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우리 집이 아닌 옆 집 문을 두드리고 있었고 좀 진정된 나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집에 비틀거리며 들어와 침대에 몸을 던졌다. 그러고 30분 동안은 춥고 아파서 웅크리고 있다가 정신이 좀 들자 슈퍼바이저에게 전화를 해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세상에서 제일 쿨한 보스인 그는 내 말을 잘라먹고는 알겠으니 그만 얘기하고 내일 다시 전화 달라고 했다. 전화를 끊자마자 기절하듯 잠들었다가 몇 번의 고비를 더 넘기고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 멀쩡히 글을 쓰고 있다.


  엄마가 위암으로 큰 수술을 하시고 고생하시는 것을 옆에서 지켜봤으면서도 오랫동안 함께해온 식습관은 고치기가 힘들다. 엄마도 암 판정 전에는 나처럼 자극적인 음식을 달고 사셨다. 지금은 위가 없으니 항상 조심하시고 채식을 주로 하셔서 건강에 문제가 없지만 이젠 내가 문제다. 앞에서 말했듯 이렇게 장염으로 인한 미주신경성 실신이 처음도 아니다. 한 번은 엄마 앞에서 실신해서 온 가족을 식겁하게 한 적도 있으나 평소에는 뭘 먹어도 멀쩡하니 몸의 신호에 신경 쓰지 않고 살아온 무신경한 내 탓을 해야겠지. 맵고 짜고 달게 먹는 것이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나로서는 대체 어떻게 해야 건강한 식습관에서 즐거움을 찾을 수 있을지 깊게 고민을 해봐야 할 것 같다.


  무릎은 언제 그랬는지 꽤 크게 벗겨져서 피가 맺혀 있고 머리는 산발로 엉망진창인 꼴을 보니 헛웃음이 나왔다. 그깟 된장찌개가 뭐라고.... 물론 거기에 들인 정성이 몹시 아까웠겠지만 내 건강과 바꿔야 할 만큼 소중하지는 않은데... 그런데도 음식 앞에만 앉으면 자꾸 까먹으니 글이라도 남겨서 이 뼈아픈 교훈을 되새겨야겠다. 이만하길 정말 다행이라는 감사함과 함께.

  푹 쉬면서 글을 쓰고 있으니 할머니 재키가 괜찮냐며 들어와서 따뜻한 차와 함께 이마에 손을 짚어주었고 할아버지 그렉은 소독약을 가져다주어 가족들이 보고 싶어 서러운 마음에 한 줄기 위로가 되었다. 또 나를 구해준 시민분께서 내가 집에 들어간 후 혹시라도 학대를 당하거나해서 아팠던건 아닌지 경찰에게 확인 부탁했다고한다. 재키가 전화를 받고 그녀는 괜찮고 지금은 자고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정말이지 감사한 분인데 너무 정신이 없던 나머지 이름도 묻지 못하고 보내버려서 마음이 걸린다. 이웃 주민이니까 지나가다 마주치면 꼭 커피라도 사드리고싶다.



※ 그 문제의 된장찌개는 뒤도 안 돌아보고 갖다 버렸다. 나는 왜 똥인지 된장인지 꼭 먹어봐야 아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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