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외면해 온 질문들
응급실 뺑뺑이 이야기가 뉴스에 나올 때마다 사람들은 분노한다. “왜 병원이 환자를 안 받느냐”, “의사가 부족해서 그렇다”, “정부는 뭐 하느냐” 같은 말들이 반복된다. 나 역시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이 문제가 몇 년째 반복되는 모습을 보면서, 점점 다른 질문이 떠올랐다. 정말 이건 특정 집단의 무책임 때문일까, 아니면 우리가 만들어온 구조의 필연적인 결과일까.
한국 의료는 늘 자랑의 대상이었다. 아프면 바로 병원에 갈 수 있고, 큰돈 들이지 않고도 고급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해외에 나가본 사람일수록 “그래도 한국 의료만 한 데 없다”라고 말한다. 이 말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문제는 바로 그 ‘장점’이 지금의 위기를 키웠다는 데 있다.
우리는 의료를 너무 쉽게 사용할 수 있게 만들었고, 그 대가를 누군가 대신 치러주길 기대해 왔다. 응급실은 그 기대가 가장 극단적으로 모이는 공간이다. 중증 외상 환자, 심정지 환자뿐 아니라 갈 곳 없는 노인, 보호자 없는 환자, 요양병원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경우, 심지어는 단순한 불편함까지 모두 응급실로 향한다. 응급실은 언제부터인가 ‘응급’을 처리하는 곳이 아니라, 사회가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임시로 떠넘기는 장소가 되었다.
그런데 우리는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유독 가혹하다. 환자를 받지 않으면 비난을 받고, 받아서 문제가 생기면 개인이 법적 책임을 져야 한다. 어떤 선택을 해도 안전하지 않은 구조에서, 의료진이 점점 방어적으로 변하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 인간적인 반응이다. 이쯤 되면 “왜 안 받느냐”라고 묻기보다 “받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이 될 수 없는 구조가 왜 만들어졌는가”를 물어야 한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호주의 응급의료 시스템이 떠올랐다. 호주는 한국과 모든 조건이 다르다. 인구 밀도도 낮고, 의료 접근성도 떨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응급실이 지금처럼 붕괴 직전의 공간이 되지는 않는다. 이유는 단순하다. 응급의료의 중심이 병원이 아니라 ‘현장’에 있기 때문이다.
호주에서 파라메딕은 단순한 이송 요원이 아니다. 이들은 명확한 교육과 권한을 가진 의료 전문가로서, 현장에서 판단한다. 치료가 가능하면 그 자리에서 끝낸다. 병원으로 보내지 않아도 되는 환자는 보내지 않는다. 반대로 정말 위험한 환자는 병상이 있든 없든 정해진 병원으로 곧바로 간다. 병원이 거부할 여지는 없다. 이 과정에서 개인은 보호받고, 책임은 시스템이 진다.
여기서 중요한 건 호주가 더 착해서도, 의료진이 더 헌신적이어서도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호주는 의료를 ‘선의’에 맡기지 않는다. 권한을 주는 대신 책임을 나누고, 책임을 묻는 대신 판단을 존중한다. 반면 한국은 여전히 의료가 사명감과 희생 위에서 굴러가길 기대한다. 그리고 그 기대가 한계에 도달했을 때, 우리는 개인을 비난한다.
응급실 뺑뺑이는 그래서 우연이 아니다. 이건 “누군가가 나쁘게 행동해서” 생긴 문제가 아니라, “아무도 결정할 수 없게 만든 사회”의 결과다. 모든 환자는 중요하다고 말하면서, 정작 누가 먼저여야 하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모두를 살리고 싶다고 하면서, 그 부담을 누가 져야 하는지는 외면한다.
우리가 호주에서 배워야 할 것은 제도의 일부가 아니라 태도다. 응급실은 만능 해결사가 아니라는 사실, 현장에서 끝낼 수 있는 문제는 현장에서 끝내야 한다는 용기, 그리고 무엇보다 의료 사고의 책임을 개인이 아니라 시스템이 져야 한다는 상식 말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응급실 뺑뺑이는 계속될 것이다. 의사를 더 늘려도, 병원을 더 지어도, 결국 같은 장면을 반복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구조가 바뀌지 않으면 사람만 바뀔 뿐이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언젠가 모두 지쳐 떠난다.
어쩌면 응급실 뺑뺑이는 의료의 위기가 아니라, 사회가 책임을 설계하는 방식의 위기인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그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더 이상 “누가 잘못했는지”를 따지기 전에, “왜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는지”를 묻는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