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PAULE Jan 14. 2021

결혼을 반대한 이유

나 예쁘다는 집에 갑시다

그 사람과의 추억을 미화하다 아주 인류애가 넘쳐난다는 친구의 살기어린 한 마디를 듣고 좋지 않은 기억을 꺼내 정리해보았다. 나쁜 건 경험으로, 좋은 건 추억으로 남긴다니까. 나쁜 것 먼저 정리하자.




왜 갑자기 식 한 달 전에 결혼을 갑자기 미루라고 하신 건지, 영문도 모르고 사과드리러 가기 전에 있던 일들은 다음과 같다.



1. 모바일 청첩장 사진

어느날 아침에 전화를 달라고 하셔서 드렸더니 모바일 청첩장에 넣은 내 유일한 독사진이 마음에 안드니 바꾸라 하셨다. 세상 제일 까다로운 우리 엄마가 예쁘다해서 올린건데. 나는 그게 정말 내가 찍은 최선의 사진인데, 이거 말고 대안이 없는데! 정말로 그렇게 맘에 안 드시냐고 되물었더니, 신부가 신비감이 있어야지 잇몸 보이고 웃는 사진 이상하다고 언성을 높이시곤 끊으셨다. 나는 생각치도 못한 지적에 서글퍼 지하철에 서서 훌쩍였더랬다. 그래도 일단 말씀하신 사진을 내렸고, 그에게는 반항심에 내린 게 아니라 청첩장을 돌리시긴 해야 할테니 내려둔 것이며 다른 사진 찾아서 올려둘거라고, 이따 통화하거든(원래 하려고 했대서) 잘 말씀드려달라 부탁했다. 그는 자기 엄마 말대로 할 필요 없다고, 미안하다며 간섭 못하시게 하겠다고 얘기했지만 내 생각엔 그가 말을 바보같이 한 것 같다. 이 사건은 그의 누나의 추측에 의하면 다음의 생각을 불러왔던 듯 하다. “너는 내가 말하는데 고분고분 ‘네’ 할 줄 모르는구나(한 번 확인차 질문했다고 혼나다니)! 그리고 내가 일부러 너에게 얘기한건데, 그걸 내 아들한테 쪼르르 가서 이르고, 관여를 못하게/이간질을 해?”



2. 혼주 한복

한복집을 알아보던 중, 결혼식장 내 한복집이 동선도 좋고 비싼 만큼 퀄리티도 좋아서 우리 엄마가 그의 어머니께 직접 전화를 했다. 나랑 그는 어렸을 적 친구였기에 두 분은 학부모로 만난 사이. 우리 엄마보다 연배도 있으시고, 성격도 달라서 친한 사이는 아니여도 십 여년 넘게 우리 둘을 포함한 mutual friends의 경조사에서 만나 ‘ㅇㅇ엄마’로 호명하는 사이였다. 생각보다 퀄리티도 괜찮고, 바로 그 자리에서 전문가들이 도와주니 환복하기 편해서 좋으니 시간 되시면 오셔서 둘러보셔도 좋겠다고 어렵게 권유했고, 흔쾌히 오케이하셨다고 전해들어 한복집에 예약을 해 둔 상태였다. 결혼 준비 막바지에 지쳤던 나는 서울 근교 도시에서 잘 아는 한복집을 찾기 힘들었는데, 와주신다니 잘됐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흔쾌히 수락>은 엄마와 나의 착각이었다!

“분명 집 근처에서 한복하겠다고 했는데 왜 자기 맘대로 오라가라 하냐(바보에게서 전해들은 이야기), 너희 엄마 별로 친하지도 않고(굳이 그렇게까지 말씀하실 건 뭐람) 그동안 몰랐는데 아주 기 세고 날 우습게 안다(이 문장은 이후 내가 직접 가서 내 귀로 들은 이야기다).”



그래, 기분이 상하셨을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런 이유들로 다짜고짜 갑자기 결혼을 미루라는 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렇게까지 하셔야 하는 걸까? 얼마나 화가 나신 거지? 내가 그렇게 크게 잘못했기에 한 달 남은 식을 잡고 흔드실까? 이해가 안 된건 당시 이 분의 아들도 비슷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는 아주 무력했고, 난처해했으며 내가 이 이야기를 듣고 너무 황망하고 자존심이 상해 울고 있어도 달래주지 못했다. 그는 정말 이런 것 때문에 마음이 상하신 걸 수 있으니 “제발 한 번만 부탁할게. 사과드리러 가”라고 했다. 뭘 가라는 거야. 자기가 반차 내고 같이 가면 자기를 조종한다고 욕먹을 수 있으니 혼자 가라고. “너도 너희 엄마 마음을 모르는데 내가 뭘 안다고 사과를 드리러 가, 넌 날 혼자 보내고 싶니? 너 반차 내고 같이 가, 무조건.” 그래서 폭우를 뚫고 그의 본가 근처 카페에 가 그의 어머니를 만난 월요일. 그날만큼은 자존심을 버리고 사과드리러 갔던 나는 전혀 예상치 못한 얘기를 듣게 된다!



3. 난 ㅇㅇ 빨리 결혼하길 바란 적 없어.

커피를 시키고 마주 앉아 들은 첫 얘기였다. 머리가 띵했다. 사귄 지 4년 됐을까, 어느날 내게 “난 할만큼 했으니 이제 네(나 말이다)가 키워”라고 하셔서 벙쪘던 날의 백 배 되는 충격이었다.


우리가 어린 시절을 함께 보냈던 친구 다섯 중 셋-모두 남자-이 줄줄이 먼저 결혼을 했었다. 그 친구들 결혼식엔 우리 엄마도, 그의 어머니도 왔었다. 친구의 결혼식이 끝난 후 어머니들끼리 먼저 간이 상견례를 하면서 결혼을 본격적으로 준비하게 됐었다(이후 직계가족이 모이는 상견례 자리도 당연히 가졌었다). 그간 결혼식에서 만나면 내 손을 잡고 “너도 빨리 결혼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게 우리 아들이랑 헤어지고 넌 알아서 다른 남자랑 결혼하라는 거였나? 우리는 서른 둘이고, 7년을 만나고 같이 살겠다는 건데?



4. 난 너 뭐하는 지 관심도 없어. 그리고 그거 돈도 못 번다던데?


아, 그러니까 나는 당신의 아들과 결혼하기엔 부족한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난 네가 무슨 공부를 하는지, 뭐 하는지도 관심이 없었어. 너, 들어보니 공부 3년은 더 해야 한다며. 그리고 너 공부해봤자 돈 많이도 못 번다며? 너 교수는 될 수 있니?”


나는 결혼 준비 과정에서 마음 상하신 게 있을까 해서 사과를 드리러 왔는데 이건 무슨 전개인가. 정말 너무나 황당해서 헛웃음이 날 뻔했다. 내가 미래가 조금 막연한 전공 공부하고 있는 건 맞다. 그렇지만 공대 아니고서야 미래가 좀 정해진 대학원이 있나.(사실 이건 전남친이 예전에 결혼을 막연히 꿈꾸던 내게 했던 쓰라린 멘트였다. 공대도 아니고 로스쿨도 아닌데 불확실한 미래 어떻게 믿고 결혼을 생각하냐는 아주 최악의 팩트폭력) 이제서야 갑자기 시작한 것도 아니고 벌써 5년째 걷고 있는데. 집에서 지원해 준대도 손 벌리기 싫어서 악착같이 조교 하면서 내 등록금, 내 용돈 벌면서 학계 탑티어 교수 밑에서 공부 잘 하고 있는데. 우리 가족이 응원하고, 내가 돌고 돌아 찾은 길이고 자부심을 갖고 있는데. 생각치도 못한 가장 큰 모욕을 내가 제일 사랑하는 사람앞에서, 내가 제일 사랑하는 사람의 어머니에게서 당하고 있었다.


나는 교수는 애초부터 계획에 없었고, 바로 연구원에서 일할 계획이라고 말씀드렸다. 그는 내가 하고싶은 일을 하고 사는 걸 응원하고 있으며 공부 마치고 논다는 것도 아니고 일을 한다는데 그게 무슨 문제냐고 설득했다. 그러나 그 분은 말을 자르고 내가 졸업하고 뭘 하든간에 관심이 없다고 했다. 어차피 내가 당신의 기대에 못 미칠 수준의 알량한 돈밖에 못 버니까. 요즘은 전문직 둘이 먹고 살아도 힘들다고 하시면서 결혼한 다른 친구들 이야기를 하셨다.나는 작아졌다. 친구들이 얻은 사업가, 약사, 변호사 아내들보다 내 돈벌이는 한참 적었다. 그렇지만 그 아내를 둔 친구들의 부와 지위도 높았다. 친구들은 의사, 성공한 청년 사업가였다. 전남자친구는 명문대-대기업이라는 전통적인 한국 사회 성공의 정석 코스를 밟아왔다. 그럼에도 어린 시절 함께 공부했던 친구들과 ‘비교하면 쥐꼬리만한(난 항상 더 못받는 사람이 훨씬 많다는 걸 알아달라고 했지만)’ 월급쟁이로 살고 있는 자신의 삶에 대해 스스로 큰 불만과 후회를 갖고 산 사람이었다. 나도 그 친구들의 부가 부럽기는 했어도 나만의 삶의 목표가 뚜렷했고 자부심도 있었기에 별 타격은 없었다. 아무튼 그는 자기야말로 40대에도 잘릴 수 있는 평범한 대기업 사무직이고, 직장인 둘이 모아서 집 사는 건 어차피 불가능하니 그런 생각은 하시지 말아달라 부탁했다. 그렇지만 돌아오는 말은 돈 땜에 치사하게 구는 것 같아 미안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나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내가 박사 따고 정년 보장되는 국책연구원 들어가서 먹여 살릴테니 나 취업할때까지만 책임지라고 우리 둘이 합의했던 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그렇지만 돈 때문에 행복하지 못했던 그는 말과 달리 내내 돈이 마음에 걸렸을 거다.



5. 난 불행한 결혼생활을 했어.

이 전개는 상상도 못했다. 남편, 그러니까 그의 아버지와 아주 불행한 결혼생활을 했다고 말씀하셨다. 그의 아버지는 수도권 대학의 교수였다. 국내에서 박사를 따면서 신혼시절에는 강의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다니기 바빴고, 집에 있을 때는 연구 실적을 쌓느라 가족에겐 무심했던 남편이자 아이들의 아빠였다. 부부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도, 전남자친구가 아버지와의 심리적 거리가 멀다는 건 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남편과 비슷한 커리어를 갖게될지도 모르는 내가 당신 아들을 당신처럼 똑같이 힘들게 할까봐. 그래도 그렇지, 아들 앞에서 어떻게 불행한 결혼생활을 했다고 말씀하실 수가 있을까. 그런 부모님 밑에서 이 정도로 건강하고 무탈하게 살아온 남자친구가 안쓰럽고 또 대견하게 느껴졌었다(이건 당시 내 착각이었고 그는 결국 부모님 모습에 겁먹고 내 손 놓고 도망친 인간이었다).



6. 넘겨짚은 우리 집안 사정

우리 아빠도 그의 아버지와 같은 직업을 갖고 있었다. 전공도 멀지 않아서 아빠는 당신의 지인을 통해 그의 아버지 직장 이야기를 전해 들을 수 있는 정도. 그래서 양가가 특별히 부유하진 않아도 결혼에 집안 사정은 별 문제가 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기에 아빠가 생각치도 못하게 돌아가셨던 것도 별 변수가 되지 않는다고 여겼다. 그의 어머니가 아빠 장례식에서 위로의 말씀과 함께 손을 잡아주시던 모습을 기억한다. 그러나 그 결핍이, 우리집에 남자가 없어서 아들이 고생할 게 보인다고 하셨다. 엄마와 나, 그리고 한 살 터울 여동생. 이렇게 여자 셋인 집에 귀한 아들이 고생할까봐. 그치만 아빠 없다고 수입이 없는 것도 아니고, 엄마의 노후 대비가 안되어있는 것도 아니다. 내가 평생 벌어도 못 모을 재산을 가진 게 우리 엄만데요. 고생? 우리 엄마가 바라는 듬직한 큰 사윗감이 아니긴 하다. 그치만 명절에 빈손으로 쭈뼛쭈뼛 오더라도 깔깔 잘 웃고, 열심히 먹고 배부르다고 거실 소파에 누워서 자다 가는 그 아이같은 순진함을 예뻐했다. 자기 딸보다도 키가 작았던 열 다섯 살짜리 조용하고 작은 남자애를 기억하는 엄마는 내가 좋다고 하면 좋다고 했다. 훌쩍 커서 내게 기쁨을 안겨주는 사람에게 더 바라지 않았다. 나는 정말 내가 듣는 게 현실인가 싶었다. 이런 소리를 듣고도 그와 결혼하고 싶은 나를 딸로 둔 엄마에게 미안했다.



7. 효도 안 할 것 같은 며느리

처음부터 당신이 결혼식 축가 하겠다고 하셔서 하시라 했고, 가족 행사 오라하시면 군말없이 따라갔다. 나에 대한 질문 하나 없이 그들만 아는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내가 누군지 궁금하지 않을 어린 조카들과 놀아주고. 눈치없고 무심한 남자친구 덕에 늘 하루를 채우고 나왔는데. 그는 하도 들어서 지겹다는 아버지 이야기도 진심으로 들어드렸고, 그가 관심없어하는 어머니 취미활동도 짧은 시간마다 동참해드렸는데 무엇이 문제였을까, 고민해보니 선물을 잘 안했던 게 있다. 그의 아버지를 처음 뵙던 날, 공부하는데 쓰라고 용돈을 주셨다. 아빠를 잃은 지 얼마 안 된 시기였기에 나는 그 때 결혼하면 시아버지가 생긴다니 괜히 뭉클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그걸 정말 용돈으로 생각했지 뭐야. 어련히 대학원생 주머니 사정 아시니, 아빠도 없는 거 아시니 정말 어여삐 여겨서 주신 줄 알았는데, 그 금액의 반은 선물로 드렸어야 했나보다. 꽃이나 케이크로는 부족한 줄 몰랐지. 선물은 안 해도 그만이라고 말하던 그의 이야기를 곧이 곧대로 믿은 내가 바보였다. 왜냐하면 우리집은 정말로 케이크 정도로 됐었거든. 원래 부족한 당신의 아들, 그리고 그 아들의 부족함을 채울 수 없을 것 같은 사람. 좀 더 생글생글 웃고, 하라는 대로 고분고분 따르고, 돈은 잘 벌되 남편을 추켜세우고, 어련히 알아서 시부모를 위한 선물을 척척 사와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이유로 나는 배려라고는 할 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버렸다. 나는 여기서 마음이 깨졌던 것 같다. 그런 이유로 나를 모자라고 어리석다 평가하는 사람의 마음에 들고자 노력할 수 있을 지, 자신이 없어졌다.



나는 대략 이런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상하신 부분이 있었다면 미처 헤아리지 못한 내 잘못이라고, 죄송하다고 말씀드리고 나왔다. 결혼을 하게 되더라도 그의 어머니를 내가 좋아할 수 있을지, 예쁨받을 수 있을 지 두려웠다. 완전한 내 편이 되어주지 않는 그의 모습에 불안하기도 했었다. 그래도 그에겐 처음인 상황이니까, 하며 소극적인 그를 이해하려고 했었나. 설령 내가 마음에 안 드신다고 해도 시간을 두고 일정 부분 오해를 풀고, 마음을 돌리실 수 있도록 노력하려고 했다. 아니 모든 것을 떠나서, 내겐 그 하나만 있으면 됐었다. 그렇게 아파도 나는 너만 있으면 됐는데. 너는 너무 아픈 건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말없이 내 손을 놓았던 마지막은 여전히 나를 조금은 힘들게 하지만 이제는 아주 잘 안다. 우리 결혼하지 않은 건 잘 한 선택인 것을.




매거진의 이전글 가을, 마지막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