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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필로 Jan 12. 2022

한예종 연극원에서 네이버 개발자가 되기까지 1편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는데


'최종 합격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다음 단계인 처우협의를 위해...'
 
 네이버로부터 최종합격 문자가 왔다. 영화관 좌석에 앉아 상영을 기다리던 참이었다. 문자를 읽자마자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영화가 시작됐지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사실 면접 경험이 만족스럽지 못했기 때문에 기대하지 않고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초조했다. 다른 회사를 준비하려고 인프런이라는 교육 사이트에서 알고리즘 강의도 끊어놓았다. 놀랍게도 합격 문자를 받은  바로  당일날이었다. (강의는 바로 환불)


이글은 연극을 공부하던 내가 네이버에서 웹 서비스를 만드는 개발자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정리한 글이다. 미래에 대한 갈피를 잡지 못해 방황하던 그때를 기억하며,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던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공감이 되었으면 한다.


1-1 연극은 놀이니까


 나는 한예종에서 연극을 공부했다. 고등학교 때 연기를 공부하던 친한 친구의 소개로 한예종이라는 곳을 처음 알게 되었다. 알아보면 알아볼수록 멋진 곳이었다. 소수정예 수업, 국립예술대학교, 천재들이 가는 학교. 솔직히 덕질하기 좋은 키워드를 많이 가진 학교였다. 입시 준비를 하면 할수록 예종에 대한 환상이 커져 갔다. 운좋게 예종에 붙고 나서, 생각했던 것과 달리 나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많다는 걸 금방 깨달았지만 말이다. 그래서 더 친근감이 들었다.


 예종에서 연극을 공부하는 건 정말 즐거웠다. 작품을 보고 어땠는지 토론을 하는 수업도 재밌었고 극장에서 소품이나 무대를 만드는 실습 수업도 재밌었다. 같이 수업을 들었던 지인과 연이 닿아 서울시문화재단에서 후원하는 아동청소년극에 참여하기도 하고 영화과 사람들이랑 어울려 촬영을 하기도 했다. 예술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재밌는 작업들을 많이 해볼 수 있다. 실습 수업 외에도 미학 이론을 배울 수 있는 수업들이 있는데 고대 그리스부터 현대미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철학자들의 사상을 공부할 수 있다는 것도 큰 장점이었다. 그때 배웠던 철학적 사상들은 지금의 내 가치관을 이루는 일부가 되었다.


 학교를 다니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연극하기 수업인데 한 학기 동안 연극원에 있는 모든 학과 사람들과 어울려 학기말에 연극 한 편을 올리는 수업이다. 연기과, 무대미술과, 예술경영과, 연극학과, 극작과, 연출과 등이 모여 5개 조로 나뉘고 각본을 짜고 연기를 하고 무대 소품도 만들며 최종적으로 발표를 한다. 그때 함께 했던 친구들이 현재는 유명 인플루언서가 되거나 배우가 되어서 가끔 그 시절을 추억을 하기도 한다. (좀 친해질껄)

무대 소품 위에 어정쩡하게 서있음

 무슨 패기인지는 몰라도 1학년 때는 새내기의 풋풋함으로 학교에 캠핑의자와 스피커를 들고 다니며 옥상에 가서 노래 틀던 관종으로 살았던 기억도 있고.. 돌이켜보면 좋은 추억흑역사이 많았다.


'그래서 너는 졸업하고서도 연극을 계속 할거야?'

 점차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진로에 대해 묻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처음에는 뭐 그러겠지 라고 가볍게 생각했다. 몸을 담고 있는 곳에서 직업을 찾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니까. 그러나 졸업할 시기가 다가올수록 선뜻 대답하기가 어려워졌다. 연극은 분명 재밌었다. 예술과 관련한 수업을 듣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좋았다. 그런데 졸업을 하고서 계속 연극계에 남아있을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다. 내가 계속 이 일을 업으로 삼을 수 있을까? 스스로 질문을 수백번, 수천번 던져보았다.


 학교에서는 다들 연극에 대해서 얘기하고 그게 일상의 전부처럼 느껴지지만, 밖에 나와 주변을 둘러보니 연극을 보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도피처를 찾아 예종으로 왔지만 예종을 떠나고 어떻게 살지를 생각해보면 막막함이 컸다. 그렇다고 내 친구들처럼 뛰어난 능력을 가진 것도, 인생을 바칠 정도의 애정을 가진 것도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솔직하게, 나는 노는 게 좋아서 왔을 뿐이다.


 1-2 도망친 곳에서 찾은 독일


 휴학을 했다. 복잡한 고민에서 벗어나 새로운 도피처를 찾고 싶었다. 나는 과외를 통해 어렵사리 모은 돈을 들고 독일이라는 나라로 떠났다. 당시 독일은 해외유학생들에게 등록금도 무료로 지원해주는 그야말로 꿈과 같은 나라였다. '교육은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제공되어야 한다.' 그게 당시 이 나라의 슬로건이었다. 동물보호법, 차별금지법, 노동법이 잘 보장되어 있는 나라. 그런 나라에 가서 살 수 있다면 삶에서 안정감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당시 한국은 탈조선이라는 키워드가 뉴스에 오르내리며 선진국으로 가고자 하는 이민 행렬이 많았다. 돌이켜보면 나 역시도 분위기에 휩쓸려 나갔던 부분이 있었던 것 같다.

 독일 공원은 대체로 크다

 독일에서의 생활은 기대 이상으로 좋았다. 친절한 호스트와 넓고 자연친화적인 정원, 상쾌한 공기와 맛있는 소금. 소금 딸기, 소금 샐러드, 소금 피자, 소ㄱ... 솔직히 음식은 너무 짜서 혀가 소금인지 소금이 혀인지 구분이 안되었지만 말이다. 다행스럽게도 내가 지냈던 곳의 사람들은 친절했고 환경은 쾌적했다. 학원에서 어학 공부가 끝나면 집 근처에 있는 큰 호수를 따라 산책을 하며 따사로운 햇살을 만끽했다.


 거리에는 반려견과 함께 산책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확실하진 않지만 식당에 가도 특별한 제한 없이 반려견과 들어갈 수 있었던 것 같다. 고개를 들면 강아지들이 많아서 흐뭇했다. 백조가 공원에서 유유자적하며 돌아다니는데 그 풍경이 너무 예뻐서 하염없이 바라보기만 한 적도 많다. 사회생활을 하지 않고 처음으로 유학을 갔던 학생의 입장이었기 때문에 모든 게 좋게만 보인 것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때 나를 챙겨주었던 주인집 아주머니와 할아버지의 따뜻함은 온전히 기억하고 있다.


 그렇게 독일에 도착한지도 6개월 정도가 지났을 무렵이었다. 행복한 일상이 지속될 수록 머릿속에 많은 의문이 떠올랐다. 타지인으로서 그 나라 사람의 전문 인력을 대체할 수 있으려면 현지어를 무척이나 잘해야 한다. 외국어를 그렇게 잘하려면 언어 공부에 쏟을 오랜 기간의 시간이 필요하다. 오랜 시간을 언어 공부에 쏟으려면 상당한 비용이 필요하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머릿속에 떠오르는 의문에 지쳐갔다. 명쾌한 답을 내릴 수가 없었다.


 행복한 일상과 불안한 미래가 교차하면서 큰 괴리감에 몸부림을 쳤다. 특히나 나는 부모님의 지원을 받고 유학에 온 것이 아니라 온전히 내 힘으로 벌어서 온 것이었기 때문에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곳도 없었다. 경제적인 독립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 내게 불안감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이 남지 않았다는 걸 깨닫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는 결국 한국에 귀국하기로 결정하게 되었다. 6개월 동안의 공부와 방황이었다.


 한국에 돌아오고 나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독일에 다녀오고 나니 더욱 그랬다. 실패한 기분도 들고 괜히 부모님 보기에 죄송스러웠다.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진로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그럼에도 한 가지 확신이 드는 건 언제 어느 곳에서든 생존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언제 어느 곳에서든 생존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1-3 기술은 남는다


 우리 아빠는 한때 엔지니어로 일했다. 금속 가공을 하는 일이었다. 아빠에게 내가 기술을 배우는 걸 고민하고 있다고 털어놓자 공장에서 함께 일했던 친구분이 시흥에서 공장을 차려 크게 성공했다는 얘기를 해주었다. 곧바로 소개해줄 수 있는지 물어봤다. 아빠는 친구에게 연락했고 친구분은 흔쾌히 공장에 견학을 올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나도 모르게 마음이 들떴다. 삶의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한 소설 속 주인공이 된 마냥 즐거운 상상도 해봤다(원래 난 공상을 좋아한다).


 차를 타고 이동했다.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1시간 남짓 거리에 있던 시흥은 허허벌판이었다. 시흥도 지역마다 다르지만 공장들이 밀집되어 있는 곳은 농사를 짓는 벌판, 직원들이 밥을 먹을 수 있는 식당, 공장이 전부이다. 첫 인상은 생각보다 심심했다. 친구분의 안내를 받아 공장에 들어갔더니 초록색 시멘트 바닥과 회벽으로 둘러져 있었고 철제 기계들이 가득했다.

포탑 엔지니어

그곳은 자동포장기계를 만드는 곳이었다. 쉽게 말해 제품을 보호하는 비닐이나 비타민 음료의 병뚜껑을 자동으로 씌워주는 기계를 제조하는 곳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5명 남짓 안되는 인원으로 이런 기계를 만들고 기계 하나당 1억원 정도에 판다고 했다. 1년에 수십억을 번다는 아빠 친구분의 자랑 섞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도 저 기술을 배워야 할 것만 같았다.


 직원 중 한 명은 기자 일을 하다가 도박으로 큰 돈을 날리고 공장에서 기술을 배우며 제 2의 삶을 살고 있다고 했다. 자기 자식들도 기술을 가르칠 거라며 나를 보더니 한시라도 빨리 기술을 배우는 게 좋을 거라고 했다. 기술은 배워두면 사라지지 않고 차곡차곡 쌓이기 때문에 그 말에 동의를 표시했다. 나는 공장에서 일하는 모습에 대한 판타지가 있었다. 멋지지 않은가. 땀흘려 일하는 블루 칼라 엔지니어의 모습, 본인만의 기술로 직접 기계를 만드는 모습 말이다.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고 점심을 먹었다. 30분, 1시간, 2시간, 4시간이 지났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뭔가 이상했다.


... 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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