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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필로 Feb 20. 2022

한예종 연극원에서 네이버 개발자가 되기까지 4편

K-회사 취업하기

4-1 취업 준비됐어?


 한예종을 자퇴하고 과외를 거쳐 국비지원 학원 수료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흘렀다. 프로그래밍을 처음 접하고 1년 반은 더 걸렸을 것이다. 나는 속도가 느린 편이었지만 계속 문을 두드렸고 드디어 취업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문은 두드린 자에게 열린다고 했다. 하지만 먼저 문을 두드리기 전에 그 문이 거적때기로 만든 것인지 금떼기로 만든 것인지 알아봐야 한다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나는 취업문을 두드리기 위해 이력서를 작성했다. 학원에서 나눠주는 이력서 양식에 이름과 나이, 학력을 적고 자기소개 글과 내 성격의 장단점 등을 적었다. 왜 학원은 이력서 양식을 이따구ㄹ... 이렇게 주는지 당시에는 몰랐지만 열심히 작성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이력서에 나이, 소개, 성격 등을 적을 필요는 없다.) 지금은 다시 꺼내보고 싶지 않을 정도로 잘못된 이력서의 표본이었다. 이력서를 잘 쓰고 싶다면 다음 글을 추천한다. 

@참고자료: 개발자 이력서 잘 쓰는 법

 취업이라니. 프로그래머로 일하는 그림을 상상만 해왔지 막상 목전 앞에 있다고 생각을 하니 많이 떨렸다. 회사에 지원을 어떻게 할지 고민하다가 근처에 마침 it 취업 박람회가 있어 참여해봤다. 박람회에서 가장 괜찮아 보이던 회사가 있었고 즉석에서 1차 면접을 봤다. 작업했던 프로젝트를 설명하며 할 줄 아는 기술이 뭔지 어필했다. 돌이켜보면 부족한 게 참 많았던 프로젝트였고 면접이었다. 그래도 당시 면접관 눈에 잘 들었는지 운이 좋게 덜컥 합격해버렸다. 곧이어 2차 면접 일정이 잡혔고 2차는 가벼운 기술 질문과 인성 면접을 같이 보는 식이었다. 당시 면접에 들어왔던 대표는 밤 늦게까지도 일할 수 있겠냐는 질문을 했다. 신입으로서 워라벨보다 배우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나는 늦게까지 일하는 것에 대한 불만은 크게 없었다. (왜 그랬어)


 신입 특유의 열정이 보였는지 2차 면접도 스무스하게 넘어갔고 합격 문자와 함께 연봉 책정이 되었다. 작은 스타트업이었지만 프랑스, 우즈벡, 베트남 등 해외 각지에서 온 외국인 개발자들이 있었고 영어로 모든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곳이었기에 적잖은 환상을 갖고 있었다. 자유롭게 소통하는 글로벌한 스타트업의 이미지를 떠올렸다. 한국에서 외국인 개발자들과 같이 일해볼 수 있는 기회가 얼마나 있을까. 연봉이나 근무 환경은 처음 프로그래머로 취업하는 신입에게 큰 우선순위가 아니었던 것이다. (왜 그랬어) 다른 회사를 지원해볼 것도 없이 이곳이 내가 가고 싶었던 회사라고 생각했다.


4-2 첫회사에 가면 정장을 입어야 하나요


 첫 회사에서만 느낄 수 있는 두근거림이 있다. 옷은 어떻게 입어야 할지 일은 어떻게 찾아서 할지 사람들하곤 어떻게 지내야 할지 모든 게 낯설고 의문투성이였다. 그래도 이런 부분은 차근차근 적응하면서 알아갈 수 있었지만 회의부터 시작해 대부분의 업무를 영어로만 진행을 하다보니 못 알아들은 내용이 많아 어려움이 컸다. 한국인 개발자 동료들과 친해져서 모르는 걸 많이 물어볼 수 있어 다행이었다.


 처음 맡았던 업무는 회사 홍보 페이지를 개발하는 일이었는데 인력에 따라 프론트엔드 역할을 맡았고 내 커리어는 이때부터 자연스럽게 프론트엔드 개발자가 되었다. 코딩으로 미디어아트를 만드는 수업을 들은 적이 있어서 그런지 시각적인 작업에 매료되었고 주된 관심분야도 프론트 쪽이었다. 회사 백엔드 스택이 구버전의 php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프론트를 선택한 건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업무에도 조금 익숙해졌다. 프로젝트를 angular 기반에서 vue 기반으로 마이그레이션 하는 작업을 맡으면서 학원에선 배울 수 없었던 기술들도 많이 배울 수 있었다. 개발하는 내용을 영어로 공유하면서 영어 듣기 실력도 조금씩 늘었다. 모르는 내용도 대충 알아들었다는 듯 끄덕거리는 능청도 늘었다.


 동료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 좋았다. 나와 비슷한 또래의 동료들과 퇴근하고 오버워치 게임도 하고 밥도 먹으러 다니면서 많이 가까워질 수 있었다.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친구를 따라 처음으로 할랄 레스토랑에 가보기도 하고 연극을 취미로 하는 친구를 따라 공연을 보기도 했었다. 이때 친해진 친구들과는 베트남 개발자 친구의 결혼을 축하해주기 위해 베트남에 직접 찾아가기도 했고, 더 나중에는 한 친구가 차린 인디게임 회사에서 일하는 기회를 얻기도 했다. 돌이켜보건대 이제껏 다녔던 회사들 중에 가장 수평적이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단 한 사람을 빼고 말이다.


4-2 자네 이리로 오게


 작업할 게 많아 야근하는 날이 잦았다. 어느 날은 밤 11시에 퇴근해 겨우 막차를 타고 집에 갔었다. 다음날 무거운 눈꺼풀을 떼고 겨우 일어나 출근을 했다. 집에서 회사까지 거리가 멀어 4번 이상은 환승을 해야 했기 때문에 늘상 피곤한 상태였다. 그날도 여느 때와 다르지 않았다. 회사에 도착해 졸음을 없애기 위해 찬물로 세수를 하고는 사무실로 돌아가 자리에 앉았다. 평소와 같이 일을 하며 1시간이 지났을 즈음 갑자기 대표가 나를 회의실로 불렀다. 


 무슨 일이신가요? 그의 무뚝뚝한 표정을 쳐다보며 물었다. 요새 일은 열심히 해요? 더 열심히 해야 할 거 같아서 불렀어요. 그는 내 태도가 못마땅하다는 마냥 물었다. 네? 어제도 11시까지 일하고 집에 갔는데요? 그의 대답에 당황했지만 애써 참으며 답했다. 아니 더 열심히 해야죠. 11시가 중요한 게 아니고요. 그는 내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11시까지 일한 게 중요한 게 아니라고요? 다시 반문했다. 


네 11시까지 하든 새벽까지 하든 더 열심히 하세요 

 나는 그의 말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야근수당 하나 챙겨주지 않는 회사에서 그래도 회사 사람들이 좋고 같이 성장한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일했는데 인정 받지 못하는 걸 넘어서 가스라이팅까지 하니 화가 났다. 회사에 마음을 뜨게 된 시점이 딱 이때부터였을 것이다. 회의가 끝나고 나서 나는 정시퇴근을 했고 동료 친구들 역시 나와 뜻을 함께 해주었다. 점점 대표의 압박은 심해졌고 회사 분위기가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동료들이 하나둘씩 말도 안되는 이유로 시말서를 썼다. 


 이직에 대한 얘기가 오고 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더 좋은 곳에 갈 수 있는 친구들이 많았다. 국내외 유명 공대를 나온 친구들은 매우 똑똑했던 친구들이었고 비자나 병역특례와 같은 갖가지 사정 때문에 묶여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친구들마저 마음이 뜨면서 탈출 행렬에 앞장섰다. 나 역시 퇴근하면 집에 도착하자마자 밤 늦게까지 개발 공부와 이직 준비를 했다. 여러 회사에 이력서를 돌렸고 연락이 온 곳 중에서 가장 괜찮아 보이는 회사를 가기로 했다.


... 5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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