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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우 Oct 14. 2022

볼보의 영혼 P1800 스토리

며칠 전 볼보 시승회에 다녀왔습니다.

현재 볼보 코리아에서 판매되는 모든 차를 모아놓고 탈 수 있는 기회를 준거죠. 서울이 아닌 속초에서 1박2일간 볼보를 경험하는 건 뭔가 색다르면서 리프레시되는 듯했어요. 차도 풍광도 좋은 시간이었으니까요.

시승회에서 설명해주시는 볼보 관계자분이 브리핑에서 P1800 이야기를 꺼내셨습니다. 그때부터였던것 같습니다. 저는 그 순간부터 2016년 6월 스웨덴 고텐버그의 기억 속으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이 차가 볼보 P1800입니다. 라인을 보세요. 아름답죠? 독특하게 뻗은 크롬 라인도 그렇고, 짧고 낮은 루프도 인상적입니다. 그런데  뭔가 좀 독특한 것 같지 않으세요? 으레 스포츠카라는 건 노즈가 길고 리어 데크가 짧은 것이 특징인데, 이 차는 스포츠카 치고 리어 데크가 굉장히 길죠. 그 이유는 차차 말씀드릴게요.

여기가 스웨덴 고텐버그에 있는 볼보 카 데모 센터입니다. 더불어 볼보 본사와 공장, 연구소, 박물관 등이 모여 있습니다. 더불어서 차를 테스트할 수 있는 작은 트랙도 있습니다. 볼보 데모 센터는 소비자들이 각종 볼보 모델들을 체험하는 곳입니다. 공장과 연구소를 견학하고 바로 옆에 있는 박물관에서 볼보의 역사를 공부한 후에 데모 센터에서 여러 볼보 모델을 시승하는 거죠. 저는 스페인에서 볼보의 새로운 기함 S90을 시승하고 바로 이곳으로 날아왔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P1800을 처음 만났죠.

왼쪽부터 볼보 164, P1800, 아마존입니다. 164는 1968~1975년 생산된 볼보의 럭셔리 세단입니다. 중후함과 함께 존재가 또렷한 디자인을 하고 있죠. 4만6000대 이상 팔렸다니 당시로서는 꽤 많이 팔린겁니다. 아마존도 볼보 역사에서 영롱하게 빛나는 모델입니다. 세단, 쿠페, 스테이션왜건까지 다양한 형태로 제작돼 많은 소비자에게 사랑받습니다. 3단 매뉴얼 뒷바퀴 굴림으로 낭창거리는 승차감이 즐거웠습니다.

차에 대해 설명도 들을 겸 먼저 볼보 담당자가 운전하는 P1800에 동승했습니다. 실내는 이렇게 단출합니다. 그래도 각종 계기반들이 사랑스럽죠? 변속은 4단 수동입니다. 기어노브가 짧은 것 좀 보세요. 이 차의 성격과 성향을 잘 반영하고 있네요.

룸미러가 대시보드 위에 있어요. 독특하죠? 이 차는 시트 포지션이 스포츠카 치고는 약간 높습니다. 물론 지금 기준이기는 하죠. 그리고 루프는 낮죠. 키 큰 유럽인들은 머리가 거의 닿을랑 말랑. 그러니 룸미러가 위에 있다면 뒤가 잘 안 보일 수 있을 거 같고 시야를 가릴 거 같기도 합니다. .

눈높이와 윈드실드 끝이 이렇게 거의 평행을 이루는 되는 거죠. 아! 그런데 리어 데크가 긴 이유가 이 사진에서 살짝 드러났네요. 뭔가 심상치 않죠? 테일핀이 있습니다. 옆에서 봤을 때 리어 데크가 높고 길어 보였던 이유죠. 마치 전투기의 그것과 비슷한 느낌이죠? 볼보에서도 이렇게 유용성이 거의 없는 디자인이 있었다는 게 신기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유가 있어요. 이 차는 미국 시장을 염두에 두고 만들었거든요. P1800이 판매되던 시절의 미국 쿠페들은 정말 화려했습니다.

그 당시 미국의 쿠페들은 엉덩이는 대충 이랬습니다. 허세와 허영의 극치였죠. 차체도 엄청 컸어요. 그러니 미국에서 차를 판매하려면 엉덩이에 핀 하나는 꽂아줘야 했습니다. 위의 미국차들과 비교하니 P1800의 엉덩이는 귀엽고 앙증맞은 수준이네요.

로저 무어

P1800의 디자인은 이탈리아의 카로체리아 피에트로 프루아(Pietro Frua)에서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도 재미있는 스토리가 있습니다. 당시 피에트로 프루아에는 볼보의 디자이너 헬머 패터슨(1944년부터 22년간 생산된 볼보의 장수 모델 PV444의 디자인을 담당)의 아들 펠레 패터슨이 일하고 있었습니다. 펠레 패터슨은 뉴욕에서 디자인을 전공하고 당시 자동차 디자인의 성지인 이탈리아에서 일하고 있었죠. 그런데 아버지 회사에서 쿠페를 기획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볼보에 제안을 한 겁니다. 이렇게 해서 이탈리아에서 미국 시장을 겨냥한 스웨덴 쿠페를 디자인합니다.

펠레 패터슨

1957년 아들이 멋진 디자인의 차를 완성했습니다. 그래서 생산을 위해 테스트카 제작을 독일 카르만(Karmann)에게 맡깁니다. 테스트카가 잘 되면 여기서 생산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카르만이 계약을 취소해버립니다. 당시 폭스바겐은 그들이 준비 중이 스포츠카와 볼보의 P1800이 경쟁하게 될 것을 우려해 카르만을 협박한 거죠. 카르만 입장에선 최대 고객인 폭스바겐의 갑질 때문에 볼보와의 계약을 취소한 겁니다.

어쩔 수 없이 헬머는 새로운 쿠페 디자인 도안을 들고 유럽 전역을 헤맵니다. 이 차를 생산해 줄 공장을 찾기 위해서였죠. 그렇게 3년이 흘러 영국에 닿았습니다. 그리고 이 차를 만들어 줄 곳을 찾았죠. 바로 젠센 모터스라는 곳이었습니다. 나름 영국 안에서는 스포츠카 제작으로 이름 좀 있었던 곳이었습니다. 엔진과 기어 박스는 스웨덴에서, 리어 액슬은 미국, 전기 시스템은 독일에서 왔습니다. 젠센 모터스는 보디 쉘과 조립을 전담했죠. 그런데 이게 대박이 납니다. 미국에서 없어서 못 팔 정도였고 유럽에서도 P1800을 내놓으라고 아우성이었죠.

하지만 각종 부품을 여기저기서 모아서 영국 웨스트 브롬비치에서 생산하는 과정은 물류과정이 꽤나 힘들었던 모양입니다. 주문량을 따라가기 힘들었죠. 그래서 볼보는 젠센 모터스에서 6000대까지만 생산하고 P1800의 생산지를 스웨덴 고텐버그로 옮깁니다. 그리고 P1800에 S를 붙이죠. S는 스웨덴이란 뜻입니다. 즉 스웨덴에서 생산한 P1800이란 거죠.

스웨덴에서 생산한 P1800S는 내구성이 월등히 좋아졌다고 합니다. 이를 반증이라도 하듯 미국의 한 젊은이가 P1800S를 타고 엄청난 짓(!)을 합니다. 1966년 25살의 아이브 고든은 1년치 월급 4150달러를 주고 볼보 P1800S를 구입하죠. 그런데 차가 너무 좋았답니다. 그래서 미국을 비롯해 차가 갈 수 있는 곳 어디든 같이 다녔다고 하네요. 그렇게 21년 만에 100만일(160만 km)를 달립니다. 그리고 2002년에 200만 마일(321만 km)를 기록합니다. 그리고 2013년 드디어 300만 마일(482만 8000km)을 달성합니다. 그렇게 아이브와 그의 볼보 P1800S는 세계에서 가장 긴 거리를 달린 자동차로 기네스북에 등재됩니다.

제가 P1800S를 타보니 아이브 할아버지의 마음을 조금을 이해할 거 같습니다. P1800S는 내가 운전대를 처음 잡은 순간부터 지금까지 탔던 차들 중에서 가장 재미난 차였습니다. 4기통 1.8리터 엔진은 100마력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떤가요? 출력을 또렷하게 뽑아내는걸요. 더불어 아주 기분 좋은 소리를 냅니다. 4단 수동기어는 뻑뻑해요. 그런데 기계적으로 물리는 느낌이 아주 좋아요. 클러치는 생각보다 무겁지 않았어요. 그런데 유동거리가 길어서 꾸~욱 밟아야 해합니다. 얇고 큼지막한 나무 운전대도 무겁습니다. 전동 모터가 없으니까요. 그래서 좋아요. 노면과 바로 직결된 것처럼 생생하고 또렷한 정보를 전달하거든요. 노면 상태뿐 아니라 엔진 회전, 그립, 횡중력 등도 모두 운전대에서 느껴지는 것 같았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 즐거운 주행이었습니다.

미친놈처럼 실실 웃으며 아무도 없는 트랙을 돌고 또 돌았죠. 이런 게 황제 드라이빙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게 달리다 보니 속도가 점점 빨라지더군요. 저도 모르게 시속 100킬로미터를 넘기기 일쑤였습니다. 시승 전 볼보 관계자는 “시속 60킬로미터 정도가 가장 안정적인 속도”라고 말했거든요. 그 이유는 브레이크입니다. 속도를 제대로 컨트롤하지 못하면 뒷바퀴가 밖으로 슬금슬금 빠지거든요. 이때 브레이크를 강하게 밟으면 조향이 되지 않아요. 차가 양옆으로 움찔움찔합니다. ABS가 없으니까요. 또 무게가 갑자기 앞으로 쏠리면 뒤가 약간 불안해집니다. 뒤쪽 그립이 떨어지니 제동성능이 떨어지는 것 같고요.


코너를 빨리 돌때마다 뒤가 조금씩 미끄러집니다. 이때는 살짝 카운터 스티어를 해주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자연스럽게 노즈가 주행 방향으로 돌아와요. 재미를 위해 뒤를 던지는 게 아니라 일상에서 드리프트를 하는 셈인 거죠. 드리프트라고 했지만 뒤를 막 흘리면 타이어가 흰 연기를 내뿜는 그런 드리프트가 아닙니다. 짧게 짧게 주행 방향을 잡는 정도죠. 그래서 운전대를 탁탁 쳐주는 느낌으로 코너를 돌아야 해요. 만약 이 차에 전자장비가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안쪽 바퀴에 제동을 걸면서 차가 밖으로 흐르는 걸 막았겠죠. 차가 흘렀을 때도 브레이크가 걸려서 자연스러운 드리프트는 만들지 못 했을 겁니다. 또 앞바퀴 굴림이었다면 언더스티어가 먼저 났겠죠.

P1800S엔 센서와 모터, 컴퓨터 등이 전혀 없습니다. 모두 운전자의 몫이죠. 그러니 차체 움직임을 정확하게 파악해 그에 대응하는 과정을 모두 운전자가 해야 합니다. 당연히 운전에 집중해야죠. 그래야 더 많은 정보를 캐치할 수 있으니까요.

컴퓨터가 브레이크를 밟고 전동 모터가 운전대를 돌리는 간섭이 없으니 운전이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특히나 이 차는 그 느낌이 정말 생생했어요. 아이브 할아버지가 50년이 넘게 이 차를 사랑하는 이유를 조금은 알거 같아요. 저도 이 차 주면 50년 탈 수 있을 거 같아요. 물론 앞으로 50년은 살지 못하겠지만요.

P1800S은 정말 즐거운 경험이었습니다. 많은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앞으로 자율 주행 차도 나올 텐데 이제 운전의 재미는 요원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더불어 P1800S와 같은 차가 없는 지금은 아주 불행한 시대라고 생각했죠. 왜 볼보는 예전에 이렇게나 재미있는 뒷바퀴굴림 쿠페를 만들어 놓고는 지금은 앞바퀴굴림만 만들까 하는 푸념도 해봅니다.

볼보도 P1800에 대한 아련한 향수가 있나봅니다. 바로 P1800을 오마주한 '볼보 콘셉트 쿠페'를 선보이기도 했으니까요. 단아하면서 힘이 느껴지고 고급스럽습니다. 특히나 약간 길게 뽑은 리어 데크가 P1800과 흡사한 느낌이 들어요.

테일핀 부분은 이렇게 강한 에지를 주면서 P1800을 연상케 합니다. 그러면서 볼보의 디자인 철학과 느낌도 잘 가미했어요. 멋스럽습니다. 앞모습도 깔끔하네요. 볼보 디자인은 허수가 없어서 좋아요. 쓸데없는 라인이 전혀 없잖아요. 이런 디자인이 오래 봐도 질리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 차가 출시될까요? 현재 볼보에는 뒷바퀴 굴림 플랫폼이 없습니다. 네 바퀴 굴림으로 나온다고 해도 앞바퀴 굴림 기반이니 P1800처럼 빠릿하고 짜릿한 느낌을 주기는 어렵지 않을까 싶어요. 볼보는 이 콘셉트카가 앞바퀴굴림 기반 SPA 플랫폼에 2.0리터 엔진+플러그인 하이브리드라고 했어요. 출력은 400마력이고요. 그러니 XC90 T8과 같은 직렬 4기통 2.0리터 터보+슈퍼차저+플러그인 하이브리드라는 말이죠. 그리고 안전의 볼보잖아요. 안전을 위해 엄청난 전자장비를 넣을 겁니다. P1800처럼 날것같은 주행감은 없을 겁니다.  

몇 년 전 볼보는 P1800을 오마주로 콘셉트카까지 만들었지만 이 차는 아직 나오지 않았습니다. 물론 앞으로도 나올 확률은 거의 없을 거 같네요. 세상은 변했고 볼보도 변했습니다. 지금의 볼보는 P1800만큼 또렷하고 명징한 드라이빙 감각을 선사하지는 않지만, P1800에게는 없었던, 내가 존중받고 있다는 감성을 줍니다. 실내 디자인과 주행질감에서 볼보는 볼보만의 특별하고 독특한 감각을 선사해요. 운전하는 행위 자체에 피곤이나 피로가 없게끔 세세하고 소소하게 운전자를 배려하죠. 이게 지금 볼보의 가장 큰 무기가 아닌가 싶네요.  

솔직히 P1800이 다시 나온다고 해도 크게 기대하진 않을 거 갚습니다. 새로운 P1800은 제가 경험했던 오리지널 P1800이 아니니까요. 첫사랑은 기억 속에 있을 때 더 아름다운 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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