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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우 May 23. 2018

물욕의 노예

사야 할 이유는 많지만 살 수 없을 때의 박탈감이란...

일 년에 한두 번 물욕의 노예가 되어 무언가를 사지 않으면 안 되는 순간이 있다. 일 년 간 열심히 외고를 써 차곡차곡 통장에 모아 놓은 돈을 쓰고 싶어 미치는 순간이다. 순간만 참으면 되는데 쇼핑몰에서 봐 둔, 또는 화려한 문체로 제품을 칭송하는 리뷰가 그 찰나의 순간에 치고 들어온다.           

“남자는 풀프레임이지”

면세점에서 캐논 EOS 6D를 샀다. 빨간 줄이 간 렌즈도 같이. 아프리카 나미비아 출장길에 유용하게 썼다. 그 사진으로 잡지 8페이지를 막았고 블로그에 포스팅을 다섯 개나 했으니 알뜰하게 사용했다. 

흔히 가기 힘든 나미비아에 다녀왔더니 몇몇 잡지사에서 외고 청탁이 들어왔고 사진 비용까지 살뜰하게 챙겨줘 카메라 값을 뽑고도 남았다. 다행이다.          

“난 해외출장이 많으니 여행자 시계가 필요해” 

순토 카일라쉬는 세계 어디를 가든 그 나라 시간이 저절로 맞춰지는 신박한 기능을 지닌 시계다. 그렇게 출장 때마다 차고 다녔다. 비행기에서도 GPS가 잡히면 지명이 표시되고 시간이 맞춰졌다. 120만 원이 훌쩍 넘는 시계를 인터넷 면세점 포인트를 긁어모아 70여만 원에 샀으니 남는 장사라 생각했다.

 그런데 출장이 없어졌다. 매년 적게는 여섯 번 많게는 열세 번씩 해외 출장을 다녔는데 김영란법이 생기면서 출장이 없어졌다. 공직자 윤리를 위한 법이 공직자가 아닌 나의 삶과 일에도 큰 변화를 만들었다. 카일라쉬는 지난 1년 가까이 서울 시간만 표시하고 있다.           

“난 해외출장이 많으니 리모와가 필요해” 

다분히 충동적이었다. 눈부신 은빛이 내 동공을 간질이며 지르라고 애원했다. 안 살 수가 없었다. 영롱한 빛을 내며 내방을 환하게 비추는 리모와를 볼 때마다 ‘사길 잘 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아름다운 은빛은 단 한 번의 비행으로 흐리멍덩해졌다. 여기저기 찌그러지고 혹이 생겼다. 아귀가 잘 안 맞는 거 같기도 하다. 요즘엔 바이크 장비를 넣어 두는 보관함에 불과하다.     

“청소의 노예는 싫어”

여러 개의 로봇 청소기를 아주 꼼꼼하게 비교해놓은 리뷰가 문제였다. 난 로봇청소기에 꽂혔고 비교 리뷰에서 1등을 한(가장 비싼) 제품을 주문했다. 방 두 개짜리 빌라에 혼자 산다. 밥은 밖에서 먹고 잠만 자는 곳인데도 며칠만 청소하지 않으면 영화 <황야의 무법자>에서나 볼법한, 황야를 나뒹구는 먼지덩이처럼 머리카락과 먼지가 한 몸이 돼 자유롭게 돌아다녔다. LG 로봇킹은 나를 청소로부터 해방시켰다. 집에 짐이 없으니 로봇청소기의 효율성이 더욱 높다. 더불어 RC카처럼 스마트폰으로 조종도 할 수 있다. 무료한 내 삶은 여전히 무료하지만, 청소로부터 해방되니 삶이 약간 더 윤택해진 듯하다. 급하게 지른 여러 제품 중 만족도가 가장 높다.   

“차가 너무 오래됐잖아”

차를 8년째 타고 있다. 이전에 타던 차도 10년을 탔으니 차를 오래 타는 편이기는 하다. 오래됐지만 많이 타지 않아 아직도 엔진이 쌩쌩하다. 관리도 잘 하는 편이다. 문제는 여기저기 고장이 나기 시작했다. 에어컨 컴프레서가 고장 나 교체 비용으로 140만 원이 나가갔다. 사이드미러가 안 접해 컨트롤러를 교체하는데 12만 원, 배기센서 교체 40만 원 등 돈이 쏠잖게 들어간다. 차에 애정이 떨어지는 와중에 볼보 XC60이 치고 들어왔다. 편하고 조용하고 안락하며 안전하다. 오디오 음질도 훌륭하다. 쉽게 질리지 않는 스타일이다. 한국인이 디자인했는데, 그 한국인 디자이너와 호형호제하는 사이이기도 한다. 차를 사야 할 이유를 수도 없이 만들어 냈다. 결정적으로 이 차를 타면 내 삶이 훨씬 더 윤택해질 것 같다. 

14년간 자동차 전문지 기자를 하면서 수많은 차들이 내 가슴속으로 안겼지만 이번엔 깊이 꽂혔다. 거의 매일 차를 팔고 차를 사는 생각을 한다. 각종 세금과 보험도 계산하고 할부 금리도 알아본다. 한 달에 외고를 몇 개 써야 할부금을 갚아 나갈 수 있을지 계산기를 두드린다. 하지만 계산이 안 나온다. 현실적으로 생각해 이 차를 사면 내 삶이 윤택이 아니라 궁핍이 될게 뻔하다. 지금도 주택담보대출에 갚아 나가는데 척추가 무너지는 것 같다. 

XC60과의 밀당이 생각보다 오래가고 있다. 보통은 1~2주 정도면 사고 싶은 애틋함이 점점 옅어졌었는데 지금은 한 달이 가까워지고 있다. 꽤 오랜 시간 내 안에 머물면서 여러 감정을 간질이다. 사고는 싶은데 살 수 없는 처지의 처량함, 누군가 이 차를 샀다는 소식이 전해주는 박탈감 등등. 어쩌면 헤어진 지 3~4개월 됐을 때 문득문득 느끼는 약간의 애틋함도 있다. 참 요망한 차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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