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은 거창한 계획 속에서 시작되지 않았다. 처음 연구를 접했을 때조차 교수라는 길을 꿈꾸진 않았다. 다만 어느 순간, 사회적 아픔이 나의 시선을 바꾸었다. 세월호 사건이었다. 텔레비전 속 가라앉는 배와 끝내 돌아오지 못한 아이들의 얼굴, 그리고 남겨진 이들의 울부짖음은 내 일상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 경험은 단순한 사회적 슬픔에 머무르지 않고, 인간의 고통과 그것을 함께 짊어지는 문제를 묻는 계기가 되었다.
이 물음은 나를 정신역학 연구로 이끌었다. 자료가 부족했기에 새로운 체계를 세우는 것부터 시작해야 했다. 한국인의 정신질환 변수와 증상 변수를 정리하며 연구 기반을 만들었다. 과정은 더디고 외로웠지만, 그 속에서 오히려 살아 있다는 감각을 얻을 수 있었다. 작은 희망이라도 누군가의 고통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 나를 지탱해 주었다.
그러나 교수로서의 삶은 다른 형태의 무게를 안겨주었다. 기대하던 논문들이 거절되면서, 성과보다는 실패의 기록이 더 많아졌다. 논문 파일을 열 때마다 ‘리젝’이라는 단어가 주는 압박이 마음에 남았다. 문제는 성과의 부족만이 아니었다. 학내에서 동료들과 함께하는 자리에서도 나는 늘 스스로를 축소시키곤 했다. 회의에서 확신에 찬 비전이 제시될 때면, 내 연구의 정당성을 내 안에서 조심스럽게 되뇌어야 했다. 공동 연구나 지원금 논의 속에서도 내가 충분히 경쟁력이 있는지 불안이 뒤따랐다. 동료들은 나를 직접 배제한 적이 없었지만, 나는 언제나 스스로를 한 발 뒤로 물러나게 두었다. 결국 외부의 압력이라기보다, 그 앞에서 자신을 자꾸만 작게 만드는 내 모습이 더 힘겨웠다.
주변은 늘 빛나 보였다. 누구는 국제학술지에 이름을 올리고, 누구는 대형 연구비를 따냈다. SNS에 올라오는 성공의 소식들은 내 작은 성취를 금세 빛바래게 만들었다. 남의 성공이 곧 내 실패로 환산되는 듯했다.
학생들은 미래를 걱정하며 눈물을 보였고, 연구원은 건강 문제로 연구를 중단하고 싶다고 했다. 지도교수로서 그들을 붙들어야 했지만, 내 안의 무력감은 점점 깊어졌다. “나는 이 자리에 설 자격이 있는가.” 그 질문은 일상이 되었고, 계절이 바뀔 때마다 더 뚜렷해졌다.
그 무렵 만난 한 문과대학 교수님의 말씀이 내게 오래 남았다.
“교수직은 인생의 목적이 아닙니다. 다만 섬김의 방식으로 부름 받았을 뿐입니다. 그래서 학생들의 목소리를 듣고, 잘 가르치기 위해 공부를 멈추지 않습니다.”
그 말은 내 안에서 조용히 울렸다. 나는 의도적으로 비교 속에서 살아왔다기보다, 어느 순간부터 무의식적으로 비교를 기준으로 삼아 자신을 평가하고 있었다. 논문 수, 연구비, 학문적 영향력 같은 척도가 자연스럽게 내 기준이 되었고, 그 안에서 끊임없이 나를 재단했다.
그러나 그 말씀이 준 울림은, 그것만이 전부일 필요는 없다는 자각이었다. 비교는 인간의 조건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지만, 반드시 거기에 매여 살 이유는 없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자리에서 발견하는 의미가 또 하나의 좌표로 존재할 수 있다. 그것은 수치로 드러나지 않고, 외부에 크게 보이지 않지만, 내 안을 조금 더 자유롭게 하는 힘이었다.
돌아보면 나의 학문은 이미 그 자리에서 출발하고 있었다. 세월호의 아픔을 이해하고자 했던 마음, 그것이 내 학문적 시작이었다. 최근 세월호 유가족을 위한 전문가 의견을 작성할 수 있었던 것도 그 연장선이었다. 미약했던 내가 이제는 그들에게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은 조용한 감격으로 다가왔다.
그렇다고 비교의 문제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여전히 나는 남의 성취 앞에서 작아지고, 내 전문성의 경계를 의심한다. 비교는 그림자처럼 곁에 머문다. 그러나 그 그림자에만 시선을 두지 않는다. 여전히 남아 있지만, 나는 다른 방향으로 시선을 돌릴 수 있다.
그 방향은 거창하지 않다. 오늘 하루를 살아내는 일이다. 거절된 논문 파일을 다시 열어 학생들과 함께 문장을 고치고, 조금 더 나은 통찰을 담기 위해 애쓴다. 그 단순한 행위가 오늘을 버티게 한다. 내 연구가 큰 명성을 가져다주지 못하더라도, 누군가에게는 작은 도움이 될 수 있다. 유가족을 위한 글, 학생들과의 대화, 연구자들과의 토론 속에서 나는 여전히 의미 있는 자리에 서 있다. 그 사실이 내일을 이어갈 힘이 된다.
학문은 미래의 영광을 보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오늘 하루를 살아낼 이유를 건네줄 수 있다. 나는 여전히 부족하고 흔들리지만, 누군가의 삶에 조금이라도 기댈 수 있는 사람이 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래서 내일 아침이 오면, 다시 몸을 일으켜 책상 앞에 앉을 것이다. 비교의 그림자와 무력감을 함께 안은 채, 오늘의 나로 살아가는 일. 그 단순한 행위 속에서 나는 이 길을 계속 걸어갈 근거를 찾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