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타심이 아니라 위험관리의 문제
한 아프가니스탄 출신 학생의 박사학위 심사를 맡게 되었다. 그는 지난 아프가니스탄 난민들을 대상으로 정신건강(불안, 우울, PTSD)을 측정하고자 했다. 한국에라는 새로운 환경에서 겪는 언어장벽과 차별이 어떻게 아프가니스탄 난민들의 정신건강에 영향을 미치는지 알고 싶어 했다. 그의 연구계획을 보면서, 어렴풋이 나는 이 연구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그 적당한 이유를 찾지 못했다. 왜 이 연구는 내가 알고 싶었던 것일까.
솔직히 ‘난민’이라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나는 좀 더 ‘인자해진 모습’을 강요당하는 듯했다. TV와 소셜 미디어에 보이는 그들의 어려운 현실에 공감하고, ‘지구인’으로서 그 고통을 함께 해야 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인류애, 연대, 공감… 항상 난민 연구를 하면 따라붙는 단어들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인간은 그토록 선하지 않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자기 이익을 우선하는 존재다. “성선설”은 철학의 영역에 남겨두고, 현실의 인간은 훨씬 더 계산적이다. 그렇다면 이런 인간관 위에서 다시 질문해 보자. 우리가 난민의 정신건강에 신경 써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관리하지 않으면 그 대가를 우리가 치르게 되기 때문이다. 정신건강은 개인의 내면에 머무르지 않는다. 치료받지 못한 불안, 우울, 외상 후 스트레스는 행동으로 번지고, 그것은 곧 공동체와 사회의 위험으로 변한다. 마치 담뱃불이 큰 산불로 번지는 것과 같다. 난민들이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에서 제도 밖으로 밀려나면, 그 불안은 공동체 전체로 확산된다. 그들은 합법적인 치료의 문턱을 넘지 못한 채 비공식 영역으로 숨어든다. 언어가 통하지 않고, 의료비를 감당할 수 없으며, 추방이 두렵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은폐된 환자 집단’이 생긴다. 이들은 통계에도 잡히지 않고, 보건당국의 감시망에도 걸리지 않는다. 하지만 병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깊어진다. 그러다 어느 순간 폭발한다. 자살, 폭력, 약물 남용, 그리고 응급실로의 급격한 유입으로. 결국 사회 전체가 그 비용을 떠안는다.
이건 단지 윤리의 문제가 아니다. 경제적 비효율의 문제다. 예방할 수 있었던 질환이 응급 단계로 넘어가면 치료비는 몇 배로 늘어난다. 공공의료 시스템은 뒤늦게 뛰어들어야 하고, 그 사이 사회적 불안정이 커진다. 즉, 초기 정신건강 개입은 ‘착한 행동’이 아니라 비용 절감 전략이다.
이란은 이 메커니즘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국가 중 하나다. 현재 이란에는 약 350만 명의 난민이 살고 있다. 그중 99%가 아프가니스탄 출신이다. 그러나 이란이 정신건강에 쓰는 예산은 전체 보건예산의 3% 남짓에 불과하다. 심리상담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일부다. 대부분은 언어, 비용, 문화적 장벽 때문에 치료를 미루고, 결국 병을 키운다.
국제 학술지 《Lancet Psychaitry》에 실린 연구는 이렇게 경고한다. “정신건강 지원의 부재는 난민 위기를 공중보건 위기로 전이시킬 수 있다.(”Without swift action, the refugee crisis in Iran could devolve into a public health crisis that could further destabilise the country.”) 이 말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정신질환은 연쇄 반응을 일으킨다. 치료받지 못한 우울은 약물 복용 불순응으로 이어지고, 그로 인해 당뇨나 고혈압 같은 만성질환이 악화된다. 불안과 외상은 알코올·약물 의존을 부추기고, 이는 다시 폭력과 범죄로 이어진다. 결국 의료비, 치안비용, 생산성 손실이 한꺼번에 폭증한다.
유럽 역시 같은 교훈을 얻었다. 그리스 레스보스섬의 모리아 캠프는 “난민들은 억류하면 통제할 수 있다”는 신화를 믿은 정책의 실패 사례다. 수용 정원 3천 명짜리 시설에 최대 2만 5천 명이 몰리면서, 불안과 자살 시도, 폭력 사건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의료 인력은 턱없이 부족했고, 2020년 대형 화재로 캠프가 무너졌을 때 수천 명이 노숙 상태로 내몰렸다. 그리스 정부는 결국 더 많은 예산을 투입해 뒤늦게 보건·치안 대응을 강화해야 했다. 봉쇄는 위기를 줄이지 않았다. 그저 위험을 더 통제 불가능한 형태로 바꾸었을 뿐이다.
반대로 정신건강을 ‘관리 가능한 변수’로 다룬 사례는 훨씬 합리적이었다. 터키와 파키스탄은 세계보건기구(WHO)가 개발한 저강도 심리중재 프로그램인 ‘Problem Management Plus(PM+)’를 도입했다. 전문의 대신 짧은 교육을 받은 지역주민과 난민 출신 보건요원이 우울과 불안을 겪는 난민을 상담했다. 결과는 분명했다. 우울과 불안 증상이 뚜렷이 줄었고, 응급의료 의존도가 감소했다. 무엇보다 비용이 현저히 낮았다.
비슷한 모델은 시리아 난민을 지원하기 위해 설계된 ‘3RP(Regional Refugee and Resilience Plan)’에서도 확인된다. 이 계획은 1차 의료 체계에 정신건강 서비스를 통합하고, 준전문인력 네트워크를 만들어 접근성을 높였다. 전문가만 하던 업무 일부를 훈련받은 비전문가가 나눠서 수행하는 ‘과업공유(task-sharing)’ 모델이다. 단순히 구호물자만 주는 게 아니라 의료, 교육, 심리사회적 지원을 함께 하고 지역사회의 회복력을 강화하려 한 것이다. 이로 인해 의료 전문가 부족을 해결하면서도,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의 예방효과를 낸 것이다.
이 모든 사례가 말하는 것은 단 하나다. 난민의 정신건강을 방치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의 보건 리스크를 키우는 일이라는 사실이다. 질병은 국적을 가리지 않는다. 관리되지 않는 트라우마와 불안은 폭력과 범죄, 약물 남용으로 번지고, 그 영향은 국경을 넘는다. 이는 보건의 문제이자 치안의 문제이고, 결국 우리의 삶의 질과 세금의 문제다.
우리는 흔히 난민 문제를 도덕의 프레임으로 본다. 하지만 냉정히 따져보면, 정신건강 관리야말로 가장 실용적인 공중보건 전략이다. 불안정한 집단의 정신건강을 조기에 개입하면 응급의료비와 사회적 비용을 줄이고, 치안과 안전을 지킬 수 있다. 반대로, “우리와 상관없는 일”이라며 외면하면 그 위험은 형태를 바꿔 우리 사회로 돌아온다. 결국 난민의 정신건강을 신경 써야 하는 이유는 착해서가 아니다. 그들을 돕지 않으면, 그 대가를 우리가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건 도덕이 아니라 생존의 계산, 이타심이 아니라 리스크 관리의 논리다.
감정의 언어 대신 냉정한 이익의 언어로 말하자면, 정신건강은 가장 효율적인 보건안보 예산이다. 그리고 그 예산은, 남을 위한 것이 아니라 결국 우리 자신을 위한 보험이다. 나는 나와 우리 공동체를 위해서 아프가니스탄에서 온 학생의 연구를 도와주고 있다. 이 문제는 비단 남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