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ritique of Practical Aversion
싫어함은 대개 명확한 판단처럼 찾아온다. 별로야, 나랑 안 맞아. 하지만 사실 감정은 판단보다 훨씬 빠르다. 싫어한다는 감정이 먼저 도착해 자리를 잡으면, 이성은 뒤늦게 그럴듯한 이유를 조립해 가져다 놓을 뿐이다. 그래서 싫어함은 결론처럼 들리지만, 시작은 의외로 물리적이다. 머리가 아니라 몸이 먼저 반응하는, 거리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가장 익숙한 장면이 있다. 만원 지하철이나 좁은 엘리베이터에서 누군가 내 공간 안으로 한 발 더 들어오면 공기가 즉각적으로 바뀐다. 그 사람이 무례하게 군 것도 아닐 수 있다. 그런데도 몸은 긴장한다. 시선은 가늘어지고 마음은 뒤로 물러선다. 이때 내가 싫어하는 건 상대라기보다 침범 그 자체다. 내 경계가 밀려났다는 느낌, 내가 선택하지 않은 가까움이 억지로 도착했다는 느낌. 싫어함의 첫 페이지는 이렇게 나만의 공간에서 열린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마음은 이 싫어함에 정당한 이유를 붙여 달라고 아우성친다. 그래서 우리는 상대의 단점을 수집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 설명은 대상을 정확히 묘사하기보다, 내가 세상과 관계 맺는 방식을 드러낼 때가 많다. 내가 어떤 거리에서 숨을 쉬는지, 어떤 리듬에서 안전함을 느끼는지, 무엇을 불편해하는지를 보여 주는 것이다.
싫어함이 말로 드러나는 순간도 있다. 특히 칭찬에서. 칭찬인데도 기분이 좋아지지 않는 칭찬이 있다. 의외로 잘하네, 네가 한 것치고는 괜찮다, 생각보다 똑똑하네. 그 말이 상대를 올려 주는 대신, 상대의 위치를 미리 정해 둔 평가처럼 들리는 순간이 있다. 그때의 불쾌함은 저 사람이 나쁘다는 감정을 넘어, 말의 형식이 나를 이상하게 취급한다는 관계의 어긋남으로 이동한다.
감정이 여기까지 흘러왔다면, 이제 우리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야 한다. 싫어하는 마음은 내 마음대로 생겨나지만, 그 마음을 어떻게 다룰지는 나의 선택이기 때문이다. 나는 내 싫어함이 정당한지 확인하기 위해 세 가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 보기로 했다.
첫째, 모두가 이렇게 해도 괜찮은가. 내 불편함을 근거로 상대를 쉽게 단정해 버린다면, 세상은 서로를 이해하기보다 회피하고 분류하는 차가운 곳이 될 것이다.
둘째, 나는 지금 상대를 어떤 존재로 만들고 있는가. 행동을 비판하는 것을 넘어 존재를 부정하는 순간, 싫어함은 폭력이 된다.
셋째, 이 판단을 사람들 앞에서 당당히 말할 수 있는가. 정당한 비판인지, 아니면 비겁한 낙인인지 가늠해 보는 것이다.
이 질문들을 통과하지 못한다면, 싫어함은 그저 내 안의 감정으로만 남겨 둬야 한다. 타인을 단죄하는 결론이 되어서는 안 된다. 정당화는 내 마음을 일시적으로 편안하게 해 주지만, 그 편안함에 중독되면 우리는 상대를 읽어 보려는 노력조차 멈추게 되기 때문이다. 싫어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 감정이 상대가 서 있을 자리까지 빼앗지는 않아야 한다.
결국 좋아함과 싫어함 모두, 내가 어떤 사람이 되어 가는지를 보여 주는 과정이다. 좋아함이 타인을 내 세계로 초대하는 법을 배우는 일이라면, 싫어함은 타인을 지우지 않으면서 나를 지키는 법을 배우는 일이어야 한다. 감정의 순결함을 지키는 것보다 중요한 건, 어떤 감정이 밀려와도 상대를 인간으로 대하는 최소한의 선을 무너뜨리지 않는 일이다. 그 선이 살아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감정의 주인이 되어 타인과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