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ritique of Pure Attraction
좋아함이란 감정은 무엇이고, 왜 생겨나는 것일까. 사실 우리는 누군가를 잘 알아서 좋아하기보다 마음이 먼저 이끌리는 경우가 훨씬 많다. 상대의 말투, 찰나의 표정, 혹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분위기에 감각이 먼저 반응하기 때문이다. 이때의 이끌림은 완성된 감정이라기보다 일종의 예감에 가깝다. 이 사람과라면 내 삶의 리듬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혹은 내 세계가 조금 달라질지도 모른다는 기분 좋은 예감 말이다. 이끌림은 그렇게 작은 불씨로 시작되고, 우리는 그 불씨가 꺼지지 않도록 나만의 방식을 찾기 시작한다.
아장아장 걷는 아이들을 보면 그 방식이 참 투명하다. 누군가가 좋아서 배시시 웃다가도 갑자기 손으로 얼굴을 가린다. 고개를 돌리면서도 시선은 자꾸 그쪽을 향한다. 어떤 아이는 어른 뒤로 숨어 버리고, 어떤 아이는 대놓고 매달린다. 같은 이끌림인데도 반응은 제각각이다.
아이가 얼굴을 가리는 건 부끄러워서가 아니다. 좋아서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감당할 형식을 찾는 중인 것이다. 감정이 먼저 범람하고, 몸이 그 뒤를 간신히 따라가는 셈이다. 이처럼 좋아함은 누구에게나 똑같은 형태로 나타나지 않는다. 감정의 크기가 달라서가 아니라, 그 감정을 다루는 각자의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차이는 어른이 되어서도 이어진다.
대학 시절, 나는 다가가기나 숨기가 아닌 지속을 전제로 하는 좋아함을 경험했다. 나와는 참 달랐지만 이상하게 잘 맞던 친구가 있었다. 함께 보내는 시간이 일상이 되었고, 그 친구는 내 하루의 풍경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그러다 그 친구가 2년 정도 자리를 비우게 되었을 때, 나는 예상보다 큰 공백을 느꼈다. 단순히 못 본다는 사실보다 더 나를 괴롭혔던 건 그 사이에 그 친구가 변해 버리면 어쩌지라는 불안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두려워했던 건 변한 친구라기보다 바뀌는 관계의 리듬이었다. 칸트가 말하듯, 우리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기보다 우리 마음이 만들어 둔 틀을 통해 받아들인다. 관계도 마찬가지다. 언제 연락할지, 어떤 농담에 웃을지 같은 작은 전제들은 내가 혼자 만든 규칙이 아니다. 서로 시간을 쏟아 길들이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굳어진 우리만의 질서다. 그 질서가 끊기면 외로움을 넘어, 내 일상의 축 하나가 빠져나간 것 같은 허전함이 밀려온다. 좋아함은 시간을 들여 관계를 길들이고, 길들여진 만큼 책임도 따라오는 감정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잘 모르는 유명인이나 스포츠팀을 좋아하는 마음은 무엇일까. 우리는 그들의 실제 모습을 전부 알지 못한다. 우리가 만나는 건 편집된 영상이나 인터뷰 같은 장면들, 곧 현상에 가까운 모습들이다. 그런데도 누군가 내가 좋아하는 스타를 비난하면 마음이 먼저 아프다. 그건 그 사람을 잘 알아서가 아니라, 내가 그에게 투영해 둔 의미가 흔들리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동안 내가 들인 시간, 그리고 나는 이런 결을 가진 사람이라는 자의식까지 한꺼번에 건드려진다.
문제는 길들여진 마음이 자동으로 규칙을 만들기 시작할 때 생긴다. 이 사람은 이럴 거야라는 기대, 이 관계는 계속될 거야라는 전제. 하지만 모든 전제는 결국 흔들린다. 어떤 배우가 이 매체와 저 매체에서 말이 조금씩 다를 때, 우리는 혼란을 느낀다. 기억은 흐릿해질 수 있고 맥락은 바뀔 수 있다. 모든 불일치가 곧바로 거짓말은 아니다. 다만 그 균열이 진실을 대하는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깨진 건 사실관계라기보다, 그 사람과 나 사이에 조용히 성립해 있던 신뢰의 규칙이기 때문이다.
좋아함이 상징과 이야기로 작동한다는 점에서는, 더 큰 공동체도 예외가 아니다. 국가에 대한 애정도 비슷하다. 우리는 국가의 실체를 전부 알 수 없기에 상징과 이야기와 의례를 통해 그 대상을 만난다. 그런데 국가가 내가 믿었던 가치를 저버릴 때, 그 배신감은 개인적인 실망보다 훨씬 무겁게 다가온다. 좋아함의 대상에 따라 우리가 짊어져야 할 책임의 무게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런 책임의 무게를 체감하면서, 나는 예전만큼 무언가에 쉽게 빠져들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게 더 편안하다. 좋아함을 버린 게 아니라, 좋아함이 성립하는 방식을 다시 정리했기 때문이다. 작품은 즐기되 사람을 맹목적으로 믿지 않기, 결과물과 인격을 섞지 않기, 신뢰는 천천히 주기. 이런 태도는 냉소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좋아함이 너무 쉽게 배신감으로 변해 스스로를 망치지 않도록, 온도를 조절하는 법을 배운 것이다.
어린 왕자에서 여우가 말하듯, 길들인 것에는 책임이 따라온다. 좋아함은 대상에 붙어 있는 성질이 아니라, 내가 선택한 신뢰의 형태다. 내가 누군가를 좋아할 때 그를 다 안다고 착각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 그 적절한 경계가 오히려 상대를 타인으로서 존중하게 만든다.
아이가 좋아서 웃음을 가리는 순간에도 이미 같은 일이 일어난다. 감정은 새어 나오고, 우리는 그것을 감당할 나름의 형식을 찾는다. 진정한 좋아함은 대상을 향해 무작정 달려가는 직선이 아니다. 내 마음이 다치지 않으면서도 상대를 향해 계속 다가가려는, 조심스럽고도 단단한 마음의 방식이다. 그래서 좋아함은 어떤 결론이라기보다, 그 마음을 대하는 태도를 통해 내가 어떤 사람이 되어 가는지를 보여 주는 과정에 더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