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혐오의 시대

불안의 시대 - 1

by Epiphanes

90년대의 광고와 뮤직비디오가 말하던 진실은 단순했다.

“Sex sells.”


눈길을 붙잡고 싶은가. 자극을 주면 된다. 욕망은 빠르고, 몸은 설득을 기다리지 않는다. 시선은 잠깐이라도 멈춘다. 그 시대의 시장은 인간의 욕망을 잘 알았다. 그래서 대놓고 팔았다. 고급이라서도 저급해서도 아니라, 가장 즉각적인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다른 종류의 솔직함을 가진 시대다. 지난날처럼 노골적인 욕망을 내세우지 않아도 시선을 붙잡는 방법은 넘쳐난다. 그런데 요즘 시장이 새로 발견한 진실은 이거다.

“Hate is the new Sex.”


욕망 대신 분노가, 관능 대신 경멸이, 유혹 대신 낙인이 돈이 된다. 욕망은 취향을 타지만, 분노는 더 보편적이다. 욕망에는 ‘끌림’이 필요하지만, 분노는 ‘반응’만 있으면 된다. 클릭, 댓글, 공유, 체류 시간. 플랫폼은 그것을 정확히 보상한다.


하지만 이 변화는 단순히 “세상이 더 각박해졌다”는 말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여기에는 시대의 공기가 있다. 불안, 박탈, 무력감. 미래가 흐릿해질수록 사람들은 명쾌한 설명을 원한다. 문제는 현실의 어려움이 점점 설명하기 어려워진다는 데 있다. 집값은 왜 오르고, 일자리는 왜 불안하고, 의료와 교육은 왜 이렇게 숨이 막히는지. 원인은 복잡하고, 책임은 분산돼 있고, 해결은 느리다.


그때 사람들에게 가장 달콤한 것은 긴 설명이 아니라 짧은 결론이다. 혐오는 그 짧은 결론을 가장 명쾌하게 제공한다. “저게 문제다.” 불안은 흐릿한데, 혐오는 또렷하다.


그렇다고 분노가 틀렸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분노는 타당할 때가 많다. 사회가 불균형한 것도 사실이고, 많은 불만은 실제 삶을 건드리며 발생한다. 문제는 그 분노가 위로 향하지 못하고 옆으로 새는 방식이다. 분노가 향해야 할 것은 망가진 제도와 구조인데, 실제로는 가장 가까운 얼굴을 향한다. 우리는 시스템을 상대로 싸우기보다, 옆 사람과 싸우는 쪽을 너무 쉽게 택한다.


비행기의 이코노미 좌석을 떠올리면 이해가 빠르다. 좌석을 뒤로 젖히는 문제는 늘 뜨겁다. 누군가는 “권리”라고 하고, 누군가는 “폭력”이라고 한다. 그런데 싸움이 격해질수록 희미해지는 것이 있다. 좌석을 이렇게 만든 설계, 수익 모델, 규제의 공백 같은 이야기다. 그것들은 멀고 복잡하고, 당장 바뀌지 않는다. 반면 앞자리와 뒷자리는 가깝고, 분노는 즉시 꽂힌다. 판은 구조가 만들었다. 그런데 전쟁은 승객이 치른다. 사건은 촬영되고, 플랫폼에서 소비되고, 댓글은 판결을 내린다. 갈등은 도파민을 부르는 콘텐츠가 된다.


팁 문화도 같은 경로를 따라간다. 북미에서 팁은 한때 ‘감사의 표시’였다. 그러나 지금은 사실상 임금의 일부가 되었다. 문제는 그 비율이 아니라, 그 애매한 정체다. 계산기 화면에 ‘Tip’이 뜨고, 높은 선택지가 기본값처럼 먼저 올라온다. 음식값은 이미 올랐고, 세금과 서비스 차지도 붙는다. 그 위에 또 한 번 “당신은 어느 쪽 사람인가”를 묻는 화면이 덧붙는다. 팁과 관련된 순간은 결제가 아니라 심사가 된다.


이때 소비자의 불만은 대체로 구조를 겨눈다. 서버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최저임금을 제대로 보장하지 않는 시스템이 문제라는 것이다. 반면 많은 서버들은 이렇게 말한다. “팁을 낼 수 없다면 외식하지 말라.” 공격적으로 들리지만, 동시에 이 구조 안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사람의 언어이기도 하다.


여기서 중요한 건 누가 옳으냐가 아니다. 분노의 방향이다. 이 갈등의 뿌리는 분명 윗선에 있다. 임금 설계, 고용주의 책임 회피, 규제의 부재. 하지만 테이블 위에서 벌어지는 싸움은 늘 소비자와 서버 사이에서 일어난다. 계산서가 놓이는 그 짧은 순간, 사람들은 시스템이 아니라 서로를 평가한다. “왜 이렇게나 요구하느냐”와 “왜 이것도 못 내느냐”가 충돌한다. 이때 자주 나오는 논쟁이 있다.


A: Service isn’t charities.
B: If service isn’t charities, then don’t ask for donations.


서비스가 자선이 아니라면, 기부를 요구하지 말라는 말이다. 이 말이 날카로운 이유는 도덕의 문제를 계약의 문제로 되돌려 놓기 때문이다. 팁이 기부라면 강요될 수 없다. 팁이 임금이라면 구조 안에 명시돼야 한다. 문제는 팁이 자발적인 기부처럼 말해지면서, 실제로는 의무처럼 작동한다는 점이다. 의무가 된 기부만큼 기묘한 것은 없다.


이 장면은 플랫폼 위에서 더 잘 타오른다. 과한 팁 요구 영상은 분노를 부르고, 서버의 반격 영상은 또 다른 분노를 부른다. 댓글은 금세 도덕 재판장이 된다. 누가 무례했는지, 누가 착취자인지, 누가 ‘외식할 자격’이 있는지. 제도의 문제는 인성 테스트처럼 소비된다. 분노는 콘텐츠가 되고, 조회수는 쌓인다.


더 미묘한 변화도 있다. 이 팁 문화가 유럽과 아시아로 슬금슬금 번지고 있다는 점이다. 원래 서비스 요금이 가격에 포함돼 있던 지역에서도 결제 단말기에 ‘Tip’ 항목이 등장한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경계한다. 이건 문화 교류라기보다, 불안과 책임을 개인에게 떠넘기는 방식의 수입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층간 소음은 이 현상의 또 다른 얼굴이다. 문제의 뿌리는 부실 시공과 책임 구조의 허술함일 때가 많다. 하지만 싸움은 늘 윗집과 아랫집이 한다. 한쪽은 “왜 뛰냐”고 하고, 다른 쪽은 “애 키우는 집은 어쩌란 말이냐”고 한다. 둘 다 틀렸다고 말하기 어렵다. 다만 둘 다 너무 가까워서 서로를 사람으로 보지 못하게 된다. 설계의 결함이 이웃 간 도덕 재판을 불러온다. 불만은 위로 올라가지 못하고 옆으로 튄다.


이민자 혐오도 같은 구조를 가진다. 이민은 원래 정책의 영역이다. 노동시장, 주거, 복지, 교육, 정착 지원. 하지만 사람들이 체감하는 것은 정책 문장이 아니라 일상의 무게다. 임대료, 대기 시간, 동네 분위기의 변화. 그 체감이 “변수”에서 “정체성”으로 굳어지는 순간, 문제는 정책이 아니라 전쟁이 된다. 전쟁은 퍼지기 쉽고, 결속을 만들고, 돈이 된다.


국제 분쟁 역시 플랫폼 위에서는 비슷한 길을 탄다. 전쟁은 너무 커서 개인을 무력하게 만든다. 무력감은 행동을 원하고, 행동은 상징을 찾는다. 그래서 보이콧은 복잡한 현실을 찬반으로 압축한다. 압축은 빠르지만, 낙인과 편가르기가 뒤따른다. 정의는 언제부턴가 “누가 더 그럴싸하냐”의 경쟁이 된다.


캔슬 컬처도 다르지 않다. 구조가 먼저 책임져야 할 순간에도, 실제로 불타는 것은 개인이다. 개인은 이야기로 만들기 쉽고, 분노를 투사하기 쉽고, 승패가 빠르다. 구조는 느리고 복잡해서 잘 타지 않는다. 그래서 플랫폼의 정의는 자주 ‘가장 잘 타는 표적’을 고른다. 힘 있는 곳은 못 태우고, 잘 타는 사람만 골라 태우는 방식으로.


90년대의 “Sex sells”가 욕망의 시장이었다면, 지금의 “Hate is the new Sex”는 불안의 시장이다. 욕망은 “더 가지고 싶다”고 속삭였고, 적대는 “누군가를 밀어내고 싶다”고 부추긴다. 그리고 그 결론은 종종 정답처럼 느껴진다. 불안한 사람에게 정답은 필요하니까.


그래서 대혐오의 시대에는 예가 너무 많다. 그런데 이코노미 좌석도, 팁도, 층간 소음도, 이민 문제도, 보이콧도, 캔슬 컬처도 모두 같은 문제의 변주다. 구조에서 시작된 문제인데 가까운 곳에서 희생양을 찾는다. 그리고 그 희생양에게 향한 분노는 다시 콘텐츠가 된다. 해결은 멀어지고, 적대는 가까워진다. 이때 분노는 방향을 잃는다. 위를 향하지 못한 분노는 옆을 찌르고, 옆을 찌른 분노는 또 다른 정답처럼 유통되며 새로운 희생자를 만든다.


분노를 없애자는 말이 아니다. 다만 분노가 치솟는 순간, 한 번만 방향을 확인하자는 것이다. 지금 내가 겨누고 있는 것은 바꿀 수 있는 규칙과 설계인가, 아니면 가장 가까운 얼굴인가. 싸움이 승객과 승객 사이에서 끝날 때, 층간 소음이 이웃 간 도덕 재판으로 남을 때, 팁이 인성 테스트로 소비될 때, 문제는 절대 해결되지 않는다. 그 확인이 없으면, 분노는 언제나 콘텐츠로만 소비되고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스스로에게 한번 물어보길 바란다. 조금 전 누른 ‘좋아요’가 분노의 방향을 바꾸기 위해서였는지, 아니면 분노에 휩쓸렸기 때문이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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