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의 시대 - 2
"나는 올바르고 싶다." 이 말은 얼핏 미덕의 극치처럼 보이지만, 요즘은 아집과 독선을 포장하기 위한 말처럼 들릴 때가 많다.
불안은 흐리고 원인은 복잡하고 해결은 멀다. 그래서 사람들은 해답 대신 위치를 택한다. 내가 서 있는 자리가 "올바른 자리"인지 확인받는 것. 그 확인이 클릭이 되고, 박수가 되고, 면죄부가 된다.
올바름은 원래 인간이 서로를 덜 다치게 하기 위해 만든 장치다. 그러나 불안이 커진 시대에는 올바름이 더 자주 다른 기능을 한다. 윤리는 방향이 아니라 방패가 되고, 아이러니하게도 방패는 곧 상대를 밀어내고 찍어 누르는 무기가 된다.
사람들은 세상을 바꾸기 위해 올바름을 붙잡기보다, 무너져가는 세계에서 스스로가 무너지지 않기 위해 올바름을 붙잡는다. 그 욕망이 강해질수록 "올바름"은 내용이 아니라 형식에 집착하게 된다. 무엇을 바꾸겠다는 결심이 아니라, 내가 어떤 사람인지 증명하는 표식이 된다.
나는 요즘 몇 가지 유행에서 그런 모습을 본다. 정당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사람을 살리기보다 사람을 가르는 방식으로 굳어 버린 것들이다.
이 글이 말하려는 것은 특정 가치나 실천의 무용함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나는 가치가 유효하기 때문에, 그 가치가 통화처럼 쓰일 때 더 많은 것이 망가진다는 말을 하고 싶다. 문제는 무엇을 믿느냐가 아니라, 그 믿음이 어떻게 사용되느냐에 있다. 같은 윤리도, 같은 감수성도, 같은 정의감도 "방향"으로 작동할 때와 "위치"로 작동할 때 전혀 다른 얼굴을 가진다.
그리고 그 사용은 말에만 머물지 않는다. 우리는 올바름을 문장으로 주장할 뿐 아니라, 소비로 인증하고, 관계로 구획하고, 참여와 불참으로 드러내며, 일상의 선택 속에서 반복해서 수행한다. 무엇을 말하는지뿐 아니라 무엇을 사고, 누구와 어울리고, 무엇에 침묵하고, 누구를 밀어내는지가 모두 오늘의 올바름을 구성한다. 그래서 지금의 올바름은 하나의 의견이라기보다 삶 전체를 조직하는 행위 양식에 가깝다.
그 변질은 대체로 비슷한 경로를 따라간다. 처음에는 돌봄의 언어와 태도로 들어온다. 치유와 상담, 심리 언어는 많은 사람에게 실제로 도움이 된다. 문제는 그것이 실질적인 도움이 아니라는 데 있지 않다. 그 도움이 삶의 한 영역에 머무르지 않고 삶 전체의 문법이 되어 버릴 때 문제가 된다.
그 순간 사회 문제는 개인의 상처로 축소되고, 정치적 갈등은 관계의 트라우마로 환원된다. 책임은 구조가 아니라 마음의 상태로 이동한다. 우리는 이런 장면을 쉽게 본다. 갈등이 생겼을 때 누군가는 "그건 네가 선을 알아서 그어야 해"라고 말하고, 또 누군가는 상대를 특정 단어로 봉인한다. 말 자체가 틀렸다는 게 아니다. 다만 그 말이 대화를 여는 열쇠가 아니라 대화를 닫는 자물쇠로 쓰여서는 안 된다.
그러나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런 감각은 곧 행동의 방식으로 번진다. 사람을 이해하려 하기보다 먼저 거리를 두고, 관계를 정리하게 된다. 물론 자기 보호는 필요하다. 다만 모든 관계와 갈등을 같은 방식으로 다루기 시작하는 순간, 돌봄은 사람을 회복시키는 기술이 아니라 사람을 선별하는 기술로 바뀐다. 그 순간 진단은 설명이 아니라 종착역이 되고, 이해는 시작되기도 전에 끝난다.
그리고 이 언어와 태도에는 분명한 계급성이 따라붙는다. 돌봄의 기술은 아름답지만, 누구에게나 같은 방식으로 열려 있지 않다. 안정적인 시간표, 비용, 보험, 언어 능력, 정보, 그리고 무엇보다 "내 마음을 들여다볼 여유"가 있어야 그것은 작동한다. 하루의 생계에 허덕이는 사람에게 마음의 치유를 위한 여정은 당장 감당할 수 있는 일정이 되기는 어렵다. 그래서 돌봄의 언어가 대중화될수록 역설이 생긴다. 가장 도움이 필요한 사람일수록 접근하기 어렵고, 가장 접근하기 쉬운 사람일수록 그 여유를 더 많이 소유한다.
이 흐름은 곧 삶의 방식과 품격의 문제로 옮겨 간다. 윤리적 소비나 윤리적 식단은 분명 중요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동물과 환경을 생각하는 일은 가볍지 않다. 다만 그 윤리가 어느 순간부터 "삶의 조건"이 아니라 "삶의 품격"으로 변모하기 시작할 때 문제가 생긴다.
그때부터 실천은 변화가 아니라 표식이 된다. 무엇을 하는지가 아니라, 무엇을 하지 않는지가 개인을 증명하게 된다. 무엇을 사는지, 무엇을 먹는지, 어떤 브랜드를 거부하는지, 어떤 소비를 부끄러워하는지가 어느새 한 사람의 도덕성을 판정하는 기준이 된다. 여기서 우리가 자주 놓치는 것이 있다. 이 윤리는 의지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원이라는 점이다. 시간과 돈, 그리고 선택지가 있는 사람에게 더 쉬운 윤리라는 뜻이다.
신선한 식재료, 대체 단백질, 영양 보충, 균형 잡힌 식단을 유지할 수 있는 환경은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는다. 지방의 마트, 야근과 교대 근무, 강도 높은 노동, 저임금의 일정 속에서 "무엇을 먹을지"는 철학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이다. 친환경 제품, 윤리적 브랜드, 불매와 대체 소비 역시 마찬가지다. 그것은 신념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접근성과 비용의 문제이기도 하다.
선택지가 없는 사람에게 윤리를 요구하는 순간, 윤리는 이상이 아니라 계급이 되기 쉽다. 그리고 계급이 된 윤리는 스노비즘과 만나는 속도가 빠르다. "의지"라는 단어는 너무 편리해서 조건을 지워 버린다. 결국 남는 것은 실천의 확장이 아니라, 실천의 자격 심사다. 함께 변하기 위한 윤리가 아니라, 누가 더 깨끗한 삶을 사는지 겨루는 경쟁이 된다.
이런 경향은 다시 말과 태도의 규율로 굳어진다. 존중의 언어가 지키려는 목적은 분명하다. 말과 태도가 사람을 다치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약자의 존엄을 최소한으로 지키는 것. 문제는 존중 그 자체가 아니라, 존중이 심사표가 되는 방식이다. 그 목적이 "대화의 기본값"이 아니라 "대화의 목표"가 되는 순간, 의미보다 단어를 먼저 점검하고 맥락보다 태도를 먼저 판정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진다. 실수는 수정의 계기가 아니라 처벌의 증거가 되고, 질문은 학습의 출발이 아니라 의심의 징표가 된다.
그리고 이 규율은 말투에만 머물지 않는다. 표현의 규칙은 곧 관계의 규칙이 되고, 관계의 규칙은 다시 배제의 규칙이 된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은 틀리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걸러지지 않기 위해 행동하게 된다.
이 교조성은 대화만이 아니라 창작에도 스며든다. 특히 거대한 산업에서는 더 그렇다. 작품이 먼저 관객을 만나기 전에 작품은 먼저 검열과 계산을 만난다. 무엇을 말할지보다 무엇을 피할지가 앞선다. 인물은 사람이라기보다 표상으로 점검되고, 서사는 이야기라기보다 메시지로 검사된다. 그렇게 "존엄"은 종종 체크리스트가 되고, 공감은 정답이 된다.
관객은 이 순간을 생각보다 빨리 알아챈다. "나를 즐겁게 해 준다"가 아니라 "나를 설득하려 든다"는 느낌이 스칠 때, 대중은 피로해진다. 그 피로는 곧바로 정치화된다. 작품은 이야기로 평가받기 전에 "진영의 상징"으로 소환되고, 산업은 그 싸움의 한복판에 서게 된다. 다만 중요한 건 "진보적 메시지 = 흥행 실패" 같은 단순한 결론이 아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그게 아니다. 교조화된 규율은 "무엇을 말하느냐"보다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행동하느냐"를 함께 망가뜨린다.
사람을 이해시키기 위해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비난을 피하고 안전한 위치를 지키기 위해 정답을 제출하게 만든다. 그래서 남는 것은 더 무해한 말, 더 안전한 태도, 더 예측 가능한 행동이다. 그러나 안전해진 말과 행동이 현실을 건드리는 것은 아니다. 말과 행동이 안전해질수록 현실은 안전하지 않은 채로 남는다.
이 모든 것은 결국 전선의 언어와 행동으로 귀결된다. 성평등의 문제의식은 여전히 필요하다. 21세기에도 성별이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을 겪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현실이니까. 문제는 성평등을 말하는 언어가 어떤 순간부터 구조를 분석하기보다, 누가 올바르고 누가 틀렸는지를 먼저 판결하는 언어로 굳어지는 데 있다.
그 순간 운동은 운동이 아니라 도덕적 위치가 된다. 누군가를 설득하고 현실을 바꾸기 위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올바른 편에 서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말하고, 선택하고, 참여하고, 거리 두게 된다. 그 결과 남는 것은 변화가 아니라 편과 적의 재편성이며, 끊임없는 자가 검열이다.
사람들은 무엇이 올바른지 토론하기보다, 무엇을 말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자신이 안전한 위치에 설 수 있는지부터 계산한다. 자가 검열은 침묵이 아니다. 오히려 끊임없는 발화와 행동의 리허설이다. 문장을 내뱉기 전에 머릿속에서 먼저 검열하고, 문장 바깥의 맥락을 지우고, 오해될 수 있는 부분을 잘라낸다. 동시에 누구의 행사에 갈지, 어떤 게시물에 반응할지, 누구를 공개적으로 지지할지, 누구와 선을 그을지까지 미리 계산한다.
질문은 공격으로 읽힐 가능성이 있고, 망설임은 배신으로 오해될 수 있다. 그래서 말은 점점 더 짧아지고, 더 단정해지고, 행동은 더 예측 가능해진다. 그러나 그것들이 늘어난다고 해서 진실이 늘어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복잡한 이야기는 사라진다.
구조를 설명하는 문장은 대개 복잡하고, 복잡한 문장은 곧바로 취약해진다. 구조를 바꾸는 행동도 대개 느리고, 느린 행동은 곧바로 의심받기 쉽다. 한 문장만 떼어 내도 의미가 뒤집히고, 한 장면만 잘라 내도 사람 전체가 판정된다. 이 환경에서 사람들은 정확함보다 생존을 택한다.
결국 이 모든 것은 서로 다른 모습을 하고 있지만 같은 욕망을 품고 있다. "나는 올바르고 싶다." 더 정확히 말하면, "나는 흔들리고 싶지 않다." 그래서 사람들은 윤리를 선택한다. 윤리는 원래 세상을 더 나은 방향으로 움직이기 위해 존재했지만, 불안이 커진 시대에는 자주 정반대의 기능을 한다. 보호를 위해 세운 윤리가 공격의 도구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간단하다. 올바름은 포기할 수 없다. 그러나 올바름을 도구로 사용하는 방식은 포기해야 한다. 누군가가 나의 한 문장이나 단편적인 모습으로 내 존재 전체를 판정하려 할 때, 우리는 대부분 반사적으로 맞서거나, 더 단정한 말과 행동으로 다시 상대를 밀어낸다. 하지만 그 순간부터 그건 윤리의 문제가 아니게 된다.
그래서 최소한의 규칙이 필요하다. 누군가를 규정하고 싶은 충동이 올라올 때, 먼저 스스로에게 묻는 것. 내가 지금 요구하는 게 변화인지, 아니면 누군가의 배제인지 자문해야 한다. 변화라면 설득이 필요하고, 설득에는 시간을 허용해야 한다. 배제가 목적이라면 내 말과 행동은 판결로 작동하게 된다.
또 하나의 규칙은 이것이다. 상대를 재단하기 전에, 상대가 실제로 한 말과 처한 조건과 행동의 맥락을 먼저 다시 보는 것. 맥락을 확인하지 않은 채 의도를 단정하는 순간, 올바름은 방향이 아니라 무기가 된다. 질문이 공격으로 읽히기 쉬운 시대일수록, 질문을 질문으로 남겨 두는 절차가 필요하다. 단정하기 전에 듣고, 배제하기 전에 묻고, 판결하기 전에 조건을 살피는 습관이 필요하다.
가치가 다시 가치로 남으려면, 올바름이 다시 사람 쪽으로 돌아와야 한다. 판결의 언어가 아니라 설득의 태도로, 자기 인증의 행동이 아니라 함께 바뀌기 위한 실천으로. 낙인의 속도가 아니라 변화의 속도로.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올바르다는 증명이 아니라 우리가 조금이라도 나아졌다는 증거로.
올바름은 증명될수록 강해지는 게 아니다. 올바름은 확장될수록 강해진다. 더 많은 사람이 배울 수 있을 때, 실수한 뒤에도 다시 말하고 다시 행동할 수 있을 때, 다른 사람의 조건부터 재단하지 않고 이해하려 할 때, 올바름이 현실을 바꿀 수 있다.
그렇지 않은 올바름은 결국 그럴듯한 모양만 남은 빈 껍데기가 된다. 우리는 이미 충분히 피곤한 시대를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