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의 시대 - 3
요즘 사람들은 서로를 덜 돕는 것처럼 보인다. 길에서 누군가 넘어져도 잠시 망설이고, 도움이 필요한 상황에서도 한 발 물러선다. 이런 장면을 볼 때 우리는 흔히 이렇게 말한다. 세상이 각박해졌다고. 하지만 정말 그럴까. 사람들이 예전보다 덜 착해졌기 때문일까. 아니면 착해지는 일이 예전보다 더 위험해졌기 때문일까.
몇 년 전, ‘펜스룰’이라는 말이 널리 퍼졌다. 남성과 여성이 단둘이 있는 상황 자체를 피하자는 것이다. 처음 이 개념이 등장했을 때는 비판도 많았다. 연대를 거부하는 태도, 지나친 자기 보호, 성평등에 대한 퇴행으로 읽는 시선도 있었다. 그러나 그 선택을 하는 사람들의 설명은 대체로 비슷했다. 돕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오해받을 위험을 감당할 수 없어서라는 것이다.
이 장면에서 중요한 것은 그 선택이 옳으냐 그르냐가 아니다. 그런 선택이 어떤 환경에서 나왔느냐는 점이다. 선의가 더 이상 선의로만 해석되지 않는 환경, 의도가 설명되기 전에 기록과 판결이 먼저 작동하는 환경에서 사람들은 도덕적 행동조차 위험 관리의 문제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이 변화는 위기 상황에서도 드러난다. 길에 쓰러진 사람을 보고도 직접 개입하지 않고 신고만 하거나, 아예 외면하는 선택이 그렇다. 겉으로 보면 냉담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다른 계산이 있다. 도와주다가 일이 잘못되면 책임은 개인이 떠안아야 한다는 인식, 선의가 보호받지 못한다는 사례의 축적이다. 이 조건에서 도움은 미덕이 아닌 리스크가 된다.
비슷한 장면은 더 사소한 일상에서도 반복된다. 길가에 떨어진 지갑이나 카드를 보고도 선뜻 줍지 않는 모습이 그렇다. 주인을 찾아 주려다 괜한 의심을 받거나 덤터기를 쓸까 봐 손을 대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행동은 종종 정직함이나 시민의식으로 포장되기도 한다. 남의 물건을 함부로 건드리지 않는 성숙한 문화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미덕의 증거라기보다, 개입하지 않는 쪽이 더 안전하다고 학습된 환경의 산물에 가깝다. 위험을 피한 결과가 문화적 성숙으로 인식되는 순간, 제도가 해결해야 할 문제는 시민의식이라는 말 아래 가려지고 만다. 돕지 않음은 어느새 조심성, 예의, 성숙함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임마누엘 칸트는 타인을 언제나 목적 그 자체로 대하라고 말했다. 누군가를 돕는다는 것은 그를 수단이 아니라 사람으로 대하는 가장 직접적인 방식이다. 정언 명령에는 계산이 없다. 위험하든 불편하든, 옳은 일은 옳은 일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문제는 우리가 그 말을 잊어서가 아니다. 지금의 우리는 옳은 일을 했을 때조차 그 결과를 개인이 홀로 감당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선의는 설명되기 전에 의심받고, 맥락은 고려되기 전에 잘려 나간다. 이런 조건에서 정언 명령은 도덕의 나침반이라기보다, 위험 감수 선언에 가까워진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불안은 소극적인 회피라는 반응만 이끌어내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책임을 피하기 위해 물러서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것을 다른 이름으로 흩어 버리기도 한다.
아이가 독감이나 장염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를 숨긴 채 어린이집에 보내는 선택을 떠올려 보자. 맞벌이 구조, 돌봄의 공백, 회사의 무관심 같은 조건은 분명 존재한다. 그런 압박을 무시한 채 개인만을 비난하는 것은 확실히 공정하지 않다. 그래서 종종 이런 말이 따라붙는다. 개인을 탓하지 말고 시스템을 탓하라고.
이 말은 대체로 옳다. 실제로 많은 문제는 개인의 악의보다 구조의 결함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그 말이 잘못된 선택까지 덮는 방패로 쓰이는 순간, 구조 비판은 비판이 아니라 면책이 된다. 감염병이 관련된 상황에서의 최소한의 윤리는 구조의 산물이라는 말만으로 지워질 수 없다. 그 선택의 비용은 결국 다른 아이들, 다른 부모들, 돌봄 현장 전체로 퍼져 나가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구조를 볼 것이냐 개인을 볼 것이냐의 이분법이 아니다. 구조를 이해한다는 것은 책임을 지우지 않는 일이 아니라, 어떤 조건 속에서도 끝내 넘지 말아야 할 선이 무엇인지 함께 묻는 일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시스템 탓이라는 말 역시 또 하나의 자동 반응이 된다. 혐오가 판단을 단순화하듯, 면죄 역시 판단을 생략한다.
우리는 정말 이상한 시대를 살고 있다. 한편에서는 선의를 보이다가 책임을 뒤집어쓸까 봐 망설이고, 다른 한편에서는 구조를 말하며 책임을 너무 쉽게 미루기도 한다. 누군가는 도와주지 않기 위해 물러서고, 누군가는 잘못의 무게를 줄이기 위해 구조 뒤로 숨는다. 방향은 달라 보여도, 그 밑바닥에는 모두 불안이 있다. 책임을 감당할 자신이 없는 사회, 책임의 경계가 불분명한 사회, 그래서 사람마다 먼저 자신을 지키는 법부터 배우는 사회다.
이런 사회에서 사람들은 덜 선해진 것이 아니라, 선해지는 방식 자체를 바꾸게 된다. 거리 두기는 무례가 아니라 안전이 되고, 침묵은 방관이 아니라 생존 전략이 된다. 사람들은 타인을 외면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자신이 다치고 싶지 않아서 물러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막연한 도덕적 각성이 아닐지도 모른다. 더 따뜻한 사람이 되자거나, 더 착하게 살자고 다짐하는 말만으로는 이 문제를 건드릴 수 없다. 마음을 탓하는 동안에도 조건은 바뀌지 않는다, 조건이 그대로인 한 선의는 계속 망설임 속에 머물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은 친절한 마음이 아니라, 친절이 과실이 되지 않는 조건일 것이다. 선의를 베푼 사람이 바보가 되지 않고,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이 구조 뒤로 쉽게 숨지 못하는 사회. 도움을 주는 일이 무모함으로, 최소한의 윤리를 지키는 일이 손해로 오역되지 않는 사회. 어쩌면 우리가 정말 회복해야 할 것은 사람들의 마음속 온기 그 자체보다, 그 온기가 왜곡되지 않고 작동할 수 있는 환경일 것이다.
우리가 다시 서로를 사람으로 본다는 것은 영웅적인 도덕을 되찾는 일이 아니다. 불안 속에서도 서로를 끝내 밀어내지 않을 최소한의 조건을 지켜 내는 일에 가깝다. 그 조건이 무너질 때 가장 먼저 사라지는 것은 거창한 정의가 아니라, 남을 선뜻 돕고자 하는 평범한 마음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