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한 중년 배우는 자신이 소유한 건물을 두고 길거리에서 들뜬 목소리로 자랑하듯 외쳐 빈축을 샀고, 또 다른 배우는 도서관에서 빌린 책에 밑줄을 그은 사진을 SNS에 올려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그리고 또 한 배우가 반려견의 얼굴에 낙서를 한 사진을 SNS에 올렸다가 공분을 사고 있다. 사건의 종류는 서로 다르지만, 이 장면들 앞에서 사람들이 느낀 당혹감은 묘하게 닮아 있다. 저 행동이 단지 경솔해서가 아니라, 이제는 더 이상 그런 미숙함이 젊음의 실수로 보이지 않는 나이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런 순간에 흔히 나잇값이라는 말을 꺼낸다. 이 말은 자칫 권위적이고 구시대적인 훈계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여전히 완전히 폐기되지 않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나잇값이란 단지 점잖게 굴라는 요구가 아니다. 내 자유와 장난과 자랑이 어디까지는 사적인 것이고, 어디부터는 타인과 함께 쓰는 세계를 건드리는 것인지 아는 감각에 더 가깝다. 길거리에서의 과장된 자랑도, 공공재를 사적으로 다루는 태도도, 애정 표현이라는 이름으로 타자의 몸을 가볍게 희롱하는 일도 결국은 그 경계를 흐린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장면들이 꼭 거대한 악의에서 나오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많은 경우 그것은 악의보다 무감각에 가깝다. 본인에게는 농담이었을 수 있고, 별것 아닌 습관이었을 수도 있고, 애정 표현이었을 수 있다. 그러나 바로 그 지점에서 문제가 드러난다. 성숙이란 나쁜 마음을 품지 않는 데만 있지 않다. 내가 아무렇지 않게 여긴 행동이 남에게는 불쾌함이나 불편함으로 읽힐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에 있다. 사적인 감각과 공적인 감각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은 악인이 아닐지언정 미숙해 보이기 쉽다.
여기에 지금 시대의 분위기가 하나 더 겹친다. 대체적으로 요즘 사람들은 예전보다 훨씬 긴 시간 동안 젊어 보인다. 피부를 관리하고 몸을 가꾸고 이미지를 유지하는 기술은 점점 더 정교해졌다. 돈과 시간, 여유라는 자원을 충분히 가진 연예인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은 예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데, 사회가 요구하는 책임감과 절제의 무게는 분명 달라져 있다. 어쩌면 이 간극이 문제의 일부일지도 모른다. 얼굴은 늙지 않았는데, 그래서 자신도 아직 예전의 가벼움으로 세상을 대해도 된다고 무심코 착각하는 것이다.
물론 어려 보인다고 해서 모두 철없는 것은 아니다. 젊은 얼굴과 성숙한 태도를 함께 지닌 사람도 얼마든지 있다. 문제는 외모 그 자체가 아니라, 젊음의 이미지를 오래 유지하는 환경 속에서 나이가 들었다는 자각마저 늦춰질 수 있다는 데 있다. 예전 같으면 주름과 체력의 변화가 자연스럽게 사람을 돌아보게 만들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그 신호들이 많이 지워진다. 늙음을 늦추는 데는 성공했는지 몰라도, 그만큼 성숙의 타이밍도 함께 유예되는 듯한 인상을 줄 때가 있다.
그래서 요즘 대중이 불쾌해하는 것은 단순한 실수 하나가 아니다. 충분히 나이를 먹고 사회적 위치도 가진 사람이 여전히 세상을 자기 감각의 연장처럼 다룬다는 데서 오는 당혹감이다. 내 건물이니 내 마음대로 자랑해도 된다고 여기고, 내 손에 들어온 책이니 내 습관대로 다뤄도 된다고 여기고, 내 반려동물이니 귀엽다는 이유로 얼굴에 무엇을 해도 된다고 여기는 태도. 그 바탕에는 소유와 친밀함이 곧 허가가 된다는 착각이 숨어 있다. 그러나 공공성과 존중은 언제나 그 착각을 멈추는 데서 시작된다.
어른스러움은 얼굴에 먼저 나타나는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 얼굴은 관리할 수 있으니까. 주름은 늦출 수 있고, 인상은 가꿀 수 있고, 젊음의 분위기도 얼마든지 연장할 수 있다. 그러나 성숙함은 다른 데서 드러난다. 내 장난이 어디서 남의 불쾌함이 되는지, 내 자랑이 어디서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지, 내 사적인 감각이 어디서 공적인 세계를 침범하는지 아는 데서 비로소 시작된다. 어쩌면 우리가 요즘 자주 목격하는 것은 철없는 몇 사람의 경솔함만이 아니다. 늙지 않는 얼굴 뒤에 숨어 버린 미성숙, 바로 그 시대의 초상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