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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일 Aug 25. 2019

[걸어서 동네속으로] 이탈리아 길거리의 숨은 보물들.

이탈리아의 간판, 낙서, 쇼윈도

"우리 모두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세계에 익숙해진다. 물체들은 점점 익숙해질수록 배경 속으로 섞여 들어가고 한때는 단계마다 미리 생각해가면서 수행했던 새로운 일도 곧 기계적 습관이 된다. 우리는 더 이상 질문을 하지 않는다. 그에 대한 대답과 사물이 돌아가는 모습을 당연하게 보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당연하지 않다고 해도, 그 당연함을 느끼게 만들었던 조건이 오래전에 바뀌었다 해도 말이다."

관찰의 힘_얀 칩체이스, 사이먼 슈타인하트 


걷는 것 = 관찰하고 발견하는 행위 

여행 가기 전에는 거의 걷지 않았다. 걷는 행위를 그저 운동으로 치부했기 때문이었다. 이미 체육관, 헬스장에서 충분히 운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걸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연인과 재잘거릴 때가 아니라면 딱히 걷는 것에 의미를 두지 않았었다. 하지만 여행을 통해 바뀐 환경에 놓이면 그저 걷는 것도 새로운 경험이 된다. 모든 것이 우리 동네와 다르기 때문이다. 너무 익숙해져 무시하고 있던 비슷한 풍경들이 여행지에서 되살아나며 우리 동네와 겹쳐 보인다. 그렇게 차이를 발견하고, 숨은 가능성을 발견한다.


어둠이 깔리면 도심은 환하게 빛난다. 시선을 끄는 가게들의 네온사인은 서울 사람이라면 지긋하게 봤을 풍경이 아닐까? 약 10년 전, 서울시에서 간판 정비사업을 하며 대부분의 투박한 간판들이 말끔한 모습으로 변신했지만 요란하게 빛나는 투박한 간판은 이 도시의 고유한 풍경이 돼버렸다. 간소하게 바뀐 간판들도 때론 좋다고 생각했지만 획일화된 모습이 썩 달갑지는 않았다. 대충 잘라 붙인 이미지와 맞지 않는 색 배합, 한때 인기 있던 무료 폰트로 휘갈겨쓴 간판은 얼굴을 찌푸리게 만든다. 그저 사람들을 자극하기 열심인 간판들은 너무 현란해서 어지러울 정도다. 우리 서울 사람들에게 이런 풍경은 너무 익숙해졌다.

이탈리아 화장실 견문록에 이어 나는 길거리에서 특이한 모양들을 발견했다. 간판과 그라피티, 쇼윈도가 그것이다. 간판 정비사업으로 개성을 잃은 서울의 그것과 다르게 이탈리아의 간판은 가게의 아이덴티티 그 자체로 잠재적 소비자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가게의 간판은 주인장의 취향으로 엄선해 꾸며놓은 쇼윈도와 더불어져 은은하게 자신의 멋을 뿜어냈다. 거기에 낡은 건물의 허름한 외벽에 그려진 정체불명의 표시들(그라피티)은 이 모든 일상적인 풍경을 충분히 신비롭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이탈리아를 여행하던 때에 나는 그래픽 디자인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온갖 벽화와 간판 사진을 긁어모았는데, 특히 간판은 개성 넘치는 타이포그래피로 비슷한 모양이 하나도 없었다. 피렌체에서는 '간판 동네'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예쁜 간판을 많이 발견했다.

제일 인상적인 간판을 꼽으라면 단연 Mineral Shop과 Stilnovo다. 미네랄 샵은 간판만 봐도 귀금속을 판매하는 곳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한쪽에는 광물과 둥근 조개 모양을, 한쪽엔 심플하게 가게 이름을 써 놓았다. 출력물이나 LED가 아닌 그림으로 된 간판이었기에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스틸노보는 넥타이 매는 법을 간판으로 표현했다. 누가 봐도 넥타이 혹은 그와 관련된 것을 판매하는 곳이라고 짐작할 수 있을 거다. 가게 이름을 작게, 아이덴티티를 드러내는 인포그래픽을 크게 배치한 것은 주인의 입장에서 실험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내 눈길을 끄는 데엔 성공했다.


이탈리아에서는 반드시 (벽을 보며) 걸을 것


피렌체에서 딱 한번, 동행을 구해 돌아다닌 적 있다. 네 명 중 내가 피렌체에 가장 오래 머물렀었는데, 일행이 나에게 피렌체의 볼거리에 대해 물었었다. 나는 그들에게 피렌체에 오면 벽을 잘 보며 다니라고 권해주었다. 이렇게만 들으면 이해될 리 없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다.

아직도 이탈리아 여행객들이 내게 뭘 봐야 하는지를 묻는다면 단연코 벽을 보며 걸어보라고 말하고 싶다. 그만큼 이탈리아의 벽은 매력적이다. 온갖 너저분한 벽보, 한자와 아랍어가 공존하는 그라피티가 건물과 꽤나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피렌체를 걷다 보면 Look이라는 글자가 많이 보인다.(어떤 비밀집단의 암호일까? 하하) 게다가 영화나 명화를 수중 버전으로 패러디한 벽보가 온 동네에 붙어있다. 그것이 누구에 의해 붙여졌는지는 모른다. 이 포스터들은 꽤나 사랑스러워서, 걷다 지친 여행객들을 잠깐이나마 미소 짓게 만든다.


장소가 하는 역할은 어느 도시를 가나 같다. 사람들에게 먹을 것, 일자리, 여가생활 등을 제공한다. 길의 역할도 다를 것 없다. 서울의 길과 이탈리아의 길도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을 것이다. 길은 한 도시가 오랫동안 켜켜이 쌓아 올린 생활의 터전으로, 유구한 역사가 여기저기에 켜켜이 쌓여있다. 그것을 발견하고 차이를 느끼는 방법은 오로지 걷는 것뿐이다. 익숙한 세계를 느리게 탐험하면 그 속의 작은 세계를 발견하게 된다. 여기서부터 진정한 발견이 시작되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왜 벽을 보며 걷지 못했을까? 그것들이 눈에 띄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들이 눈에 띄지 않는 이유는 너무 익숙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우리가 걷는 목적이 '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건물에서 나와 어딘가로 향하고, 그러는 동안 핸드폰을 보거나 혼자만의 생각에 잠긴다. 그를 둘러싼 온갖 풍경은 핸드폰 화면과 생각의 저편으로 숨어버린다. 우리는 늘 목적을 가지고 움직이기 때문에 목적을 제외한 나머지를 보지 못한다. 나를 도와줄 어떤 목적도 없이 헤매는 것, 그때부터 우리는 우리의 시각으로 세상을 본다.

일단 길거리로 쏟아져 나와 어디로든 방황하며 걸어보라. 핸드폰은 금지다. 방향을 정해놓을 필요도 없다. 그저 발이 닿는 대로 걸어볼 것을 권한다. 남들에게 사소하고 유치 찬란한 발견들이 당신의 세상에서는 보물이 될 수도 있다. 피렌체에는 재미난 쇼윈도와 문구점이 많다고 했을 때 일행은 의아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우리의 관심사가 다르니 그럴 수 있다. 어쨌든, 이 글을 읽는 이들에게 퇴근 후든 오랜만에 맞는 휴일이든 일단 거리로 나와 걸어볼 것을 권한다. 목적지는 없다. 여행지도 아닌 당신의 도시에서 길을 잃어도 미아가 되진 않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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