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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piphany Jul 16. 2023

키치 Kitsch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Kitsch 키치. 들어본 적은 있지만 정확한 개념을 알지는 못했었던 것 같다. 그럴 수 있었던 건 아마 일상에서 ‘키치’라는 단어를 사용할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인데, 그저 느낌적인 느낌으로 키치란 ‘진짜인 것을 모방해 만든 이미지나 설명, 개념이 가질 수밖에 없는 한계, 즉 원본(Originality)을 흉내 낼 수 없는 가짜의 조악함을 풍자하는 것’ 정도라고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돌이켜보니 이러한 부정확하고 모호한 이해때문에 그동안 ‘키치’라고 말해야 할 것을 ‘짝퉁’이나 ‘B급’ 아니면 좀 더 나아가 케케묵은 뻔한 것이라는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클리쉐’ 등의 단어들로 대신해 쓰곤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밀란 쿤데라는 아래와 같이 말한다.

그것이 종교적 믿음이건 정치적 믿음이건 간에 모든 유럽인들의 믿음 이면에는 창세기의 첫 번째 장이 존재하며, 이 세계는 마땅히 그래야만 한다는 모양으로 창조되었고, 존재는 선한 것이며 따라서 아이를 가지는 것이 좋은 것이라는 생각이 거기에서 유래했다.
이러한 근본적 믿음을 존재에 대한 확고부동한 동의라고 부르도록 한다.

똥과의 불화는 형이상학적인 것이다. 똥을 누는 행위는 창조의 받아들이기 어려운 성질을 일상적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우리는 둘 중 하나를 택해야만 한다. 똥은 수락할 만한 것이라거나 (그렇다면 화장실은 문을 잠그고 들어앉지 말아야 한다) 또는 우리가 창조된 방식은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라는 것 중에서.
그러므로 존재에 대한 확고부동한 동의가 미학적 이상으로 삼는 세계는, 똥이 부정되고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각자가 처신하는 세계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이러한 미학적 이상은 <키치>라고 불린다. 말하자면 키치란 본질적으로 똥에 대한 절대적 부정이다. 문자적 의미나 상징적 의미에서 그렇다.
<키치는 자신의 시야에서 인간 존재가 지닌 것 중 본질적으로 수락할 수 없는 모든 것을 배제한다.>


즉, 키치는 인간이라면 본질적으로 그러할 수 없는 것을 상상의 나래 속에서 마치 그러할 것이라고 믿는 행위라고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드라마를 즐겨보지 않는 편인데, 이유를 생각해 보면 드라마야말로 키치 왕국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할 수 없는 것을 그러하다고 가정하는 것, 가장 중요하고 있을 법한 일을 생략해 버리는 경우 몰입감이 확 떨어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드라마를 시작하고 끝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요즘 TV, 유튜브, SNS에 자주 나오는 경제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의 성공담을 읊어대는 것, 행복해야 한다는 압박을 몸소 실천하는 사람들의 포스팅들이 이제는 조금 지겨워지기 시작한 것도 이와 관련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키치가 유발한 느낌은 가장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어야만 한다. 키치는 인간들의 기억 속에 깊이 뿌리내린 핵심 이미지에 호소한다. 배은망덕한 딸, 버림받은 아버지, 잔디밭 위를 뛰어가는 어린아이, 배신당한 조국, 첫사랑의 추억.

키치는 백발백중 감동의 눈물 두 방울을 흐르게 한다. 첫 번째 눈물은 이렇게 말한다. 잔디밭을 뛰어가는 어린아이, 저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두 번째 눈물은 이렇게 말한다. 잔디밭을 뛰어가는 어린아이를 보고 모든 인류와 더불어 감동하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키치가 키치다워지는 것은 오로지 이 두 번째 눈물에 의해서다. 모든 인간 사이의 유대감은 오로지 이 키치 위에 근거할 수밖에 없다.


페미니즘, 학벌주의 타파, 종교적 당위성, 좌/우 정치노선을 이야기할 때 그들이 항상 가지고 나오는 표어, 이미지, 감정에 호소하는 이야기들에 더 이상 마음이 움직이지 않은 나를 발견하고 나이가 들어 감수성이 떨어진 것이 아닐까 자책 같은 걸 한 적이 있다. 예전에는 그런 것을 접하면 어떤 방향으로는 불끈 힘이 생겼는데, 지금은 그들의 주장보다는 어떻게 하면 자신의 삶보다 신념이 우위에 있을 수 있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생기는 편이다. ‘그들은 정말 신념을 위해 싸우는 것일까 아니면 신념을 위해 싸우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싶어서 움직이는 것일까.’


좌익을 좌익답게 하는 것은 대장정의 키치라고 나는 이미 말했다. 키치의 정체는 정치 전략이 아니라 이미지, 은유, 용어로 결정된다. 따라서 관습을 깨고 공산주의 국가의 이익에 반하는 행진을 하는 것도 가능하다. 체면을 잃고 싶지 않은 사람은 자기 자신의 키치가 지닌 순수성에 충실해야만 한다.


여러 사조가 공존하고 그들의 영향력이 서로를 제한하고 무화하는 사회에서는 키치의 독재로부터 어느 정도 빠져나올 수 있다. 개인은 자신의 독창성을 보고할 수 있으며, 예술가는 예기치 않은 작품을 창조할 수 있다. 그러나 정치 흐름 하나가 모든 권력을 쥐는 곳에서 사람들은 대번에 전체주의의 키치 왕국에 빠지게 된다. 이곳에서는 키치를 훼손하는 모든 것은 삶으로부터 추방당하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소위 강제 수용소는 전체주의적인 키치가 자신의 오물을 버리는 정화조라고 할 수 있다.

전체주의적인 키치 왕국에서는 대답은 미리 주어져 있으며, 모든 새로운 질문은 배제된다. 따라서 전체주의 키치의 진정한 적대자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인 셈이다.
그러나 소위 전체주의 체제에 대항하는 사람은 질문과 의심을 가지고 투쟁할 수 없다.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이해되어야만 하고 집단적인 눈물샘을 자극해야만 하는 확신과 단순화된 진리가 그들에게도 필요한 것이다.


밀란 쿤데라가 말하듯 어쨌든 우리 모두는 영원히 키치에서 벗어날 수 없으니까.

키치는 거짓말로 인식되는 순간, 비-키치의 맥락에 자리 잡는다. 권위를 상실한 키치는 모든 인간의 약점처럼 감동적인 것이 된다.
왜냐하면 우리 중 그 누구도 초인이 아니며 키치로부터 완전하게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무리 경멸해도 키치는 인간 조건의 한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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