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분노는 거룩한 분노이다.
오늘 복음서 이야기가 요한복음서 2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성전 정화사건이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하셨는데, 내가 생각해도 예수님께서 성전을 들어 엎으신 사건은 장기용 요한 신부님의 말씀처럼 “거룩한 분노”이고, 김규항 작가가 《예수전》(돌베개)에서 하신 말씀을 인용하면 구조악은 사람들이 분노를 보일 때 허물어짐을 말하고 있다. 미국 장로교 성직자인 고 유진 피터슨 목사는 《메시지》에서 예수의 성전 정화사건에 대한 기억을 아래와 같이 서술한다. 여기서 기억은 성 아우구스티누스 주교가 《고백록》(CH북스)에서 한 말씀을 인용하면, 심상(心想)들이 만들어내는 시각, 운동, 청각 그림(Image)들을 일컫는다. 성 요한은 자신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예수의 성전정화사건을 보면서, 마음속으로 만들어낸 시각, 운동, 청각 그림들이라는 심상들을 글로 서술하고, 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쓰고 있는 것인데, 그가 글로써 쓴 심상은 다음과 같다.
유대인들이 매년 봄에 지키는 유월절이 막 시작될 무렵,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 예수께서 성전이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것을 보셨다. 예수께서 비둘기 상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기에서 너희 물건을 치워라! 내 아버지 집을 쇼핑몰로 만드는 것은 그만 두어라.”그 순간 제자들은 “당신의 집을 향한 열심(熱心)이 나를 삼킵니다.”라고 한 성경말씀을 기억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불쾌한 마음에 이렇게 물었다. “당신이 하는 이 일이 옳다고 입증해줄 신임장을 제시할 수 있겠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짓겠다.” 그들은 분개하며 말했다. “이 성전을 짓는데 사십 육년이 걸렸는데, 당신이 사흘 만에 짓겠다는 거요?” 그러나 예수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자신의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나중에 예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뒤에야 제자들은 그분이 그렇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해냈다. 그때서야 제자들은 비로소 올바른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모두 믿게 된 것이다.(요한복음서 2장 13절에서 22절, 유진 피터슨, 《메시지》,복 있는 사람, 253-254쪽, 2019년.)
예수께서 고난을 앞두시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는데, 에돔 민족인 헤로데가 민족이 다른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지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장사꾼들이 희생제의에 쓰는 가축들과 유대인들이 하느님께 드릴 돈을 바꾸는 환전상들이 있었다. 그들을 보고 예수께서 몹시 분노하셔서 성전에서 장사꾼들을 몰아내서 성전을 거룩하게 하시는 열심을 보이셨다.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의 거룩한 분노를 보고, 다윗이 성전에서 하느님께 드린 찬양인 “당신 집을 향한 내 열정이 나를 불사릅니다.”(시편 69:9)라는 문장을 생각하였다. 사울의 핍박을 받는 중에도 하느님께 대한 찬양을 드린 다윗처럼 경건한 유대인인 예수께서는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는 거룩한 집에서 장사꾼들이 장사를 하여, 유진 피터슨이 “쇼핑몰”이라고, 공동번역성서에서는 “비둘기 장수들에게 "이것들을 거두어 가라. 다시는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요한복음서 2장 16절)라고 꾸짖으셨다.”라고 풀어 옮김과 옮김을 함에서 알 수 있듯이, 종교를 소비자의 필요에 맞추어 사고파는 상품으로 만드는 행동을 보고 분노하신 마음을 보이셨다.
필자가 보기에도 예루살렘 성전은 유대인들의 경건한 믿음을 이용하여 사익을 취하려는 소인배들의 소굴로 타락하였다. 본래 희생제사는 유목민이었던 유대인들이 하느님께 자신의 가장 소중한 재산인 가축을 희생 제물로 드리는 경건한 믿음의 표현이며, 유대인들이 성전세(0.5세겔)를 드리는 헌금 또는 봉헌도 당연히 하느님께 내가 소유함을 하느님께 드려서 그분에 대한 믿음을 표현하는 전례이다.
한국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그러하겠지만, 그리스도 교인들이 전례 때 하는 봉헌은 내가 소유함을 하느님께 드린다는, 내 소유가 아닌 하느님의 소유라는 믿음의 표현이다. 당연히 필자도 성찬례를 드리기 전에 그러한 마음을 담아 주정헌금, 월정헌금, 성 미가엘 사회복지관 후원금을 드리며, 우리 성공회(聖公會)내동교회 헬레나 교우님도 지적장애인 시설인 성 보나의 집(casa sancta bonae, 거룩한 좋은 집)에 그분의 소유였던 충청북도 보은군의 땅을 길을 닦기 위해 교회에 드리셨다. 교우들이 돌아가면서 하는 꽃과 애찬봉헌도 같은 의미를 가진다. 유대인들도 같은 마음을 가지고 전례에 참여하셨을 것임은 분명하다.
그런데 문제는 가축들을 먼 외국에서 가져올 수 없고, 이스라엘 은화로써 성전세를 드려야 하니, 가축 상인들은 가축을 파는 장사를, 유진 피터슨이 고리대금업자라고 풀어 옮김을 한 환전상들은 돈을 바꾸어 수수료를 취하는 장사를 하고 있었다. 유대인들의 거룩한 믿음을 이용하여 이익을 취하는 소인배들이 성부께서 계신 집에서 있다는 것은 성전이 성부이신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는 거룩한 집이 아닌, 소인배들이 사사롭게 이익을 취하는 가게로 변질한, 거룩해야 할 종교가 개인의 돈벌이 수단으로 의미가 변질하여 타락한 모습이었기 때문에, 예수께서 경건한 유대인으로서 분노한 것이었다.
당연히 성전에서 전례를 집전하는 대사제들과 사제들의 용인이 없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므로, 구조적인 악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부정의함을 비판하고 분노하는 거룩한 분노는 교회사에서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면벌부를 가톨릭 사제인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가 풍자소설인 《우신예찬》(열린책들)에서, 마찬가지로 가톨릭 사제인 마르틴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에서 “값싼 은혜”(디트리히 본회퍼, 《나를 따르라》, 김순현 옮김, 복 있는 사람), “평생에 걸쳐 회개하라고 하신, 우리들의 주님, 선생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어긋난다.”, “거짓 평화”라고 비판하여, 개신교 종교개혁이라는 변혁의 물결이 일도록 한 비판정신으로 이어진다. 한국사에서는 3.1혁명, 광주학생운동, 4.19혁명, 광주민주화운동, 6월 민주항쟁, 전남 신안군 암태면 소작인 투쟁 등의 저항정신이며, 《맹자》를 인용하면 인간의 선한 본성이자 사람됨인 수오지심 곧 악을 미워하는 마음이기도 하다.
또한 예수의 선언은 새로운 공동체를 선언함이기도 하다. 유대인들이 당신이 무슨 권리로 이러냐고 따지자(이어 오는 문장인 “기적을 보이시오.”라고 말함에는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기보다는 성 아우구스티누스 주교가 《고백록》에서 한 통찰처럼 종교인들이 기적을 보이라고 말함으로써 종교를 거룩한 분을 만나고, 믿고, 거룩한 분의 가르침을 따름이 아닌, 호기심을 보이기만 할 뿐인 마음이 담겨 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성 요한은 성전을 예수의 성체를 은유한다고 말한다. 문제는 유대인들이 문학 공부를 하지 않았는지, 은유임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헤로데 대왕이 46년에 걸쳐 지은 성전을 다시 어떻게 사흘 만에 짓느냐고 되묻는다. 하지만 성 요한은 예수께서 죽임당함과 부활로써 그분의 새로운 공동체를 이루실 것임을, 이미 거룩한 집이 아닌 종교상품인 예루살렘 성전은 무너질 것이지만, 그분의 죽임 당함과 사흘만의 부활로써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이루실 것임을 말씀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계파간의 갈등을 겪는 고린토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여러분은 자신이 하느님의 성전이며 하느님의 성령께서 자기 안에 살아 계시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17 만일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을 멸망시키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성전은 거룩하며 여러분 자신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편지 3장 16-17절)라고 말한다.
2024년 3월 3일 사순 3주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