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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라피아 Oct 23. 2021

필사의 깊이

손끝으로 전해지는 글의 온도

글 쓰는 일을 마냥 즐거워하는 사람을 본 적은 없다. 나 역시 무언가를 쓸 때마다 고통스럽다. 단어 뒤에 올 단어, 문장 뒤에 이어질 문장, 문단의 전후 관계 등을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거린다. 장르가 무엇이든 힘들이지 않고, 글을 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컨디션이 좋은 날에는 글이 잘 써지지만, 그렇지 않은 날에는 더 힘들다. 그런 불편함을 극복하고 더 잘 쓰고 싶은 사람은 분명 존재하다. 내가 그렇다. 그런 감정에 휩싸일 때, 누군가의 글을 따라 써본다.


필사를 처음 시작한 것은 오 년 전이다. 대본 쓰는 작업을 하면서 종종 난관에 부딪혔다. 한 줄 한 줄 쓰는 일은 고통이었다. 그럴 때 운동장에 가서 땀을 흠뻑 날 정도로 달리기를 하면 글이 다시 잘 써지기도 했고, 소용없는 날도 있었다. 내 얘기를 들은 친구는 ‘필사’를 권했다. 좋아하는 작가들의 대본들을 그대로 따라 써보라는 것이었다. 처음엔 반신반의했다. 쓸모없는 일처럼 느껴졌다. 글이 써지지 않고 비가 내리던 어느 날, 달리기 대신 집에서 노트북으로 필사를 했다. 손을 움직이는 일도 일종의 체력 소모의 행위이며, 피곤함도 있었다. 하지만 두 회 분량의 대본을 필사하면서 즐거움을 느꼈다. 대본을 읽을 때 완벽하게 이해했다고 생각했는데, 필사를 하며 다른 부분을 발견했다. 잘못 이해했거나 놓친 부분이 보였다.


‘주인공 행동 이면에 이런 생각이 있었을 수도 있겠구나.’

‘이 상황은 다시 보니 작위적이야.’      


영상을 보고 대본을 읽는 것보다 필사를 하면서 작품 속으로 더 깊이 빠져들 수 있었다. ‘필사’가 다른 형태의 독서법 혹은 감상법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종종 필사를 했다. 그 행위를 하면 작품을 좀 더 깊이 이해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드라마 작가라는 꿈을 위한 연습의 과정이기도 했던 필사는 지속하지 못했다. 현실의 벽에 부딪혀 꿈을 접게 됐기 때문이다. 새로운 직업을 갖게 됐다. 자연스레 필사를 할 필요성이 없어졌다.     


대전 동구 송촌남로 11번길 116,  백석 <사슴> 초판본



드라마 작가의 꿈이 끝나고, 한동안 필사 없는 삶을 살았다. 서류를 정리하는 일이 중요했다. 책도 잘 읽지 않았다. 집에 있을 때 책상보다는 소파에 누워 과자를 먹으며 리모컨을 돌리는 게 일상이었다. 텔레비전에서 집안 정리를 콘셉트로 하는 프로그램이 방영되는 것을 보고, 청소를 하고 싶어졌다. 내 방을 먼저 정리하기 했다. 방 안에 필요 없는 물건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다 책이 시야에 들어왔다. 보지 않는 책들이 상당히 많다는 것을 알았다. 과거에 늘 읽던 작법서, 미술 이론서, 소설책도 거추장스럽게 느껴졌다. 한 권 완독 하는데, 두 시간이 넘게 걸리는 책들이다. 그 정도의 시간을 내면서 두꺼운 책을 읽을 열정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책꽂이에서 책을 모두 꺼내 버릴 책들을 분류했다. 인터넷 서점에 팔아버릴 생각이었다. 지난 몇 년간 한 번도 들춘 적 없는 책들만을 골라냈다. 그것들을 분류하다 멈칫했다. 


손끝에서 갈등을 야기시키는 두 권의 책이 있었다. 영국 작가 조지 기싱의 수필집 ‘기싱의 고백’과 박완서 작가의 산문집 ‘나의 만년필’이었다. 모두 내가 특별하게 여기던 책이었다. ‘기싱의 고백’을 접한 것은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이다. 집에 온 신문을 들춰보다 서평란에 소개된 것을 읽게 됐다. 기사를 읽으며 흥미를 느꼈다. ㅌ책의 주인공 ‘헨리 라이크로프트’라는 가상의 인물은 작가 자신이었다. 주인공의 직업은 영국의 가난한 작가였다. 노년기에 접어들며 사계를 관찰하면서 느끼는 자연에 대한 감상과 지나온 삶에 대한 성찰을 담담한 어투로 기록한 수필집이었다. 당시 내게 죽음은 멀고 먼 얘기였다. 하지만 그 책을 읽으며 내 생의 마지막 순간을 상상해 볼 수 있었다. 새로운 느낌이었다. 스산하고 적막한 겨울 날씨 덕분에 책 내용에 더 깊이 빠져들었던 기억이다.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매년 그 책을 한 번씩 습관처럼 읽었다. 일상에 쫓기며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성찰 따위를 하지 않고 살다가 그 책을 읽으면 내가 조금은 근사 해지는 것만 같았다. 회사에서 내가 좋아했던 선배가 내게 ‘가장 감명 깊은 책’이 무엇인지를 물어봤을 때,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The Private Papers of Henry Ryecroft> 1903 


"기싱의 고백이요."


박완서 작가의 ‘나의 만년필’과의 만남은 매우 우연적이었다. 서른 초반, 만년필을 처음 사용했다. 종이 위에서 내는 만년필 특유의 사각거리는 촉감이 신비로웠다. 볼펜이나 샤프처럼 쉽게 써지지 않는 불편함도 매력적이었다. 병 잉크를 쓰기 시작하면서 만년필에 대한 공부가 필요할 것 같았다. 관련된 전문서를 찾으려고 도서관에서 ‘만년필’을 검색했는데, ‘나의 만년필’이라는 제목이 상단에 떴다. 박완서 작가의 소설은 읽었지만, 그의 산문집을 읽은 적은 없었다. 그렇게 ‘나의 만년필’을 처음 접했다. 산문집의 매력은 짧은 글들의 모음이라 시간이 날 때마다 조금씩 다시 읽을 수 있어서 좋았다.     


‘이 순간 이런 생각을 했구나. 이런 일도 있었어.’     





산문집에서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았다. 글을 쓰며 겪는 불편함, 여성 차별적인 시각, 역할 갈등 같은 것들이다. 내가 아니더라도 어머니와 나의 자매 중에서 누군가 겪었을 일이기도 했다. 그 두 권의 책만큼은 처분할 수 없었다. 물론 그 책들을 들추지 않은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한동안 책을 읽는 게 불편했다. 그 책들을 책상 위로 가져왔다. 아끼던 그 책들을 한동안 외면하고 지냈던 시간이 미안해졌다. 그것들을 위해 무슨 행위라고 하고 싶었다. 아껴두었던 ‘클레르퐁덴’이라는 브랜드의 노트와 만년필을 꺼냈다. 산문집 ‘나의 만년필’의 내용을 따라 쓰기 시작했다. 볼펜이 아니라 만년필로 쓴 것은 책 제목의 영향이었다.

      

만년필로 장문의 글을 따라 쓰는 작업은 스릴과 쾌감이 있었다. 필사의 행위가 글자 그대로를 표현해야 하는 일인 만큼 글씨를 틀리지 않고 싶었다. 정확히 쓰면서도 잉크가 번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압박감도 동시에 작용했다. 퇴근 후, 텔레비전 앞에서 줄곧 시간을 보내다가 책상에 앉아 펜을 쥐니 기분이 새로웠다. 이 책상 위에서 많은 일을 생각하고, 많은 것들을 썼다. 필사를 마치고 나니 책을 버리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그날 이후로 내 만년필은 필사 도구가 됐다. 평소 다이어리를 쓰는 일에만 애용됐던 만년필의 존재 가치가 생겨났다. 존경하는 위대한 작가의 문장들을 온몸으로 흡수하는 개체로 거듭났다. 만년필에 잉크를 충전하는 횟수가 늘어났다. 필사를 하며 만년필에 대한 관점도 바뀌었다. 과거에는 비싸고, 고급스러운 만년필에 매혹됐었다. 하지만 필사를 하면서 타인에게 보이는 것보다 내 손에 쥐어졌을 때의 필기감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박완서 작가가 ‘파카45’라는 만년필만 줄곧 썼던 것처럼 실사용 필기에 편한 만년필이 존재했다. 내게 ‘트위스비’라는 대만 브랜드의 중저가 만년필이 그런 존재였다. 내가 선호하는 디자인과 거리가 있었지만, 사용하며 그 가치를 알게 됐다.


서울, 한강 


다른 사람이 쓴 글을 따라서 쓰는 ‘필사’의 행위지만, 노트북으로 쓰는 것과 손으로 쓰는 것은 엄연히 달랐다. 자판을 두드릴 때의 느낌은 정보를 기록, 저장한다는 느낌이 강하다. 반면 손으로 쓸 때는 ‘진짜 뭔가를 쓰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비록 남의 글이지만 내 손에서 제2의 형태로 만들어지는 것 같은 창작의 감정도 든다. 그게 뿌듯함을 줬다. 나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그런 특별한 느낌을 추구하는 사람도 늘어나고 있다. 서점에도 다양한 형태의 ‘손글씨’, ‘필사’ 책이 출시된 것을 보았다. 글씨는 쓴다는 게 하나의 트렌드가 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필사를 하며 글씨체에 크게 신경 쓰지 않게 됐다. 글씨 크기가 일정하지 않거나, 삐툴 거리는 것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기게 됐다. 마음이 복잡한 날에는 완연히 글씨 모양으로 드러났다. 틀린 글자는 밑줄을 긋고, 줄 아래쪽에 맞는 글자를 쓴다. 틀리지 않으려고 아등바등하는 하는 것도 별로였다. 자유로움 속에서 필사하면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어쩌면 필사는 세상에서 제일 생산적이지 않은 행위일지 모른다. 내가 처음 필사를 접했을 때도 그런 감정이었다. 누군가의 말을 똑같이 적는 것보다 그 시간에 하나라도 새로운 것을 창작하는 게 경제적인 일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타인의 문장을 쓰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필사는 읽는 것만으로 알 수 없는 누군가의 삶과 시간을 완벽히 이해하는 일이었다. 글이 쓰기 싫어진 순간, 책이 읽는 일이 지겨워진 순간에 필사로 그 불편한 감정을 극복할 수 있었다. 필사의 행위는 내 창작 욕구가 살아나는 데 도움을 줬고, 잠잠했던 독서의 욕망도 일깨워줬다. 손으로 쓰는 과정은 머리와 육체를 동시에 움직이게 한다. 새로운 발상이 떠오르지 않아 답답함에 시작한 필사가 나의 창의력을 자극했을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어떤 글을 직접 따라서 쓰다 보면 읽을 때 알 수 없던 것들이 보인다. 여행지의 사진을 보는 것과 직접 그곳에 가보는 것이 다른 것처럼 말이다.




<종이 일기>


잘 써지지 않는 날들이 있습니다. 머리를 쥐어짜고, 밖에서 달리기를 해봐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럴 날에는 어차피 잘 쓸 수가 없습니다. 내 글을 쓸 수 없는 시간은 존재하는 법입니다. 그럴 때도 있는 법입니다. 그 순간에 자책하기보다 잘 쓴 타인의 글을 그대로 따라 써보았습니다. 노트북으로 써도 되지만, 직접 손으로 써보면 더 좋은 것 같습니다. 컴퓨터로 자판을 두드리는 일반적인 우리의 일상의 일과 좀 다른 행위니 까요. 


영국 작가 조지 기싱의 ‘기싱의 고백’과 소설가 박완서의 ‘나의 만년필’은 저의 소중한 필사 대상이었습니다. 그저 독서를 할 때 보이지 않던 것들이 필사를 하면서 새롭게 볼 수 있었습니다. 작가와 더 큰 교감을 할 수 있었고, 글 속의 주인공들에게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글을 쓰지 않는 사람에게도 필사는 좋은 경험이 될 것입니다. 도무지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는 순간에 자신이 선망하는 누군가의 글을 필사해 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자연스럽게 그 사람의 좋은 에너지와 재능이 당신에게 전이될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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