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은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현실로 느껴지지 않네요.


저는 요새 애도와 트라우마에 관한 영화대본을 적어보려고 시도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떠나시던 날 그 이후부터

제가 알 수 없는 어떤 힘이 이미 나를 이 운명과도 같은 시간 속으로 끌어당겼는지도 모르죠. 당신이 떠나고 나서도 누군가가 세상을 떠나는 몇 번의 이별을 맞이했습니다.

나와 친했던, 혹은 스쳐 지나갔지만 나의 세계에 존재했던 그들이 떠나가면서 나에게 남긴 것은 상실과 애도가 가진 슬픔이었겠지요. 저는 요새 대학원 철학 수업을 듣고 있습니다. 제가 왜 이러한 수업을 공부해야 할까 생각을 해보니, 인간에 대하여 고민하고 근원적으로 들여다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무언가를 느끼려면 정성을 들여야 되고 그 정성 속에서 귀한 인식이 발생합니다. 제 부족한 식견에서 인간의 떠남을 단편적으로 바라보고, 상실이 가진 슬픔을 보편적으로 적어나가기 싫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약 나에게 적을 수 있는 용기가 주어진다면, 미천한 마음이지만 할 수 있는 한 가장 숭고하고 집요한 태도로 관찰해야 한다. 온전이 그려내야 한다는 사명감, 아니 신념이 내 안에 뿌리 깊게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느낍니다. 그게 훗날 당신을 하늘에서 만났을 때 부끄럽지 않은 태도이지 않을까, 지레짐작을 해봅니다. 사실 이 대본을 적겠다 마음먹고, 몇 달 동안 아직 한 줄의 글귀도 명확히 적어 내려가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왜 다른 대본을 적었을 때와는 다르게 써지지 않는 것인가? 곰곰이 고민해 보니, 저는 겁을 내고 있었습니다. 이 대본이 훗날 영화가 된다면 어떤 식으로 예술적 목적을 가질 수 있을까? 나의 이 행위가 단순히 표현하고자 하는 한 인간의 치졸한 욕심에 그치지는 않을까? 그런 남루함이 끝이라면 정말 이제는, 다른 일을 찾아보는 게 나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땅히 돈을 벌 수 있는 일은 없겠지만요. 저는 정말 돈에 미쳐서, 단 한시도 인생을 허비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내 안에서는 역동적인 힘이 느껴졌습니다. 나 자신이 사랑했던 한 인간을 온전히 그려낼 수 있는 아름다운 재현의 영역으로 넘어갈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 아름답다는 것은 무엇일까? 아름다움에는 추악함이 있다고 하던데, 그것은 그럼 단순히 아름답다고만 할 수 있을까? 한 인간이 가진 애도와 상실은 어디서 어떤 무의식에서 시작되어 파도와 같이 밀려올까? 우리는 이 상실과 애도의 시대를 견뎌낼 수 있을까? 또다시 용기를 갖고 살아갈 수 있을까? 그 이별 앞에서 아무렇지 않은 척 살아갈 수 있을까? 죽음은 삶을 엄숙하게 만든다고 한강작가님이 그러셨는데, 그 죽음은 내가 볼 수 없는 어두운 곳에서 나를 부르는 이 감정은 또 무엇인가?

도대체 인간은 무엇이고,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미치지 않을 수 있을까? 이 냉정한 세상에서 반복이 주는 이 두려움 속에서, 더욱 어두워지는 어둠 앞에서 빛을 쫓을 수 있을까? 나는 어두운 곳에 희망이 있냐고 묻는다. 매번, 수십 년째, 그러나 어떤 희망은 어두움을 마주했을 때 더욱 빛이 난다고 믿는다, 마치 등불처럼. 그렇다면 이제 나는 영화 학도로서 이창동 감독님의 말씀을 되새겨본다

“자신의 결핍을 인정하면 새 생명이 시작된다. “

사는 동안 나는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하고 그리워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죽던, 타자가 죽던- 그 죽음을 경험할 것이다. 만약 타자가 먼저 죽는다면 그 상실을 견뎌내고,

상실이 가져다준 삶의 숭고함을 온몸으로 경험할 것이다.

그리고 나 또한 재가 되어,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열렬히 사라질 테야. 그 사라짐이 허무의 일부라도

눈에 보이지 않겠지만, 나는 재야. 아니 바람이야.

바람은 느끼는 것이지. 바람은 자유롭지. 어디든 얽매이지

않고 갈 수 있으니까. 올해도 벚꽃이 피웠다.

문득 떨어지는 벚꽃의 꽃잎을 보고 있자니

여전히 눈 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아름다웠다,

어두웠지만 세상은 여전히 아름답다.

아름다움은 어둠이 가득할 때

그쯔음 더 열렬히 빛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