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규현 Feb 20. 2023

미디어 시대에서 세련된 사람이란

국립현대미술관, 페터 바이벨, 페터 바이벨 : 인지 행위로서의 예술



전시정보


전시명ㅣ<페터 바이벨 : 인지 행위로서의 예술>

작가ㅣ페터 바이벨 (Peter Weibel)

전시기간ㅣ2023-02-03 ~ 2023-05-14

장소ㅣ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관람료ㅣ서울관통합권 4,000원




어릴 적에 팔뚝에 주사를 맞을 때면 나는 꼭 바늘이 살갖에 꽂히는 걸 똑똑히 지켜보아야 직성이 풀리곤 했다. 옆에서 엄마와 간호사분은 쳐다보면 더 무섭다 그렇게 당부를 해도 난 그 바늘을 쳐다보는걸 굴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위험할지 모를 그 광경을 눈에 보이도록 두어야 했었는지도 모르겠다. 낯설고도 서슬이 퍼런 것이 내 몸을 관통하는데 내가 감시 해야지 누가 하겠는가.


많이 달라지기야 했겠지만 사실 지금도 난 직접 눈으로 보고 나서야 안심하는 성향이 있음을 완전 부정하지는 못한다. 그렇게 다른 감각보다 오직 시각의 힘만을 압도적으로 신뢰 해온 모양이다.



각자 좀 더 믿고 있는 감각이 존재할테고, 때론 그 감각에 의존도 하겠지만 그러나 우리의 감각은 생각보다 훨씬 더 유기적이다. 우리의 뇌는 인지 감각들을 관할할 때 특정 '역할'에 얽매이지 않는다. 이를테면 시각을 담당하는 뇌의 세포가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각 관련 자극이 들어왔을 때 어떤 세포든 그걸 처리할 뿐이다. 단지 그걸 자주 처리한 세포가 시각 관할을 도맡고 있는 것이며, 그 세포 대신 다른 세포가 그 자리여도 금새 적응하여 역할 수행이 가능하다. 이러한 뇌의 성질을 '뇌 가소성'이라 부른다.


뇌 가소성을 알면 결코 우리가 하나의 감각에 고착될 필요없이, 우리의 신체를 좀 더 유연한 신체로 상정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떠오른다. 아닌게 아니라, 실제로 현대 사회를 사는 우리의 감각은 알게 모르게 꽤나 유연해져있다. 정보통신기술과 매체의 눈부신 발달을 통과하며 비로소 침대에 누워 지구 반대편 실황을 엿볼수도 있게된 우리는, 예전과는 비교도 어려울 정도로 많은 것들과 연관되어 그만큼의 자극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미디어 예술가이자 이론가이기도 한 페터 바이벨 (Peter Weibel)은 이를 인간 인지의 '인공적 확장'으로 칭했는데, 미디어가 모니터 화면을 통해 수많은 이미지와 정보들을 급격히 재생산하게 됨으로써 인간의 인지도 그에 적응하기 위해 훨씬 확장되었다는 것이다.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자극을 감당하기 위해 현대인의 인지는 인공적으로 확장되고 있는 중이며, 그만큼이나 우리의 뇌는 잠재력있고 신뢰할만하다지만, 문제는 우리의 태도이다. 우리의 생각은 그저 어릴 적 주사실에서 살을 찌르는 주사바늘을 집요하게 쳐다보는 아이에 머물러 있다.


페터 바이벨의 작품 중에는 ‘가능한(Possible)’이라는 단어가 스크린에 영사된 형태의 설치 작품이 있다. 관객이 이 영사기와 스크린 사이를 지나가도록 작품을 설계했는데, 한 자리에 멈춰서 수동적으로 감상할 때는 스크린에 ‘가능한’이라는 단어가 단순히 투사돼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움직이면서 관람하다보면 그림자가 지지 않고 줄곧 선명한 '가능한'이라는 단어의 형태 때문에 이 단어가 영사기에서 투사되는 것이 아닌 스크린에 직접 적혀 있는 것임을 깨닫는다. 투사된 기호이자 표상으로만 보였던 것이 사실은 실재하는 사물이었던 것이다. 작가는 어쩌면, 미디어 시대의 유력한 화두인 이미지와 실재 사이의 존재론적 차이에 대해 고민할 타이밍을 연신 놓치고 있는 우리 모습을 환기 하는지도 모른다.



현대 사회에서 미디어가 주는 새로운 인지의 파도, 그 기세에 맞지 않게 우리의 태도는 너무 가볍거나 수동적이다. 강렬하고 빈번하여 소모적이게 되어버린, 차고 넘치는 1차원적 자극에 무방비하다. 계속해서 끌려다니는 자세라면 우리 뇌의 능력은 가진 것에 비해 당연히 제한 될 수 밖에 없다.


이럴때 일수록 우린 무엇이든 읽어야한다. 피상적 정보 말고, 맥락을 수용함을 단련해야 한다. 본질과 심미성에 천착하고, 그것들을 끊임없이 엮어 본인만의 통찰을 직조하기 위해 시도해야 한다. 그래야 질낮은 자극이나 포르노그라피에 쉽게 현혹되지 않을 수 있으며, 우리 신체가 가진 유연성을 제대로 써먹을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결과적으로 개인의 삶 가운데 주어진 선택이든, 타인이 관여된 관계 속에서의 사사로운 선택이든 모종의 본질을 향하는 방법이며, 몸 부딪혀 경험하지 않고도 초연함을 얻도록 하는, 진정한 의미의 세련된 사람이 되기 위한 방법이다. 진정한 의미의 인지 확장의 방법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꼰대의 필요충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