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에게
오래전 너에게 빌려와서 읽고 돌려주지 않았던 책이 있어. 조경란 작가의 『풍선을 샀어』(문학과 지성사, 2008)라는 책이야. 기억나니? 이 책은 오랫동안 우리 집 거실 책장 한 칸에 꽂혀있었는데, 지난 일요일 문득 꺼내 읽었지.
나의 오래된 고질병. 책을 완독하고 나면, 돌려주기 싫어지는 병. 지인이나 친구에게 빌려 있은 책이 너무 좋을 때, 새 책을 사면 그만인데, 그게 싫은 거지. 새 책이 아니라, 내가 붙잡고, 숨결을 담아 페이지를 넘겼던 그 ‘읽은 책’을 갖고 싶거든. 책을 빌려서 읽고 안 돌려주는 버릇 탓에 책을 빌리는 경우도 드물지만, 내 책을 잘 빌려주지도 않아. 만약 어쩔 수 없이 빌려줘야 한다면, 조용히 각오를 하지. 저 책과 나는 영영 이별이겠구나. (생각보다 빌려간 책을 돌려주지 않는 사람들은 정말 많아. 나처럼)
내 어릴 적 친구 기옥이 집에는 소년소녀 문학 전집이 있었어. 나는 그 집에 거의 매일 놀라가서 그 책들을 꺼내 읽었지. 그 집 책장 위에는 기옥이네 오빠가 써 놓은, 무시 무시한 경고문이 붙어 있었어. “책은 빌려주지도, 빌려 달라고 하지도 맙시다.” 기옥이네 집과 우리 집은 담장을 마주하고 있어서 밥때가 되면 엄마는 부엌 창을 열고 나를 부르곤 했어. 조금만 더 읽으면 마저 읽을 수 있는데, 엄마는 꼭 그런 타이밍에 밥을 먹으라고 부르는 거야. 소공자가 지붕 위로 올라가 이웃집 여자 아이에게 말을 거는 순간이라던가, 몽유병에 걸려 밤을 헤매는 알프스 소녀 하이디가 어떻게 될까 봐 가슴 졸이며 책 장을 넘기는 순간 같은 때 말이야. 어린 가슴이 콩닥콩닥 뛰고 다음 페이지가 궁금해 죽을 지경인데, 밥 따위가 먹고 싶겠어? 엄마는 내 맘도 모르고 빨리 안 오냐고 성화를 하고, 기옥이네 엄마도 밥상을 들고 안방으로 들어가는 걸 보니 집에 안 갈 도리가 없는데, 읽던 책은 마저 읽고 싶어서 기주 오빠 눈치를 슬슬 보며 책을 빌려 달라고 할까 망설이곤 했지. 그러다가 책장 위의 그 무시무시한 손글씨 경고문에 주눅이 들어 아쉬운 마음을 안고 집으로 돌아가곤 했어. 어쩌면 그때 기주 오빠가 책을 빌려 주었다면 책에 대한 욕망이랄까 갈급함이 사라져서 나의 독서의 역사는 꽤 달라졌을지도 몰라.
너에게 빌려 읽고 돌려주지 않은 책이야기를 하려다가 엉뚱한 이야기로 흘렀다. 일요일에 문득 그 책을 책장에서 꺼내 읽었어. 그리고 책의 안쪽 표지에서 너의 단정한 글씨체를 발견했지. 2009년에 후배의 추천으로 구입했다고 쓰여있더라. 나는 어디에서건 너의 손 글씨를 금방 알아볼 수 있어. 왼쪽으로 10도쯤 기울어져 있고, 약간 흘려 쓸 때도 모든 자음들이 반듯한 느낌이 나는 글씨체. 서울 YMCA에서 받았던 누런 색 월급봉투(아, 정말 옛이야기 아니니?)를 옛 다이어리를 보관하던 상자에서 발견했는데, 그 봉투 뒤에 적힌 월급 명세서를 보고 나는 단박에 글씨를 쓴 주인공이 너란 걸 알아차렸지. 오랜 친구란 각자의 역사와 취향뿐 아니라 글씨체까지도 알아보는 관계인가 봐.
『풍선을 샀어』의 주인공은 서른아홉이고, 십 년 동안 독일에서 니체를 공부한 후에 이제 막 집에 돌아온 여성이야. 십 년 동안 치열하게 공부했는데 막상 집으로 돌아오니까, 배운 공부는 하등 쓸모없는 것처럼 치부되고, 마땅한 일자리도 없는 거지. 함께 철학을 공부했던 대학 선배는 학교에 자리 잡는 것을 포기하고, 소도시에서 지물포를 냈는데, 그녀는 그것이 자신의 미래가 될까 봐 겁을 먹어. 그러나 그나마도 그녀를 챙겨서 문화센터의 주 1회 할 수 있는 대중 강좌라도 연결시켜 주는 사람이 지물포 선배인 거야. 십 년 유학하는 동안, 부모님 집에 있던 자신의 방은 결혼한 오빠 가족들의 차지가 되었고, 이제 돌도 안 된 조카는 그녀를 처음 보자마자 “이건 뭐야?”라고 물어. 남들처럼 사는 게 싫었는데, 이제와 남들과 다른 것에 큰 불안을 느끼는 모순. 나 역시 그런 과정을 지나왔기 때문인지, 주인공의 마음 상태가 어떤 건지 이해하는 것이 전혀 어렵지 않았어.
예전에 분명 다 읽고, 좋아서 책을 돌려주지 않았던 것이 분명한데, 어쩌면 한 문장도 기억나는 것이 없더라. 완전히 처음 읽는 소설 같았어. 너는 거의 모든 페이지마다 연필로 밑줄을 그어 놓았어. 책에 밑줄이 그렇게 많았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했지. 밑줄 친 문장을 읽을 때마다 나는 2009년도의 너의 마음을 읽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 밑줄이 그어진 문장들은 대개가 외롭고, 불안하고, 걱정하는 마음에 관한 것들이었어. 조경란 작가가 독일에서 실제 니체를 공부한 적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니체적 관점에서 절망이나 상실을 재해석하는 문장들이 많았는데, 너는 그 문장들에 자를 대고 그은 듯 반듯하게 밑줄을 쳐놨더라.
그 문장들은 당시의 너에게, 아마도 나에게도 희망을 주는 메시지였던 것 같아. 우리가 그 책을 좋아했던 이유겠지. 만약 다시 새 책을 구해서 읽고, 문장을 긋게 된다고 해도 같은 곳에 밑줄을 치게 될까 궁금해. 밑줄이 이렇게 많이 그어진 책이라면 너에게도 분명 소중한 책이었을 건데, 선뜻 내게 빌려주었던 너의 너그러움이 고맙고, 그런 책을 빌려와서 오랫동안 돌려주지 않았다는 아주 뒤늦은 미안함 속에 반성문 같은 편지를 쓰는 가봐.
책 속 화자는 명품 백을 팔아서 샀던 앵무새를 조류 상에 내다 팔고 그 돈으로 풍선을 샀어. 그녀는 어떤 마음이 자신을 먹어 삼키려고 할 때마다 풍선을 꺼내 흡흡 하고 불어, 풍선과 함께 그 불분명한 마음을 하늘로 날려 보내려는 듯 말이야. 날아오를 듯이 부풀고, 달뜨고, 방향 없이 흔들리다 펑 터지기 일쑤였던 그 시절을 우리는 기억하지. 지금의 나는 풍선을 불기보다 날개 안쪽에 초록색 깃이 있고 붉은 머리털과 노란색 몸통으로 알록달록한 앵무새를 돌보는 사람이고 싶어.
과거의 네가 미래의 너에게 보내는 편지 같은 문장들이 가득한 이 책을 다시 너에게 돌려보낼게. 이 시절 너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 힘든 시간을 보내는 너를 위해 친구로서 무엇을 해야 할까. 너의 마음에 다시 평화가 깃들기를 간절히 기도할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