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작아지던 그 관계, ‘배려’는 왜 늘 숨이 막혔을까
어떤 관계는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그 구조가 보인다.
그 사람과의 관계도 그랬다.
오래도록 가깝게 지냈고, 말투는 늘 정중하고 다정했다.
하지만 나중에서야 알게 됐다.
그 다정함 아래에는 아주 정교한 '질서'가 있었다는 것을.
그 사람은 감정을 직접적으로 표현하거나 기대를 분명히 드러내기보다는,
주변을 조율하고 암묵적인 흐름 속에서 상대가 움직여주기를 바라는 쪽이었다.
그런 방식이 편해 보였고, 처음에는 배려라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그것은 일종의 통제에 가까웠다는 것을 느꼈다.
예를 들어,
그의 집에 초대되었을 때 주방은 철저히 손대지 말아야 할 공간이었다.
요리를 하겠다고 해도, 설거지를 도와주겠다고 해도 정중하게 막는다.
그 정도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고, 손님에 대한 배려라고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데, 내 아이가 밥을 먹다 음식물이 바닥에 흘렀을 때 내가 닦으려 하자, 그것조차도 하지 말라며 말렸다.
내가 계속 닦자 결국 짜증 섞인 말투로 제지 당했던 일도 있었다.
여행을 함께 갔을 때조차 마찬가지였다.
나는 늘 손님이 되어야 했고, 본인은 모든 걸 혼자 해냈다.
언뜻 보면 다 해주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상대를 미숙한 상태로 두고 스스로 중심에 서고자 하는 감정적 구조가 있었다.
그 공간에서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었다.
일상 속 대화에서도 그 기류는 드러났다.
내가 아이 침대 높이를 어른 침대 높이와 맞추겠다는 말을 꺼냈을 때,
그는 "애 끼고 사는 사람들 그런 거 하잖아~" 라는 식으로 반응했다.
그 말은 겉으로는 농담 같지만, 상대의 양육 방식을 깎아내리고 통제력을 확보하려는 무의식적인 비하의 언어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저 내 아이에게 더 안전한 잠자리를 만들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그 말은 나의 진심을 희화화하는 것처럼 들렸다.
가끔은 관계가 회복될 것 같은 순간도 있었다.
한 번씩은 너무 잘해주고, 마음을 다해주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순간에 내가 장단을 맞춰주지 않거나 같은 강도로 반응하지 않으면,
그 다정함은 곧바로 싸늘한 무시나 서운함으로 바뀌었다.
마치 내가 ‘나쁜 사람’이 된 것처럼.
감정의 흐름이 일방적이었고, 언제나 주도권은 그에게 있었다.
한 날 그의 집에 놀러오라고 말했지만, 그 당시 우리 아이는 장시간 차량 이동이 힘든 나이였고,
그의 집은 편도만 1시간 반이 넘는 거리였다.
그 상황을 조심스럽게 설명했지만, 그는 "넌 늘 바쁜 느낌이야"라고 반응했다.
나는 충분히 사정을 말했지만, 그는 그 설명을 수용하기보다는 오히려 내가 냉담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남기려는 듯했다.
그 후, 아이가 자라면서 장거리 이동이 조금 편해졌다는 얘기를 하자,
그는 "차에서 소리 질렀어? 귀엽다~"며 전혀 모르는 얘기처럼 반응했다.
이전의 사정과 설명은 아예 들리지 않았거나, 잊힌 느낌이었다.
이런 반응은 마치 내 상황이나 이야기는 진지하게 받아 들여지지 않고,
그저 표면 위에서만 소비되는 느낌을 남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마음이 불편하여, 먼 길을 운전해서 그의 집에 방문하였으나
나중에 돌아온 말은, "너 그 때 엄청 짧게 있다 가지 않았어?" 라는,
나의 정성과 진심을 작게 만들려는 시도 뿐이었다.
그 관계에서 결정적인 깨달음을 준 건,
최근 내가 이사 소식을 전했을 때였다.
오랜 시간 서로를 '가장 친한 친구'라고 말하던 사이였음에도,
그는 축하 한마디 없는 무미건조한 반응을 보였다.
그 반응은 단지 덤덤한 것이 아니라,
나의 변화와 성장을 애써 인정하지 않으려는 감정이 섞인 반응처럼 느껴졌다.
그제서야 나는 확신하게 되었다.
이 관계는 다정함이라는 외피 아래,
상대의 변화를 축하하기보다는 통제 속에 두고자 하는 구조였다는 것을.
또한 나에 대해 좋은 점은 쉽게 잊고,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단점을 유독 오래 기억하며 반복적으로 말하는 방식도 있었다.
그것은 사람을 작아지게 만들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도,
그는 여전히 예전에 내가 실수했던 장면을 언급하며 내 진심을 가볍게 다뤘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예전에 여행을 같이 갔던 일이었다.
나는 일정 상 늦게 참석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고, 미리 양해를 구했었다.
그 여행이 좋았다고 말했을 때, 그 사람은 “너 늦게 왔던 거?”라고 되물었다.
나는 그 순간, 내가 공유하고 싶었던 즐거운 기억이 아닌,
그 사람의 기억 속에는 ‘내가 늦게 온 사람’이라는 사실만 남아 있었구나 싶었다.
그러던 중, 그는 동물원 이야기를 꺼냈다.
아이와 함께 먹이주기 체험을 보며 “이건 학대 같다”고 말했다.
그 말은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그 장면이 묘하게 겹쳐 보였다.
그가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방식, 즉 정서적 거리와 단서를 조율하고,
자신이 쥐고 있는 '관계의 먹이'를 적절히 주며 상대를 반응하게 만드는 방식과 말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그 장면이 불편했던 이유는,
그 안에 자신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심리학에서는 이런 걸 ‘투사’라고 부른다.
자신 안의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을 외부 대상에 비춰 강하게 반응하는 심리적 방어기제.
그는 동물에게 먹이를 주는 행위를 불편해했지만,
정작 사람과의 관계 안에서는 비슷한 역학을 반복하고 있었다.
지금 나는
그 구조에서 조금씩 거리를 두고 있다.
누가 옳고 그르다기보다는,
그 울타리 안에서 내가 자유롭지 않았다는 사실을
조용히 받아들이는 중이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누군가에게 먹이를 주는 방식으로 관계를 유지하려 할 때,
상대는 점점 자신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것.
나는 누군가와의 관계 안에서,
서로를 먹이는 존재가 아니라
서로의 걸음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