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사진보다, 같이 웃은 기억을 남기고 싶다

그 줄다리기를 놓기로 했다

by 틈 사이의 온기

아이 키우는 엄마들이라면 다 그렇듯,
가끔은 친구들과 아이를 데리고 나들이를 나가고 싶을 때가 있다. 그날도 그 친구가 먼저 “내일 어디 나갈까?” 하고 말을 꺼냈다.
“장소 어디가 좋으려나, 추천할 만한 데 없어?”
내가 하나 보내자,
“나 좀 더 멀어도 돼~” 하며 배려하는 말도 덧붙였다.

그 순간만 보면 따뜻하고 유연한 말처럼 들렸다. 하지만 그 뒤로 몇 시간이 지나도록 장소를 함께 고민하거나 찾아보는 모습은 없었다. 적극적인 의견도, ‘찾아봤어’ 하는 반응도 없었다.

결국 또 내가 찾아야겠구나 싶었다.

예전 같았으면
‘내가 너무 기대했나?’
‘요즘 바쁘겠지’
‘내가 예민한 건가…’ 하며
스스로를 조용히 눌렀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무언가 굉장히 익숙한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통제하는 게 편한 사람”
“통제당하는 게 익숙한 나”

이 구조는
너무도 익숙한 그 누구와의 관계를 떠올리게 했다.
엄마.

엄마는 늘 자신이 정한 기준과 방식이 있었고,
나는 그걸 거스르지 않는 아이였다.
애써 맞췄고, 스스로 욕구를 접었고,
그게 사랑받는 방식이라고 믿어버렸다.

그리고 그 관계 방식은
은근히, 너무도 자연스럽게
내 인간관계 곳곳에 스며들어 있었다.

그날도,
장소를 함께 이야기하던 중
그 친구는 갑자기 블로그 글을 캡처해 보내왔다.

"ㅋㅋ 너 여기 검색해봤나?
나 애 재운다고 이제 검색해봤는데
나 먹이주기 진짜 안 좋아해서리ㅋㅋㅋㅋ"

그리고는 블로그 글의 일부를 함께 보냈다.
“동물들이 무섭게 울고,
먹이주기 때문에 밥을 제대로 못 먹는 것 같아서
너무 불쌍해 보였다.”

처음엔 단순한 취향인가 싶었다.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시간 되면 나도 찾아볼게~”라고 말해놓고,
정작 장소를 찾을 시간적 여유는 없으면서
그 불편함을 설명하는 블로그 글은
공들여 찾아 읽고, 이미지를 저장해 보내는 정성이 느껴졌다.

나는 그 순간,
내가 뭔가 부족한 사람,
무감각하고 무심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 친구는 평소에도 위생이나 깔끔함에 민감한 편이었다.
과거에 내가 과일을 물로만 씻었다고,
1종 세제를 안 쓴다는 이유로
미개한 사람처럼 쳐다보던 장면이 아직도 선명하다.
그때도 내가 뭘 크게 잘못한 것 같아
괜히 움츠러들었다.

그때처럼, 이번에도
위생적으로 불편한 감정을
그대로 말하지 않고
“동물이 불쌍해서”라는 윤리적인 언어로 포장하는 방식이
묘한 불쾌함을 남겼다.

그건 단순한 의견처럼 보였지만,
말 속에는
“나는 이런 걸 그냥 지나치지 않는 감수성 있는 사람이고,
그걸 아무렇지 않게 추천한 너는 그렇지 않아”라는
묵직한 우위가 들어 있었다.

그 친구는 평소 관계에서도
정보를 쥐고 감정 흐름을 주도하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표면적으로는 유연하고 배려 깊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감정의 중심을 조율하고 싶어 하는 기류가 있었다.

그런 사람이
‘먹이주기’처럼 누군가가 주고 누군가는 받는
불균형한 구조를 외부에서 봤을 때
그 장면이 불쾌하고 혐오스럽게 느껴졌던 건
어쩌면 그 구조가
자신이 타인에게 하고 있는 것과 닮아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그렇게 느꼈다.

그건 단순한 불편함이 아니라
자신의 관계 방식을 비추는 거울 같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거울을 외면하고 싶기에,
더 강한 윤리의 언어로 포장했던 건 아닐까.


더 놀라웠던 건,

그 친구가 예전 단체 톡방에서는

자신이 아침미소목장을 다녀왔다며

엄마들 사이에서 유명한 곳이라고 얘기한 적이 있었다는 점이다.

그곳에도 먹이주기 체험은 구석에 하나 있었고,

내가 제안했던 장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단지 그곳은,

카페가 좀 더 정돈돼 있고

사진 찍기에 적당했던 기억이 남아 있는 곳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내가 제안한 장소에 대해

“먹이주기는 학대 같다”는 블로그 글을 찾아 보내며

불편하다는 의사를 조심스럽지만 단호하게 드러냈다.


그 모습은 왠지 낯설지 않았다.
스스로의 감정을 직접 표현하지 않고,
종종 ‘타인의 말’을 빌려 스스로를 방어하던 엄마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친구도 정작 장소는 찾지 않으면서,
자신의 감정은 직접 말하지 않고 블로그 글을 통해 방어하려 했다.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하고, 내가 무심한 사람처럼 느끼게 만드는 방식이었다.


사실, 그 순간 나는 이렇게 말했어야 했다.

“야 저기 엄청 크잖아.
그럼 그 먹이주기 체험은 안 보이는 데로 산책하면 되지 않을까?ㅋㅋ
니가 그래도 그게 너무 싫으면 딴 데 찾아서 알려줘ㅋㅋ”

그랬다면
상대를 지나치게 배려하지도 않았을 테고,
내 감정도 납작하게 눌러버리지 않았을 텐데.

하지만 나는 또
너무 착하게, 너무 조심스럽게, 변명하듯 말했다.

“아… 딴 데 가도 돼…”

"나도 급하게 찾은거라..."
돌아보면 참 답답하고,
그때 말하지 못한 내 자신이 너무 안쓰럽다.

나는 친구를 만날 때
장소는 중요하지 않다.
음식이 맛없어도, 의자가 불편해도
그 사람과 웃고, 이야기하고,
함께 추억을 만드는 시간이 소중하다.
돌아와서도 “그때 진짜 좋았지” 하고
함께한 순간을 떠올릴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그런데 그 친구와의 만남은 달랐다.
대화는 거의 없었고,
사진을 예쁘게 남기고,
결과를 공유하는 것에 더 집중했다.
함께 있던 시간보다,
그 시간을 어떻게 포장해서 남길지가 더 중요해 보였다.

한 번은 그 친구 집에 초대를 받았을 때,
나는 그저 같이 노는 시간, 나누는 대화,
그 안에서 편안한 분위기를 기대했다.
그런데 그는 집에 나를 초대해놓고
하루 종일 자기 집 정리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나는 거실에서 아이랑 둘이 앉아 있었고,
정작 나와 눈 마주치고 얘기 나누는 시간은 거의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나는 이렇게 말했어야 했다.

“야, 내가 너 집 구경하러 온 것도 아니고
집 치우는 거 감탄하러 온 것도 아니잖아.
우리 같이 놀고 싶어서 온 거야.”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던 나,
그저 그 친구의 리듬에 맞춰 침묵한 나,
지금 돌아보면 서글프다.

돌아보면,
그 친구와의 관계 속에서 나는 때때로 엄마의 모습을 보였고,
또 때때로는 과거의 딸같은 모습도 보였다.

나도 한때,
정리되지 않은 것들을 불편해했고,
내 기준에 맞지 않는 사람을 속으로 판단하기도 했다.

결국 우리는
서로 ‘엄마처럼’ 했다가,
또 ‘딸처럼’ 기대했다가,
감정적으로 엎치락뒤치락 줄다리기를 해왔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내가 점점 달라지고
그 관계에서 한 발 물러나자,
남은 건
그 친구 안의 ‘엄마 같은 모습’뿐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제,
그 줄다리기를 놓기로 했다.

이제는 안다.

이건 한 사람의 성격 문제가 아니라,
내가 오랫동안 반복해온 관계 패턴의 결과였다는 걸.

엄마와의 관계 속에서
나는 스스로를 줄이고 맞추는 방식으로 사랑을 구했고,
그 방식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친구 관계’라는 이름으로 이어왔다.

이제는, 그 관계 패턴을 멈추고 싶다.

내가 수습하지 않아도 괜찮은 관계,
내가 먼저 말하지 않아도 함께 대화가 되는 사람,
내가 설명하지 않아도 믿어주는 사람과
천천히, 조금씩, 새로 관계를 맺고 싶다.

누군가에게 통제되는 구조 안에서
작아지는 나를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
이제는 통제당하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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