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지키지 못했던 그때, 그리고 이제
내가 아이가 산을 기어 올라가는 사진을 프로필로 올렸을 때,
친구 수진은 이렇게 말했다.
"엄마는 장갑 끼고ㅋㅋㅋ"
장난인 척, 웃자고 던진 말.
하지만 내 마음엔 작은 파문이 일었다.
사실 그날,
그 사진은 우리 아이가 스스로 자연을 탐험하고,
작은 손으로 낯선 흙을 짚으며
세상을 만나는 순간이었다.
나는 그 모습이 대견하고 아름다워서
조금은 뭉클한 마음으로 그 장면을 남겼다.
그런데 그걸 이렇게 가볍게 비틀어 얘기하는 순간,
내 감정이, 나의 진심이,
장갑 한 켤레로 희화화되는 것 같았다.
그땐 말하지 못했다.
"그거, 나 아니고 할머니야"라는 농담 섞인 변명으로
스스로를 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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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번은 단체 채팅방에서였다.
내가 아이가 낮잠을 안 자서 너무 힘들었다는 얘기를 꺼냈을 때,
수진은 이렇게 말했다.
"하나야, 예전에 내가 이현이가 안 잔다고 했을 때 너 뭐라고 한 줄 기억나?"
공적인 공간에서,
모두가 보는 앞에서
조용히 내 말을 꺾었다.
나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했고,
그 친구는 덧붙였다.
"애가 엄마랑 놀고 싶어하는데 그냥 좀 놀아주면 안 되냐고 했지."
당황한 나는
“아, 내가 그때 망언했지ㅋㅋ” 하며 웃어 넘겼다.
그러자 그는 말끝을 덧붙였다.
"그때 망언이라 생각했지만, 너도 애 낳으면 알겠지 싶어서 암말 안 했어."
그렇게 넘겼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알았다.
그 말은,
사실 아이를 낳기 전의 내가 가장 진심으로 했던 말이었다.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이 가장 소중하고,
놀아주는 게 아이에게도 나에게도 의미 있는 일이라는 걸
그땐 본능처럼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아이를 낳고 나서,
나는 수많은 육아 정보와 영상, 전문가의 조언에 휘둘렸다.
“정해진 시간에 재워야 한다”
“낮잠을 꼭 자야 발달에 좋다”
아이의 감정보다 ‘시계’와 ‘루틴’이 우선이라는 메시지 속에서,
나는 내가 했던 그 말을
비전문적이고 미숙한 말이라고 스스로 몰아붙였다.
그렇게 ‘망언’이었다고 웃으며 지워버렸던 말은,
사실은 가장 진심이 담긴 말이었다는 걸,
지금에서야 알게 되었다.
지금의 나는 다르다.
낮잠을 거부하는 아이의 감정을 듣고,
“그래, 오늘은 그냥 안 자고 싶은 날인가 보다” 하며
그 마음을 받아들인다.
놀이로 전환하고, 함께 논다.
아이의 리듬에 귀 기울이고,
그 흐름을 믿게 되었다.
그 한마디는
내가 잘 몰랐기에 했던 말이 아니라,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세상이 틀렸다고 말했기에 잃어버렸던 말이었다.
그 말을 ‘망언’이라고 부른 순간,
나는 내 감정뿐 아니라
나의 진심과 성장의 흔적에 입을 막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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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그렇게 조용했을까.
왜 항상 "아니야, 괜찮아" 하며 웃어넘겼을까.
왜 내 마음이 불편한데도,
그 불편함을 나 자신에게서 지웠을까.
이제야 안다.
그 순간들이 내가 나를 지키지 못한 시간들이었고,
그 시간이 쌓여
내가 점점 작아졌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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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라면 말할 수 있을까.
그 말이 나에게 어떤 감정을 줬는지,
그 말들이 나를 어떻게 움츠리게 했는지.
그리고 그 침묵이 나를 얼마나 외롭게 만들었는지.
그 친구는 여전히 농담처럼 말을 던지고,
나는 여전히 그 농담을 곱씹는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씩 달라지려고 한다.
이제는
“그 말, 어떤 의미로 한 거야?”
라고 물을 수 있을 것 같다.
“지금은 좀 기분이 묘해.”
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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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때 말하지 못한 건,
참아서가 아니라 두려워서였다.
그 말이 우리 관계를 망칠까 봐,
그 말이 내가 나쁜 사람처럼 보일까 봐.
그 두려움을 이제는 내려놓고 싶다.
말하지 못했던 순간들을
이제는 내 편으로 데려오고 싶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제는 나를 지켜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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