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있어도 공허했던 순간에 대하여
내가 오래 지켜본 친구들이 있다.
수진이와 미정이.
이름만 다를 뿐, 두 사람과의 관계에는 늘 어떤 공통된 감정이 흘렀다.
함께 있으면 가끔 따뜻하고, 가끔 공허했다.
마치 어느 지점까지만 허락되는 관계처럼.
수진이는 언제나 한결같았다.
진지한 이야기에 불편해했고, 내 고민이 깊어질수록
가볍고 농담 섞인 말들로 대화를 재빨리 틀어버렸다.
내가 “애 다 키우고 나는 뭘 하고 살까?”라며 답답한 마음을 꺼냈을 때도,
수진이는 “난 늘 그런 생각을 하진 않아. 그냥 한 번씩만 고민해.” 하고 말했다.
그 말이 틀린 건 아니지만, 이상하리만큼 허무했다.
미정이도 곁에서 “나도 그냥 그런 생각 안 하고, 웹소설 보거나 게임하면서 스트레스 풀어.”라고 덧붙였다.
그러고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근데 다들 왜 임신한 거 빨리 얘기 안 했냐고 나한테 그러더라. 나는 그냥 시기가 되면 얘기하는데.”라고 했다.
그 얘기를 하는 미정이의 표정에는 피로감이 묻어 있었다.
나는 그 마음이 조금은 이해됐다.
아마 미정이도 무의식중에 알았을 것이다.
빨리 말한다고 해서 그 모임에서 따뜻한 감정적 공감을 받을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걸.
그래서 굳이 서두르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순간에 나도 솔직하게 공감을 표현하기보다는,
안전한 말들만 골라 대답했다.
“그냥 하는 말 아니야?ㅋㅋㅋ 아님 모임에서 뭐 챙겨주려 했는데 그날 당일에 얘기해서 민망했나?”
그렇게 가볍게 넘겨버렸다.
그러자 수진이는 곧바로
“왜 바로 말 안 했어?ㅋㅋㅋ 빨리 알았으면 내가 육아용품 딴 사람 안 주고 너 주면 됐잖아.”
하고 현실적인 얘기로 화제를 돌렸다.
감정이나 기분보다는 늘 눈에 보이는 쪽에만 집중하는 모습이
수진이답다고 느껴졌다.
그 자리에는, 내 마음이 오래 머물 공간이 없었다.
미정이는 조금 달랐다.
그녀에게도 가벼운 얼굴이 있었지만,
단둘이 있을 때는 삶의 결핍과 갈증을 솔직히 이야기하곤 했다.
한 번은 내가 준 책 선물을 진심으로 고마워하며
그동안 하지 못했던 마음 이야기를 꺼내주었다.
내가 아이를 낳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몸도 마음도 힘들던 시기에 내가 드레스 투어에 함께 가주었는데,
그때 미정이가 정말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내 아픈 이야기를 꺼냈을 때 같이 눈물을 흘려주기도 했고,
최근에도 오랜만에 깊이 있는 이야기를 나눴다.
그 순간들이 나에게는 분명 소중했다.
어쩌면 앞으로도, 그런 솔직한 마음이 이어질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미정이도 그 자리에서는 결국 수진이의 리듬에 맞추어 갔다.
내가 조금 무거운 얘기를 꺼내면
잠깐 공감해주는 듯하다가도
곧 가벼운 화제로 돌아가곤 했다.
그게 늘 아주 아쉽다고 할 수는 없지만,
조금 쓸쓸하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누구에게나 깊은 대화를 바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오랜 시간을 함께한 관계에서는
가끔 더 오래 머물 수 있기를 바랐다.
수진이도 가끔 마음을 열려는 순간이 있긴 했다.
어느 날은 자기 집에서 자고 가라고 초대하기도 했고,
내가 고민하던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들어주려는 모습도 보였다.
예전에 내가 시터 이야기를 했을 때는 별말 없이 지나갔지만,
나중에야 “그 시터 좀 별로인 것 같긴 해. 니 얘기 들어보면.” 하고 말을 꺼냈다.
그 순간들은 분명 뜻밖이었고,
어쩌면 그도 나름의 방식으로 마음을 건네려 한 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런 몇 번의 순간이
관계의 온도를 완전히 바꾸진 못했다.
어쩌면 나는 늘 이런 순간들에 머물러 있었다.
깊은 대화를 원하면서도,
상대가 그 자리에 함께 서주길 기대하면서도,
결국은 허무한 농담과 평가성 멘트로 흘러가버리는 자리에.
그리고 이제는 안다.
내가 원했던 것은 거창한 결론이나
누구를 설득하거나 꺾는 일이 아니었다.
그저 나는,
살아있는 관계를 원했을 뿐이었다.
서로의 마음에 오래 머물고,
가볍게 지나가지 않는 대화.
진심이 흔들리지 않는 시간.
가끔은 생각한다.
10대, 20대 초반의 수진이는 지금 같지 않았다.
그때의 그녀는 훨씬 솔직했고, 조금 더 부드럽게 마음을 내보이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나이가 들수록 방어가 점점 더 견고하고 정교해져
내가 들어갈 틈조차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아이를 낳고 각자의 삶이 복잡해지면서,
수진이가 본래 가지고 있던 불안과 강박이 더 깊어졌을지도 모른다.
그게 더 이상 숨기지 못할 만큼 커져서,
이제는 무슨 이야기를 꺼내도 가볍게 덮어버리는 태도로 남아버린 걸까.
그게 조금 서글프다.
내가 이 관계를 떠나기로 한 것도,
누구를 탓하거나 거리를 두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그저 더는 진심이 닿지 않는 벽 앞에 오래 머물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렇다고 해서 나만 늘 솔직했거나 용기 있었던 건 아니다.
생각해보면, 나도 세 명이 모인 자리에서는
마음을 끝까지 꺼내지 못했다.
그 순간엔 나 역시 가벼운 농담으로 무게를 줄이거나,
안전한 말로 내 마음을 숨겼다.
아마 나도 여러 사람 앞에서는
약해 보이고 싶지 않았고,
어쩐지 센 척하며 버텨야 할 것 같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미정이를, 수진이를 마냥 비난할 수만은 없다.
우리 모두 조금씩 닮아 있었고,
그걸 알게 되니 마음 한켠이 더 복잡해진다.
그리고 가끔은 그런 생각도 든다.
그저 가장 친한 친구들이라는 이름 아래 대외적으로 묶여 있던 관계조차,
막상 들여다보면 진심이 오래 머무르는 자리는 아니었다는 걸.
내가 예전에는 그들과 비슷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감정 표현을 서툴러하고 안전한 말들로만 마음을 대신하는 사람들에게
더 편안함을 느꼈던 게 아닐까.
그래서 그때는 이런 공허함을 크게 자각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이제야 조금씩 달라진 내가,
그 자리에서 더 이상 예전처럼 숨 쉴 수 없게 된 것 같다.
이제는 그저 담담하게 구분하려 한다.
누가 옳고 그른지를 따지기보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더 명확히 알고 싶다.
내 시간과 마음을,
살아있는 대화와 관계에 쓰고 싶다.
그것이 내가 택한 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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