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와 소속 사이, 나와 아이의 균형을 찾아서
아이를 낳고 나서 자연스럽게 사회적으로 입고 있던 옷들을 하나둘 벗게 되었다. 더 이상 ‘뭐 하는 사람’이라는 타이틀보다, 그냥 ‘나’ 자체로 존재하는 순간이 많아졌다.
아이가 돌이 될 때까지는 마치 한 몸처럼 아이와 감정을 나누며 살았다. 아이가 기쁘면 나도 기뻤고, 아이가 슬프면 나도 같이 슬펐다. 어디까지가 아이이고, 어디까지가 나인지 모를 정도로, 하나가 된 느낌이었다.
그러다 아이가 점점 자기 주관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동시에 나도 ‘내가 하고 싶은 게 뭘까?’라는 고민을 하게 됐다. 아이가 자기 삶을 주장하는 순간, 나도 내 삶을 다시 돌아보게 된 거다.
나는 진짜 뭘 하고 싶은 거지?
아이에게 자유를 주려면, 먼저 내가 나에게 자유를 줘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나 자신을 허용할 줄 알아야, 아이의 욕구도 있는 그대로 존중할 수 있으니까.
그래서 고민해 봤다.
‘내가 하고 싶은 건 뭘까?’
‘나는 어떤 방식으로 살아야 가장 나다운 걸까?’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나는 표현을 통해 자유를 느끼는 사람이라는 걸.
글을 쓰고, 수학을 탐구하는 순간, 나는 가장 나다웠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하나의 고민이 생겼다.
"얼마나 자유로워야 하고, 얼마나 사회적 틀에 맞춰야 할까?"
완전히 자유로우면 외톨이가 될 것 같고, 완전히 틀에 맞추면 내 자신이 사라질 것 같았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예술가들도 자유와 사회적 틀 사이에서 각자의 균형을 찾기 위해 고민했다.
예를 들어, 고흐를 떠올려 보자. 그는 단순히 사회적 틀에 맞추기를 거부한 걸까? 아니면 애초에 그 틀 안에서 살아가는 게 어려운 사람이었을까?
고흐는 창조의 자유를 누구보다도 갈망한 사람이었지만, 그의 삶을 보면 단순한 자유에 대한 열망을 넘어 더 복합적인 요소들이 얽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감정의 격동이 심했던 그는 세상과의 관계를 맺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타인의 기대에 맞추기보다는 자신의 내면을 표현하는 데 집중했다. 그렇다면 그가 선택한 방식이 단순히 사회적 틀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그의 성향과 만족할 수 있는 균형점이 원래부터 다르게 형성된 것은 아닐까?
반면, 창작의 자유를 유지하면서도 대중과 조화를 이루는 삶을 살았던 예술가들도 있다. 이들은 사회적 관계 속에서 감정을 조절하고 균형을 맞추며, 자유와 소속감을 동시에 유지했다. 누군가는 더 많은 자유 속에서 만족을 느끼고, 누군가는 어느 정도의 사회적 틀과 안정 속에서 더 편안함을 느낀다. 각자 자신만의 균형점이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고민이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아이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도 완전한 자유 속에서는 불안을 느끼고, 과한 통제 속에서는 답답함을 느낀다. 부모가 적절한 자유와 통제 사이에서 균형을 맞춰 줄 때, 아이는 비로소 진짜 ‘안전하다는 감각’을 경험하게 된다. 하지만 중요한 건, 모든 아이가 똑같은 방식으로 자유와 통제를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어떤 아이는 더 넓은 자유 속에서 성장할 때 안정감을 느끼고, 어떤 아이는 명확한 규칙과 틀 속에서 편안함을 느낄 수도 있다. 결국, 부모는 아이가 어떤 균형점에서 가장 안정감을 느끼는지를 섬세하게 알아가야 한다.
결국, 나는 나만의 균형을 찾아가는 중이다. 그리고 아이도 마찬가지다.
자유롭고 싶고, 또 그 속에서 안전하고 싶고.
우리는 모두 각자의 균형을 찾아가며 살아가는 존재가 아닐까.
(+) 아이의 균형점을 찾아주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
부모로서 어디까지 허용하고, 어디서부터 제약을 둬야 하는지 고민될 때가 많다.
나 역시 이 과정에서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아이를 키우고 있다.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면, 내가 브런치에서 연재 중인 글도 한 번 읽어보면 좋겠다.
아이에게 적절한 자유와 통제를 조화롭게 주는 방법을 더 깊이 다뤘다!
[연재 브런치북] 나 자신으로 존재하는 엄마
https://brunch.co.kr/brunchbook/beingm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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