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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ghoo Kim Aug 28. 2020

일반의지에서 일반의지 2.0으로

아즈마 히로키 (3) : 루소, 헤겔, 그리고 아즈마 히로키의 '국가'

들어가며



<이 책은 정보기술이 민주주의를 실현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정보기술이 도처에 깔려 있는 사회의 출현은 민주주의 그 자체를 바꿔 버리며, 정치나 통치의 이미지 자체를 바꾸고 만다고 주장하는 책이다. 정보기술은 분명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봐왔던 것과는 상당히 다른 ‘민주주의’가 될 것이다 ─ 이것이 이 책에서 전개한 내용이다.> 본서 p.8 中


『일반의지 2.0』은 아즈마 히로키가 기성의 철학・문예 논단에서 완연히 저널리즘적 비평으로 돌아섰음을 보여주는 저작이라 말할 수 있다. 차이가 있다면 2010년대 이후 아즈마는 새로운 서브컬처 비평을 내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한 본인의 해명은, “2010년을 전후해 일본 평론계의 세대교체가 이루어졌고, 그 결과 자신은 오히려 윗세대가 되고 말았고, 이런 변화 속에서 가치 전도를 목적으로 한 서브컬처론, 그러니까 젊은 문화론은 이제 자신이 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다만 애니메이션, 게임, 인터넷 등이 만연한 일본 사회에서 새로운 가치관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이쪽으로 방향을 틀어야하기 때문에 서브컬처와 관련된 활동은 상대적으로 줄어들 것이라 밝힌다.

저자 본인이 서두에서 밝히듯 이 책은 철저히 대중 대상으로 쓰인 책이다. 전반부에서 아즈마의 장기인 도식적・도해적 풀이를 통해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의 핵심 사상을 소개하고는 후반부에선 그에 착안하여 자신이 구상한 21세기 현실 상황에 맞는 새로운 참여 민주주의의 모델을 설명한다.

사실 기본적으로 독자에 대한 배려가 결여된 본 플랫폼의 글을 읽는 것보다 서가에서 그의 책을 집어 드는 게 훨씬 효율적일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저명한 학자의 작품을 소개하는 데 그치는 거면 블로그를 하는 의의가 없을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좀 더 풍부하면서도 연결고리가 있는 내용들을 정리하고 편집하고픈 욕망이야말로 인터넷에서 개인이 미디어를 생산하는 원동력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이번 편에서는 루소의 『사회계약론』과 더불어 그의 저작에 지대한 영향을 받은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의 이야기를 조금 해 볼 것이다. 서양 근대 철학의 완성자라는 이명을 갖는 헤겔의 철학을 아무리 콤팩트하게 담으려고 해도 이 자리에서는 무리이며 그럴 의도도 없다. 다만 그의 주저 『정신현상학』에 루소가 끼친 영향을 정리하는 것을 주안점으로 삼을 것이다.

사실 『일반의지 2.0』의 알짜배기는 아즈마가 구상한 형태보다는 그를 둘러싼 예상 가능한 쟁점들을 살펴보는 데 있다. 이미 본서에서도 예상 쟁점들에 대해 저자가 일일이 설명하고 반박했지만 결말부에서는 간단하게나마 나도 나름대로의 의견을 피력하려 한다.



(1) 루소의 『사회계약론』


개관



루소는 이 책을 통해 기존 사회 질서의 불합리를 비판하며 문제를 제기한다. 본디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인데 사회생활을 영위하려면 불가피하게 자유롭지 못한 상황을 강요당한다는 것이다. 루소는 자유가 억압되는 현실을 바꾸기 위해 새로운 사회 질서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기 위해 그는 먼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든 국민이 자유를 양도해야 한다고 말한다. 보통 자유를 양도하면 자유를 빼앗긴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한 명의 개인에게 자유를 양도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에 양도하는 것이므로 개인은 평등의 권리를 가질 수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잃어버리는 부분은 자연 상태에서 욕망에 휘둘리는 ‘자연적 자유’뿐이고, 국민은 진정한 자유인 ‘시민적 자유’를 새롭게 얻는다. 시민적 자유란 의무와 이성에 따라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자유를 일컫는다. 사회 구성원이 함께하는 공동체에서는 시민적 자유가 매우 중요하다.

그렇다면 사회 구성원 모두가 만족할 만한 국가를 어떻게 만들어 갈 수 있을까? 루소는 모든 구성원이 공감할 수 있는 공통된 ‘일반의지’가 분명히 존재한다고 말한다. 일반의지는 개개인의 개별 의지를 더하기만 한 ‘전체의지’와 전혀 다르다. 전체의지의 경우, 단순히 다수의 의견을 반영한 의지에 그친다. 반면에 일반의지는 모든 이의 공통된 이익으로, 의지의 최대공약수를 의미한다.

공통분모가 되는 일반의지를 찾아내려면 구성원 간의 토론을 거쳐야 한다. 이 때문에 필연적으로 직접 민주주의가 필요하다. 직접 민주주의가 실현될 때, 일반의지에 기초해서 모든 국민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다. 이때 국민은 주권자로서 입법권을 갖고, 일반의지를 법의 형태로 표명한다. 한편 일반의지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집행권자로서의 정부가 필요하다. 루소가 생각하는 정부는 국민이 고용한 일꾼에 지나지 않는다. 실권은 없고, 그저 국민의 의지를 집행하는 일만 성실하게 수행해 주면 된다.

이와 같은 방법대로 한다면, 이론적으로는 모든 국민이 만족할 만한 공통 의지를 간추릴 수 있다. 만약 공통분모가 될 만한 보편적인 의지를 찾을 수만 있다면, 국가를 운영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사회계약론자로 대표적인 3인을 꼽자면 홉스Thomas Hobbes, 로크John Locke, 그리고 루소Jean-Jacques Rousseau가 있다. 홉스는 인간은 본성적으로 이기적이며, 국가 성립 이전의 자연 상태에서는 정의와 부정의가 존재하지 않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불가피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 보전을 위해 자발적인 동의에 의해 자연 상태의 권리를 국가에 양도하는 것으로 본다. 로크는 인간의 본성은 선하므로 자연 상태에서도 사람들 사이에서 극단적인 투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보았다. 단 시민이 탐욕적인 사람들에 의해 자연 상태의 권리를 침해당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계약을 맺어 국가를 구성한 것으로 보았다.

루소는 시민이 자신의 잠재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하기 위하여 동의에 의해 자발적으로 정치 공동체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다시 말해 그는 시민들은 양도하거나 나눌 수 없는 주권을 행사하여 시민의 일반 의사에 입각한 정치 공동체를 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만약 정부가 일반의지에 반하고 특수의지(사적 이익이나 파당적 이익)에 따라 움직일 경우, 정부는 주권자인 인민의 권리를 대행하는 것에 불과하므로 인민은 언제든 대표자를 ‘혁명으로’ 갈아치울 수 있다. 정당화될 수 있는 저항 수단으로서의 폭력을 인정한 셈이다. 그래서 루소에게 민중은 지식인이나 지배집단보다 우월하고 선한 집단이다.

이는 당연히 왕권신수설에 기초하여 신의 의지로부터 부여받은 전권을 자의적으로 휘두르던 18세기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의 절대 군주들의 권력 기반을 송두리째 흔들어놓았다. 거의 동시기에 나온 다른 주저 『에밀』을 통해 급진적인 교육학적, 정치학적 이념을 드러낸 루소는 구체제를 떠받쳐 주는 두 기둥이었던 왕권le trône과 교권l’autel의 심기를 크게 불편하게 했고, 이 일로 인해 루소는 철저한 박해의 대상이 된다.



『사회계약론』의 구성


① 1부 : 사회계약


<나는, 인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법을 있을 수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정당하고도 믿을 만한 통치의 법칙이 정치사회 속에 있을 수 있는지를 알아보고자 한다. 그러므로 나는 이 연구에서 권리가 허용하는 것과 이해타산이 명하는 것을 끊임없이 조화시키려고 노력할 것인데, 그것은 정의와 이익이 결코 분리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사회계약론』 (김중현 譯) p.33


정치사회의 정당한 근거는 무엇인지에 대해 질문하면서, 그에 대한 대답이 자신의 저서의 목적임을 밝힌다. 그런데 그 근거가 되는 것은 자연권도 아니고, 힘도 아니다. 그러므로 강자의 권리라는 주장은 당연히 터무니없는 주장이다.


<모든 사회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또 유일하게 자연적인 것은 가족 사회다. 하지만 자식은 자신의 생명 보존에 필요한 만큼만 아버지에게 매여 있다. 하지만 자식은 자신의 생명 보존에 필요한 만큼만 아버지에게 매여 있다. 그 필요가 없어지면 곧 그 자연적인 관계는 사라진다. 자식은 아버지에 대한 복종의 의무에서 벗어나고, 아버지는 자식을 돌보아야 할 의무에서 벗어나면 그들은 모두 똑같이 독립을 되찾는다. 만일 그들이 계속해서 결합되어 남아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자연적인 게 아니라 자발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가정 그 자체는 오로지 계약에 의해서만 유지된다.> 위의 책 p.35


<최강자라 할지라도 자신의 힘을 권리로, 그리고 복종을 의무로 변화시키지 않는 한 계속해서 주인이 될 만큼 결코 강할 수는 없다. 그로부터 최강자의 권리, 즉 겉으로는 냉소적으로 들리지만 실제로는 원리로 확립되어 있는 그 권리가 생겨난다. 그런데 이 말뜻을 우리에게 설명해 주지 못할 사람이 있을까? 힘은 물리적인 위력이다. 그렇기에 나는 그 힘의 행사로부터 어떤 도덕성이 유래할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 힘에 복종하는 것은 불가피한 행위이지, 자발적인 행위는 아니다. 그것은 기껏해야 조심성에 기인한 행위일 뿐이다. 그럴진대 그것이 어떤 이유에서 도덕적 의무일 수가 있을까?> 위의 책 p.38


반면 계약이야말로 모든 정치사회의 근거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계약이라고 해서 한쪽 당사자에게 다른 쪽 당사자의 노예가 되도록 강요할 수는 없다. 그리하여 힘에 기초한 것이 아닌 최초의 계약이 있는데, 바로 그 계약이 사회계약이라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 계약에 대해 분석한다.


<우리는 저마다 자신의 신체와 모든 힘을 공동의 것으로 만들어, 보편적 의지(일반의지)라는 최고 지휘권 아래 둔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각 구성원을 전체와 불가분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위의 책 p.48


그러면 주권자란 무엇인가? 그것은 계약자들의 총체이자 그들의 보편적 의지이기에, 주권자는 곧 인민인 것이다. 이어 그는 자연 상태와 사회 상태를 비교한다. 인간은 전자에서 후자로 이동하는데 이동 시 인간은 잃는 것이 있지만 얻는 것도 있다고 말한다. 계속해서 그는 자연 상태에서의 재산과 사회 상태에서의 재산(소유권)을 비교한다. 역시 전자에서 후자로 이동하지만 인간은 잃는 것만큼 얻기도 한다고 말한다. 이를테면, 공동체가 개인들의 재산을 받아들일 때 그것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그 재산의 합법적인 점유를 보장하고, 침탈을 참된 권리로, 보유를 소유권으로 바꿔준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점유자들은 공공재산의 수탁자로 간주되고, 그들의 권리는 국가의 구성원 모두가 존중하고 또 국가가 최선을 다해 외국으로부터 보호해 준다.


<모든 사회제도의 기초가 되어야 하는 것 하나를 지적하면서, 이 부部와 장을 끝맺고자 한다. 이 기본적인 계약은 자연적 평등을 파괴하기는커녕 오히려 자연이 인간 사이에 생겨나게 할 수 있었던 육체적 불평등을 정신적이고 법적인 평등으로 바꾸어 놓는다는 것과, 사람들은 체력이나 타고난 능력에서 불평등할 수 있지만 계약에 의해 법적으로 모두가 평등해진다는 것이 그것이다.> 위의 책 p.56



② 2부 : 주권


<만일 개인들 간의 이익의 상충이 사회 수립을 필요하게 했다면 그 수립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개인들 간의 그 이익의 일치이다. 사회적 유대를 형성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상이한 이익들 속에 있는 그 공통의 이익이다. 그러므로 구성원 모두의 이익이 일치하는 점이 없으면 어떠한 사회도 존재할 수 없다. 사회는 오로지 이 공통의 이해에 기초하여 다스려져야 한다. 그러므로 나는 주권은 보편적 의지의 행사일 뿐이기에 결코 양도할 수 없으며, 집합적인 존재인 주권자는 집합적인 존재 자체에 의해서만 대표될 수 있다고 말하고자 한다. 권력은 물론 이양될 수 있지만, 의지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위의 책 p.57


주권은 양도할 수 없기에, 인민은 주권을 포기할 수 없다. 주권은 분할할 수도 없다. 따라서 권력의 분할도 있을 수 없다. 주권은 오류를 범할 수도 없다. 보편적 의지는 언제나 공정하며 언제나 공익을 지향하는 단 하나의 목표를 가질 뿐이다. 이어 그는 주권의 한계에 대해 고찰한다. 주권은 그것이 아무리 절대적이고 신성불가침한 것이라 할지라도 보편적인 계약의 한계를 넘지 못하는데, 계약 자체에 의해 규정된 개인의 권리, 즉 재산(소유권)과 자유가 바로 그 한계다.


<따라서 주권자는 한 신민에게 다른 신민보다 더 큰 부담을 지울 권리가 전혀 없다. 왜냐하면 그럴 경우 문제는 개별적이 되어 주권자의 권한 밖의 일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별이 일단 받아들여지면, 사회계약에 의해 개인들 측에 어떤 포기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명백히 오류가 된다. 실제로 그들의 상황은 그 계약의 이행에 의해 이전보다 더 나은 상황이 되기에, 양도는커녕 유리한 교환을 한 것일 뿐이다. 즉, 그들은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존재 양식을 더 낫고 안전한 존재 양식으로, 자연적인 독립을 자유로, 타인을 해칠 수 있는 힘을 그들 자신의 안전으로, 타인의 힘에 의해 전복될 수 있는 자신들의 힘을 사회적 결속을 통해 누구도 가로챌 수 없는 권리로 교환한 것일 뿐이다.> 위의 책 p.66


이어 생살권에 대해 기술한다. 범죄가 사회계약을 깨는 경우에는 사형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법률은 보편적 의지의 표시이며, 입법자는 인간의 모든 정념을 이해하지만 그 어떤 정념도 느끼지 않으며, 인간의 본성과 아무런 관련이 없으면서도 그 본성을 철저히 파악할 줄 아는 그런 뛰어난 정신적 존재다. 현명한 입법자일지라도 법을 지켜야 할 인민이 그 법을 감당하기에 적합한지를 먼저 검토해야 한다.


<사람에게처럼 인민에게도 성숙기가 있어서, 그들이 법에 복종하도록 하려면 그때를 기다려야 한다. 그러나 인민의 성숙기를 알아보는 일이 항상 쉽지만은 않다. 그런데 만일 그 성숙기를 앞서 가면, 일을 그르치고 만다. 어떤 인민은 태어날 때부터 규율을 지키게 할 수 있는가 하면, 어떤 인민은 10세기가 지나도 그렇게 하지 못한다.> 위의 책 p.80


한 국가의 최상의 구조에는 그 국가가 가질 수 있는 규모에 한계가 있다. 국가가 너무 커서 잘 다스려질 수 없도록 하지 말고, 너무 작아서 스스로 자신을 유지할 수 없도록 하지 않게 해야 한다. 통치 체제는 두 가지 방식으로 측정될 수 있다. 하나는 앞에서 말한 영토의 크기에 의해서이고, 다른 하나는 인민의 수에 의해서인데, 이 둘 사이에는 국가가 최상의 규모를 갖기에 적합한 비율이 있다. 따라서 국가의 규모에 따라 다양한 입법 체계와 다양한 법이 존재한다.


<다른 한편, 국가는 반드시 겪게 될 혼란에 맞서고 자기 보존을 위해 기울이지 않을 수 없는 수고를 견뎌내기 위해, 어떤 견고한 기반을 갖추어야 한다. 왜냐하면 모든 인민은 데카르트의 와동설渦動說처럼 서로에게 끊임없이 작용하여 이웃 국가를 희생하고 영토를 넓히려는 경향을 갖는 일종의 원심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약자들은 곧 먹혀 버릴 위험이 있어서, 자신을 다른 모든 인민과 일종의 균형 상태를 유지함으로써 사방에서 밀려오는 압박의 힘을 거의 동일하게 만들지 않고는 아무도 스스로를 보존할 수 없다.> 위의 책 p.83



③ 3부 : 정부


<모든 자유의지에 대한 행위는 두 원인이 협력하여 발생한다. 하나는 정신적인 것으로, 이를테면 행위를 야기하는 의지이며, 다른 하나는 육체적인 것으로, 이를테면 그 의지를 실행하는 힘이다. 내가 한 대상을 향해 걸어갈 때, 먼저 그곳으로 가고 싶어 해야 하며, 다음으로 내 발이 그곳으로 나를 데려다 줘야 한다. 마비 환자가 달리고 싶어 한다 해도, 반대로 민첩한 사람이라도 달리고 싶어 하지 않는다면, 그 둘은 모두 제자리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통치 체제도 이와 똑같은 원동력을 갖고 있다. 거기에서도 마찬가지로 힘과 의지가 구별된다. 의지는 입법권이라 부르고, 힘은 집행권이라 부른다. 그것들의 협력이 없으면, 아무것도 행해질 수 없으며 행해져서도 안 된다.> 위의 책 p.92~93


정부는 집행권이지 주권이 아니다. 통치 대상이 되는 국민들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정부가 존재할 수 있는데, 형태로는 먼저 민주정치가 있고, 귀족정치, 군주정치가 있다. 그것들이 적절히 혼합된 형태의 정부, 즉 혼합 정부 또한 존재한다.


<단일 정부 형태는 단일하다는 것만으로도 최상의 것이다. 하지만 집행권이 입법권에 충분히 의존하지 않을 때에는, 즉 ‘군주’에 대한 인민의 비율보다 주권자에 대한 ‘군주’의 비율이 더 클 때에는 정부를 분할하여 이 불균형을 시정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정부의 모든 부분은 신민들에게 같은 정도로 권위를 유지하면서도, 분할을 함으로써 주권자에 대해서는 그 권위가 약화되기 때문이다. 또 이 불균형을, 정부를 분할 않고 통째로 놓아두면서 집행권과 입법권의 균형을 맞추고 각각의 권리를 유지하는 데만 이용되는 중간 행정관들을 둠으로써 방지하기도 한다. 그때 정부는 혼합 정부가 아니라 완화된 정부다.> 위의 책 p.116~117


“자유는 어떤 풍토에서건 다 열리는 열매가 아니기에 모든 나라 인민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몽테스키외의 말처럼, 모든 정부 형태가 모든 나라에 다 적합한 것만은 아니다. 좋은 정부의 특징으로 어떤 것들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지만, 정치적 결합의 목적은 그 구성원의 생명의 보존과 번영에 있기에 구성원들의 자기 보존과 번영에 대한 가장 확실한 특징은 무엇보다 구성원 수, 즉 인구의 증가다.


<나는 사람들이 너무도 간단한 한 특징을 무시하거나 솔직하게 인정하지 않는 것에 항상 놀란다. 정치적 결합의 목적인 무엇인가? 그것은 그 구성원의 생명의 보존과 번영이다. 그렇다면 구성원들의 자기 보존과 번영에 대한 가장 확실한 특징은 무엇인가? 그것은 곧 구성원 수, 즉 인구 증가다. 그러니 그토록 이론異論이 분분한 그 특징을 다른 데 가서 찾지 마라. 그 밖의 모든 조건이 같은 경우, 외국의 도움이나 귀화나 식민 등이 아닌 상태에서 시민이 더 많이 살고 더 느는 정부는 확실히 최상의 정부다. 반면 인민이 줄고 쇠퇴해 가는 정부는 최악의 정부다.> 위의 책 p.124


모든 정부는 권력을 남용함으로써 타락하는 경향이 있다. 개별 의지가 끊임없이 보편적 의지에 대항하여 작용하듯, 정부는 계속해서 주권에 대항하는데 이것이 커지면 커질수록 국가의 구조는 더욱 변질된다. 군주의 의지에 저항함으로써 그 의지와 균형을 이루는 다른 단체 의지가 없기 때문에, 조만간 군주는 주권자를 억압하거나 사회계약을 깨버리는 일이 일어나게 된다. 그것은 통치제가 생겨나면서부터 이를 끊임없이 와해시키려는 경향이 있는 내재적이고 불가피한 결점이다.


<국가가 와해될 경우, 정부의 권력 남용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 모두 무정부anarchie라 불린다. 좀 더 구별을 하자면 민주정치는 중우정치Ochlocratie로, 귀족정치는 과두정치Olygarchie로 변질된다. 왕정은 참주정치Tyrannie로 변질된다는 것도 더 말해 두고 싶다. 그런데 이 참주정치라는 말은 애매해서 설명이 요구된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참주는 정의와 법을 무시한 채 폭력으로 다스리는 왕을 지칭한다. 하지만 정확한 의미에서 참주는 자신에게 권리가 없는 왕권을 가로채는 개인을 가리킨다. 그리스인들은 그렇게 참주라는 말을 이해했다. 그들은 훌륭한 군주든 나쁜 군주든 왕권이 정당하지 않은 군주를 일률적으로 그렇게 불렀다. 따라서 참주Tyran와 왕위 찬탈자usurpateur는 완전히 동의어인 것이다.> 위의 책 p.126~127


통치 체제는 인간의 육체와 마찬가지로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어가기 시작하며, 그 자체에 자가 해체의 원인을 지니고 있다. 이처럼 통치 체제의 사멸은 불가피하다. 이와 같은 사멸을 피하거나 지체시키기 위해서는 인민들이 자주 소집될 필요가 있다. 인민이 주권을 가진 단체로서 합법적으로 소집되는 순간, 정부의 모든 권한은 중지되고, 집행권은 정지되며, 말단 시민의 인격 또한 최고 행정관의 인격과 마찬가지로 신성불가침한 것이 된다.


<군주가 실재하는 상급자를 인정하거나 인정해야 하는 그 정지 기간은 그 군주에게 언제나 두려운 기간이었다. 그리하여 통치 체제의 방패이며 정부의 재갈인 그 인민의 총회는 항상 지도자들에게는 두려운 대상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총회의 시민들을 물러서게 하고자 이의와 반론을 제기하고 약속들을 하는 등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위의 책 p.133


주권은 양도할 수 없는 이유와 마찬가지로 대표될 수도 없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보편적 의지에 있다. 그런데 이 의지는 절대로 대표될 수 없다. 그것은 그것일 뿐이거나, 아니면 다른 것이다. 그 중간은 없다. 그러므로 인민의 대의원은 그들의 대표자도 아니며, 대표자가 될 수도 없다. 정부의 수립은 계약이 아니다. 왜냐하면 국가에는 단 하나의 계약, 즉 결합association의 계약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부의 수립은 개별적인 행동이다. 정부 수립 행위는 복합적이거나, 아니면 다른 두 행위 즉 법 제정과 법 집행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첫 번째 행위를 통해 주권자는 이런저런 형태의 정부를 수립할 것임을 규정한다. 이 행위가 곧 법이다. 두 번째 행위를 통해 인민은 수립된 정부를 책임지게 될 지도자들을 임명한다. 그런데 이 임명은 개별적인 행위이기에 첫 번째 행위처럼 법은 아니고, 단지 첫 번째 법의 결과물로 정부의 기능일 뿐이다. 어려운 점은, 정부가 존재하기 전에 어떻게 정부 행위를 가질 수 있는지, 주권자이거나 아니면 신민일 뿐인 인민이 어느 상황에서 어떻게 군주 혹은 행정관이 될 수 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또한 여기에서 우리는 모순되게 보이는 작용들을 조정하는, 통치 체제의 놀라운 속성 가운데 하나를 발견한다. 왜냐하면 이 작용은 주권에서 민주정치로의 갑작스러운 전환에 의해서 생기기 때문이다. 그 결과로 눈에 띄는 어떤 변화도 없이 오직 전체 대전제의 새로운 관계에 의해서만 시민들은 행정관이 되고, 보편적인 행위에서 개별적인 행위로 그리고 법에서 집행으로 옮겨간다. 이 관계의 변화는 실례가 없는 이해하기 힘든 공론空論이 아니다. 그것은 영국 의회에서 매일 일어난다. 그곳에서는, 어떤 상황에서는 국사를 더 잘 토론하기 위해 하원이 전원 위원회로 바뀌어, 이전처럼 주권자의 단순한 위원회가 된다. 그리하여 그 위원회는 이어 전원 위원회로서 조금 전 결정한 사항을 하원으로서 자신에게 보고하며, 전원 위원회 자격으로서 이미 결정한 사항을 하원의 자격으로 다시 심의 의결한다.> 위의 책 p.140~141


정부의 월권행위를 막거나 늦추는 데 적합한 것은 정례 총회의 소집이다. 무엇보다 그 총회를 열기 위해 정식 소환장이 필요하지 않을 때 더욱 더 적합하다. 왜냐하면 그때 군주는 자기가 법의 위반자이며 국가의 적이라고 선언하지 않는 한 그 총회를 막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⓸ 4부 : 도시국가의 작동


<많은 사람이 서로 결합하여 자신들을 하나의 단체로 생각하는 한, 그들은 공동의 보존과 전체의 안녕에 관련되는 단 하나의 의지만을 갖는다. 그때 국가의 원동력은 기운차고 단순하며, 국가의 원리는 명확하고 자명하다. 그래서 얽히고설켜 서로 상반되는 이해관계를 갖지 않으며, 공동의 이익은 어디에서나 명백하게 드러나기에 그것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양식만 가지면 된다. 평화와 단결, 그리고 평등은 정치적인 교묘함을 매우 싫어한다. 곧고 단순한 사람들은 그 단순성 때문에 속이기가 어렵다. 술책과 교묘한 구실은 그들을 설득하지 못한다. 그들은 쉽게 잘 속을 만큼 교활하지도 않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인민들의 나라에서 농부들이 참나무 밑에 무리지어 모여 국사를 처리하고 언제나 현명하게 행동하는 것을 볼 때, 수많은 기교와 이상한 것들로 자신들을 유명하게 만들지만 그와 동시에 비참하게도 만들어버리는 다른 나라 국민들의 세련됨이라는 것을 경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위의 책 p.144


보편적 의지는 소멸될 수 없다. 많은 사람이 서로 결합하여 자신들을 하나의 단체로 생각하는 한, 그들은 공동의 보존과 전체의 안녕에 관련되는 단 하나의 의지만을 갖는다. 그래서 서로 상반되는 이해관계를 갖지 않으며, 공동의 이익은 어디에서나 명백하게 드러나기에 양식만 가지면 그것을 알아볼 수 있다. 모든 주권 행위에는 지극히 당연한 투표권이 있다. 투표권은 누구도 시민에게서 빼앗을 수 없고, 선거로 선출되는 행정관은 구성원이 의사를 개진하고 제안하고 표결하고 토론할 권리를 가진다.


<몽테스키외는 추첨에 의한 선거는 민주주의의 본질에 속한다고 말한다. 동의한다. 그런데 왜 그런가? 그는 이렇게 말을 계속한다. 즉 추첨은 어느 누구의 마음도 아프지 않게 하는 선거 방식이다. 그것은 모든 시민에게 조국에 봉사할 적합한 희망을 부여한다고. 하지만 이 말은 질문에 대한 적절한 해명이 되지 못한다. 지도자의 선거는 정부의 역할이지 주권의 역할이 아니라는 것에 유의한다면, 추첨 방식이 왜 민주주의의 본질에 더 부합되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민주주의에서 행정은 행정행위가 적을수록 더 바람직하다. 모든 진정한 민주정치에서는 행정관직은 특권이 아니라 짐이 되는 직책이다. 그러므로 어떤 특정인에게 그 직책을 강요하는 것은 부당한 일일 수 있다. 법만이 추첨에 의해 선출된 사람에게 그 직책을 강요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때 조건은 누구에게나 평등하며, 선택은 전혀 인간의 의사에 의해 좌우되지 않기에 법의 보편성을 손상하는 개별적인 적용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위의 책 p.150


루소의 정치사상의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요소가 있는데, 고대인들의 정치 체제의 예가 곧 그것이다. 그는 먼저 로마 민회의 예를 든다. 국가를 구성하는 부분들 사이에 정확한 균형을 확립할 수 없을 때나, 제거할 수 없는 어떤 원인들에 의해 끊임없이 그 균형이 깨질 때, 다른 행정관직 단체에는 속하지 않는 특수한 행정관직을 창설하는데 그것이 바로 호민관직이다. 국가의 구원이 명백하게 문제될 때에는 가장 적당한 자에게 그 책무를 위임하는 특별 법령에 의해 국가의 안전에 대비해야 한다. 위험이 너무 커서 법기구가 그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는 데 장애가 될 때에는, 모든 법을 침묵시키고 잠시 주권을 정지시키게 하는 최고 통치자를 임명한다. 그와 같은 경우, 물론 보편적 의지는 의심의 여지가 없이 확실하다. 인민의 일차적인 목표 또한 국가가 멸망하지 않게 하는 것임 역시 변함이 없다. 이와 같이 입법권의 정지는 그 입법권을 폐지하는 것이 아니다. 입법권을 정지시키는 행정관은 그 입법권을 행사할 수는 없다. 그는 입법권을 지배하지만 그것을 대리하지는 않는다. 그는 법을 만드는 일만 제외하면 모든 일을 할 수 있다. 그가 바로 독재(집정)관으로, 독재관의 임명이 위기 상황에서 국가 구원의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공화국 초기에는, 아주 자주 독재정치의 도움을 받았다. 왜냐하면 국가는 자신의 구조가 갖는 힘에 의해 스스로를 지탱할 수 있을 만큼 아직 기반이 다져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에는 다른 시대라면 필요했었을 많은 대비가 양속良俗에 의해 불필요했기에 독재집정관이 권력을 남용하는 것에 대해서나 임기 이상으로 그 권력을 쥐려고 시도하리라는 것에 대해 걱정하지 않았다. 그 반대로, 너무도 권력이 커서 그것을 부여받은 사람에게는 부담이 되었던 것 같다. 그만큼 그 사람은 그 권력을 벗어던지려고 서둘렀다. 마치 그것이, 법을 대신하는 자리로서 너무도 힘들고 너무도 위험한 자리였던 것처럼 말이다!> 위의 책 p.169


마지막으로 루소는 시민 종교에 대해 논하며, 시민 종교는 사회계약과 애국심을 공고히 하는 데 기여해야 한다고 말한다.


<사회계약이 부여하는 인민에 대한 주권자의 권리는, 내가 이미 말한 것처럼 공익성의 경계를 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인민들은 자신의 의견이 공동체에 중요한 한에서만 주권자에게 알려야 한다. 그런데 국가로서는 각 시민으로 하여금 자신의 의무를 사랑하도록 하는 종교를 갖게 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그 종교의 교의는 그것이 윤리와 관련되는 한에서만, 그리고 그 종교를 믿는 사람이 타인들에 대해 지키는 의무와 관련되는 한에서만 국가와 그의 구성원에 이익이 된다. 그 외에도, 각자는 자신이 원하는 의견을 가질 수 있지만 주권자는 그것을 알아야 할 의무는 없다. 왜냐하면 주권자는 영적 세계에 대해서는 권한이 없기 때문이다. 인민이 이 세상에서 훌륭한 시민이기만 하면 되었지 내세에서 그들의 운명이 어떻든 그가 상관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권자가 그 항목을 정해야 하는 순전히 시민적인 신앙고백이 있다. 그 항목이 정해지는 것은 종교 교의로서가 아니다. 그것이 없으면 훌륭한 시민도 충실한 인민도 될 수가 없는 사회성의 의식으로서 정해져야만 한다. 누구에게도 그 항목을 믿게 강요할 수는 없지만, 주권자는 그것을 믿지 않는 사람이면 누구나 국가에서 추방할 수 있다. 그는 그 사람을 신성 모독자로서가 아니라 비사회적인 자로, 법과 정의를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는 자로, 그리고 또 필요할 때 의무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칠 수 없는 자로서 추방할 수 있는 것이다. 그 교의들을 공개적으로 인정해 놓고도 마치 그것을 믿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사형에 처해져야 한다. 그는 가장 큰 범죄를 저질렀으며, 법 앞에서 거짓말을 했기 때문이다. 시민 종교의 교의는 간결하고 항목 수가 적어야 하며 설명과 주석 없이 명확하게 규정되어야 한다. 강하고 총명하며 자비롭고 선견지명이 있어 앞을 대비하는 신의 존재, 내세, 의인들이 누리는 행복, 악인들에 대한 징벌, 사회계약과 법의 신성함 등이 긍정적인 교의들이다. 나는 부정적인 교의로는 오직 하나, 즉 불관용으로 한정시키겠다. 그것은 우리가 거부한 종교들의 속성인 것이다. 내 생각에, 시민적 불관용과 신학적 불관용을 구별하는 사람은 잘못된 것 같다. 이 두 가지 불관용은 따로 생각할 수 없다. 영벌을 받은 자로 간주되는 사람들과 평화롭게 사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들을 사랑하는 일은, 그들을 벌하는 신을 미워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니 그들에게 종교를 되찾게 하든지, 아니면 고통을 주어야 한다. 신학적인 불관용이 받아들여지는 곳이면 어디서나, 어떤 시민적인 효과effect civil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신학적 불관용이 그 효과를 가지자마자, 주권자는 속세에서조차 이제 주권자가 아니다. 그때부터 성직자들이 진정한 주인이며, 왕은 그들의 관료에 지나지 않는다. 배타적인 국민 종교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할 수도 없는 지금, 타 종교를 인정하는 모든 종교를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종교의 교의가 시민의 의무에 전혀 반하지 않는 이상 말이다. 그러나 “교회 밖에서는 구원이 없다.”라고 감히 말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국가로부터 추방되어야 한다. 국가가 교회가 아니고 군주가 교황이 아닌 이상 말이다. 이와 같은 교의는 오직 신정정치에서만 유익할 뿐이며, 그 밖의 모든 정치에서는 해롭다. 앙리 4세가 가톨릭교회를 받아들였다고 말하는 그 이유는 모든 정직한 사람들로 하여금, 무엇보다 이치를 따질 줄 아는 모든 군주로 하여금 그 종교를 버리게 하고 말 것이다.> 위의 책 p.184~186



정리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인 일반의지는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모든 사회구성원이 정치적 소외와 불평등으로부터 벗어나 진정한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모두가 참여하는 이상 형성 과정이 수립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공공선에 대한 인식과 공공정신이 자발적으로 형성되어야 한다. 루소는 그리스적인 폴리스를 정치적 이상으로 삼아 정치공동체의 규모, 공동체 내부의 동질성과 경제적 형평성 등이 일반의지의 형성에 중요한 조건들임을 밝힌다. 나아가 고전적 공화주의의 전통을 계승하여 시민 교육을 통한 덕성의 함양, 입법가의 자질, 시민 종교의 기능에 대해서도 세심한 관심을 기울인다.

루소는 모든 사회구성원이 시민으로서의 자유를 향유할 수 있다는 민주적 공화주의의 이론적 기초를 제시함으로써 고전적 공화주의에 내재한 배타성과 강압을 극복하고자 시도하였다. 루소의 민주적 자치의 이념에 의해 자유와 도덕, 자연권과 정치적 의무가 결합됨에 따라 그 당시 정치사상의 주류인 정치 현실주의에 대한 비판과 극복의 가능성이 열리게 되었다.



(2) 루소가 헤겔에 끼친 영향



헤겔 철학의 탄생 배경


<헤겔 철학은 ‘계몽’과 ‘프랑스 혁명에 의한 계몽의 좌절’이라는 이중의 한정요소 없이는 이해될 수 없다. 왜냐하면 헤겔 철학은 프랑스 혁명에 의해 형성된 세계, 보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나폴레옹에 의해 색조가 변해버린 혁명의 현실화에 의해 형성된 세계에서 ‘이성의 지배’와 ‘이성의 존재론적 우선성’을 말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식의 혁명의 실현으로 인해 전체 유럽은 부르주아 사회 내에서 자생적으로 전개되던 사회문제와 마주하게 된다. 부르주아 사회의 내적 모순이 드러나기 시작한 새로운 현실에서 계몽주의적 이성의 왕국은 더 이상 철학적 사유의 중심으로 기능할 수 없게 되었다.

이렇듯 새로운 상황에 대한 가장 즉각적인 반응은 이성의 존재론적 유효성을 부인하는 것이었다. 낭만주의는 이성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 비합리irratio를 집어넣었다. 여기서 비합리란 말은 현재의 세계상황에 내재하는 모순을 경멸한다는 것, 나아가 아직 모순이 드러나기 이전의, 참되게 보이는 조화의 영역인 과거로 되돌아가서 하나의 길을 추구한다는 것을 내포한다. 한편 이와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이는 사상가들도 있다. 이들은 이 새로운 형태의 현재를 현재의 모순을 극복한 참된 이성의 왕국으로의 이행과정으로 파악한다. 피히테가 바로 그 경우이다. 그는 자신의 시기를 “완전한 죄악의 시대”로 고찰했다. 그는 이 시대의 반대편에 현실적 이성의 왕국이라는 미래의 상이 반짝거리고 있다고 한다. (많은 유토피아주의자들도 피히테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이긴 하지만 혁명 이후 모순에 빠진 바로 오늘부터 시작하여 미래 속에서 현재를 극복하고자 하는 전망을 현실적인 것으로 드러내는 사회-역사적 세계상을 추구한다.) 헤겔은 이 양극단들 사이에 놓인다. 그의 위치의 특이점은 그가 현재 자체에서 이성의 왕국을 철학적으로 증명하고자 한다는 데 있다. 이를 통해 모순은 존재론적 중심범주이면서 동시에 논리적-인식론적 범주로 발전해갔다. 위대한 철학자들 중에서 헤겔이 최초의 의식적인 변증법론자는 아니다. 하지만 그는 존재론적인 근본원리인 모순이 셸링의 “지적 직관”과 같은 것으로 철학적으로 극복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은, 헤라클레이토스 이후 최초의 의식적인 변증법론자이다. 따라서 철학의 토대인 모순성은 이성의 실현태인 실제 현실과 결합해 있는데, 헤겔 사유의 존재론적 초석들은 바로 이 모순성을 형성한다. 모순과 현실의 이러한 결합으로 인해 헤겔에게서 논리학과 존재론은, 당시의 일반적인 사유와는 다르게, 아주 친근하고 강하게 서로 결합한다.> 『사회적 존재의 존재론』(G.Lukacs 著, 이종철・정대성 譯) 中


일반적인 철학의 관점에서뿐 아니라 헤겔의 기본적인 입장을 이해하는 관점에서도 이성의 왕국이라는 계몽적 사유는 아주 중요하다. 여기에서 이성은 자연과 사회의 존재와 생성을 설명하는 최종적 원리이다. 철학의 과제는 이 원리를 발견하고 이 원리로부터 작업하는 것인데, 이를 통해 사회는 변화하지 않는 영원한 자연법칙들에 상응하게 된다. 따라서 본질적으로 서로 동등한 자연과 이성의 실천적이고 실질적인 이러한 융합은 인간의 사회적 삶의 영역에서 볼 때 현재에 대한 존재론적 규정이라기보다 미래적 요청이다.

계몽은 프랑스 혁명을 준비하는 철학이며, 헤겔의 철학은 그 혁명의 결과를 나타내는 철학이다. 계몽의 철학은 르네상스 이래 진행되어온 경향들의 발전이자 확대이다. 인류는 르네상스 이래 현세에서의 통일적 존재론을 구축하고자 하였으며, 이로써 이전의 초월적-목적론적-신학적 존재론을 몰아내고자 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생각의 배후에는 사회적 존재의 존재론이 자연존재론의 토대 위에서만 구축될 수 있다는 엄청난 사상이 숨겨져 있다. 계몽은 사회적 존재의 존재론을 자연존재론에 근거하여 구축한다. 이때 계몽은 이러한 근거를 너무나 통일적으로, 너무나 균질하게, 그리고 너무나 직접적으로 파악함으로써 궁극적 통일의 내부에 있는 질적 차이의 존재론적 원리를 사상적으로 파악할 수 없게 된다. 바로 여기에서 계몽은 그 이전의 사조들처럼 파산하고 만다. 자연개념 내부의 존재론적인 균열은 이러한 상이성을 통일성 내부에서 파악할 수 없으며, 따라서 결코 통일적 존재론이 구축될 수 없다는 사실의 현상적 형식일 뿐이다.


루소는 사회적 변증법의 본질적 계기들을, 특히 자연으로부터의 이탈의 근거와 그 역동적 필연성을 발견한다. 이때 그는 사회-인문적 당위의 중심범주로서의 자연을 유물론적 자연존재론에서 철저히 분리하여 내적으로 가장 모순적인, 하지만 그 때문에 더 효과적인 방식으로 이 자연을 관념론적인 역사철학의 중심점으로 삼는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의식적으로 당시의 유물론적 존재론을 파괴한다.

홉스에서 출발한 근대 정치철학의 이론적 출발점이 초월적 권위에 있었다면, 루소와 헤겔의 이론적 출발점은 법에 근거한 자유의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소와 헤겔의 정치철학적 입장은 분명히 구별되는데, 그 구별점으로 헤겔은 루소가 자유의지의 현존으로서의 법을 개념적으로 적절하게 파악하지 못했음을 지적하고 있다.

헤겔은 선악을 모순되는 대립 항으로 간주하지만, 선악의 동일성도 주장한다. 선악은 모순되면서 동시에 모순되지 않는다는 비동일성과 동일성의 구조를 지닌다. 선악의 비동일성과 동일성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헤겔은 초 합리적 선악 개념을 정립한다. 이러한 선악관의 단초는 루소의 문명관에서 선의 전개가 악의 전개라는 독특한 문화 전개와 맞닿는다. 루소의 선악의 동시적 심화는 칸트의 종교철학의 근본악과 달리 종교철학과 역사철학 모두에서 나타나는 문화적 악과 반사회적 사회성 개념과 관련이 깊다. 인간성의 소질이 극단화되어 나타나는 경쟁심으로서 문화적 악은 문화를 발전시키는 악이면서 역사를 도덕화하는 자연적 장치가 된다. 문화화와 도덕화의 동시적 심화 속에서 도덕화의 반기제로서 악의 심화 내지 악의 발흥이 야기된다. 그러한 측면이 헤겔에게는 영웅의 열정이나 정복욕으로 나타난다. 시대이념과 관계없이 작용하는 영웅의 정복욕은 전쟁을 야기하고 그 전쟁은 변화를 기다리는 시대 요청, 시대 요청을 끌고 나가는 절대정신의 간교한 꾀가 된다. 전쟁은 곧 새롭게 발전된 질서와 발전된 문화를 야기하는 요소이며, 이 요소를 통해 절대정신은 자기를 실현한다. 악의 문제가 단순히 윤리적으로, 종교적으로 선의 대립 항으로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와 역사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며, 형이상학적 체계에서 선악이분법으로만 이해할 수 없는 측면이 문화와 관련하여 나타난다.



헤겔 『정신현상학』에서 엿볼 수 있는 루소의 영향


『정신현상학』은 헤겔의 이른바 예나 시대(1801~1807년)를 대표하는 저작이자 헤겔 최초의 주저이다. 나폴레옹 군대가 예나에 입성한 날인 1806년 10월 어느 날 심야에 탈고되어 편집을 거치다가 1807년 4월에 밤베르크에서 처음 출판되었다. ‘정신현상학’이란 일차적으로 의식의 경험에 관한 학Wissenschaft der Erfahrung des Bewußt-seins인 바, 이는 우리의 의식이 여러 가지 경험을 통하여 진리를 파악하여 가는 과정을 서술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경험’이란 의식이 자기 자신의 내용과 대립을 극복하고 자기에게로 돌아와서 자신과 완전히 일치하게 되기까지의 의식의 변증법적 운동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연대적으로나 체계적으로나 그의 사상의 출발점이 된 저작이며 유럽 철학사에서는 손꼽히는 고전의 하나이다. 헤겔은 이 책에서 정신이 감각적 확실성에서 출발하여 과학적 오성[지성], 이성적 사회의식, 종교 등의 단계를 순차적으로 변증법적 경로를 거치며 끝까지 올라가 끝내는 절대지絶對知인 완전한 자각에 이르는 도정을 서술하였다.

『정신현상학』은 인간 정신이 그 일상의 의식 형태에서 출발하여, 어떤 근거에 의거하여, 또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철학적 의식에 도달하는가를 논한 것이다. 그리하여 『정신현상학』은 먼저 (대상)의식에 대한 논의를 설정하고, 직접적, 자연적인 의식으로서의 감성적 확신에 대한 장章에서 출발한다. 여기서 헤겔은 감성적 확신・지각・오성[지성]이라는 의식의 변증법적 운동을 통한 대상의식의 자기의식으로의 전화轉化를 묘사하고 있다. 대상의식으로부터 시작한 의식의 운동 속에서 의식은 대상세계의 배후에 있는 자기 자신을 보게 되고, 그래서 대상의식은 자기의식으로 전환한다. 대상의식에서 의식의 대상은 의식 자신 밖에 즉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었다. 이에 반해 자기의식에서는 자기 자신이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자기의식은 다른 어떤 것도 다 그렇듯이 단번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고 변증법적 3분법에 따라서 자기 확신의 진리 → 자기의식의 자립성과 비자립성 → 자기의식의 자유라는 3단계를 거쳐 완성되는 것이다. 이와 동시에 자기의식은 이성으로 발전하여 간다.

자기의식의 최종 단계, 즉 자기의식의 자유의 단계에 도달하면 의식과 대상, 주관과 객관, 개별과 보편이 통일되어 이전의 자기의식은 이제 이성으로 나아간다. 한마디로 이 이성은 대상의식과 자기의식의 통일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대상의식은 대상과 의식이 대립하고 진리는 오직 대상 쪽에 있다고 생각되었고, 자기의식은 그 진리가 대상 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 속에 있음을 발견한다. 그러나 자기의식에 있어서 자아는 자신을 그 대상들 안에서 인식하기는 하였으나 아직 절대적 실체이자 동시에 절대적 주체이기도 한 정신으로서의 의식일반과 자신이 통일되어 있다는 것을 파악하지는 못한다. 이 통일에 대한 의식이 바로 이성이다.

“이성은 (자기가)모든 실재성이라는 확신이다.”(Die Vernunft ist die Gewißheit, alle Realität zu sein) 요컨대 이성으로 현상하는 정신은 자신만이 실재성이라고 확신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이성의 초기 수준에서 실재성이란 다만 확신하고 단언할 뿐 비매개적인 직접적 단계, 즉 즉자적 단계에 있을 따름이다. 이에 입각해서 “공허한 관념론”der leere Idealismus이 형성된다. 따라서 이성은 이러한 공허를 벗어나기 위해서 자신이 실재성을 지니고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입증은 이론적 이성 또는 관찰하는 이성의 단계에서 실천적 이성의 단계, 그리고 자각적 이성 또는 사회적 이성의 단계로 나아가면서 더욱 분명하게 완성된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즉자적 단계에 있는 이성은 대자적이기도 한 이성으로, 즉 즉자적이고 동시에 대자적인 이성, 곧 정신으로까지 나아간다.

정신은 상승하여 절대적 정신 곧 ‘자기 확신적 정신’으로 지양되어 간다. 헤겔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제 이성은 정신이 될뿐더러 이것은 즉 이성이 전체를 포괄하는 실재라는 데 대한 확신을 진리의 단계로까지 고양시키면서 동시에 이성이 그 자신을 바로 자기의 세계로서, 그리고 다시 이 세계를 자기 자신의 것으로 의식하는 가운데서 이루어진다.> 『정신현상학 Ⅱ』 中


세계를 자기의 것으로 하고 그 운동을 나의 것으로 하는 정신이야말로 ‘절대적인 진실의 실재’라고 할 것이다. 정신의 성립과 함께 ‘의식의 경험의 학’은 끝을 맺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정신현상학』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이제 ‘자기 자신을 바로 자기의 세계로서, 그리고 다시 이 세계를 자기 자신의 것으로 의식하는’ 이 정신의 전개를 역사적으로 추적하여 가는 것이다. 끝으로 『정신현상학』은 절대정신을 이야기한다. 정신이 스스로 정신임을 자각한 정신, 이것이 곧 절대정신이다. 이제 ‘자기 확신적 정신’은 절대정신으로 지양된다. 그리고 절대정신이 직접 자기를 직관하는 것은 종교의 장章에 와서야 가능하다. 절대적 정신이 직접적, 대상적으로 직관되고 표상되는 단계가 종교인데, 그것이 순수 사유 또는 개념으로서 자각되면 절대지絶對知에 이르게 된다.


- 프랑스 혁명은 공포정치로 인해 좌절되었다. 천상과 지상을 조화시키려는, 다시 말해 국가를 구체적으로 일반의지로서 실현하고자 한 민중의 숭고한 노력도 사실상 역사적 대실책이었다. 그리하여 정신은 ‘또 다른 지상’으로 도피하여 도덕적 정신이 된다. 루소의 일반의지는 외형상으로 칸트의 도덕주의 및 독일 관념론에 의해 성취된 내면적 혁명으로 계승되었다. 이 혁명은 정신의 자기知에서 정점에 도달하고 또한 이 자기知는 종교라는 새로운 지반, 즉 역으로 그 진리를 절대知, 철학 속에서 발견하도록 운명 지어진 지반 속에서 표출된다. 


- 『정신현상학』은 의식이라는 중간과정을 거쳐 정신에로 나아가는 영혼의 여정이다. 헤겔이 이와 같은 여정을 생각하게 된 것은 칸트, 피히테, 셸링 등 철학적 저술들에 의해서 암시되어진 결과이겠지만, 교양소설roman de culture의 영향 또한 중요하게 보인다. 헤겔은 튀빙겐 대학 시절 루소의 『에밀』을 읽었다. 그는 이 작품에서 고유하고 창조적으로 형성되어 가는 경험을 통하여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유에로 상승, 고양돼 나가는 자연적 의식의 역사를 처음으로 발견하였다. 이 작품의 교육학적 의미를 말하고 있을 때, 『정신현상학 서설』은 루소의 작품에서도 다루어졌던 개체적 진화와 종種적 진화의 관계를 강조하기도 한다.


- 『정신현상학』이 제기하는 문제는 세계사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헤겔이 (정신적)실체라고 부르는 것을 자각하면서 필연적으로 학적 知로 형성되어가야만 하는 개별자로서의 개인l’individu singulier의 정신적 도야(교양)의 문제이다. 이것은 이미 루소가 『에밀』에서 독자적으로 설정했던 과제와도 무관하지 않은 특수한 의미에서의 교육적pédagogique 과제이다. 루소의 작품에 대하여 혹자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그것의 근본 관념은 엄격한 의미에서 과학적이다. 만약 개체의 발전이 種의 진화를 압축적으로 반복하고 있다면 어린이의 교육은 대체로 인류의 보편적 운동을 재현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루소가 이 점에서부터 감성적 지각의 시기가 반성의 시기에 선행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는 데 비하여, 헤겔은 인류사 일반이 개인적 의식 속에 내재하는 문제를 진지하게 취급하고 있다.


- 현상학적 측면에서의 이성에서 행위하는 자기의식의 전개가 취하는 세 가지 형식이 있다. 각각 ‘쾌락과 필연성’, ‘마음의 법칙과 자만의 망상’, ‘덕성과 세계의 행정’이다. 쾌락과 필연성에서 순수한 쾌락주의는 아무런 반성도 없이 세계의 향유를 추구하여 결국 개체성을 무화시킨다. 필연성은 더 이상 자기의식 밖의 냉혹한 운명으로서 나타나지 않는다. 개체성에 대하여 존재했었던 이 필연성은, 반성으로 말미암아 개체성의 내면으로 이행하였다. 개체성은 이제 자신의 행복에 대한 욕구가 필연적인 욕구임을 직접적으로 알게 된다. 이 욕구가 보편적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개체적 자기의식은 세계를 향유하면서 거기서 자신을 재발견하고자 하는 욕구인 동시에 그 자신의 자기에 대하여 보편적인 것이다. 만약 보편성이라는 말이 원리상 모든 것에 타당한 질서 또는 법칙이라는 말과 동일시된다면, 이 새로운 육화 속에서 자기의식이 처음에 취했던 개별성의 너머로 고양되었다고 말해질 수 있으며, 그는 자신의 욕구 속에 법칙의 관념까지도 포용하고 있다고 말해질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는 직접적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에서, 아직은 실존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행동을 위한 목적에 지나지 않는 이 법칙이 마음의 법칙이라고 말해지는 것이다.

이는 헤겔이 그 시대의 센티멘털리즘이나 그 자신이 젊은 시절 한동안 심취했던 루소의 사상, 또는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또한 이번 장의 마지막 부분이 암시하고 있는 것처럼 질풍노도의 시대의 대천재Krafgénie나 쉴러의 『군도』에서 칼 무어가 생각되고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법칙이 마음의 법칙이라고 말하는 것은 개체성의 욕구, 그것의 직접성 또는 자연성이 여전히 극복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또한 우리는 서슴없이 자연적 성향들을 따라야 하며, 우리를 쾌락에로 충동질하는 것은 우리가 사회로 말미암아 타락해 있지 않는 한 결코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최초의 충동은 언제나 선하다. 다시 말하면 본성은 더 이상 개별적인 것으로만 간주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본성은 모든 개체성들을 지배하는 보편적 법칙과 직접적으로 일치하고 있다. 따라서 각각의 개체성이 마음이 지시하는 바를 추구한다면, 제각기 살아간다는 것으로부터 직접적인 환희를 맛볼 것이다. “개체성이 실현하는 것은 그 자체가 곧 법칙인 까닭에 또한 그가 추구하는 쾌락도 만인의 가슴속에 파고들 수 있는 보편적인 쾌락일 뿐이다.” 참으로 루소의 그림자가 짙게 느껴지는 대목이다.


- 영어 단어 ‘alienation’은 기본적으로 ‘이방인 혹은 타자를 만드는 작용’을 의미한다(라틴어 ‘alius’는 ‘타자other’를, ‘alienus’는 ‘다른 사람이나 장소에 소속된다belonging to another person or place’는 뜻을 갖고 있다). 근대 초기에는 권리의 양도에 많이 쓰였다. 가령 그로티우스Hugo Grotius의 자연법 계약 이론에서 그 말은, 안정된 사회질서의 이익을 얻기 위해, 스스로에 대한 주권적 권위를 다른 사람─군주─에게 양도하는 것을 가리켰다. 나중에 정치경제학에서 이 말은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판매와 구매를 통해서 소유권이 한 사람에서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는 것을 가리켰다. 이 두 맥락의 차이가 서로 다른 두 독일어 단어가 가진 의미상의 차이를 만들어냈다. 자연법 이론의 맥락에서는 alienation이 상실이라는 부정적 함의를 가진다. 여기서 본래의 자유는 포기된 것 혹은 낯설어진 것이 된다. 이것이 소외를 독일어 ‘Entfremdung’(이 말은 ‘낯선(alien, 이방인적인)’이라는 뜻의 ‘fremd’에서 유래했다)으로 번역했을 때 갖는 의미이다. Entfremdung은 처음에 도둑질이나 정신적 힘의 상실─혼수상태나 인사불성의 뜻에서─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으나 점차 일반화되어 사람들 사이에서 낯설어짐을 나타내는 데도 사용되었다. 요즘에는 통상 ‘estrangement’(낯설어짐)로 통한다. 반면 정치경제학의 맥락에서는 ‘alienation’, 소유자에게 외적인external 것이 되었음을 가리킨다. 헤겔은 이 두 의미를 넘겨받아 자기 사유 속에서 하나로 통합했다. 그것을 통해 그는 우리가 스스로를 인식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대상으로 외화시킴으로써만, 즉 자신을 소외시킴으로써만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말하려고 했다. 외화라는 말에서 우리는 ‘대상화’라는 의미를 읽을 수 있다. 즉 주체가 그 자신을 대상의 형식으로, 자기 활동의 결과로서 드러내는 것이다. 헤겔은 이러한 외화를, 의식─헤겔에게는 의식이 이상적 활동이다─이 스스로를 대상의 형식으로만, 단순한 결과로서만 인식하는 한에서, 일종의 낯설어짐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헤겔에게 이러한 낯설어짐은 하나의 긴 과정, 즉 의식이 대상의 타자성 안에서 결국 주체로서의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긴 과정의 한 단계에 불과하다. 헤겔은 이 순간을 “절대적 타자성 안에서의 절대적 자기 인식”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이 바로 그의 사유의 절정이다.

‘외화’라는 말은 이미 자연적 자기의 외화 문제를 여러 가지 다른 방식으로 고찰했던 홉스, 로크 그리고 루소와 같은 정치사상가들에 의해 사용되었었다. 만일 우리가 진정으로 법적 상태─헤겔에 의해 그 가장 일반적인 형식에서 자연법에 대한 직접적인 긍정으로 간주된─에서 시작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인격체가 자신의 권리의 전체나 혹은 일부를 거부─사회생활의 조건으로서의 거부─할 수 있는가를 묻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우리는 루소가 사회계약을 정의했던 구절을 상기해 볼 수 있다. “물론 이와 같은 조항들은, 각 구성원이 자신의 모든 권리를 사회 전체에 총체적으로 양도(외화)한다는 하나의 조항으로 환원이 가능하다.”(『사회계약론』 中) 헤겔은 ‘개인의 형성・도야’에 의한 사회적 실체의 실현을 논구하면서 사회계약론의 논지를 인용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우리는 마치 모든 시민들이 모여서 숙고한 것처럼 그리고 마치 다수표가 일반의지를 창출한 것처럼 일반의지의 구성을 상정한다.”(『헤겔 전집』 中) 이러한 묘사를 통해 우리는 하나의 필연적 운동, 즉 ‘자기부정을 통해’ 개별자가 보편자에로 고양되어 가는 운동을 파악한다.


- 정신적 자기의 두 번째 유형인 ‘절대적 자유의 공포’의 단락에서, 절대적 자유로 이행하기 전 유용성의 세계에는 여전히 칸트의 물자체의 외관이 남아 있다. 우리가 현존하는 제도들─군주제, 의회제, 공화제─를 고찰한다면, 우리는 유용성의 세계에서는 이것들이 더 이상 즉자대자적으로 존재하는 제도들로서 절대적으로 정립되어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말하자면 그것들은 그 유용성에 의해서만 정당화되는 것이다. 일관성이 결여된 유용성의 개념은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무엇을 위해, 어떤 의미에서 유용한가? 답변은 오직 보편적인 자기, 즉 루소가 이미 사회계약론에서 논파했던 것처럼 일반의지 내지 사유하는 의지일 수가 있다. 불가분적이며 양도 불가능한 일반의지란 공통적인 자기, 즉 정체政體의 목표이며 토대이다. 따라서 유용성의 세계에는 오직 대상성 및 자기의식에의 대립이라고 하는 외관만이 있을 뿐이다. 보편적인 자기, 즉 일반의지의 사유 속에는 존재하는 것으로서 그러한 의지의 표현이 아닌 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자기의식에 대해 “세계는 그것의 의지일 뿐이며 또한 그것의 의지는 보편적인 의지이다.” 실현되는 것은 일반의지의 분출인 것이다. 법은 법으로서 객관적인 동시에 나의 의지의 표현으로서 존재한다. 나의 의지는 나의 것, 개별적인 의지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보편적인 의지이거나 혹은 루소의 표현을 빌리면 ‘일반의지’다.

<일반의지는 암암리에 이루어지거나 혹은 대표자를 통해서 이루어진 의지와 같이 공허한 사상이 아니다. 그것은 실질적인 의미에서의 일반의지, 즉 모든 개개인 그 자체의 의지이다. 왜냐하면 의지란 즉자적으로 인격성의 의식이거나 혹은 여하한 인격체의 의식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진정한 현실적 의지, 각 사람과 만인의 인격성의 자각적 본질이어야만 한다. 따라서 각 인격체는 언제나 스스로 유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만사를 도모하며, 만인의 행위로 나타나는 것은 곧 각인의 직접적인 의식적 행위인 것이다.> 『精神現象学』(G.W.F Hegel 著, 熊野純彦 譯) 中

한편 루소는 이렇게 적었다.

<우리는 공통적으로 자신의 인격과 자신의 모든 권한을 일반의지의 최고의 지도하에 위임하였다. 그러므로 신체와 같이 우리는 각 구성원을 전체와 불가분적 관계에 놓인 부분으로서 받아들인다.> 『사회계약론』(위의 책) 中

일반의지에로 고양됨으로써 각 개별의지는 私人의 의지로부터 公民의 의지로 바뀐다. 이러한 의지는 직접적으로 그리고 불가분적 방식으로 전체 행정에 참여하여 자기 자신을 그 전체 행정의 통일성에서 재발견하고자 한다.


- 직접적 형식으로는 절대적 자유는 실현될 수 없다. 정신의 生에는 외화와 매개가 필수적이다. 절대적 자유는 긍정적으로 사유되었었다. 그렇지만 현실에 있어서 그것은 순수한 부정성으로서 즉, 개체성이라고 하는 점의 절대적 부정으로서 실현되고 있다. 그것은 절대적 주인인 죽음에 대한 공포로서 경험되는 것이다. 그러한 상호작용은 추상적 부정이 내면화된 새로운 세계로의 이행을 보장해 주며, 그리하여 도덕적 의지로서의 순수의지와 순수知가 된다. 헤겔은 이것을 ‘자유로운 주관성의 각성’이라 부른다. 루소의 일반의지가 칸트의 순수의지로 된다. 다시 말해 프랑스 혁명의 세계가 독일 관념론의 도덕적 세계─창조적 주관성에로의 이행─로 화한 것이다.


- 언어는 보편자를 진술하며, 또한 스스로에게 감각적인 현재성을 부여한다. 언어는 정신의 진정한 표현이다. 『정신현상학』 전체에 걸쳐 언어는 정신의 生의 모든 중요한 계기마다에 수반하고 있다. 그것은 모든 계기의 근원성을 구현한다. 언어는 또한 문화의 세계에서 본질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왜냐하면 자아가 스스로를 완벽하게 외화시키고 실체적 국가가 인격성을 획득할 수 있는 것은 언어의 매개를 통해서이기 때문이다. 또한 자기소외된 자아의 분열을 진술하는 것도 언어이다. 단지 이 시대의 문학만이 이와 같은 정신의 분열을 표현할 수가 있다.

도덕적 의식(칸트적 의미에서)에서 자기는 아직 현실적인 실존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그 의식은 침묵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지금 이와는 대조적으로 그 내면적인 신념 속에서 스스로에 대해 확신하는 자기를 보편화하는 것은 오직 언어뿐이다.

<양심의 언어를 이루고 있는 내용은 자기 자신을 본질로서 아는 자기이다. 언어는 오직 이러한 자기만을 표현하며 또한 이러한 표현이 행동의 진정한 현실성이고 타당성이다. …보편적 자기의식은 한낱 존재할 뿐인 특정한 행동으로부터 자유롭다. 현존재로서의 이러한 행동은 의식에게 아무런 타당성을 갖지 못한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이러한 행동이 의무라고 하는 신념과 또한 그 신념이 언어 속에서 실현되고 있다는 점이다.> 『精神現象学』(G.W.F Hegel 著, 熊野純彦 譯) 中

여기서 우리는 루소의 『고백록』으로부터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아름다운 영혼의 고백』에 이르는 문학을 상기한다. 특정한 행동은 필연적으로 인정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가 그 신념에 따라 행동한 것에 부여하는 확신이다. 위 작품들과 같은 자아의 문학 전체 속에서 뚜렷하게 빛을 발하고 실현된 자기의 내면적인 확신이다. “그것은 현실적인 것으로 정립되어야 하는 형식이다. 그것은 그렇게 언어 속에서 실현되는 자기, 그 자신을 참된 것으로 언표하는 자기, 바로 이 언어 속에서 모든 자기를 인정하고 또 그것들에 의해 인정된 자기인 것이다.”


정리


한 국가 안에서의 보편적인 문화체계와 사회진보를 다루는 루소와, 역사발전의 선험적 틀을 마련한 칸트의 영향관계 속에서 선의 전개와 악의 심화는 동시에 작용하며, 심지어 칸트는 악 자체가 선하다고까지 주장한다. 칸트는 자연의 역사는 신의 작품이라서 선에서 시작하지만, 자유의 역사는 이성의 전개이긴 해도 인간의 작품이라서 악에서 시작된다고 주장한다. 루소도 신의 작품으로서 자연은 선에서 시작하지만, 문화발전 속에서 이루어지는 선의 심화는 동시에 악의 실현과 심화를 야기하기 때문에 문화와 역사발전을 비판적으로 조명한다. 그러나 칸트의 악은 그저 악과 대립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선의 실현에 도움이 되는 악이다. 악덕에 대한 충동 또한 악의 원인이 아니라 그 자체로 선한 것이다. 악은 문화적 악덕, 반사회적 사회성으로 나타난다.

이 악개념은 문화와 역사의 진보를 배제하고서는 불가능하며, 역사 안에서 도덕성과 악의 긴장관계를 배제하고서는 불가능하다. 헤겔은 악 자체에 천착하지도, 악을 선한 것으로 간주하지도 않지만, 청년기에는 악을 인간이 지닌 선입견, 편견에 기인한다고 주장한다. 루소와의 사상사적 영향관계 속에서 선악의 전개와 심화라는 틀이 헤겔에게 작용하고 있으며, 이성성의 심화를 위해 이와 모순되는 비이성적, 반이성적 대립항이 필요하다. 대립의 심화와 모순의 첨예화를 통해 새로운 통일과 화해를 이뤄나가는 과정에서 헤겔도 루소적 모습을 내비치기는 한다. 그러나 악에 대한 이율배반적 태도를 해소하려고 하는 헤겔이 이성의 실현을 위한 반이성과의 대립, 반이성과 이성의 통일 및 새로운 지양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초합리적 지평을 마련하고 있다.


헤겔은 『법철학』에서 루소를 약간 비판적으로 언급하는데, 그에 따르면 『사회계약론』은 일반의지라는 뛰어난 개념을 도출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겨우 특수의지의 총합으로밖에 표현하지 못한 한계를 지녔다. 특수의지를 아무리 많이 모아도 전체의지가 만들어질 뿐 일반의지가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이 때문에 헤겔은 전체의지와 일반의지의 차이를 ‘사회’와 ‘국가’의 차이로 이해하려 했다. 그에 따르면 일반의지, 즉 ‘국가의 의지’는 개인 의지의 집합이 아니라 이와 논리적으로 다른 수준에 있는 더 큰 무엇, 개인 의지의 집합이 스스로를 반추하고 재귀적으로 파악해 하나의 의지로 실체화한 것이어야 한다. 비록 그것이 결과적으로 일반의지라는 개념의 신비화에 불과하고, 실제 헤겔은 일반의지=국가의 의지가 사회에서 출현하는 구체적인 과정, 이를 가능케 하는 조건에 대해서는 전혀 논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칸트에서 시작하여 피히테, 셸링을 거쳐 헤겔에서 완성되는 독일 관념론의 면면은 이성, 오성의 범위를 어디까지 파악하고, 어디까지 적용할 수 있느냐를 둔 팽팽한 줄다리기였다. 다르게 표현하면 데카르트부터 시작된 이성과 비이성의 이분법은 마침내 헤겔의 변증법에 이르러 극복된다. 여기에서 루소가 미친 영향력, 그의 공헌이 얼마나 큰지는 이미 충분히 확인한 대로이다.



(3) 일반의지 2.0


개관


아즈마는 본서의 한국어판 번역자 안천과의 대담에서 “루소를 제대로 읽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후반, 아마도 2006~2007년쯤”이라 밝혔다. 본서에서 아즈마는 루소의 일반의지를 “의사소통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다양한 의견을 몇 가지 대립축으로 환원해버리기 때문에 오히려 다양성을 억압하고 만다. 소통 없는 의견의 집약이 가능해지면 원래의 다양성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인민의 일반의지를 파악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는 ‘집단지성’의 원리에 비추어 볼 때, 의사소통을 경유해서 단순화를 거친 판단에 비해 보다 정확한 판단을 이끌어낼 것이다.” 라 재해석한다.

이는 일전에 쓴 파시금 관련 글( https://brunch.co.kr/@rh3244/14 )에서 지적한 ‘궁극의 무책임 체계’로서의 대의제 민주주의의 허실을 적확하게 꿰뚫고 있다. 시스템의 한계를 감안하여 선출한 국민의 대표가 과연 충분한 대표성을 띄는지 파고들지 않는다면 국회의원이 100명이든 10명이든 상관없고, 심지어 한 명의 참주까지도 허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선진국들은 대의제 민주주의를 정치 체제로 채택하고 있으며, 경제 체제로는 자본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일반의지 2.0』의 제안은 그러한 국가들 모두에게 해당될 수 있다. 아즈마는 그런 제안을 하게 된 ‘선진 자본주의 사회의 공통된 맥락’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우선 현대사회가 매우 복잡해졌다는 사실을 꼽을 수 있습니다. 헤겔이 생각했던 절대정신으로서의 국가는 더 이상 사회 전체를 아우르기 힘듭니다. 달리 말해 복잡성이 증대해서 대의제 민주주의가 제대로 기능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또 하나, 일정 수준의 인권 의식이 선진 자본주의 사회에 자리 잡았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여기에는 ‘인간을 사람으로 취급할 것이냐, 물건으로 취급할 것이냐’라는 어려운 문제가 놓여 있습니다. 사람으로 취급한다는 것은 한 사람 한 사람 주체로 받아들여 최선을 다해 대화하는 것을 말합니다. 한편 물건으로 취급한다는 것은 통계의 숫자로, 노동력으로 취급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근대적인 인권 의식이 충분히 침투하지 않은 사회에서 인간은 대부분 물건 취급을 받아야 했고, 지금도 그런 지역이 존재합니다. 그와 같은 사회에서는 인간을 사람으로 취급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그러나 인권 의식이 일반화된 사회에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인격으로 존중받는다는 전제하에, 인간의 사물적인 측면을 통계적으로 취급하는 시점도 도입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반의지 2.0』의 제안은 ‘지금까지 우리는 유권자를 오로지 고유의 주체로 다루어왔지만, 오히려 유권자의 의지를 사물처럼 다루고 수학적으로 취급하는 방식도 추가로 고려해보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근대적인 인권 의식이 사회에 스며든 정도에 따라, 이 제안은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저는 충분히 민주화된 사회, 그러니까 충분히 인권 의식이 침투했고 충분히 다양성이 확보된 사회에서만 일반의지 2.0이 기능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일반의지 2.0은 단순히 전체주의를 긍정하는 이론이 되고 맙니다.”> 『일반의지2.0』(아즈마 히로키 著, 안천 譯) p.274~275



‘일반의지 2.0’의 밑그림


<일반의지는 정부의 의지가 아니다. 개인들의 의지를 합한 것도 아니다. 일반의지는 우선 수학적인 존재이다. (…) 이렇게 루소를 독해하면 2세기 반 전 민주주의의 출발점에 웹에 등장한 집단지성과의 관계가 예견되어 있을 가능성이 열리게 된다. ‘차이의 합’이라는 매력적인 말은 우리에게 트위터나 구글을 연상시킨다. 실제로 이런 관계야말로 몇 번이나 예고한 것처럼 이 책의 핵심 중 핵심이며…> 위의 책 p.51


본서를 읽지 않은 사람들도 앞에서 루소의 일반의지에 대한 단락을 읽으며 어렴풋이 구글, 트위터, 페이스북 등을 상상했으리라. 루소는 일반의지가 전체의지(모두의 의지)와는 다르며, 후자는 특수의지의 단순한 합에 불과하지만 전자는 거기에 특수한 수학적 가공을 해서 추출된 것임을 강조했다.

그런데 위에서 아즈마가 말한 ‘오히려 유권자의 의지를 사물처럼 다루고 수학적으로 취급하는 방식도 추가로 고려해보자’는 발상 역시 루소에게서 먼저 나온 것이다. 일반의지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사회가 단일해야 하며 결사association가 몇 개나 생겨 분할되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분명히 사회계약론에 명시되어 있다. 루소는 제네바와 같은 작은 도시국가의 직접 민주주의를 이상으로 삼았고 대의제를 필요악이라고 생각한 사상가였다. 즉 우리가 익숙해져 있는 선거를 통한 간접 민주주의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 사상가였다.

이는 후대 사가와 이론가들에게 엄밀히 말해 루소의 미숙한 점이었다고 지적받고 있다. 후술하겠지만 루소의 이론을 현실에서 오용한 사례들은 하나같이 정당정치, 의회정치를 과소평가했을 때 벌어진 일들이었다.

그러나 아즈마는 ‘부분적 결사의 금지’를 단순히 정당의 부정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정치’라고 부르는 것조차 초월한 그 무엇이며, 이 급진성이야말로 루소가 일반의지라는 불가사의한 개념에 담았던 꿈을 선명하게 부각시킨다고 해석한다. 그에 따르면 루소는 일반의지가 적절히 추출되기 위해 시민은 ‘정보가 주어져’ 있을 뿐 서로 의사소통을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말하고 있다. 단순히 직접 민주주의를 지지하기 위해 정당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일반의지의 성립 과정에서 아예 시민 간의 토의나 의견 조정의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루소는 일반의지는 차이의 합이며, 차이는 많을수록 좋다고 보았다. 시민들 사이 의견 조정은 역으로 차이를 감소시키고, 일반의지를 부정확한 것으로 만드는 부정적인 역할만 할 뿐이다. 루소는 결사의 역할을 과소평가한 게 아니다. 정치적인 토론의 장, 의사소통의 장 자체가 일반의지가 출현하는 데 장애가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한편 20세기에 등장한 정치철학자 중 공공성의 이념을 논할 때 자주 회자되는 두 명이 있다. 아렌트Hannah와 하버마스Habermas는 모두 공적인 영역이 ‘언론’이나 ‘담론’을 통해, 즉 의사소통을 통해 형성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폴리스(정치적인 장)란 사람들이 함께 활동하고 함께 말을 나눔으로써 생겨나는 조직이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인간은 말을 나누는 힘이 없으면 자기 생명의 존속에만 관심을 갖는 ‘노동하는 동물’로 쉽게 타락하고 만다는 것이 그녀의 기본적인 입장이다. 하버마스는 『공론장의 구조 변동』에서 보다 실증적인 관점에서 공공성의 기원을 18세기 영국 및 프랑스로 보는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카페나 신문을 무대로 한 저널리즘의 발전, ‘토론하는 공중’의 탄생, 그리고 문예와 접맥된 살롱 문화 덕분에 인민과 정부 사이의 새로운 관계가 가능해졌으며, 이러한 ‘공공적’ 토론 공간 없이 건전한 민주주의는 불가능하다.

위 두 사람의 논의에 따르면 루소나 아즈마의 ‘의사소통 없이 모두의 희망사항을 평균화한 것을 수리적으로 도출하는 과정’은 애당초 정치나 공공성으로 취급받지 못한다. 하버마스는 실제로 자신의 저서에서 루소의 일반의지론을 비판하고 있다.

또 정치사상에는 ‘숙의 민주주의’라는 개념이 있다. 정치학자 다무라 데쓰키田村哲樹에 따르면 이는 집합적 의사 결정의 정통성의 원천을 ‘개개인의 의사’가 아니라 ‘숙의의 과정’ 자체에서 구하는 사상이다. 이 사상의 지지자에 따르면 개인의 의지를 모으는 것만으로 민주주의가 이루어지지 않고, ‘선호의 소여성’ 혹은 ‘이미 결정된 의사를 지닌 개인’이라는 가정을 되묻고 그 대신 ‘숙의를 통한 선호의 변화’에 주안점을 두어야 한다. 민주주의에서 중요한 것은 구성원의 의견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그 의지를 집약하는 과정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의지가 변해가는 것이란 게 그들의 주장이다.

아렌트의 ‘세계’, 하버마스의 ‘규범’, 숙의 민주주의의 ‘선호의 변화’는 20세기 사회사상의 주류 전통이며 이에 비출 때 루소와 아즈마의 일반의지는 극히 비상식적인 주장이 된다. 아즈마는 이러한 어긋남을 각오하고 본서에서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본서 1장에서 구글, 트위터를 언급해 둔 아즈마는 루소의 일반의지를 (러프하게나마) 현대의 데이터베이스로 치환해 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 단 아즈마는 일반의지가 데이터베이스라는 주장은 실증적인 루소 해석은 아니며, 루소의 문장을 ‘과장 해석’ 혹은 ‘확대 해석’하고 있다고 자인한다. “인문과학이란 항상 고전을 그 시대에 맞춰 확대 해석함으로써 발전되는 것이기 때문에, 어찌 보면 정통적인 방법이라 할 수 있다.” 루소의 텍스트를 총기록사회의 현실에 비추어 새로 업데이트한 후 얻게 된 개념을 아즈마는 ‘일반의지2.0’이라 칭한다.

루소에 따르면 인민은 아무리 토의를 계속해도 자신들의 힘으로는 일반의지에 도달할 수 없으며, 일반의지를 파악해서 현실의 정책이나 제도로 구체화하기 위해서는 ‘천재’나 ‘신’으로 형용되는 초인간적인 존재가 필요하다고 결론을 내린다. 이는 독재자의 출현을 용인하는 것으로 루소의 일반의지 이론에 대한 비판은 주로 여기 맞춰져 있다.

일반의지 2.0에는 이런 버그가 없다. 일반의지는 지각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구체적인 데이터베이스로 어딘가의 서버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초월자는 필요하지 않으며 필요한 것은 적절한 접속 권한과 분석 알고리즘의 설정뿐이다. 몇몇 민간 기업이 독점하고 있는 일반의지 2.0에 대한 접속은 원칙적으로 모든 시민이 접속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루소는 정부를 일반의지의 공복이어야 한다고 했다. 정부는 주권을 갖고 있지 않다. 민의를 대표하지도 않는다. 주권은 어디까지나 인민의 일반의지에 있으며 정부는 그 하인에 불과하다. 만약 이 주장을 현대에 적용한다면 앞으로 실현되어야 할 정부를 구상할 때, 그것은 우선 일반의지 2.0의 하인이어야 한다.

미래의 정부는 시민의 명시적인 의지 표명(루소의 용어에서는 ‘전체의지’에 해당)이 아니라, 오히려 정보환경에 새겨진 행위와 욕망의 집적, 사람들의 집합적 무의식=일반의지에 충실해야만 할 것이다. 무의식에 따르는 정치. 이것이야말로 2세기 반 이전에 루소가 꿈꿨고, 지금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대두하기 시작한 새로운 정치의 모습인 것이다.

미래의 정부, 아즈마의 표현으로 정부 2.0은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인 정보를 가능한 한 보존해서 교육・의료・취직 지원 등 각각의 ‘필요’에 부합하는 맞춤형 서비스, 즉 ‘선택지’를 제공하는 거대한 서비스 산업으로서의 정부이다. 정부 2.0의 역할은 다양한 교육제도나 보험 제도가 있음을 시민들에게 알리고 선택지의 폭을 넓히는 보조자 역할에 전념하게 된다.


<루소는 정부란 일반의지의 하인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따라서 우리는 장래에 실현될 정부 2.0도 일반의지 2.0의 하인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구체적으로는 앞으로의 정부란 선거, 공청회, 의견 공모 등등 시민의 명시적이고 의식적인 의사표시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네트워크에 흩뿌려진 무의식의 욕망을 적극적으로 주워 담아 정책에 반영해야 함을 시사하고 있다.> 위의 책 p.120


전체의지는 특수의지의 총합이지만 이 총합은 잘못된 판단을 내리는 경우가 있다. 한편 일반의지는 틀리는 일이 없다. 특수의지와 일반의지가 상반된 것처럼 보일 때, 사실 시민들은 자신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모르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 루소의 주장이다. 이 보이지 않는 일반의지를 가시화하기 위해서는 초인적인 능력을 지닌 ‘입법자’가 필요하며, 고대 그리스처럼 ‘입법자’는 공동체 바깥의 인간이어야 한다. 공동체의 진정한 욕망은 타자의 눈에만 비치기 때문이다.

인민이 자신들의 진정한 욕망을 자각하지 못한다는 발상은 사회계약설의 계보에서는 결코 나올 수 없다. 로크John Locke의 『시민정부론』에선 시민은 자신의 생명과 소유권을 지키기 위해 사회계약을 맺고, 이를 위해 자연권을 정부에게 위탁하고 있을 뿐이다. 시민의 소유권을 위협하는 정부는 정당하지 못하고 사회계약을 어기고 있기 때문에, 시민 또한 더 이상 계약을 지킬 필요는 없으며 국가를 이탈하거나 정부를 전복해도 된다. 사회계약의 당사자인 시민들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 확실하게 알고 있다.

루소의 사회계약에서 이 전제는 무너진다. 사회계약론의 루소의 인간상은 자기가 무엇을 원하는지 자기도 잘 모른다. 왜냐하면 자연 상태에서 인간은 고독하게 서로 뿔뿔이 흩어져 생활하는 것에 만족했기 때문에 사회의 탄생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회가 탄생한 것은 단순히 사람이 다른 사람의 고통에 공감해서 손을 내밀고 말기 때문이다. 사람은 측은지심 때문에 행복한 고독을 버리고 집단을 만들고 만다.


<21세기의 국가. 그것은 생활환경 곳곳에 컴퓨터와 네트워크가 스며들어 데이터화한 방대한 양의 개인 정보가 공개되고, 일상적으로 집계된 시민의 무의식이 통치의 기초를 이루는 국가가 될 것이다. (…) 공(전체의지)과 사(특수의지)의 대립을 이성의 힘으로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이 이항 대립과는 별도로 존재하는 무의식의 공共(일반의지)을 정보기술로 추출해냄으로써 통치 기반을 마련하는 새로운 국가.> 위의 책 p.139~140


21세기의 국가는 숙의의 한계를 데이터베이스의 확대를 통해 보완하고, 데이터베이스의 전제專制를 숙의의 논리로 억제하는 국가가 되어야 한다. 국가는 오로지 숙의가 인도하는 대로 통치될 필요는 없다. 어차피 국민국가의 통치는 방대한 양의 데이터 없이 불가능하다. 이는 인터넷이 출현하기 전에 이미 밝혀진 사실로, 푸코Michel Foucault의 권력론에 따르면 국세조사를 통한 개인 정보 수집이나 공중위생, 사회보장의 정비가 근대 국가권력─‘생권력’─의 기둥이다.(『앎의 의지』 中)

하지만 총기록사회의 탄생은 그 데이터의 질과 정확도를 결정적으로 바꿔 놓았다. 정신분석의가 환자의 무의식을 훤히 들여다보이게 하는 것처럼, 정보기술은 지금 국민의 무의식을 훤히 들여다보이게 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앞으로 이 무의식을 통치에 활용할 수단을 고안해내야 한다.

주의할 점은 이는 미래의 국가가 무의식, 즉 데이터베이스의 노예가 된다는 말이 아니다. 우리는 무의식의 욕망에 항상 위협을 느끼면서, 때로는 그 억제에 성공하고 때로는 실패하면서 이런저런 갈등을 떠안은 채 자아의 통일성을 유지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국가도 네트워크와 컴퓨터가 산출하는 무의식의 욕망에 위협을 느끼면서 그 억제에 때로는 성공하고 때로는 실패하면서 휘청거리며 통치를 해가면 되는 것이다. 위험한 것은 오히려 자신의 무의식적인 욕망을 무시하는 처사이다.

우리는 사회를 운영하는 데 앞으로는 우선 가시화된 대중의 욕망을 조건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거기에 저항해도 의미가 없다. 정책 실현에 실패할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대중의 욕망에 따르는 노예가 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 제약 조건 아래에서 얼마나 뛰어난 정책을 입안하고 시행하는가, ‘숙의와 데이터베이스의 투쟁’이라는 표현에 담겨 있는 것은 이런 방법론으로 이와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 선량주의나 원리주의가 있다.



‘일반의지 2.0’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구현하는가


<일반의지를 ‘물질’로 파악하여 그 제약 아래에서 정책을 심의하는 국가. 조금 더 이미지를 키워보자. 예를 들면 2009년부터 2010년에 걸쳐 민주당 정권에서 이루어진 행정쇄신회의의 국가예산사업 공개판정회, 소위 ‘사업 재분류’가 큰 화제가 되었다. 특히 2009년 가을에 실시된 ‘제1탄’에서는 한 인터넷 사용자가 회의장 소식을 게릴라식으로 생중계했고, 이를 시청한 청중이 트위터에 많은 의견과 감상을 투고해서 주목을 받았다. 이는 마치 정부 관리 영역 외부에 자생적으로 시민 집회가 출현한 듯한 광경이었다.

당시는 아직 트위터 사용자의 투고에 특정 해쉬태그hashtag를 붙여 특정 키워드로 검색할 수 있게 만들어 같은 주제에 대해 쓴 글들이 중계 영상의 옆 창에 실시간으로 표시되는 정도의 집약이 이루어졌을 뿐이었다. 따라서 당시 사업 재분류 담당자들이 트위터를 지켜보았다 하더라도 ‘이런 의견을 가진 사람도 있구나’ 정도의 인상밖에 없었을 것이다.

만약 이때, 더욱 고차원적인 정보의 집약이 이루어졌다면 어떨까? 예를 들면 형태소 분석이나 네트워크 분석 등의 방식을 이용해서 수많은 ‘트윗’에서 자주 사용되는 단어의 경향이나 상호 연관을 실시간으로 추출한 것을 알기 쉬운 도표로 변환해서 회의장 한 켠에 비추면 어땠을까? 즉 사업 재분류 회의장에서 슈퍼컴퓨터에 대해 혹은 우주 탐사기에 대해 논하고 있었을 때, 얼마만큼의 사람들이 이 주제에 관심을 갖고 있고,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다른 문제에 대해 어떤 트윗을 하고 있는지 철저히 가시화할 수 있다면 어땠을까? 표본 수에 따라 다르겠지만 이런 가시화는 아마 회의장 내 논의에 커다란 영향을 줄 것이다.

이와 같은 도표는 특정 주제에 대해 찬반을 묻는 설문 조사가 아니기 때문에 전문가들의 논의에 특정한 결론을 강요하지는 않는다. 즉 아마추어의 투표로 결론을 내리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회의에 출석한 정치인과 전문가는─몇 만, 몇 십만, 어쩌면 몇 백만이나 되는 트윗에서 추출한─청중들의 감정을 집약한 정보들이 마치 자신들을 벽처럼 둘러싸고 있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들이 반드시 대중의 의향에 따를 필요는 없다. 하지만 이와 너무 동떨어진 결정을 내릴 수는 없으며 또한 완전히 무시할 수도 없다. 이것이 ‘숙의와 데이터베이스가 투쟁하는 장’인 미래에 있을 정책 심의 모델 가운데 하나이다. 결과적으로 논의의 투명성 또한 확보된다.> 위의 책 p.160~162


사회의 전체적 조망이 어려워지고 ‘큰 공공’이 붕괴해서 정책 과제마다 전문가나 당사자가 모여 ‘작은 공공’을 구성해 논의를 쌓아갈 수밖에 없는, 그런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하지만 전문가와 당사자의 논의는 때때로 폭주한다. 문제의식과 전문 지식을 공유하는 참가자 사이의 토론은 자연스레 내부 지향적인 논의를 낳고, 때로는 기득권이 생기기도 한다. 그 결과 정책 과제 각각에 대해, 그것이 국가 전체의 시책의 우선순위 리스트 중 어디에 위치해야 하는지 거시적인 판단 없이 비현실적인 토론만 이루어지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난립하는 ‘작은 공공들’을 통괄하는 ‘큰 공공’의 부활이 불가능하다면 적어도 ‘큰 무의식’, 다시 말해 일반의지의 가시화를 이용하면 되지 않을까? 폭주하는 숙의를 익명의 대중들이 발화하는 재잘거림으로 제한하면 되지 않을까?


루소는 분명히 일반의지 생성에 의사소통은 필요 없으며 각자 자기 자신만 생각하면 된다고 썼다. 그는 히키코모리가 만드는 공공성에 모든 것을 건 사상가였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루소와 결별해야 한다. 『사회계약론』 이후 2세기 반은 일반의지의 변덕과 잔혹함, 그리고 집합적인 정념(민족주의)에 이끌린 국가의 폭력을 전 인류가 경험하고 그 위험성을 깨달은 시기이기도 했다. 루소는 이성보다 정념을 평가했지만 21세기를 사는 우리는 그럴 수 없다.

이 때문에 아즈마는 ‘무의식’이라는 개념을 만든 프로이트의 사상을 소환했다. 프로이트는 루소의 시대와 지금 시대의 가운데에 해당하는, 정념의 폭력이 세계를 지배하던 시대를 살았던 인물이다. 프로이트는 이성(의식)에 비해 정념(무의식)이 얼마나 강한지 호소해왔지만 결코 정념의 힘을 긍정하지는 않았다. 그는 무의식은 어디까지나 제어해야 할 대상이며, 이 제어에 실패할 때 인간은 병에 걸린다고 여겼다. 정신분석의 치료는 무의식의 욕망─예를 들면 근친상간의 욕망─을 혐오감을 불러일으킬 만큼 적나라하게 언어화하면서 진행된다(‘대화 치료’라고 불린다). 왜냐하면 프로이트는 이런 언어화=가시화를 거쳤을 때 마음의 에너지가 알맞은 장소로 향하게 되어 욕망의 폭발을 제어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태도야말로 미래의 통치를 사유할 때 필요한 태도라고 아즈마는 생각한다.


<우리는 보통 정치적인 의사 결정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쟁점을 명확히 이해하고, 자료를 꼼꼼하게 읽고, 책임 있는 발언을 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믿음이 더욱 정치 참여의 장벽을 높이고 있다. 이런 전제에서 출발하는 한, 한 사람이 개입할 수 있는 정치 영역은 극히 한정된다. 아니, 능력 있는 전문가나 활동가가 아니라면 정치 참여가 거의 불가능하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모두 같은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따라서 그 내용을 자세히는 알지 못해도 자기 생활에 영향을 끼치는 정책이 틀림없이 존재한다. 그리고 당연히 우리는 이런 정책들에 대해 일정한 ‘의견’을 갖고 있다.

지금까지 이런 ‘의견’은 익명적이고 무책임하며 논의에 속하지 않는 감정의 발로로 여겨져 공적인 공간에서 배제되어 왔다. 일반적인 정치인이라면 백수가 인터넷에 올리는 정치 비판에 일일이 귀를 기울이지는 않는다. 이것이 지금까지의 상식이었다. 하지만 구글의 출현과 집단지성의 이론은 단편적인 트윗이나 유치한 의견이라도 몇 만, 몇 십만 단위로 모이면 이로부터 중요한 통찰을 얻어낼 수 있음을 시사한다. 그렇다면 앞으로 우리는 정책 심의가 있을 때마다 이를 전부 회의실에서 인터넷으로 실시간 중계하여, 회의 자체는 어디까지나 전문가와 정치인이 진행하는 것으로 전제하되 중계 영상을 보는 청중들의 의견을 대규모로 수집해 이를 가시화해서 토론의 제약 조건으로 삼는, 이런 제도의 도입을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앞 장에서 논한 바와 같이 이는 이미 ‘사업 재분류’ 인터넷 중계와 트위터의 연동으로 어렴풋이 예상되었던 미래의 모습이기도 하다.

모든 관청의 심의회와 위원회 혹은 법안 조문 작성 과정을 예외없이 철저하게 가시화하는 국가. 정치인, 관료, 학자가 모이는 회의실에는 반드시 카메라와 스크린이 설치되어 논의가 전부 인터넷에 공개되고, 수천만 청중의 반응을 통계적으로 처리한 다음 태그 클라우드와 네트워크 도표로 영상화해서 역동적으로 피드백하는 모니터가 회의실 안에 놓여 있는 상호작용적인 정부. 딱히 부담을 가질 필요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유스트림이나 니코니코 동영상의 화면을 띄우고, 그 중에 화면을 보면서 댓글을 다는 것만으로 그 투고가 돌고 돌아 정책 심의의 방향에 영향을 끼치는, 히키코모리들의 집단지성을 활용한 새로운 공공의 장. 이 책이 이상으로 하는 ‘숙의와 데이터베이스’. ‘작은 공공’과 일반의지가 상호 보완하는 사회는 이러한 제도 설계를 하나의 목표로 하고 있다.> 위의 책 p.180~182



예상 비판과 그에 대한 반박


아즈마의 현실 방안은 보는 사람에 따라 ‘겨우 이런 걸로 거창하게 일반의지까지 끌어들였다고?’ 싶을 수 있다. 확실히 저건 굳이 아즈마가 개진하지 않아도 민간 차원에서는 큰 규모로 진행되고 있는 변화이며, 책이 나온 2011년으로부터 9년이 지난 지금 시점에선 정부 정책 차원에서도 물밑에서 충분히 고려하고 있을 만하다. 그러나 일견 평범하고 작아 보이는 변화야말로 민주주의의 미래를 생각하는 데 중대하고 핵심적인 문제이다. 이것이야말로 사회과학과 인문학의 영역에서 오롯이 할 수 있는 역할인 셈이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이 책은 민주주의를 말하는 20세기 정치철학의 주류 전통인 아렌트의 ‘세계’, 하버마스의 ‘규범’, 숙의 민주주의의 ‘선호의 변화’에서 빗나가 있으며, 아즈마도 그를 충분히 감안하고 예상되는 비판과 그에 대한 반박을 달았다. 하나씩 살펴보기로 하자.


① 이는 포퓰리즘이 아닌가? 최악의 극장형 정치가 아닐까?


첫째, 위의 제안은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포퓰리즘’, 즉 대중의 욕망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것과는 다르다. 왜냐하면 여기에서의 목표는 무의식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과 대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양식 있는 정치인은 때때로 대중의 비합리적인 요구와 대치해야 한다. 이 때문에 미리 그런 요구에 노출될 필요가 있다. 무의식의 욕망을 무시하고, 선량의 논리만으로 사태를 어물쩍 넘어가려 해도 결국 억압된 리비도가 흘러넘쳐 병이 악화될 뿐이다. 우리는 미래의 국가를 설계하면서 이러한 프로이트의 교훈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둘째, 만약 위의 제안이 포퓰리즘의 강화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이 흐름은 어차피 막을 수 없다. 그렇다면 빨리 제도화해서 정책 결정에 반영하는 편이 낫다고 아즈마는 생각한다.

지금 논단에서는 포퓰리즘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빈번한 여론조사와 인터넷의 목소리에 정치인이 우왕좌왕하는 현실을 한탄하면서 침착한 숙의의 시간을 되찾아야 한다고 호소하는 것이 작금의 지식인이 취해야 할 태도처럼 여겨지고 있다. 하지만 아즈마에게는 이런 태도가 현실도피로 보일 뿐이다. 소셜 서비스의 보급이나 동영상 프로그램의 쌍방향화를 고려하면, 앞으로 사람들은 더더욱 ‘수다’스러워질 것이고, 정치 또한 더욱 대중의 즉자적이고 폭력적이며 무책임한 반응에 노출될 것이다. 선량들에 의한 밀실의 숙의는 더 이상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한 숙의의 방식 자체를 악으로 여기는 방향으로, 모든 것은 공개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방향으로 사람들의 가치관이 급속하게 바뀌고 있는 것이다. 아즈마는 이런 대중의 욕망을 인정하고, 이를 전제로 새로운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② 그래도 이성과 숙의가 정념보다 우위에 서야 하지 않은가?


첫째, 이미 현대 사회에서는 아렌트나 하버마스가 이상으로 여긴 ‘열린 토의’를 통한 자유민주적liberal인 공공 공간은 거의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일반의지 2.0의 사상을 그런 사상에 의거하여 비난하는 것은 생산적이지 못하다. 둘째, 이 전제 아래에서 만약 지금 공공적인 토론과 비슷한 것을 성립시키려 한다면, 필요한 것은 언어적인 의사소통에 대한 과도한 신뢰가 아니라 오히려 전술한 바와 같은 수리적인 메커니즘, 즉 정보환경의 지원이다.

기존의 사회사상은 정치를 그 무엇보다 의사소통, 특히 언어를 매개로 한 의식적인 의사소통이라고 생각해왔다(전쟁이나 성행위, 나아가 상품의 매매도 의사소통의 일종이라는 논의는 일단 논외로 한다). 이를 전제로 현대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정치의 위기, 민주주의의 위기에 대해 많은 논의가 축적되어왔다.

재차 지적할 필요도 없이 현대인은 더 이상 정치에 별 관심을 갖지 않는다. 개별적인 정책 논의에 관심이 없는 차원을 넘어 정치 자체에 관심이 없다. 사회 전체를 조망하려는 의욕이 떨어지고 모두 사적인 관심 안에 틀어박혀 있기 때문에, 건전한 정치나 공론장이 성립하지 않는다. 즉 사상가들이 이상으로 여기는 정치적 의사소통은 더 이상 성립하지 않는다.

이들 논의의 바탕에 깔려 있는 것은 결국 칸트의 철학이다. 18세기에 활약했고 지금까지도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이 철학자는 눈앞의 타자에 대한 특수한(사적인) 공감은 이성을 통해 극복해야 하며, 마침내 이를 극복했을 때 비로소 보편적인(공적인) 도덕이 확립한다고 논했다. 그러나 나타난 자명한 현실은 이성은 공감을 뛰어넘을 수 없으며, 보편성은 특수성을 뛰어넘을 수 없다는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이는 점점 분명해지고 있는데도 그들은 아직도 기존 사상의 틀을 버리려 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이들은 한편으로는 사적인 공감밖에 남아있지 않음을 인정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거기에서 공적이고 보편적인 윤리의 가능성을 찾아내려고 하는, 매우 답답한 논리를 전개할 수밖에 없게 된다.



마치며


지금까지의 논의를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면 나오기 힘든 주장이지만, “정말 루소의 일반의지를 계승한다면 ‘숙의’ 같은 거창한 관리력을 들이대지 않고 군중의 가능성에 맡기면 되지 않느냐”는 말이 나올 수 있다.

물론 들뢰즈와 가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같은 예언자적인 자본주의 및 프로이트・라캉 비판에서 아이디어를 끌어온다면 관념적으로는 충분히 가능한 시스템이다. 그러나 아즈마가 상기한 ‘뭐야, 겨우 이거?’ 수준의 예시나마 현실에서 적용할 수 있는 사례를 들어 설득하려 한 배후에는 이 책이 그저 철학자・비평가의 현학을 넘어 대중과 위정자들이 실제로 참고할만한 정치 모델로 인식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

따라서 나도 지극히 현실적인 입장에서 왜 마냥 군중의 정념에 맡기면 안 되는지 적어보겠다.


역사가 볼프강 폰 바르트부르크Wolfgang von Wartburg는 루소의 이론에 아주 많은 모순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역사 속에서 큰 위상을 차지하는 루소의 정치사상이, 선의가 악의에 의해 어떻게 악용될 수 있는지를 확인하는 좋은 예를 보여 준다고 했다. 이를테면 시민의 자유를 옹호하는 자들뿐 아니라 “소위 국민으로부터 무제한의 권위를 부여받았다는 국가기구를 변호하는 자들도 『사회계약론』에서 자신들의 견해를 뒷받침해 줄 구실을 찾을 수 있는 것”이 곧 그것이라는 것이다.

루소는 실제로 절대 군주라는 옛 독재자의 자리에 대신 ‘국민의 의지’라는 새로운 현대적 독재자를 앉힌다. 국민의 의지 앞에서는 개인의 어떤 요구도 정당성을 갖지 못한다. 루소와 함께 국민주권의 이념은 유럽 대륙에서 기세를 떨쳤다. 그는 막강한 권력을 가진 국민국가를 요구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이제 개인은 지금까지 계몽주의가 요구한 것처럼 정부의 자의적인 행동으로부터 보호되어야 할 뿐 아니라 스스로 최고 권력을 함께 담당해야 한다. 『사회계약론』은 자코뱅주의자들의 성경이 되었다. 그 책은 로베스피에르가 주도하는 공안위원회의 책상에 놓이게 되었던 것이다.

교양인이든 무지한 자든 누구나 군중에 합세하는 순간부터 관찰력을 상실한다. 서너 명의 개인이 한 자리에 모여도 쉽사리 군중을 형성할 수 있고, 더구나 그들이 전문적인 지식인이라도 그들의 전문분야와 무관한 사안들에 관해서는 군중이 지닌 모든 특성을 드러내며, 그들 각자가 개인적으로 보유한 관찰력과 비판정신도 곧장 사라지고 만다.

군중은 이성적으로 추론하지 않으며, 사상들을 일괄적으로 수용하거나 거부하며, 토론도 반론도 일절 허용하지 않는다. 그들은 적절한 분위기만 조성되면 자신들이 열광하는 이상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친다. 신을 섬기는 인간만 종교적 인간은 아니다.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이끄는 귀감과 지침이 되는 어떤 사상이나 인물에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혀 자신의 의지마저 철저히 복속시킨 채 미친 듯이 헌신하는 인간도 종교적 인간이다.


자본주의를 채택한 자유 민주주의에서 모든 개인은 자유롭다. 단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말이다. 이러한 자유는 헌법으로 보장된다. 바이마르 헌법에서 토대를 따온 대한민국 헌법 1조는 <①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②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되어 있다.

인민이 자신들을 지배하는 자신들의 권력을 제한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은, 직접민주주의 국가란 단지 꿈꾸는 것이라거나, 먼 과거 시대에 존재한 것으로 책에서 읽는 것에 불과했던 시대에는 자명한 것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의 민주공화국이 마침내 지구상의 큰 부분을 차지하게 되면서, 세계 공동체의 가장 유력한 구성원의 하나로 등장했다. 그리고 그런 위대한 현존 사실에 수반하여 민선의 책임 국가가 인민의 감시와 비판 대상이 되었다. 그 결과 ‘자기통치’라든가 ‘인민 자신을 지배하는 인민의 권력’이라는 문구가 실상을 표현하는 것이 아님을 사람들이 인식하게 되었다. 즉 권력을 행사하는 ‘인민’은 언제나 권력 행사를 당하는 인민과 동일하지 않고, 이른바 ‘자기통치’란 각자가 자신을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여타 모든 사람의 지배를 받는 정치를 뜻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인민이 그 구성원의 일부를 억압하고자 할 수 있다. 그래서 인민의 권력에도 똑같은 경계가 필요하게 된 것이다.

다른 폭정과 마찬가지로 ‘다수의 폭정’도 주로 공적 권위의 발동을 통해 행해지기 때문에 처음부터 두려운 것이었고, 지금도 여전히 일반적으로 그렇다. 그러나 생각이 깊은 사람들은, 사회 그 자체가 하나의 폭군일 때, 즉 사회가 집단적으로, 그것을 구성하는 개개인에 대해 폭군일 때, 그 폭정의 수단은 그 정치기구의 손에 의해 감행될 수 있는 행동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에 따라 사회가 민형사상 처벌 이외의 수단으로 사회 자체의 사상과 관습을, 그것을 찬성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행동 규범으로 강요하려는 경향에 대한 보호도 필요하다. 또 사회가 그 자체의 관습과 조화되지 않는 어떤 개성의 발전도 저지하고, 되도록 그 형성을 가로막으며, 모든 성격을 사회의 모델에 맞추라고 강요하는 경향에 대한 보호도 필요하다. 개인의 독립에 대한 집단적 여론의 간섭에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그 한계를 찾아내고, 그 한계를 여론의 침해로부터 유지하는 것은, 정치적 압제에 대한 보호와 같이 인간 생활의 양호한 조건에 없어서는 안 된다.


군중의 정념이 폭주하고 숙의가 이를 방관하거나 오히려 이를 조장할 때 제일 먼저 희생되는 대상은 지난 2세기 반 동안 민주주의의 아버지들이 그토록 보전하려던 ‘개인’이다. 엘리트주의의 프레임으로 일체의 이성, 숙의를 배제하기에는 우린 그 경과를 분석할 최소한의 모형조차 갖고 있지 않다. 그런데 현실은 민의, 아니 정의의 이름으로 정념의 폭주를 조장하는 엘리트 집단이 한 나라를 운영하고 있다. 그들이 생각하는 이성과 숙의의 근간이 무엇인지 분명한 대답을 들어야 한다. 아니면 설마 나라 하나를 실험장으로 삼는다는 초월적인 ‘입법자’ 마인드를 갖고 있는지 진지하게 묻지 않을 수 없으니 말이다.



참고 문헌


『西洋哲学史』 小川 仁志 著

『사회계약론Du Contrat Social ou Principes du droit politique』 J.Rousseau 著, 김중현 譯

『사회적 존재의 존재론Ontologie des gesellschaftlichen Seins』 G.Lukacs 著, 이종철・정대성 譯

『정치학의 이해』 서울대정치학과 著

《루소의 정치철학에 대한 헤겔의 비판》 이재성 著

《헤겔의 문화-역사 발전과 악의 관계》 이정은 著

《헤겔 『정신현상학』 ~철학 텍스트들의 내용 분석에 의거한 디지털 지식 자원 구축을 위한 기초적 연구~》 강성화 著

『헤겔의 정신현상학Genesis and Structure of Hegel’s Phenomenology of Spirit』 J.Hyppolite 著, 이종철 譯

『HOW TO READ Marx』 P.Osborne 著, 고병권・조원광 譯

『精神現象学』 G.W.F Hegel 著, 熊野純彦 譯

『一般意志2.0 ルソー、フロイト、グーグル』 東浩樹 著, 안천 譯

『군중심리La psychologie des foules』 Gustave Le Bon 著, 김성균 譯

『자유론On Liberty』 J.S.Mill 著, 박홍규 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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