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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ghoo Kim Aug 13. 2020

포스트모더니즘과 그 비판, 이윽고 동물화하는 오타쿠

아즈마 히로키 (2) : 포스트모던 사회의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 들어가기에 앞서 


이 글은 전편 <아즈마 히로키 (1) : 『존재론적, 우편적』의 저변들 ~ 하이데거, 지젝, 그리고 들뢰즈와 가타리 ~ >에서 다룬 자크 데리다 독해서 『존재론적, 우편적』의 내용을 숙지하는 게 원활한 읽기에 도움이 될 것이다.

https://brunch.co.kr/@rh3244/17 




들어가며



아즈마 히로키는 『존재론적, 우편적』을 통해 사상계의 기린아로 급부상했다. 그러나 아즈마는 그 직후 급속히 변모하여 아사다 아키라와 가라타니 고진과는 의식적으로 거리를 두게 된다. 『존재론적, 우편적』 말미에는 이를 예고라도 한 듯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이 책은 ‘왜 데리다는 기묘한 텍스트를 썼을까’라는 물음으로 일관하고 있지만, 사실 그것은 ‘왜 나는 그 기묘한 텍스트에 끌리는가’라는 물음, 즉 데리다를 이렇게 집요하게 읽고 있는 이 나에 대한 자기 언급적인 물음이기도 했다. 바꿔 말하면 그것은 또 나를 이다지도 추상적인 사변, 이른바 ‘철학’으로 몰아가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이기도 하다. 사람은 왜 철학을 하는가. 나는 도중부터 거의 반쯤은 진심으로 그 큰 문제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거기서부터 기초적으로 시작하지 않으면 이 데리다론의 존재 가치 자체가 수상쩍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일련의 시론을 끝낸 지금 나는 바로 그것이 함정이었다고 느낀다.> - 『존재론적, 우편적』 中


여기서 말하는 함정, 자기 언급적인 함정은 뭔가에 대해 말하는(생각하는) 것이 ‘이 나’에 대해 생각하는(말하는) 것으로 반전됨을 의미한다. 아마 아즈마는 이 말을 ‘문학 비판’에 대해 했을 것이다. 문학은 ‘이 나’를 묻고, ‘이 나’를 묻는 ‘이 나’를 또 묻는 식으로 끊임없이 되풀이된다. 전편에서 말한 클라인 관의 부정신학, 고유명적 함정 말이다.

1999년 4월호 『Voice』에 발표한 「공존하는 비평」이라는 글에서 아즈마는 “1990년대의 ‘비평’이 저널리즘과 아카데미즘으로 크게 양극화되고, 게다가 양자가 애매한 형태로 서로 통함(보완・상보)으로써 결과적으로 비평의 빈곤을 불러왔”다고 지적한다. 이론적으로는 다른 입장의 비평을 복수화(다양화)하는 바람직한 일이었겠지만 현실적으로는 ‘저널리즘적 비평=후쿠다 가즈야’와 ‘아카데미즘적 비평=아사다 아키라’가 경쟁을 피하고 공존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어느 쪽도 그 효력을 잃어버렸다는 말이다.


<문예 비평의 언어가 예전에 갖고 있던(적어도 그렇게 간주되고 있던) 보편성은 포스트모던이 철저해진 1990년대에는 완전히 상실되었다. 그렇다면 아카데미즘과 저널리즘의 분할을 교란하고, 세분화된 작은 ‘비평’들의 문맥을 횡단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언어, 사고를 위한 새로운 문체가 필요해질 것이다> - 「공존하는 비평」 中


공존을 성립케 한 배경, ‘비평=사상’의 ‘메시지’와 ‘미디어’ 사이의 단절, 다시 말해 ‘내용=주장’과 그 ‘유통과 영향’의 분리, 아즈마는 이를 ‘철저해진 포스트모던’이라 부른다.

1999년 초 『히효쿠칸批評空間』에서 ‘지금 비평의 장소는 어디에 있는가’ 란 제목의 좌담회에서 아즈마는 아사다와 ‘콘스타티브’와 ‘퍼포머티브’에 대한 견해 차이를 확인한다. 아사다는 아즈마가 데리다의 퍼포먼스를 논한 『존재론적, 우편적』을 그 자체로서는 콘스타티브하게 썼다고 평가한다. 그러면서도 사후적일 수밖에 없는 ‘효과’를 어떻게든 선취하여 자신의 비평을 퍼포머티브하게 전개해 나가려고 하는 것에는 의문을 제기한다. 이에 대해 아즈마는 “책에도 쓴 것처럼 퍼포머티브와 콘스타티브는 나뉠 수 없고, 모든 콘스타티브한 텍스트는 퍼포머티브한 효과를 갖게 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텍스트는 일부러 콘스타티브하게 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역시 글을 쓰는 사람은 어떤 형태로든 퍼포머티브한 효과에도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대답한다.


아즈마  아사다 씨와 저의 의견이 다른 단 한 가지는, 아사다 씨는 좋은 텍스트가 어딘가에 있으면 누군가 읽을 거라는 것이지요.

아사다  아니, 읽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거야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아즈마  읽지 않았다면, 사후적으로 보면 그저 사라진 것일 뿐입니다.

아사다  사라져도 어쩔 수 없겠지요.

아즈마  그건 일종의 니힐리즘인데, 글을 쓰고 싶은 저로서는 그런 입장을 취할 수는 없습니다.

아사다  저는 니힐리스트라고 자인합니다만, 성실하게 하려고 생각한다면 진지하게 쓰고 난 다음에는 바다에 흘려보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즈마  저는 진지하게 쓰고 있습니다.

아사다  그럼 된 거 아닌가요?

아즈마  저는 그렇게 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플러스 알파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잘못 배달될 가능성이 높아진다면 그거야 할 수 없는 일 아닐까요?

─「지금 비평의 장소는 어디에 있는가」 中


그리고 2001년 가을, 아즈마는 첫 신서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 오타쿠를 통해 본 일본 사회』를 출간한다. 「공존하는 비평」의 구별에 따른다면, 아즈마는 이 책으로 ‘아카데미즘적 비평’에서 ‘저널리즘적 비평’으로 다리를 놓았던 것이다. 여기서 그는 오타쿠라는 독특한 존재를, 21세기 초(2000년대 초) 일본의 ‘현실=현재’를 독해하기 위한 틀로 이용한다. 오타쿠의 양상을 ‘동물화’라고 명명한 것이 이 책의 핵심이다.


포스트모던,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은 20세기 중후반을 점령하던 사조였다. 19세기 이전까지의 위대한 근대적 이성을 인용・요약하며 밥벌이로 삼는 강단의 교수란 작자들이나 그들을 철석같이 믿고 따르는 철부지 학부생, 대학원생들 중에는 ‘그거 다 허구요 허상이다’라 걸핏하면 입버릇처럼 말하면서도 왜 허구요 허상인지 똑 부러지게 정리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러나 그 반대 역시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적어도 대학에서 로고스라 칭하는 학문이라면 텍스트로서의 일관성은 보장되어야 하며, 그러지 못한다면 포스트모던 담론은 그저 호사가들의 지적 유희로서의 운문으로 남는다고 해도 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물론 나는 그저 모든 학문을 사랑하는 사람이며 어느 진영에 선들 쌀 한 톨 떨어지는 것 없다. 그저 차분하고 지루하게 ‘포스트모던’의 배경을 구구절절 설명하고, 아즈마의 책 이야기로 넘어갈 생각이다. 그러나 전편에서 얼핏 지나간 앨런 소칼의 「소칼 사건」과 이를 계기로 쓴 20세기 철학자들에 대한 비판서 『지적 사기Fashionable Nonsense』를 중간에 짚고 넘어갈 것이다.



(1) 포스트모던의 뿌리



포스트모던의 시대


지난 몇 십 년 사이에 수세기 동안 익숙했던 문화와 사회의 구조에 큰 변화가 일고 있다. 세계관이 변화하고 진리에 대한 생각이 바뀌면서 학문이 변하고 있다. 사회 구조가 변하며, 예술과 문학, 생산과 소비의 형태에 이르기까지 삶 전체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고 있다.

후기-산업사회post-industrial society, 후기-실증주의 시대post-positivitic age, 탈-이데올로기 시대post-ideological era와 같이 후기後期 또는 탈脫을 뜻하는 포스트post란 접두사는 어느덧 이 시대를 정의하는 필수품이 되었다.

포스트모던은 글자 그대로 모던modern, 즉 근대와 관련된 말이다. 근대란 대략 16세기 이후의 과학 기술과 계몽 사상에 근거한 인본적이고 이성적인 삶의 양식이 지배하는 시대를 말한다. 그렇다면 포스트모던이란 이제 과학과 이성으로 특징지어진 근대를 떠나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는 이야기다. 따라서 포스트모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모던뿐 아니라 그 이전 세계의 역사적 변천 과정에 대해 다소간 알 필요가 있다. 포스트모던이 전 시대로부터 비판과 이탈을 시도하는 운동이라 할지라도 단절뿐만 아니라 연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던이라는 단어는 대표적으로 아놀드 토인비Arnold Toynbee가 대표작 『역사의 연구Study of History』에서 서구 역사를 크게 암흑기, 중세기, 모던, 포스트모던의 네 시기로 구분한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여기서 포스트모던이란 제1차 세계대전 또는 1870년대 이후의 세계를 의미한다. 곧 “합리주의가 붕괴되고 무정부주의가 처음 대두되기 시작한 가장 최근의 역사적 시기”를 지시하는 말이었다.

토인비는 1956년 『역사가의 종교 이해An Historian’s Approach to Religion』에서 포스트모던 시대의 특징을 자포자기, 도피주의, 표류라고 보았으며, 또한 그 시대는 언어, 관습, 종교 등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아무것이나 무차별 수용하는 초점 없는 혼합주의와 무비판적 관용의 시대라 했다. 그는 이러한 현상을 대중적 정신의 승리라고도 표현했다. 이러한 토인비의 포스트모던에 대한 정의는 우리가 오늘날 사용하는 뜻에 상당히 접근해 있다.


이 사상이 본격적으로 가시화된 것은 1960년대에 예술, 건축, 사상의 영역에서 나타난 반反-근대 작업에서다. 어떤 문학 평론가는 모더니즘의 대부인 엘리어트T.S.Eliot가 죽은 해인 1965년을 포스트모던의 기점으로 제시한다. 건축가인 찰스 젱크스Charles Jencks는 프루이트-아이고우Pruitt-Igoe 주택 단지의 폭파 해체 시간인 1972년 7월 15일 오후 3시 32분을 그 기점으로 잡기도 한다. 한편 서구 대학가에서 벌어진 일단의 사건(미국 대학들의 베트남 전쟁 반전反戰 데모, 유럽의 68 학생 운동)을 실마리로 보기도 한다. 이 시기에 유럽과 미국의 대학들이 급진적으로 변하고 그 영향으로 인해 근대 세계의 해체가 가속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포스트모던이란 어휘가 광범위한 영역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70년대의 일이다. 그것은 건축에서 시작해서 문학 비평과 철학을 거쳐 문화-사회 전반에 중요한 말로 부각되었다. 이처럼 빠르면 19세기 말 늦어도 20세기 초반에 서구 문화의 지배적 패턴에 근본적 변화의 징조가 의식되기 시작했으며, 문학과 예술, 건축 그리고 삶의 다양한 분야에서 감지된 이러한 문화의 변화 추세는 늦어도 1970년에 이르러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단어로 폭넓게 대변되었다.


단 포스트모던을 규정할 때는 한 가지 견해로 깔끔하게 정리되진 않는다. 용어에 담긴 구체적인 내용을 보면, 어떤 경우 근대주의의 일부로 분류되거나 근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것으로 주장되기도 한다. 또 다른 경우 근대의 철학과 문화에 대한 극단적 비판 운동을 지칭하는 데 국한되기도 한다. 즉 주로 후기구조주의라 부르는 프랑스의 급진적 사상과 동일한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영향력의 범위 측면에서도 한편에서는 건축이나 예술, 문학 비평에 국한된 방법적 유행으로 보고 다른 한편에서는 문화의 새로운 형태로 보기도 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개념이 이렇게 다양한 것은 무엇보다도 그것이 현재의 문화-사회적 환경으로 계속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모든 것이 유동적이며, 반성의 거리를 확보하기가 어렵다. 이렇게 변화하는 문화적 환경을 정의하거나 가치를 판단하려는 것은 움직이는 과녁을 쏘는 것과 같다. 이 말은 지금도 계속되는 논의에 의해 의미가 확장되고 내용이 달라지기도 한다.

무엇보다 이 실체를 대변할 만한 통일된 움직임이나 학파가 존재하지 않는다. 철학의 논쟁만 보더라도 서로 대립되는 여러 학파의 다양한 주장이 얽혀 있어 전모를 한마디로 규정하기가 극히 어렵다. 따라서 이후에 어떤 상황이 전개될지를 예측하는 것은 더욱 어렵다.


금세기 중반 대표적 변증가였던 루이스C.S.Lewis는 「내가 믿는 기독교Mere Christianity」의 첫머리에서 소위 ‘자연법’에 호소하여 자신의 신앙을 타인과 논하는 전략을 세운다. 자연법이란 모든 사람이 논쟁의 해결점으로 삼는 궁극적 참조틀을 말한다. 그에 따라 우린 일상적 경험에서 모종의 행동 규범에 호소한다든지 한다. 또한 루이스는 억지 논쟁도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믿는 표준을 지키지 않기 위한 변명 혹은 그 표준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해석하기 위한 시도일 뿐이며, 이런 논쟁과 변명이 ‘자연법’이 존재하는 가장 확실한 증거라 보았다.

한편 영문학자 비이스G.E.Veith는 『현대 사상과 문화의 이해Postmodern Times』에서 “포스트모던 시대에 처하여 새로운 변증을 시도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의 생각으론 요즘 이런 식의 변증법을 사람들에게 들이대면 씨알도 안 먹히며, 이는 곧 자연법이 학문적으로는 물론이요 상식으로조차 통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이 시대의 정신은 더 이상 절대적인 권위와 근거를 가진 그 무엇도 용인하려 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가장 주관적이라고 생각되는 신앙의 타당성을 이에 입각해서 객관적으로 증거하기는 매우 어렵다.

비이스는 자신의 주장을 강화하고자, 미국인의 70퍼센트가 성경을 진리로 존중함과 동시에 결코 절대적 진리란 없다는 것을 함께 믿는다는 통계를 인용한다. 이제껏 학문적 논쟁뿐 아니라 실생활에서 모든 시비를 가리는 방법은 합리적 논쟁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문화의 변화가 전례 없이 혁명적이라는 점은 바로 이러한 믿음이 사라진다는 데 있다. 근대뿐 아니라 그 이전 시대에서는 확고히 신뢰받던 자연 법칙과 규범의 존재에 대한 불신이 이 시대의 특징이다.


비이스는 근대적 이상이었던 유물론적 사회공학에 기초해서 세워진 사회의 대표적인 예, 즉 소련의 붕괴는 근대 세계의 종말을 그 무엇보다 확실히 보여 준다고 주장한다. 그 후 미국 문화가 세계를 제패하여 판[pan, 범汎]-아메리칸 시대 또는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 시대가 온 듯 보인다. 그러나 사실 세계는 신보수주의, 광신적 근본주의, 지역주의, 인종주의, 종족주의에 입각한 각종 분쟁과 테러리즘이 어느 때보다 심각하다.

이것은 전 세계의 상황일 뿐 아니라 한 나라와 사회 속에서도 일어나는 일이다. 앤더슨Walter Truett Anderson이 말한 “새로운 극단과a new polarization” 경향이 그것이다. 즉 한 사회 내에 인종, 성차, 종교, 사상, 언어가 다른 다양한 그룹이 분립하여 공립학교 교실에서의 기도, 안락사, 낙태 문제나 다양한 문화의 형태 등을 둘러싸고 상호 대립하며 소위 ‘문화 전쟁’을 벌이는 상황이 일어나고 있다. 그 결과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진리’보다 소위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이 정치뿐 아니라 심지어 학문적 맥락에서도 매우 중요해지고 있다.


삶의 토대를 이루는 세계관과 진리, 도덕이 붕괴하면 그것은 즉시 삶에 영향을 미치게 마련이다. 경제와 사회에 극단화된 개인주의가 나타나는 것은 공통적 삶의 토대가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던 시대는 모두가 자신의 법칙을 따라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시대다.

공통적 토대의 상실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 주는 것은 오늘날 철학의 분열된 모습이다. 진리의 기초를 다루는 철학은 전통적으로 가장 공통적인 진리를 담보해 주는 학문으로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오늘날 철학은 더 이상 보편적인 학문이 아니다. 철학 자체가 학파 간에 심각한 의사소통의 장애를 느끼고 있다.

오늘날 철학에서 해석학이 중요해진 것은 바로 이런 상황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철학은 과거 존재론이나 인식론에서처럼 초월적인 방법을 통해서 세계의 본질을 파악하는 것을 포기했다. 오늘날 철학은 이성이나 심리보다 언어에 반영된 세계를 비교하고 상호 이해하는 일에 몰두한다. 즉 과학이나 공식으로 이루어진 인위적 언어가 아니라 자연의 언어가 드러내는 세계에 대한 이해가 오늘날 철학의 주된 관심이다.

이 세계는 언어의 숫자만큼이나 다양한 세계이며, 그 세계는 해석이라는 새로운 틀에 입각해 있는 세계이다. 이 세대의 특징은 비이스의 말처럼 “공통적 참조를 찾기”의 곤란을 체험하는 세대이다. 결국 포스트모던 세계는 “실재에의 권리 획득을 위한 수많은 소리의 다수성으로 특정지어진다.” 이합 핫산Ihab Hassan은 포스트모던을 본질상 형식 파괴적이며 문화적 무질서의 상태라고 주장한다. 리오타르J.F.Lyotard도 포스트모던은 모든 것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니힐리즘, 아나키즘, 다원주의의 싸움 이후의 “완화의 시대”요, 이제는 “차이점에 대한 감각성”과 “총체성에 대한 전쟁”을 수반하는 시대라고 주장한다. 상대주의가 오늘날 처음 대두한 것은 아니지만 이전의 상대주의는 개인적인 것인 반면 오늘날의 것은 공동체를 기준한 상대주의라는 점에서 그 차이가 있다. 포스트모던적 상대주의는 진리의 ‘지역주의’적 성격을 부각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포스트모던적 시대는 이제껏 사람들이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이던 절대적인 것들이 무너진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에는 모두가 동의하여 그에 호소하여 논쟁을 종결할 수 있는 공통적 토대가 사라지고 보편적 세계관이 종말을 고하고 있다. 즉 보편이 해체되고 차이에 대한 존중과 지역적이고 개체적인 것을 축하하는 정서가 강하다.  



위기 의식의 발단


20세기 초반, 1차 세계 대전을 겪고서 세계는 서구의 근대 문명이 위기에 처했다는 의식이 퍼지고 있었다. 문명의 전면적 파괴를 몰고 온 세계대전이 준 충격은 그 무엇으로도 완화될 수 없는 것이었다. 한 철학자의 지적처럼 “포스트모더니즘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유럽의 지성인들 사이에 팽배했던 근대주의적 이상에 대한 환멸에서 비롯되었다.” 두 차례 세계대전의 비극은 이념 분쟁으로 이어졌고, 전대미문의 문화적・정치적・사회적 혼란이 찾아왔다. 이 불길한 현상들은 이제껏 신뢰해 온 과학적 문화가 유토피아를 가져오기보다 오히려 문명 전체를 멸망으로 몰고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근본적인 불안을 심어 주었다.

중세의 어둠을 이성의 빛으로 밝히겠다던 계몽의 불꽃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꺼지고 낙관적 진보의 꿈이 깨지자, 학자들 사이에서는 이 위기가 지엽적 문제가 아닌 문화 전반의 총체적인 것이라는 공통 인식이 형성되었다. 이 위기의 뿌리에 근대 문명을 지배해 온 계몽 사상과 과학주의적 세계관의 문제가 있다는 의식이 뒤따랐다.


근대를 과학과 이성의 시대라고 부른 이유는 근대가 이성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과학을 문화의 토대로 삼았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전근대란 신화나 계시에 기초한 신앙을 토대로 이루어진 문화였다. 전근대는 보통 역사에서 말하는 고대와 중세가 포함된다.

비이스는 이 시대의 근본적 특징을 세 가지로 정리했다. 첫째, 전근대는 초월적 세계가 존재함을 믿는다. 세계 자체를 신성시하고 외경심을 갖거나 지구를 어머니mother earth로 보는 것으로 나타나는 이러한 믿음은 과학적 세계관이 지배하는 오늘날까지도 남아있는 뿌리 깊은 사상이다. 둘째, 세계를 조화와 체계의 세계라고 믿는다. 세계에는 법, 원리, 이성, 로고스, 자연법 등으로 부르는 초인간적 질서가 있으며, 인간은 이를 계시를 통해서 혹은 이성으로 발견함으로써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셋째, 진리는 모두에게 공통적이라는 진리의 객관성에 대해 동의가 있었다. 세계가 의미가 있고 그 의미는 초인간적이며, 신화나 신학적 메시지는 그 의미를 구체적으로 체현해야 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동서양 모두에서 고대와 중세의 기나긴 기간에 큰 변동 없이 유지되어 온 전근대의 이러한 근본적 세계 이해에 혁신적 변화가 생기며 근대는 열리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세계를 신성한 유기체로 보던 관점을 떠나 하나의 무생물적 메커니즘으로 보는 기계론적 모델의 등장이 근대의 탄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지동설을 둘러싼 갈릴레오 사건은 전근대 세계관과 근대적 과학의 충돌을 보여 준다. 그것은 고대와 중세의 2,000년 이상을 지배해 온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적 세계관과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적 세계상을 폐기시켰고, 단테의 신곡에 나타난 중세의 민속적 세계관을 뒤집고, 그것들을 오늘날 상식이 된 근대의 과학적 세계관으로 바꾸어 놓는 대변혁을 가져왔다.

근대란 연대기적 의미보다 정신 상태의 변화를 의미한다. 자연히 신앙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초자연적인 세계가 실재한다고 믿던 이들이 세계를 하나의 커다란 기계로 바라보게 되면서 믿음이 약해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20세기에 들어 과학에 커다란 변화가 나타나기는 했어도 근대의 과학을 무용지물이 되게 하거나 세계관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지는 못했다. 이를 생각하면 이 때에 일어난 변혁의 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


전근대를 자세히 살피면 거기에는 역사의 흥망성쇠만큼이나 많은 세계관 사이의 긴장과 각축을 발견할 수 있다. 바로 이 세계관들 사이의 긴장과 각축에서 근대로 이행하는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다. 서양의 경우 각종 이교의 다신론과 고전적 합리주의 철학 그리고 성경의 세계관 사이의 긴장과 갈등이 치열했다. 기원전 600년경 일어난 헬라 철학은 고대 신화를 배척하고 인간 지성으로 만물의 체계를 분석하고 이해하여 삶의 방향을 설정하려는 시도였다. 철학은 본질상 매우 인간 중심적이고 자율적인 자세를 지닌다. 이 헬라 철학이 정신적 토대가 극히 다른 기독교 신앙을 만났을 때 충돌이 일어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서구의 중세에는 그 바탕에 전혀 화합될 수 없는 두 개의 상이한 세계관이 종합되어 있었다. 중세는 본질상 전혀 다른 두 개의 세계관이 하나로 종합된 세계였다. 뿐만 아니라 각처에서 유입되는 이교적 신화와 헬라적 전통 그리고 성경적 세계관의 혼합이 일어났다. 이러한 중세의 종합은 결국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이라는 두 계기로 인해 다시 갈라서게 되었다. 기독교 세계관과 헬라적 이교 사상의 혼합 체계는 15세기에 이르러 새삼 고전 헬라-로마 문명에 대한 향수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종교개혁이 성경적 세계관으로의 복귀를 주장하는 한편 르네상스와 과학의 발전, 그 후엔 계몽사상으로 이어지는 맥락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가장 결정적인 계기를 찾았다.

르네상스는 근대를 여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그것은 근대 과학이 헬라-로마의 고전으로의 복귀를 외치고 인간 중심 사상을 파급시킨 르네상스의 토양에서 싹텄기 때문이다. 권위 있는 이론이나 상식을 근본적으로 흔들어 놓은 사건이 ‘교육받지 못한’ 계층인 장인, 선원, 항해사, 기술자들에 의해 일어나는 충격적인 상황 속에서 근대 과학의 샛별이라 할 수 있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같은 선구자들이 출현했다. 16세기 초 폴란드의 사제였던 코페르니쿠스는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의 문제점을 연구하여 『천구天球의 운행On the Revolutions of the Celestial Sphere』을 써서 지동설의 근원이 되었다. 이들은 ‘자연을 있는 그대로, 전통의 권위적 편견과 철학적 추상에서 벗어나서 눈에 보이는 대로 아는 것’에 기초해 연구했다. 그 결과 단순한 논리와 명쾌한 증명을 통해 이전 학자들의 사변적 이론을 무너뜨리는 일이 수없이 일어났다.


네덜란드의 과학 역사가 호이카스Hoykaas는 근대 과학이 헬라의 이성적 사고에 뿌리를 두고 있으나 성경적 세계관의 영향 없이는 태동될 수 없었음을 지적한다. 즉 근대도 중세와 마찬가지로 종합 문화라는 것이다. 근대의 문제는 시간이 가면서 기독교적 토대가 약화되자 방향을 잃고 혼란에 빠지면서 시작되었다. 이 혼란은 주로 과학에 대한 지나친 자신감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과학의 발전에 대한 낙관과 자신감이 이야기의 전부는 아니었다. 자신감의 이면에는 과학의 한계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과학의 놀라운 발명과 발견은 사람들을 눈부시게 했다. 하지만 곧이어 나타난 과학의 한계에 대한 인식은 사람들을 깊은 불안에 빠지게 했다.

무엇보다도 어떻게 과학적 지식을 확실하다고 믿을 수 있느냐는 인식론적인 근거에 대한 질문은 심각한 것이었다. 근대 과학은 철학적 형이상학이나 기독교 세계관만큼 모든 이론을 뒷받침할 토대를 갖고 있지 못했다. 과학이 이 전통적 토대를 대체할 종합적 체계를 갖추지 못하고 있다는 의식은 작은 일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베이컨과 같이 이런 상황에 대해 반성할 수 있는 철학적 소양을 갖춘 사람이나 선각자들은 커다란 불안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긴장이야말로 근대가 갖게 된 새롭고도 근본적인 딜레마였다. 이런 불안은 곧 새로운 정신적 토대를 요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근대 초반의 과학자들은 과학을 신학과 철학에서 분리하는 것이 종교에서 분리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였다. 또 베이컨은 새로운 과학이 사랑과 함께 발전하지 않는다면 새로운 불경과 타락을 초래할 것을 경고했다. 이와 같이 근대 과학도 처음에는 기독교적 한계와 책임 의식을 분명히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근대 과학이 점차 자연 지배의 모티브에서 비롯된 힘의 추구로 기울어지면서 신앙과 윤리적 긴장을 느끼기 시작했다. 특히 신앙이 없는 이들에게는 과학의 힘에 대한 책임과 윤리의 근거를 확보하는 일은 커다란 문제가 되었다. 더욱이 근대는 이 긴장을 윤리나 신앙으로부터 과학을 분리시킴으로 해소하려 했다. 이것은 과학의 자율화를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근대 이성주의는 본질상 반反기독교적이지만 당시 대부분의 사상가는 여전히 오늘날과 같은 이념과 사상, 즉 실증주의, 유물론, 이성주의와 다른 중도적 신앙을 가졌다. 이신론(理神論, 인격적인 삼위일체 여호와가 아니라 우주의 원리 자체를 여호와로 보는 관점)의 견해에서 신은 이성 그 자체였다. 또는 칸트에게서처럼 윤리를 보증할 ‘요청된 신’이었다. 이성주의가 극에 달한 계몽 시대에조차 이런 기조는 변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볼테르의 말처럼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발명이라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분위기가 지속되었다. 물론 한편에서는 이성적으로 치닫는 과학적 세계관이나 이신론에 반대한 감리교와 경건주의Pietism가 각각 영국과 독일에서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과학 발전에서 받은 충격으로 근대인의 정신과 문화에 일어난 격동은 이러한 타협적 신관이나 치우친 신앙적 해결로 진정되지 않았다. 한 번 신앙적 토대에서 멀어진 인간은 점점 더 자율적인 방향으로 움직여 갔다. 그에 비례하여 불안도 가중되었다. 우주는 비인격적이고 물질적인 객체요 거대한 기계로 인식되었다. 인간은 삶의 처소로서의 자연에서 멀어져 소외된 주체요 자율적 존재로 바뀌었다. 자율성은 자유와 인격성의 보장을 가져왔으나 소외 역시 함께 가져왔다. 무한히 넓어진 기계적 우주 공간에 있게 된 소외된 인간이 종교적 믿음마저 상실하자 이로 인한 불안은 심각한 것이었다.


근대 철학의 근간을 이루는 인식론은 이러한 상황에서 태어났다. 중세의 사변이 무너진 후 철학자들은 새로운 방법으로 그들의 위치를 확립해야 했다. 이것은 앎의 과정에 대한 연구로 발전했다. 객관적 세계에 대한 검토와 인간이 그것에 대해 지식을 갖는 과정에 대한 연구가 본격화된 것이다. 이는 과학이 전통과 신앙으로 독립하기 위해 꼭 필요한 일이었다. 즉 전통이나 신화를 믿지 않는 근대인에게 인간의 자율적 사유에 입각해 진리와 지식의 기초를 설정하기 위한 인식론의 등장은 당연한 것이었다.

근대 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데카르트René Descartes는 이런 이론의 대표자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는 그의 경구는 너무도 유명한 근대 철학의 표어다. 이 때 자아는 자율적으로 생각하는 주체로서의 이성적 자아다. 이 자아는 자신과 우주의 존재만 아니라 신의 근거까지 결정하는 자율적 존재다. 이러한 자아의 존재는 자아를 제외한 모든 사물은 이성적 사유의 대상으로 만들어 버렸다. 여기서 근대의 특징적 세계관인 이성적 주체와 대상적 객체의 대립 체계가 탄생했다.

데카르트의 체계는 아퀴나스의 자연과 은총의 구조와 매우 흡사한 또 하나의 이원론적 세계관에 입각해 있다. 우선 그의 철학은 혼합되어서는 안 될 정신과 물질의 구분을 근간으로 한다. 과학이 물질계를 통제하고 철학이 정신계를 통제하는 체계다. 따라서 이는 중세의 자연과 은총의 세계관이 세속화된 형태라고도 볼 수 있다.

데카르트의 세계관의 핵심에는 그의 유명한 방법론이 자리하고 있다. 그는 전통의 굴레를 벗어나 새로운 과학이 이룩한 업적을 정당화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길을 닦으려 했다. 즉 과학적 지식을 신과 인간과 우주에 관한 원만한 체계라는 문맥 속에 자리잡게 하기 위한 새로운 철학을 구상했다. 그 결과로 그는 『방법서설Discourse on Method』을 썼다.


데카르트가 시작한 근대의 정신적 토대는 계속 논의를 통해 발전되었다. 흔히 합리론과 경험론, 관념론 등으로 분류되고 비교되는 후속 철학자들은 관점상 차이를 보일 뿐 이성을 중심으로 생각했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는 이성적 자연 과학의 방법을 도덕, 법, 정치, 심지어 인간 영혼의 영역에까지 확대 적용한 유물론적 시각을 제시했다. 그로티우스Hugo Grotius는 인간의 합리적 사회성에서 포괄적 법 체계를 이끌어내어 국제 사회의 기틀로 삼는 자연법이라 부르며, 신이나 국가도 어쩔 수 없는 보편성을 주장하고 이성의 법칙을 문화와 사회의 차이를 초월하는 인류의 공통적 토대로 끌어올렸다.

로크John Locke는 “모든 관념은 경험에서 온다”고 주장하며, 기독교 계시를 포함한 본유 관념을 부정했다. 그는 지식이란 경험이 마음에 축적되고 종합되는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관념idea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이로 인해 그는 라이프니츠G.W.Leibniz로부터 마음을 ‘백지tabula rasa’로 본다는 유명한 비판을 받았다. 그의 경험주의적인 인식론 중심 세계관은 소위 문화 공학 즉 환경 특히 교육을 바꿈으로써 사람과 문화 전체를 바꿀 수 있다는 사회・문화적 낙관론이 일어나는 기초가 되었다.

칸트Immanuel Kant는 로크와 달리 인간의 이성이 단지 수동적으로 주어진 경험을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의 기본적 틀로서 앎에 적극 참여한다는 혁신적인 인식론을 폈다. 즉 세상이 인간의 지각의 틀에 맞게 해석되어 이해된다는 것이다. 칸트의 자아는 단지 생각하거나 경험하는 자아가 아니라 세계를 만들어내는 초월적 자아이다. 그는 인간의 정신을 지식의 주체로 등극시켰다. 근대는 이런 사상에 입각하여 이성에 기초를 둔 문화로 바뀌어 갔다.


이러한 지적・사상적 배경에 힘입어 일어난 계몽주의는 봉건적 구습과 전통에 얽매인 무지와 신앙적 독단에서의 해방을 이상으로 추구했다. 16세기부터 급전진한 과학은 전근대적 사고를 깨뜨려 정신적 공백을 만들었고, 18세기의 계몽사상은 깨어난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지시하는 적극적인 운동이었다. 중세와는 다른 새로운 정신 세계와 문화 전체의 질서를 구축하는, 참된 의미의 근대를 여는 정신적 운동이었다.

계몽사상은 이론적으로 과학적 자연주의, 유물론적 실증주의, 공리주의를 지향한다. 종교적으로는 전통적 기독교 신앙을 배격하며 이성 종교 내지 무신론을 신봉했다. 이 계몽사상은 주로 프랑스와 독일에서 교육을 통해 반종교적이고 현세적이고 과학적인 사고방식을 확장시켜 사회적 부자유와 불평등을 제거한다는 사회・정치사상으로 발전했다.

계몽사상의 초석은 인본주의다. 영어 humanism은 경우에 따라 인간주의, 인도주의, 인본주의로 번역되는데, 인본주의라 할 때에는 특히 인간 중심주의라는 의미가 강하다. 이 말은 문학, 철학, 역사를 자연 과학과 달리 인간성에 대한 학문이라 하여 인문학humanities이라 부르는 것과 관련이 있다. 이런 용법은 교양을 핵으로 하는 헬라・로마의 문화 전통을 부흥시키려던 페트라르카Petrarca, 발라Valla, 에라스무스Erasmus를 인문주의자humanist라고 부르는 데서 기인한다. 인본주의가 체계화되고 본격화된 것은 계몽주의 시대인 18세기며 19세기에 전성기에 달했다. 이들 가운데는 에라스무스처럼 기독교인도 있으나 대체로 인간 중심 세계관과 인간의 능력에 대한 전폭적 신뢰를 특징으로 한다.

에라스무스와 루터의 자유의지 논쟁이 보여주듯 이들은 기독교를 인류의 구원에 대한 계시가 아닌 도덕법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는 신학적 자유주의의 뿌리가 인본주의라는 증거이기도 하다.


근대는 인간이 창조주요 구원자라는 자신감을 토대로 살아가는 시대다. 근대인은 세계를 ‘과학적 방법에 의해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대상과 자원으로 간주하고 기술의 힘으로 이를 통제하며 살아가는 자율적 인간 즉 ‘호모 오토노버스’다. 근대인은 ‘인간의 자율적 이성에 입각한 유토피아’라는 비전을 꿈꾸었으며, 그 궁극적 목표는 무지가 극복되고 질병이 치료되며 빈곤은 축출되고 전쟁은 종식되며 모든 물질적, 사회적 필요가 채워지는 세계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근대는 위기의식에 봉착하게 된다.

근대는 기본적으로 이성주의적 토대주의rationalistic foundationalism 문화였다. 이는 이성이 진리와 지식의 안정된 기초를 발견하고 이를 토대로 해서 문화가 세워진다는 생각에 기초한 체계다. 철학은 이 토대를 구축하는 일을 자임했다. 지식의 확실성을 보증하기 위해 나왔던 데카르트의 방법론적 인식의 반성이 그 시작이다. 그 후 근대의 철학사는 이 방법론을 공고히 하려는 다양한 실험의 역사라고도 할 수 있다.

철학의 실험이 계속 실패하여 결국 그것이 가능한 일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을 때, 근대는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바꿔 말하면 근대의 위기는 토대주의의 위기였던 것이다. 미국의 철학자 번스타인Richard Bernstein은 『객관주의와 주관주의를 넘어서Beyond Objectivism and Relativism : Science, Hermenuetics and Praxis』라는 책에서 이 위기가 객관주의적 낙관론과 상대주의적 비관론 사이의 딜레마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보았다. 이 딜레마를 가진 현대인은 항상 ‘데카르트의 불안’Cartesian Anxiety에 시달리는데, 이는 과학에 대한 자신감과 취약점의 인식 사이의 긴장과 딜레마를 뜻한다. 포스트모던은 이 이중적 유산에서 유래했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근대의 위기는 계몽주의의 종말이기도 하다. 앞서 보았던 것과 같이 서양의 근대는 과학과 그에 고무된 계몽주의 세계관이 주도가 된 문화였다. 계몽주의 문화의 특징은 세속화였으며, 그 주체는 신앙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계몽된 이성이었다. 근대의 위기는 바로 이성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면서 찾아왔다. 이성은 근대 초기의 낙관적인 신뢰에 결코 부응할 수 없었다. 이렇게 자리 잡게 된 이성에 대한 불신이야말로 다른 모든 위기의 뿌리였다.

이성은 그 자체가 결코 종교적 신앙이나 독단과 편견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계몽사상 자체도 이성의 능력에 대한 과대평가에 근거한 일종의 믿음이었다. 즉 계몽주의도 편견과 독단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것이 아니었다. 이성의 객관성과 자율성에 대한 믿음의 상실은 계몽의 종말을 가져왔다.

모든 것을 인간의 대상으로 전락시키고 인간을 주체로 옹립한 결과, 인간은 신과 자연으로부터 소외alienation를 초래했다. 초월적 주체는 다른 한편으로 소외된 존재였던 것이다. 소외는 계몽주의가 자랑하는 자율의 어두운 면이다.



붕괴의 징후


근대의 붕괴 징후들 이면에는 근대 과학과 철학이 보여준 한결같은 자신감과 불안 사이의 딜레마가 깔려 있음은 앞서 지적한 바 있다. 이 근본적 딜레마는 이미 18세기부터 특히 예술에서 표출되기 시작했고, 미학은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떠올랐다.

고대부터 있던 고전 미학은 예술을 자연의 모방으로 정의하여 ‘미에 대한 불변하며 초월적 이상을 믿는’ 절대주의 미학이었다. 이와 달리 근대 미학은 ‘변화와 새로움이라는 일시성과 내재성’의 상대주의 미학이다. 근대 미학은 ‘오랜 동안 중시되어 온 영원성의 미학으로부터의 중대한 문화적 이동’이 시도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렇게 근대 미학은 미를 연구할 때의 보편성과 불변성 그리고 지적 이해 가능성을 전제한 고전주의를 무너뜨리는 데 기여했다.

최초의 근대 미학 연구는 바움가르텐Baumgarten이 1750년에 아름다움, 추함, 즐거움과 괴로움에 관한 감성적 인식 연구를 「미학Aestehtica」이란 이름으로 펴낸 것이었다. 감성적 인식은 소위 아픔이나 쾌감 같은 생경한 감각과 다르다. 그것은 오히려 고대 철학에서처럼 진리를 선과 미에 연관시켰던 것과 흡사한 연구였다. 이후 미학은 상대적인 성격으로 인해 여러 조류로 나뉘어 주로 독일에서 발전하다가 칸트의 「판단력 비판Kritik der Urteilskraft」에서 합류하여 하나의 독립된 학문으로서의 근대 미학이 출발하였다.

미학은 그 자체로 새로운 관점이라는 면에서 큰 의미가 있다. 근대 중반에 와서 미학이 중요하게 인식된 것도 그것이 근대의 토대를 이루었던 철학이나 과학과 다르기 때문이었다. 미학은 근대 학문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이지만 동시에 그것을 해체하는 첨병이기도 했다.


미학은 인간의 가장 감각적인 차원을 연구한다. 이 부분은 데카르트가 이성적 능력과 의식 없이 존재하는 사물을 나눈 이후 계속 간과되어 왔던 영역이다. 근대 후반에 들어서며 구체성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나고 정신보다 몸에 대한 관심이 커졌는데, 이는 감각적 육체의 특징인 구체성과 특이성이 이성의 추상적 법칙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는 것으로 의식되었기 때문이다.

철학의 입장에서는 감각과 느낌의 세계도 객관적인 이성의 권위 아래 있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새롭게 부각된 이 영역이 이성의 통제를 벗어나 암중모색에 떨어지고 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근대 고유의 걱정이 앞서기 시작했던 것이다. 미학은 이 영역마저도 이성적으로 고찰하여 감성적 인식의 문제에서도 철학이 절대적인 권위를 유지하도록 하려는 장치였다.

바움가르텐이 미학을 논리의 ‘누이동생’이라 표현한 데서 알 수 있듯, 철학은 미적 인식 능력인 감성을 남성적인 이성理性에 비해 열등한 것으로 간주하려 했다. 근대 미학의 한계는 여기에 있었다. 미학은 감각과 경험의 세계가 단지 추상적 보편 법칙으로는 파악될 수 없다는 인식에 뿌리를 두고 태어났다. 감성적 인식은 그 나름대로의 독특한 논리와 영역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인정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여전히 이성과 철학의 지도를 받아야 할 열등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미학적 사고는 근대 정치의식의 변화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그것은 근대 후반에 들어 확립된 개인주의와 사회계약설에 입각한 민주 정치 의식의 발전에 기여했다. 가장 좋은 예는 루소가 시민적 덕의 기초를 동료 시민을 향한 동정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루소는 시민적 민주주의의 뿌리를 합리적 이성의 원리가 아니라 감성적 상상력으로 보았다. 즉 자연 상태에서 철저히 개인주의적인 인간이 공동체를 이루려는 근본 동기는 이성적 계산이 아니라 동료 시민을 향한 감정적 애정이라는 것이다. 그는 감성적이고 정서적 인간관에 입각한 새로운 정치의식을 퍼뜨리는 선구자 역할을 했다.

미학은 계몽사상에 의해 부화되고 양육된 부르주아적 관념이었다. 그것은 또한 초기 자본주의 사회가 표방하는 개인주의의 한 표현이었다. 즉 미학은 근대 사회 질서에 적합한 주체로서의 인간의 이미지 형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근대 시민 민주주의 사회 역시 이러한 인간관의 변화와 관련이 깊다.

미학은 정치사상의 발전과 연관해서 매우 모순적인 두 면을 지닌다. 한편으로 미학에는 전체주의와 절대주의를 깨뜨리고 개인의 해방과 민주 사회를 구가하는 면이 있다. 미학은 예술품과 마찬가지로 외부의 억압적 힘에서가 아니라 그 자체의 자유로운 정체성에 따라 살아가는 새로운 주체의 형성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 미학은 대중으로 하여금 억압적 독재를 인식하지 못하도록 감추는 일에도 활용된다.


미학은 그 개념이 다채롭고 융통성이 있기 때문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미학적 사고가 과학이 지배하던 근대에 끈질기게 계속될 수 있었던 것은 자유와 법칙성, 순발성과 필연성, 개별성과 보편성 사이에서 폭넓게 운신할 만큼 유연한 성격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론적 성격을 가진 미학의 발생과 더불어 예술은 오히려 근대적 이론의 일반적 특성인 추상성과 형식적 요소에 시달리게 되었다. 바로 여기에 미학의 한계가 있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미학은 새로운 문화의 토대를 형성할 만큼 하나로 통일된 전통이 결코 아니었다는 것이다. 미학은 실제로 매우 모순된 성격을 가진 학문이다. 근대 미학은 오랜 역사적 전통과 근대성 그리고 삼중 변증법적 대립을 수반한 위기 개념이었다. 또 미학의 실체도 모호했다. 이 점은 미학의 조화를 부정한 니체의 설명이 잘 보여 준다. 그는 미학을 삶에 간혹 나타나는 일시적 통일성으로부터도 부단히 떨어져 나가는 형태 없는 생산적 에너지라고 했다. 권력의지가 미학적인 것은 근거 없고 초점 없는 자기-산출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닥을 알 수 없는 깊음으로부터 매번 다르게 솟아나는 무궁무진한 비결정성을 특징으로 한다.

이것이 바로 미학이 과학의 충분한 대안이 되지 못한 이유이다. 미학적 세계 인식은 상대주의에 시달렸다. 이런 미학에 입각한 현대 예술은 전례 없는 파괴된 모습을 보여 주었다. 결국 근대의 유산인 이성주의와 낭만주의, 철학과 미학은 모두 한계를 드러냈다. 이 가운데 근대의 내적 긴장은 여러 단계로 표출되었고, 그것은 근대의 붕괴를 예견케 하는 징후들이었다.


미학에 입각한 현대 예술의 사조 중 데카당스는 기성의 권위가 파괴되고 남은 가치들이 상업화된 쇠퇴한 문화를 반영한다. 데카당스는 퇴폐, 부패, 쇠퇴라는 뜻으로 본래는 로마 제국 쇠망기의 타락과 방탕의 시대상을 가리킨 말이다. 이것은 다시 주로 19세기 말 프랑스에서 일어나 전 유럽에 퍼진 문학 사조를 가리키기도 한다. 관능주의, 향락주의, 악마주의, 탐미주의로 불리기도 하는 랭보J.A.Rimbaud,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 보들레르C.Baudelaire, 포우E.A.Poe 등이 이 범주에 속한다. 사회적으로는 부르주아 민주 사회에 대한 절망과 도피 그리고 냉소주의를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데카당스는 근대의 추진력이라 할 유토피아적 상상력과 창조력에서 뒤지지만 조소나 비판 면에서는 근대를 압도한다. 이런 의미에서 극단적 ‘비판의 문화’라고 할 수 있다.

한편 근대 내부의 저항과 비판이 방향을 잃고 좌절하게 된 상황에서 등장한 또 다른 사조는 니힐리즘nihilism이었다. 니힐리즘은 라틴어의 ‘무’를 뜻하는 nihil에서 유래했다. 허무주의라고 번역되는 이 용어는 근대 문화의 토대였던 이성이 가치를 상실한 상황에 대한 지시어로 적합한 것이다.

니힐리즘은 ‘극단적인 합리주의의 입장에서 기성의 도덕, 전통적 종교, 습관, 제도 등을 거부하고 파괴하려는 입장’을 말한다. 이는 ‘어떤 존재도 인정하지 않고 또 그에 대한 인식의 가능성과 가치까지도 부정하려는 사상적 입장’이다. 이런 정신은 이미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고 존재해도 알 수 없고 알아도 전달할 수 없다던 고대 그리스의 궤변가 고르기아스Gorgias에게서 볼 수 있다.

근대에 이 용어가 본격적으로 논의의 대상이 된 것은 19세기 후반의 일이다. 니힐리즘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것은 투르게네프I.S.Turgenev로 1862년 대표작 「아버지와 아들」에서였다. 그 후 도스토예프스키 등은 ‘합리주의와 과학적 인식마저 부정하고 또 신을 부정하려고 하면서도 부정하지 못하고 있는 현재의 정신적 모순’을 니힐리즘으로 보았다. 문학에서는 플로베르G.Flaubert가 시대적 위기의식을 느끼는 가운데 절망적 항변을 토하였다. 철학에서는 삶의 의지를 부정한 쇼펜하우어A.Schopenhauer와 창조적 허무를 주장한 슈티르너M.Stirner가 니힐리즘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더 나아가 니힐리즘을 몸소 체험하고 그것을 넘어서려는 노력을 기울인 철학자가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다. 니체는 니힐리즘과 데카당스를 가장 명료하게 표현했을 뿐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살았던 사람이다. 미학적 세계관 위에 서 있는 시적詩的 철학자 니체는 어느 사상가보다 근대의 위기와 붕괴의 징후를 잘 포착하고 또 발전시켰다. 마땅히 그는 포스트모던의 선구자라 불릴 만하다.


니체는 니힐리즘이 유럽 정신의 양대 뿌리인 헬라 형이상학과 기독교의 초자연적 세계관의 유산이 붕괴하는 데서 말미암는 당연한 결과라고 갈파한다. 그가 특히 강하게 저항한 것은 기독교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본 삶에 대한 적대 의식이었다. 이는 근대가 신을 버린 후에도 이성의 법칙에 따라 윤리와 도덕의 이름으로 자연스러운 삶을 구속한 데서 일어난 것이다. 본능적 삶을 부정하는 근대 문화는 허무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이런 그가 데카당스를 긍정적으로 본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는 데카당스를 삶을 부인하는 부정적 쇠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의지적으로 받아들여 촉진시켜야 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는 삶 자체의 의미 이상을 삶에 부가하는 모든 것을 마땅히 배격해야 할 것으로 여겼다. 특히 형이상학을, 삶에 이성적 질서를 부과하여 그것을 지배하려는 권력 의지의 표현으로 보고 파괴하려 했다. 그리하여 인간적 삶의 본연인 부조화와 허무를 운명적인 것으로 기꺼이 받아들일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조장하는 자세를 취한다.

데카당스를 고취하는 그의 태도는 분명히 혁명적 자세는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니힐리즘으로 넘어간다. 니체의 니힐리즘은 신과 이성의 죽음에 관한 그의 생각에서 확인된다. 즉 그의 니힐리즘은 이제까지 인류가 궁극적 진리의 근원으로 믿어 온 두 근원인 신과 이성을 부정하는 것에 근거한다. 인간은 자신이 만든 신을 믿음으로써 구원을 발견하고자 했다. 이성도 같은 목적으로 신격화되었다. 구원에 대한 갈구의 표현인 신과 이성이 세계를 지배하는 한, 삶의 목적과 의미는 상실된다. 이것이 바로 근대 후반에 찾아온 니힐리즘의 본질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러한 신이 죽었다. 마찬가지로 이성도 남을 지배하고자 하는 의지와 권력 추구의 수단에 불과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는 이런 우상들은 결국 참된 삶의 긍정적 정신을 전복시키는 것이므로 결단코 깨뜨려야 할 것으로 보았다. 니체는 기독교 도덕의 유산에 의해 지배되는 현실을 몰락시키고 인간적 삶의 본질을 힘에의 의지로 역설함으로써 니힐리즘을 극단화시키고 있다.

니체가 데카당스와 니힐리즘을 극단화한 것은 결국 근대성을 포함해 모든 근대적 정치, 사회, 문화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려는 의도에서였다. 프랑스의 철학자 폴 리쾨르Paul Ricoeur가 니체를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를 비판한 마르크스, 의식보다 무의식의 중요성을 강조한 프로이트와 함께 근대를 해체시킨 ‘의심의 대가’라고 부른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들은 모두 포스트모던 사상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지만 니체는 그 중에서도 가장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 이유는 그가 근대의 주요 기반을 해체하는 일의 선봉에 섰기 때문이다.


니체의 기독교 비판은 근대 문화의 중심인 이성주의 비판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신의 죽음을 선언한 이후 그 자리를 차지한 근대의 자율적 인간의 이성도 신에 못지않게 전제적이라고 파악했기 때문이다. 그는 근대의 이성주의 문화는 그 출발과 정신은 반기독교적이나 결국 기독교의 반사 이미지mirror image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즉 근대의 정신은 하나님 없는 기독교a Christianity without God요 하나님 대신 이성을 세워 섬기는 종교적 문화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그는 『바그너의 경우』에서 데카당스를 자신의 철학의 주제로 소개한다. “도덕은 삶을 부정한다.” 이 구호는 신성과 가치의 이름으로 숨겨 온 도덕의 폭력을 폭로한다. 그는 이는 삶을 빈곤하게 하고 종말을 지향하는 의지요, 위대한 피곤함이라 했다. 그의 이런 극단적 자세는 절대적 권위와 기준을 모두 우상으로 여겨 파괴하고, 대안이 없는 공백을 만들기 때문에 흔히 니힐리즘으로 간주된다.

니체의 의도는 절대를 배격해서 인간의 자율적 삶을 보장하려는 것이다. 이 점에서 그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 나오는 이반의 “신이 없으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주장을 입증하려 했던 사람이다. 니체는 『즐거운 학문』에서 최근에 일어난 가장 중요한 사건은 신이 죽은 사건이라고 했다. 이 소식으로 인해 모든 사상가에게 서광이 비치기 시작했고 감사와 경이와 예감과 기대로 넘친다고 했다. 그는 이제 지평선이 다시금 열려, 위험을 무릅쓰고 항해를 재개할 수 있게 되었다고 기뻐한다,


니체는 근대 이성주의 문화의 기초인 인식론을 해체하려고 했다. 그는 모든 지식이 인간의 인식 작용에 의존한다는 칸트와 피히테의 주장을 좀 더 극단화하여, 존재하는 모든 것은 주어진 것given이 아님을 강조했다. “진리란 무엇인가? 그것은 은유와 환유 그리고 신인동형론神人同形論의 기갑사단일 뿐이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고정 불변이 아니며 모든 것이 해석이요, 말뿐이라는 것이다. 그의 의도는 모든 지식과 진리가 결국 인간의 산물이라고 주장하려는 것이다. 즉 지식은 해석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더욱이 모든 지식을 실재와는 관계없이 어떤 유형의 삶을 가능하도록 만드는 전략의 결과로 보는 것이다.

결국 그는 지식과 학문은 진리와 사실을 밝히는 문제가 아니라 누구의 전략이 질서를 좌우하고 삶을 지배하느냐 하는 힘의 문제라고 주장한다. 진리란 삶을 영위하는 과정에서 파생된 부산물이다. 심지어 그는 ‘지식은 힘의 도구’라고 했다. 그렇다면 철학자는 진리와 도덕의 뿌리를 파헤쳐야 한다. 여기서 그는 포스트모던 사상가 미셸 푸코의 지식의 고고학과 도덕의 계보학을 예고하고 있다.

모든 것은 보기에 달렸다는 이런 관점주의적 진리관에서 소위 ‘대안적 관념 체계 또는 세계관’의 문제가 대두한다. 세계 이면에 존재하는 실재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에서 지식의 니힐리즘이 배태된다. 또한 객관적 지식의 가능성이 파괴된 결과 모든 지식을 의지를 관철시키려는 힘에의 의지로 보는 것은 도덕적 니힐리즘이다.


그러나 쇼펜하우어와 달리 니체는 자신의 운명을 피하지 않고 사랑하는 정신을 주장한다. 이는 초인적 의지, 무신론적 의지, 무신론적 도덕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다. 니체의 니힐리즘을 ‘능동적 허무주의’라고 주장하는 해석은 일리가 있다.

니체는 영겁회귀ewige Wiederkunft 사상을 통해 근대적 이상주의와 이제까지 서구가 익숙해 있는 역사관을 철저히 부정한다. 그가 지향하는 목표점은 근대 사상에서 익숙한 유토피아가 아니다. 왜냐면 근대의 유토피아적 역사의식 역시 기독교의 종말론적 역사관과 별로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역사의 진보나 전복은 어떠한 종결이나 완성이 아닌 그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일 뿐이라는 순환적 사관으로 복귀하고자 했다.

니체는 발전과 퇴보를 넘어서는 새로운 역사의식을 꾀했다. 우주는 순환하므로 내세나 피안이 없고 단지 순간이 있을 뿐이며, 인생도 환희와 고민의 틀 속에서 영원히 회귀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는 신 없는 시대의 인간 존재의 무의미성을 알되 이것을 저주하지 않고 이 운명을 감수하며 사랑하는 강자로서의 운명애amor fati 정신의 또 다른 표현이다. 영겁회귀란 결국 니힐리즘을 능동적으로 포용하는 자세다.


니체의 화신 차라투스트라가 보여 준 초인Übermensch의 모습도 능동적 니힐리즘을 보여준다. 흔히 오해하듯 니체의 초인은 초인간적인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기존의 경계와 한계를 ‘넘어가는 인간overman’이라는 해석이 더 일리가 있다. 이런 초인의 개념은 기독교 유산인 도덕과 윤리를 넘어가는 인간관을 제시하기 위한 것이다. 니체는 신 앞의 의인이 되기보다 선과 악을 넘어서는 초인이 되고자 한다. 초인은 불멸성 대신 영원회귀를 이상으로 삼고, 선과 진리 대신 힘에의 의지를 궁극적인 것으로 여긴다.

동시에 초인의 개념은 주체의 개념을 해체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근대는 생각하는 자아를 존재의 기초로 본 데카르트와 더불어 시작되었다. 마음이라는 내면적 공간을 만든 로크와 자아를 법 제정자로 규정한 칸트에 의해 완성된 주체, 즉 초월적 자아transcendental ego는 근대 문화의 중심이다. 니체는 이 환상적 인간관을 파괴하려고 했다. 니체가 지향하는 초인은 신의 질서에 순종하는 종교인이 아닐 뿐 아니라 근대적 자아처럼 자기를 중심에 두고 세계를 조정하고 질서를 세우는 자아도 아니다. 니체의 초인은 미학적으로 사는 인간이다.

미학적으로 사는 인간은 곧 신이 주시는 초월적 기쁨이나 형이상학이 제공하는 위로보다는 처절한 삶의 심연에서 경험하는 내재적 삶의 가치를 중시하는 인간인 초인이며, 그는 힘을 목적으로 삼고 이를 즐거워한다. 어떠한 궁극적 토대나 정당화도 여타 형이상학적 보증도 필요 없이 폭력과 지배가 있는 세계의 모습을 그대로 인정하며 사는 것이다.


니체의 심미적 세계관과 니힐리즘은 근대의 해체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서구의 몰락Untergang des Abentlandes』을 쓴 슈팽글러가 니체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근대 이성주의에 대한 가장 강력한 비판 세력인 실존주의도 니체의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 사르트르는 신이 없는 허무에 맞서, 주어진 모든 제약을 넘어서 자유를 행사하는 인간이 참된 인간이라 했다. 이것은 능동적으로 니힐리즘의 극한을 넘어선다는 니체의 초인 사상과 명백히 결부된다.

한편 향락주의나 도덕과 규범을 무시하는 이기주의 그리고 현실도피 같은 사회 심리현상을 니힐리즘이라 부를 때가 있다. 대개 니힐리즘은 도덕과 규범이 이성적 논증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과 삶 그 자체가 공허하다는 절망으로부터 자라나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은 니체가 『도덕의 계보학』에서 역설한 ‘약속’, 즉 일관성의 실현 의지가 결여되어 있기에 굳이 말하자면 ‘수동적 니힐리즘’이라 할 수 있겠다. 정치적 니힐리즘의 발로인 나치즘의 뿌리를 그의 힘에의 의지와 초인주의에서 찾기도 한다. 물론 이 역시 독일 제3제국의 경과에서 나타나는 기존 열강에 대한 열등감을 나치즘의 아방가르드적 미학으로 애써 은폐했을 뿐이라는 관점에서 르상티망이 미처 극복되지 못한 반쪽짜리 니힐리즘일 뿐이라 주장할 수 있다. 그럼에도 나치즘의 몰락이 근대의 해체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음을 감안하면 니체가 포스트모던의 선구자라는 지적은 마냥 공허한 것이 아님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2) 지적 사기



<이제는 들통났지만 이 책은 원래 장난질에서 시작되었다. 우리 둘 중 한 사람이 미국의 문화 연구 전문지 《소셜 텍스트》 지에 프랑스와 미국의 저명한 지식인들이 물리학과 수학에 대해서 쓴 황당무계하지만 불행하게도 심각한 글을 대거 인용해서 한 편의 패러디 논문을 썼던 것이다. 그 패러디 안에 들어간 것은 소칼이 도서관을 뒤져서 찾아낸 ‘기록’의 극히 일부분이었다. 주위의 과학 전문가와 비전문가에게 그 방대한 기록을 모두 보여주고 나서 우리는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것을 읽혀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조금씩 굳히게 되었다. 그 인용문들이 왜 터무니없고 그 중 상당수는 아예 말이 안 되는 소리인지를 어려운 전문어를 동원하지 않고 설명하고 싶었다. 나아가, 그런 주장이 여태까지 아무 탈 없이 먹혀들 수 있었던 문화적 풍토에 대해서도 논의하고 싶었다.> 『지적 사기』(이희재 譯) 영어판 서문 中


전편에서 지나가듯 소개한 ‘소칼 사건’이 일대 파장을 몰고 온 뒤, 소칼과 동료들은 일목요연하게 자신들의 입장을 저술 형태로 정리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렇게 앨런 소칼과 장 브리크몽이 써낸 책이 바로 『지적 사기Fashionable Nonsense』이다.

저자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라캉, 보드리야르, 들뢰즈 같은 이름난 지식인이 납득할 만한 설명도 없이 원래의 맥락에서 완전히 벗어난 과학적 개념을 써먹거나, 과학에는 문외한인 독자들 앞에서 이 개념을 끌어들이는 것이 타당한지에 대한 성찰은 고사하고 개념의 정확한 뜻조차 밝히지 않고 전문 과학 용어를 쏟아 붓는 식으로 과학적 개념과 어휘를 남용했다는 것이다. 물론 그들의 책 전체가 엉터리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이 책은 또한 인식론적 상대주의를 비판하고 있다. 인식론적 상대주의에 따르면 현대 과학은 수없이 많은 ‘신화’나 ‘이야기’ 또는 ‘사회적 구성물’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과격한 상대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해 증거에 의한 이론 결정의 미흡성이나 관찰의 이론 의존성 등 과학철학의 주제를 오용한다.



포스트모더니즘 조류에 대한 비판


사건을 일으키기 전, 저자들은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광범위한 영역에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이 잠식했다고 인식한다. 그들이 본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징은 계몽주의 시대 이후의 합리주의 전통을 거의 노골적으로 부정하며, 경험적 검증과는 동떨어진 이론적 담론이며, 과학을 수많은 ‘이야기’, ‘신화’, 또는 ‘사회적 구성물’ 가운데 하나로 간주하는 인식론적・문화적 상대주의라는 것이다.

저자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 불리는 불투명한 시대정신을 비판하는 작업에 창조적인 기여를 하려” 했다. 수학과 물리학에서 나온 개념과 용어가 자꾸만 남용되는 현상에 대하여 좀 더 경각심을 갖자는 취지에서 책을 썼다고도 밝힌다. 이들이 말하는 남용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적어도 하나 이상 가지고 있는 경우를 말한다.


(1) 막연하게 밖에 모르는 과학 이론들을 장황하게 늘어놓는다.

(2) 자연과학에서 나온 개념을 인문학이나 사회과학에 도입하면서 최소한의 개념적 근거나 경험적 근거도 밝히지 않는다.

(3) 완전히 동떨어진 맥락에서 전문 용어를 뻔뻔스럽게 남발하면서 어설픈 학식을 드러낸다.

(4) 알고 보면 무의미한 구절과 문장을 가지고 장난을 친다.


그리고 이 작업을 하면서 저자들이 받은 비판에 대해서도 조목조목 반박하고 있다. 여기서는 내가 가장 중요하다고 여긴 네 가지 비판에 대한 반박을 끌어오겠다.


Q. “철학자들의 맥락을 제대로 이해 못 한 게 아닌가?”

A. “이 저자들이 쓴 책의 나머지 부분을 우리가 속속들이 이해하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얼마든지 인정하겠다. (…) 먼저 우리가 말하고 싶은 것은 수학이나 물리학에서 쓰이는 개념을 다른 연구 분야에 도입할 경우 그 관련성을 정당화할 수 있는 논증을 약간이라도 덧붙여야 한다는 점이다. 이 책에서 인용된 모든 사례에서 그런 논증이 제시되고 있는지를 알아본 결과 (…) 그러한 논증은 찾아볼 수 없음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었다.

정말로 어떤 지적인 목적을 염두에 두고 수학을 끌어들인 것인지 아니면 그저 독자를 기죽이기 위해서 수학을 동원한 것인지를 판별할 수 있는 몇 가지 ‘경험적 법칙’을 소개할까 한다. 먼저, 정당한 활용 사례에서는 자신이 응용하려고 하는 수학의 내용을 잘 이해하고 있어야 하며─중대한 실수가 있어서는 특히 곤란하다─꼭 필요한 용어의 전문적 의미를, 과학자는 필시 아니겠지만 텍스트를 이해하려고 애쓰는 독자가 알아먹을 수 있는 표현으로 가급적 명료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 수학적 개념은 정교한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수학은 여기에 버금가는 정교한 의미를 가진 개념들이 쓰이는 분야에서 주로 활용된다고 하는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콤팩트 공간이라는 수학적 개념이 어떻게 ‘향유의 공간’처럼 부실하게 정의된 용어로서 정신분석학에 도입될 수 있다는 것인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셋째, 물리학에서도 아주 드물게밖에 쓰지 않고 화학이나 생물학에서는 생전 가야 쓰는 법이 없는 집합 이론의 선택 공리처럼 난해한 수학 개념이 인문학이나 사회과학에 난데없이 등장할 때는 특히 의심을 하는 것이 좋다.”


Q. “그건 어디까지나 은유로 사용된 게 아닌가?”

A. “물론 과학이 은유적으로 표현되는 경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은유를 하는 목적이다. 원래 은유란 것은 생경한 개념을 익숙한 개념에 연결시켜 그 뜻을 명확하게 나타내기 위하여 쓰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가령 이론물리학 세미나 시간에 양자장 이론에 나오는 아주 까다로운 개념을 데리다의 문학 이론에 나오는 아포리아 개념에 빗대어 설명한다고 가정하자. 그 설명을 들은 물리학도들은 저 사람이 자신의 현학성을 과시하려는 것이 아닌 다음에야 그런 은유ー타당하건 타당하지 않건ー를 구태여 왜 쓰는 것일까 하는 직극히 당연한 의문에 사로잡힐 것이다. 같은 이유에서 우리는 아무리 은유의 차원에서일망정 정작 본인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과학적 개념을 과학에는 문외한인 독자들에게 쏟아붓는 행위는 백해무익하다고 생각한다. 혹시 진부한 철학적 발언이나 사회학적 발언을 근사한 과학적 전문어로 포장하여 심오한 인상을 주려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닐까?”


Q. “당신들에게 자격은 있는가?”

A. “철학자들이 과학에 대해서 발언하려는 것을 (그들이 과학을 체계적으로 배우지 못했다고)우리가 꼬투리를 잡는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근데 당신들은 무슨 자격이 있어 철학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인가? 여기에는 심각한 오해가 깃들여 있다. 첫째, 우리는 누구더러 당신은 이런저런 주제에 대해서 말할 자격이 없다고 하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둘째, 어떤 주장의 지적 가치는 그 주장의 내용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지 누가 그 말을 하는 것인지에 의해서, 하물며 그 말을 하는 사람이 어떤 학위를 갖고 있는지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셋째, 무언가 혼동이 있다. 우리는 라캉의 정신분석학, 들뢰즈의 철학, 라투르의 구체적인 사회학 연구에 판정을 내리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관심은 어디까지나 이 저자들이 수학과 물리학에 대해서, 과학철학의 기본 문제에 대해서 한 말에 국한되어 있다.

언어학자 노엄 촘스키의 경험담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그는 수학을 전공하지 않았으면서도 수리언어학에 관한 논문을 썼다. 그러나 수학 세미나나 학술 대회에서 수리언어학에 관한 강연을 해 달라는 초빙을 여러 대학으로부터 받았으며, 수학자들은 단 한 명도 그의 자격qualification에 대해 따지지도 않았고 관심도 없었다.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그가 맞았는지 틀렸는지, 수리언어학이 과연 흥미로운 학문인지 아닌지, 더 나은 접근 방법은 혹시 없었는지를 판별하는 데 쏠려 있었다. 그런데 사회 문제, 미국의 외교 정책, 베트남, 중동 문제를 놓고 벌이는 토론이나 논쟁에선 그의 자격 문제가 번번이, 대단히 악의적으로 제기되곤 했다고 한다. 그는 ‘사회 현실에 대해 발언하기 위해서는 그럴듯한 자격증이 있어야 하며, 특히 주류의 견해와는 동떨어진 입바른 소리를 하려면 더더욱 그래야 한다. 대체로 지적으로 탄탄한 내실을 갖추고 있는 분야일수록 자격증보다는 알맹이에 더욱 큰 관심을 기울이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말한다. (우리가 보기에 마지막 문장은 과장되어 있지만, 그가 여기서 꼬집는 대상은 권력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으면서 권력을 신비스럽게 만드는 정치학의 분과들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겠다.)”


Q. “이 저자들은 모두 포스트모더니스트가 아니지 않은가?”

A. “지적한 대로 이 책에서 다루는 저자들은 모두 포스트모더니스트나 포스트구조주의자를 자처하지는 않는다. 저자들의 책 중에는 이 사상적 조류가 등장하기 전에 나온 책도 있으며 일부 저자는 이 사상적 조류와의 연계성을 단호히 거부한다. 더욱이 이 책에서 비판을 받고 있는 지적 남용의 사례들은 모두 같은 색을 띠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들은 프랑스 지성사에서 뚜렷하게 구분되는 두 시기에 각각 조응하는 대략 두 개의 큰 범주로 구별된다. 처음 단계는 1970년대 초반까지 이어지는 극단적 구조주의의 시대이다. 당시 저자들은 수학이라는 액세서리를 동원하여 인문과학의 모호한 담론에 ‘과학성’이라는 얄팍한 껍질을 입히려고 필사의 노력을 기울였다. 라캉의 저작과 크리스테바의 초기 저서가 이 범주에 들어간다. 다음 단계는 1970년대 중반부터 시작되는 포스트구조주의의 시대이다. 이때부터는 ‘과학성’이라는 거추장스러운 가면조차 벗어던지며, 그 저변의 철학(그것이 과연 식별되느냐가 문제이지만)은 비합리주의와 허무주의로 치닫는다. 보드리야르, 들뢰즈, 가타리의 텍스트는 이러한 입장을 잘 드러낸다.

‘포스트모더니스트’라고 불리는 뚜렷한 사상 범주가 있다는 견해는 정작 프랑스보다는 영어권 세계에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편의상 이런 용어를 채택한 것은 이 책에서 분석되는 모든 저자들이 영어권의 포스트모더니스트 담론에서 기본적인 준거점으로 활용되고 있기 때문이며 그들이 쓰는 문투의 일정한 측면(자기들끼리만 뜻이 통하는 애매모호한 전문어, 이성적 사유의 암묵적 거부, 과학적 은유의 남용)이 앵글로색슨 포스트모더니즘의 공통된 특성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우리가 가하는 비판의 타당성은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단어 하나를 쓰고 말고에 좌우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의 논증은 개별 저자가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광범위한 조류에 연계되느냐ー개념적인 차원에서건 사회학적인 차원에서건ー와는 무관하게 평가되어야 한다.”



과학철학의 인식론적 상대주의


“포스트모던 담론은 대개가 이런저런 형태의 인식론적 상대주의로 장난을 치거나 인식론적 상대주의를 뒷받침하는 논리를 내세운다.” 고 저자는 주장한다. 이에 따르면 그들은 자신의 입장을 옹호하기 위하여 관찰의 이론 의존성이라든가 증거에 의한 이론의 미결정성, 패러다임의 공약 불가능성 같은 논거를 제시한다. 여기서 저자는 가치 판단으로서의 도덕적・윤리적 상대주의와 예술적 판단으로서의 미적 상대주의를 제외한, 존재하는 것 혹은 존재한다고 주장되는 것에 대한 사실의 천명으로서의 인지적・인식론적 상대주의를 비판 대상으로 삼는다.


우리는 세계와 바로 접할 수 없고, 다만 우리의 감각하고만 접할 수 있다. 그렇다면 감각 너머에 무엇인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에 대한 증거는 없다. 그저 합리적인 가설을 받아들였을 뿐이다. 우리가 느끼는 감각의 지속성을 설명할 수 있는 가장 자연스러운 길은 그 감각이 우리 의식의 바깥에 있는 주체에 의하여 생겨났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순전히 머리로 지어낸 감각은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 하지만 생각만으로 전쟁을 종식시키진 못하고, 사자를 쫓아내지도 못하며, 고장 난 차를 굴러가게 하지도 못한다.

새삼스럽지만 이런 논증으로는 유아론을 논박할 수 없다. 누군가 자기가 유니콘이라 우겨도 그것이 오류라고 본인에게 납득시킬 순 없다. 그런데 중요한 건, 어떤 견해가 논박되지 않는다고 해서 그 견해를 참이라 믿어야 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과격한 회의주의도 이와 똑같은 논리로 접근할 수 있다. 과격한 회의주의자들은 “내가 직접 접하는 건 나의 감각뿐인데 그 감각이 실재를 정확하게 반영한다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겠느냐”고 역설한다. 데카르트의 신에 대한 선험적 논증은 21세기에 통할만한 것이 아니다. 흄은 이에 대해 깔끔하게 정리한 바 있다.


<이것은 감각의 지각을 낳는 것이 감각을 닮은 외부 대상인가 아닌가 하는 사실의 문제이다. 이 문제를 어떻게 판정할 것인가? 이것은 비슷한 성격의 다른 모든 문제들과 마찬가지로 분명히 경험에 의하여 판정된다. 그러나 여기서 경험은 침묵을 지키고 있으며 또 완전히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다. 마음 앞에 나타나는 것은 오직 지각뿐이다. 지각과 대상의 연관을 경험할 수 있는 방법이 마음에게는 없다. 그런 연관을 전제하는 것은 따라서 전혀 근거 없는 추론이다.> 데이비드 흄 『인간 오성론』 1부 12절


과연 흄의 회의주의는 들뢰즈의 탈영토화 개념의 주요 착안점이 될 만하다. 흄의 회의주의는 보편적이지만 이 보편성은 약점이기도 하다. 흄의 회의주의는 물론 논박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진지한 사람치고 생활에서 통용되는 지식을 철두철미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 당장 내가 식당 테이블 의자에 앉아 눈높이를 조절하고자 종이 상자 위에 노트북을 올려놓고 이 글을 작성하고 있는 사실을 무엇으로 회의할 수 있겠는가. 왜 일상생활에서는 거부되는 회의주의가 다른 영역 예컨대 과학 지식에 대해서는 유효하다는 것인지를 따져야 한다. 결국 경험의 정합성을 설명하는 최선의 길은 외부 세계가 우리의 감각이 제시하는 상과 엇비슷하게라도 맞아떨어지리라고 가정하는 것이다.


과학 이론(적어도 가장 잘 검증된 이론)들을 믿는 주된 이유는 그 이론들이 인간의 경험을 조리 있게 설명하기 때문이다. 탁월하게 수립된 과학 이론들의 실험적 검증이 도처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은, 비록 불완전하고 근사치일지언정 우리가 자연계에 대한 객관적 지식을 정말로 가지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그러면 과격한 회의주의자나 상대주의자는 현실에 대한 기타 담론 유형들과 과학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느냐고 물을 것이다.

물론 과학적 합리성의 완벽한 성문화는 적어도 현재로서는 존재하지 않으며 저자는 앞으로도 그것이 이루어지리라고 기대하지는 않는다. 미래는 워낙에 예측이 불가능한 것이고 합리성은 새로운 상황에 부단히 적응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자신들과 과격한 회의주의자들의 차이는 ‘잘 수립된 과학 이론들이 대체로 훌륭한 논증으로 뒷받침된다고 생각하는지’ ‘이런 논증의 합리성이 사안별로 신중하게 분석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에 있다고 밝힌다.


과학적 방법을 성문화한다는 것은 불가능이라고까지는 말할 수 없어도 굉장히 어렵다. 하지만 예전의 경험으로부터 어느 정도의 타당성을 가진 법칙들을 끌어내는 것조차 막아서는 곤란하다. 과학 이론을 만들어낼 때 원리적으로는 연역, 귀납, 유추, 직관 그 외에 여러 가지 방법이 허용된다. 사실 유일한 실제적 기준은 실용성이다. 그렇지만 이론들의 정당화는 합리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설령 합리성이 무엇인지 개념적으로 못 박아 말하기는 어렵다 하더라도 말이다.

어떤 이론을 검증하거나 반증할 수 있게 해 주는 전후 맥락으로부터 독립된 보편적 법칙이 존재한다고 믿는 것은 순진한 발상이라고 저자들은 강조한다. 달리 말하면 정당화의 맥락과 발견의 맥락은 역사적으로 평행선을 달리며 발전해 온 것이다. 그러나 역사의 순간순간 정당화와 발견은 구분되어 왔고 그러지 않았으면 이론들의 정당화 과정은 합리성에 대한 일체의 고려 없이 멋대로 진행될 수밖에 없다.


저자는 “과학의 인식론과 일상생활의 합리적 태도는 근본적으로 조금도 다르지 않으며, 전자는 후자를 확대하고 가다듬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고 말하며, “외부 세계는 과학자들의 타협에 의해 창안된 것이다”는 브루노 라투르의 주장에 대해 “과학자들은 미지수로 남아 있던 논쟁거리가 해결될 때 그를 누적된 관찰에 힘입은 결과라 보지 과학 논문의 문학적 질 때문이라 생각하진 않을 것이다.”라 신랄하게 비판한다. 상대론자에게는 사회적・문화적 상황으로부터 독립된 유일무이하게 옳은 답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반면에 정답을 추구하는 과학자들은 정의상으로도 벌써 상대론자가 아니다. 그들은 당연히 자연을 외부의 심판으로 활용한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자연에서 정말로 일어나는 일을 알고자 하며 그런 목적의식 아래 실험을 한다.



수학, 과학과 인문학, 사회과학의 진정한 대화를 바라며


저자는 이 책에서 자신들의 관심이 인문학과 사회과학에 영향을 끼친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정한 지적 측면들에 국한되어 있다고 말한다. 이를 풀어 보자면, 모호한 담론에서 느끼는 매혹, 현대 과학에 대한 전반적 회의로 귀결되는 인식론적 상대주의, 진위와는 무관하고 주관적 신념에만 과도한 관심을 쏟는 경향, 담론이 지시하는 사실이 아니라 담론과 언어 자체를 중시하는(더욱 심하면 사실이 존재한다는 관념 자체, 사실을 가리킨다는 관념 자체를 부정하는) 현상 따위를 말한다.

물론 온건한 형태로 표현되는 다수의 포스트모던 이념은 소박한 모더니즘(진보의 무한성과 연속성, 과학만능주의, 유럽문화 중심주의에 대한 맹신)을 교정하는 중요한 소임을 갖는다. 그러나 저자는 여기서 과격한 형태의 포스트모더니즘뿐 아니라 온건한 형태에서 발견되는 많은 정신적 난맥상 역시 문제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크게 다음과 같은 메시지들을 전달한다.


─ 자기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똑바로 알고 하라. 자연과학의 내용을 철학적으로 성찰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과학자들이 쓰는 많은 개념들─법칙, 설명, 인과성 개념 같은─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모호함을 담고 있으며 철학적 성찰은 이 관념들을 명료히 밝히는 데 도움이 된다. 하지만 이런 주제를 의미 있게 다루기 위해서는 관련된 과학 이론을 상당히 심도 있게 그리고 당연히 전문적인 수준에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대중 과학의 수준에서 이루어지는 모호한 이해만으로는 불충분하다.


─ 난해하다고 해서 반드시 심오한 것은 아니다. 다루는 문제 자체가 까다롭기 때문에 어려운 담론과 의도적으로 난해하게 꾸민 글 뒤에 공허하고 진부한 내용을 조심스럽게 숨기고 있기 때문에 어려운 담론은 천지 차이다. 두 유형을 구분하는 데 도움이 되는 기준이 있다. 첫째, 그 어려움이 진정한 어려움일 때는, 그 이론이 어떤 현상을 분석하는지, 그 이론에서 도출되는 중요한 결과가 무엇인지, 그 이론을 강력하게 뒷받침하는 논거가 무엇인지를 간단한 용어들로 기초적 수준에서 설명하는 것이 대체로 가능하다. 둘째, 이 경우 해당 주제에 대한 심층적 지식을 얻을 수 있는 뚜렷한 길이 있다. 반면 일부 난해한 담론들은 마치 하늘의 계시라도 되는 것처럼 독자에게 갑작스러운 질적 도약을 요구하는 듯 하는 인상을 풍긴다.


─ 과학은 ‘텍스트text’가 아니다. 자연과학은 인문과학에서 언제라도 써먹을 수 있는 비유들이 가득한 단순한 저수지가 아니다. 비과학도들은 과학 이론에서 언어 차원의 분석 가능한 보편적 주제들을 분리하고 싶은 유혹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과학 이론은 소설과는 다르다. 과학이라는 맥락에서 이 단어들은 특수한 의미를 띤다. 그리고 그 의미는 일상적 뜻과는 미묘하지만 결정적으로 차이가 나며 이론과 실험의 복잡한 거미줄 안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 자연과학을 흉내 내지 마라. 각각의 연구 분야에서 쓰이는 방법론의 유형은 탐구 대상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이 당연하다. 가령 심리학자들은 자신들의 연구 영역에서 관찰자는 피관찰자에게 영향을 준다고 주장하기 위해서 반드시 양자역학을 들먹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전자나 원자의 행동과는 무관한 자명한 상식이다. 지금 당장은 더 엄밀한 방식으로 다루기 어려운 인간 경험의 다양한 측면들을 과학이 아닌 방법으로 이해하기 위해 직관이나 문학에 의존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 권위에 기대는 논증을 조심하라. 만약 인문학이 누구도 부인 못 할 성공을 거둔 자연과학으로부터 도움을 얻으려 한다면 전문적인 과학 개념들을 끌어와서 그냥 끼워 넣어서는 곤란하다. 인문학은 자연과학의 방법론적 원칙들 중에서 영감을 얻을 수 있다. 가령 한 명제의 타당성은 그 명제를 옹호하는 사람이나 비방하는 사람의 개인적 특성이나 사회적 지위와는 무관하게 그 명제를 뒷받침하는 논리와 사실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는 원칙부터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 구체적 회의주의와 과격한 회의주의는 구분해야 한다. 과학에 대한 두 가지 유형의 비판을 세심하게 구별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특정한 이론에 반대하고 구체적 논증에 바탕을 둔 비판과, 과격한 회의주의가 예전부터 해온 주장을 이런저런 형태로 답습하는 비판이다. 전자는 흥미롭지만 논박될 수 있는 반면, 후자는 논박될 수 없지만 흥미롭지도 않다(지나친 일반성 탓에). 두 가지 유형의 논증을 혼동하면 안 되는 것은, 만약 자연과학이건 사회과학이건 어떤 사람이 과학에 기여하고자 한다면 그는 관찰과(이나) 실험을 통해 세계를 파악할 수 있는 가능성이나 논리학의 실효성을 의심하는 과격한 회의를 포기해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하나의 구체적 이론에 대해서는 언제라도 의심할 수 있다. 그러나 의심을 뒷받침하기 위해 제시되는 전반적 회의주의의 논증은 지나친 일반성 탓에 실효성을 잃는다.


─ 모호하면 언제든 발뺌할 수 있다. 본서에서 저자가 다룬 무수히 많은 애매모호한 글들은 두 가지 유형으로 집약된다. 하나는 맞지만 뻔한 주장이고, 또 하나는 과격하지만 뻔히 틀린 주장이다. 많은 경우 이 모호성은 의도된 결과라고 우리는 생각한다. 실제로 지적 전투에서는 모호성을 앞세우는 것이 대단히 유리하다. 과격한 해석은 경험이 부족한 청중이나 독자를 사로잡는 데 안성맞춤이다. 또 이런 해석의 허무맹랑함이 폭로된다 해도 저자는 오해받았다는 주장으로 자신을 변호하면서 말썽의 소지가 없는 해석으로 언제든지 물러설 수 있다.


물리 세계나 사회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이론은 어떤 식으로든 정당화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선험주의라든가 권위에 기댄 논증이라든가 ‘신성한’ 텍스트에 대한 언급을 피해야 한다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관찰과 실험에 의한 이론의 체계적 검사 말고는 별로 없다. 어떤 이론이 진지하게 받아들여지려면 간접적으로라도 경험적 증거에 의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은 일상생활에서 요구되는 합리성만으로도 충분히 깨달을 수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본서의 일부 텍스트들은 과학이 갖는 경험적 측면을 깡그리 무시하고 오직 언어와 이론적 정립에만 몰두한다. 그 글들을 읽으면 하나의 담론은 경험적 검사를 거치지 않고도 피상적 정합성을 갖추는 척이라도 하면 곧바로 과학적 담론이 되는 것 같은 인상을 받는다.


저자는 특히 ‘명료한 생각과 명료한 글쓰기의 포기’가 교육과 문화 전반에 미치는 악영향을 우려한다. 학생들은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는 담론을 복창하고 윤색하는 법을 배운다. 운이 좋은 학생들은 유식한 어휘 구사의 전문가로 떠서 대학에 자리를 잡을 수도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의도적으로 난해한 담론과 이것이 조장하는 지적 불성실함은 지식 공동체에 해악을 미치고 그렇지 않아도 이미 일반 대중에 만연된 안이한 반지성주의를 조장한다.

그러나 상대주의의 가장 심각한 문화적 여파는 이것을 사회과학에 적용했을 때 생긴다. 에릭 홉스봄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주장에 따르면 사실과 허구의 명확한 구분선은 없다. 그러나 구분선은 존재한다. 그리고 역사가들에게는, 심지어는 우리 같은 강력한 반실증주의 역사가들에도, 이 두 가지를 구별하는 능력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미신과 반지성주의, 광신적 민족주의와 종교적 근본주의가 선진 서구를 비롯하여 온 세계로 번져나가는 이 마당에 역사적으로 이런 어리석은 행태들에 맞서는 가장 유력한 방어 수단이었던 세계에 대한 합리적 해석을 사소한 것으로 취급하는 것은 무책임하기 그지없다. 반지성주의를 옹호하는 것이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의도는 물론 아니겠지만 반지성주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필연적 귀결이다.

사회의 발전에 능동적으로 기여하기를 원하는 지식인들은 사회적 통념을 명쾌히 해부하고 지배적 담론을 탈신비화를 시켜야지 신비화 작업에 덩달아 가세해서는 곤란하다. 하나의 사유 형식은 스스로에게 갖다 붙이는 ‘비판적’이라는 명칭이 아니라 비판적 내용이 수반될 때만 진정한 비판성을 얻는다.

예로부터 지식인들이 문화 전체에 대한 자신들의 영향력을 과장하는 경향이 있는 건 사실이다. 대학에서 가르치고 논의되는 관념은 아무리 난해한 것일지라도 시간이 흐르면 학계의 울타리를 넘어서는 문화적 영향력을 갖게 된다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흐리멍덩한 사고와 주관주의가 빚어낼 사회적 부작용을 질타한 버트런드 러셀의 목소리를 다소 과장된 감이 있지만 그것이 전혀 근거 없는 우려라고 말할 수는 없다.


<포스트모더니즘 다음에는 무엇이 올까? 우리가 과거로부터 배울 수 있는 중요한 교훈은 미래를 예측한다는 것은 위험천만하다는 사실이므로 우리는 우리의 희망과 공포를 그저 나열하는 것으로 만족하련다. 한 가지 가능성은 모종의 독단주의, 신비주의(뉴에이지 같은 것), 혹은 종교적 근본주의로 연결되는 반동적 기류의 부상이다. 적어도 학계에서는 이런 일이 벌어질 리 만무하다고 믿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이성의 죽음은 좀 더 극단적인 비합리주의로 나아가는 길이 충분히 놓일 만큼 과격하게 이루어졌다. 이 경우 지식 공동체는 설상가상의 위기에 봉착할 것이다. 또 하나의 가능성은 지식인들이 기존의 사회 질서에 대한 전면적 비판을 꺼리면서 (적어도 일이십 년 동안은)기존 질서의 비굴한 옹호자가 되거나─1968년 이후 프랑스의 좌파 지식인들 가운데 일부가 그랬던 것처럼─정치 활동과 아예 담을 쌓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희망은 다른 쪽으로 향한다. 우리는 합리적이되 독단적이지 않고 과학적 정신을 추구하되 과학만능주의에 젖지 않고 개방적이되 천박하지 않고 정치적 진보를 지향하되 분파적이지 않은 지식인 문화의 등장을 고대한다. 물론 어디까지나 희망사항이요, 어쩌면 꿈인지도 모른다.> 『지적 사기』(앨런 소칼, 장 브리크몽 著, 이희재 譯) 中



(3)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서두에서 말했듯 아즈마는 이 책으로 저널리즘적 비평으로의 다리를 놓았다. 아즈마는 여기서 오타쿠라는 독특한 존재를, 21세기 초(2000년대 초) 일본의 ‘현실=현재’를 독해하기 위한 틀로 이용한다. 오타쿠의 양상을 ‘동물화’라 명명한 것이 이 책의 핵심이다.

1980년대 들어 일본의 소비 사회는 난숙기에 접어들었다. 이때 등장한 애니메이션이나 만화 등의 상품을 대량으로 섭취하면서 그것들에 대한 ‘취향’이나 ‘정보’도 방대하게 수용하는 ‘서사 소비’를 수행하는 사람들이 오타쿠おたく이다. 1980년대에는 아직 인터넷이 없는 관계로 그들의 소비 행동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손이나 발, 귀를 이용하고 나름대로 시간적 비용을 지불하면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1990년대에 인터넷이 일반화되며 개인용 컴퓨터를 조작하는 것만으로 어디에 직접 가지 않고도 ‘소비’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그와 병행하여 예전 ‘서사 소비’의 대상물 자체가 컴퓨터나 인터넷을 인프라로 하는 형태로 진화해 간다. 그것은 한편으로 1980년대의 오타쿠에게도 있었던 ‘서사’에 등장하는 특정 캐릭터에 대한 애호=집착=전이=페티시즘을 더욱 세분화하고, 정확하게 위치를 선정해 가며(이것을 캐릭터 모에萌え라 부른다), 또 한편으로는 그러한 ‘모에 요소’의 발동 기록이 ‘정보=데이터’로서 송신자 측으로 회수되어 자유자재로 사용-응용할 수 있도록 저장된다. 이러한 ‘데이터베이스 소비’를 하는 것이 1990년대 이후의 오타쿠이다.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Ⅰ』의 경우 이미 본 플랫폼(블로그)의 <세 사람의 오타쿠> (https://brunch.co.kr/@rh3244/1 ) 에서 간단하게 다룬 적 있으나, 해당 글에서는 오타쿠 자체에만 초점을 맞추느라 배경 지식의 설명에 미흡한 부분이 많았다. 그것까지 감안해 이번에는 되도록 저번과 중복되지 않는 맥락 위주로 소개하려 한다.

이 책은 Ⅰ권과 Ⅱ권의 성격이 꽤 많이 다른 관계로 전자의 독서를 선행해야만 후자를 이해할 수 있거나 하지 않다. 여기선 원활한 글의 전개를 위해 본서 저술의 발단이 되는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Ⅱ』 1장의 내용을 먼저 소개하고, 뒤이어 Ⅰ권의 내용을 통해 이를 보충할 것이다.



① 라이트노벨과 만화・애니메이션적 리얼리즘


라이트노벨의 본질


라이트노벨 혹은 ‘라이트노벨스러운 소설’의 본질은 작품 내부(이야기), 외부(유통) 어느 쪽도 아닌 작품과 작품 사이에 펼쳐진 상상력의 환경(캐릭터의 데이터베이스)에 있다고 생각해 보자. 바꿔 말하면 라이트노벨을 캐릭터 데이터베이스를 환경으로 하여 쓰인 소설로 정의하자는 뜻이다.

라이트노벨의 작가와 독자는 전후 일본의 만화나 애니메이션이 키워 온 상상력의 환경을 전제로 하고 있기에 특정 캐릭터의 외견적인 특징이 어떠한 성격이나 행동 양식(신비로운 무표정계라든지 마법소녀라든지)와 매치되는지 꽤 구체적인 지식을 공유하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작품 내에 (예를 들면)작은 체구의 덜렁이 여자아이가 나오면 반쯤 자동으로 ‘얘가 이 상황에선 이런다’ ‘저 상황에선 저런다’ 하고 복수의 장면을 머릿속에 그려낼 수 있다. 작가 역시 독자에게 그러한 ‘모에의 리터러시literacy’를 기대하여 캐릭터를 조형할 수 있다.

라이트노벨의 캐릭터들은 하나의 인생을 살며 하나의 이야기 안에서 그려지는 인물이라기 보단 수많은 이야기나 상황 속에서 외면화하는 잠재적 행동양식의 다발로서 상상된다. 이는 뒤집어 말하면 한 명의 캐릭터 = 행동양식의 다발을 축으로 하여 수많은 이야기나 상황이 전개 가능함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라이트노벨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涼宮ハルヒの憂鬱』의 등장인물 아사히나 미쿠루는 원래 SF 학원판타지물의 등장인물이지만 그들이 전통적인 등장인물이 아닌 ‘캐릭터’인 이상 활약 무대는 미스터리든 청춘소설이든 호러든 자유롭고, 2차 창작도 유연하게 펼쳐나갈 수 있다.

라이트노벨의 상상력은 탈-이야기적이며 메타-이야기적인 캐릭터를 지반으로 하여 쌓아올린 이상 필연적으로 장르를 이탈한다. 이 상황을 라이트노벨의 제작과 소비 면에선 작품의 층(이야기)과 환경의 층(캐릭터 데이터베이스)이 따로 존재하고 있다고 파악할 수도 있다.


라이트노벨의 출현과 포스트모던


라이트노벨의 본질은 이야기가 아니라 캐릭터의 데이터베이스라는 메타-이야기적 환경에 있다. 라이트노벨의 작품이나 독자는 이야기를 구축하고자 혹은 독해하고자 작가의 오리지널리티나 이야기의 리얼리티가 아닌 메타-이야기적 데이터베이스의 참조에 의존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감각은 근 이십 년 가까이 성장을 계속해 00년대 초반에 이르러서는 예외적인 것으로 정리되기엔 너무나도 비중이 커졌다. 게다가 그 확대는 이십 년 가까이 지난 지금 더더욱 진행되었다.

이 특징은 Ⅰ권의 문제의식과 연동하여 말하자면 라이트노벨이 본질적으로 포스트모던적인 소설 형식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아즈마는 서장에서 ‘포스트모던에서는 커다란 이야기가 쇠퇴하므로 작은 이야기는 오히려 증식하고 범람하는 듯 보인다.’고 지적했다. 오타쿠들이 만들어낸 캐릭터의 데이터베이스는 그야말로 ‘결정적인 하나의 이야기를 성립시키지 않음에도 불구하고(캐릭터가 이야기를 이탈해버리는 의미에서) 복수의 서로 다른 판본의 이야기를 차례차례로 성립시켜버린다(한 명의 캐릭터로부터 복수의 이야기가 생성된다는 의미에서)는’ 점에서 포스트모던의 이야기 제작 조건을 체현하는 존재라 말할 수 있다.

라이트노벨의 출현과 확산을 포스트모던 이론의 관점에서 파악하는 것은 시기적으로나 독자론적으로나 타당하다고 아즈마는 간주한다. 라이트노벨의 기원은 포스트모던이 시작된 1970년대이며 확대가 시작된 것은 마침 일본에서 오타쿠화와 포스트모던화가 가속된 1990년대이다. 현재의 독자층의 중심은 Ⅰ권에서 포스트모던적 데이터베이스 소비의 기수로써 분석한 1980년대 출생의 3세대 오타쿠이다. 라이트노벨은 포스트모던의 도래와 동시에 탄생한 포스트모던한 소비자들의 지지를 받는 포스트모던의 조건을 체현한 소설 형식이다. 따라서 라이트노벨을 고찰하는 것은 포스트모던의 문학을 고찰하는 것에 직결된다.


현실의 사생에서 허구의 사생으로


역시 본 플랫폼의 <세 사람의 오타쿠>에서 다룬 바 있는 오오츠카 에이지의 이야기를 잠깐 해 보자. 오오츠카는 1980년대에 만화 편집을 경험하고 같은 연대 말 평론 활동을 시작하는 동시에 만화원작자로서도 활약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 후반 이후엔 베스트셀러 만화를 만들어내는 한편 논단지에 적극적으로 기여하여 서브컬처의 전방에 선 입장을 살려 독특한 전후 민주주의론을 전개하고 있다. 평론과 작품 양쪽을 경험하고 또 서브컬처와 사회, 정치의 관계에 대해 민감하다는 점에서 오오츠카는 지금 문예 평론에 관여하는 논자들 중에서도 돌출된 존재라 할 수 있다. 그가 1989년에 출판한 『이야기 소비론』은 오타쿠의 포스트모던화를 가장 먼저 파악한 저작이다.

그리고 오오츠카는 라이트노벨과 관계가 깊은 평론가이기도 하다. 1980년대에 카도카와 스니커 문고角川スニーカー文庫 레이블의 발족에 큰 역할을 맡았고 이후에도 업계의 중핵에서 스스로 라이트노벨 작가로서 활약하고 있다. 1990년대 후반에는 평론가로서의 실천이 더해져 주로 문예지를 무대로 하여 순문학과 라이트노벨을 등치시킨 선구적 평론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2000년대엔 『이야기의 체조』나 『캐릭터 소설 작성법』 등 라이트노벨의 창작 수법을 주제로 한 서적을 차례차례로 출판했다. 서브컬처의 세계는 유행이 빨라서 본서가 출판된 2007년 시점은 물론 지금에 와서는 더더욱 중요성이 떨어지고 있지만 오오츠카의 활동들은 앞서 말한 라이트노벨 붐의 토대를 정비했다고 말할 수 있다.

오오츠카가 제시한 ‘만화・애니메이션적 리얼리즘’이란 대체 무엇인가? 오오츠카는 순문학, 미스터리, SF 등등 라이트노벨 외의 모든 소설을 ‘현실을 사생한 것’이라 파악한다. 미스터리나 SF는 비현실적인 사건을 그리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현실의 사생을 전제로 한 것이며 거기에 위화감을 끌어들인 귀결이라는 게 오오츠카의 고찰이다. 그와 대조하여 라이트노벨은 ‘애니메이션이나 만화라는 세계에 존재하는 허구를 사생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현실의 사생과 허구의 사생이라는 대치를 오오츠카는 ‘자연주의적 리얼리즘’과 ‘만화・애니메이션적 리얼리즘’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오오츠카는 만화・애니메이션적 리얼리즘의 탄생을 1970년대 후반 데뷔한 지 얼마 안 된 아라이 모토코新井素子가 중얼거린 “『루팡 3세』의 활자판을 쓰고 싶었다.”에서 찾는다. 아라이는 1977년에 고등학생 신분으로 데뷔하여 1980년대 전반에 인기몰이를 한 SF작가이다. 그의 소설은 당시 ‘신구어체新口語體’라 불린 문체가 특징적이었는데, 이는 현재 ‘세카이계セカイ(世界)系’ 라 불리는 문체로 이어지는 상상력의 모티프를 갖추고 있었으며 오늘날에는 넓은 의미에서 라이트노벨의 원류 중 하나로 간주되고 있다. 오오츠카의 말에 따르면 위의 아라이의 발언은 그런 그의 소설이 현실세계의 묘사가 아닌 만화나 애니메이션이 부여하는 인상의 모방을 목적으로 하여 구상된 것임을 나타내고 있다. 오오츠카는 말한다. “아라이 모토코 씨의 이 발상은 사실 일본문학사상 획기적인 것이었습니다. 모두가 현실과 같은 소설을 쓰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는 애니메이션 같은 소설을 쓰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거창하게 말하자면 그는 자연주의적 리얼리즘이란 근대 일본 소설의 합의점의 외부로 시원시원하게 발을 내딛어버린 사람이었단 이야기입니다.”

오오츠카의 이론에 따르면 자연주의적 리얼리즘은 묘사의 기점인 ‘나私’를 필요로 하는 창작 수법이다. 반면 만화・애니메이션적 리얼리즘 소설은 그러한 ‘나’가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캐릭터가 존재한다. 오오츠카는 이런 사실에 기반해 라이트노벨을 ‘캐릭터 소설’이라 부를 것을 제안한다. 그와 대조되는 순문학은 나私를 그리므로 사소설이 되는 것이다.


커뮤니케이션의 기반으로서의 리얼리즘


사회학자 이나바 신이치로稲葉振一朗는 근대문학의 자연주의적 리얼리즘과 포스트모던의 만화・애니메이션적 리얼리즘이 공통적으로 공공성의 장소를 창출하는 장치로써 해석가능하다고 말한다. “리얼리즘 소설이나 영화가 ‘현실세계’와 사소한 차원에서밖에 소화하지 못하는 세계를 무대로 하는 이유는 우선 기본적으로 효율의 문제이다. 만화・애니메이션적 리얼리즘의 성립도 같은 문제를 지적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만화, 애니메이션, 라이트노벨, 특수촬영 영화의 확산에 따라 넓게 공유되기에 이른 SF적・판타지적인 온갖 장치의 집적을 아즈마 히로키는 포스트모던의 ‘데이터베이스’라 부른다. 이 가공 세계의 장치gadget들로 구성되는 데이터베이스는 오늘날 문예의 세계에서 어느 의미에선 거의 현실세계의 대체물이라 말할 수 있을 지경까지 발달하고 말았다.”

이 지적은 시사적이다. 표현이란 있는 그대로 현실과 마주하는 게 아니다. 어떤 표현이든 시장에서 유통되는 이상 발신자와 수신자의 커뮤니케이션을 배제하고는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한 전제를 두고 이나바는 오오츠카와 아즈마가 주목한 캐릭터적 상상력의 대두를 작가나 독자의 상상력 자체의 변화로서가 아닌 그를 지탱하는 사회의 변화로 다시 파악한다.

이나바의 논의를 대입하면 자연주의 문학의 작가는 현실을 그려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라 ‘현실을 그리는 게 커뮤니케이션 효율이 높아서’ 현실을 사생했다. 마찬가지로 캐릭터 소설 작가는 캐릭터를 그려야 한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그쪽이 커뮤니케이션 효율이 높아서 캐릭터를 참조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차이가 나타난 이유는 단지 두 문학적 상상력이 놓인 사회 환경이 구별되기 때문이다. 자연주의 문학을 집필할 때 현실사회 묘사를 매개로 한 커뮤니케이션의 효율이 높다고 생각된 이유는 그를 둘러싼 근대 사회가 사람들의 이데올로기나 세계관을 조정하여 구성원이 하나의 현실을 상상적으로 공유하도록 강제되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포스트모던에서는 그런 전제가 붕괴되고 있다. 따라서 근대의 자연주의 작가와 포스트모던의 캐릭터 소설 작가 사이에는 커뮤니케이션의 효율성의 기반이 크게 차이난다. 오오츠카는 각각의 기반을 리얼리즘의 ‘현실real’로 본 것이다.


두 리얼리즘의 기반


우리는 모두 특정한 상상력의 환경에서 살고 있다. 전근대의 이야기꾼語り部은 신화・민화의 집적 하에, 근대 작가=독자=시민은 자연주의 하에, 그리고 포스트모던의 오타쿠들은 캐릭터 데이터베이스 하에 살고 있다. 각각의 환경들은 작가의 표현을 규정하며 또 작품의 소비 형태를 규정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그 환경이 작품 횡단적, 장르 횡단적으로 기능한다는 사실이다. 이는 자연주의에서도 다르지 않다. 자연주의 문학의 역사는 길고 이미 많은 장르로 분열되어 상호 교류가 어려워졌다. 그러다보니 쉽게 연상하긴 힘들지만, 이나바도 강조하듯 자연주의는 역사적으로 전근대적 이야기가 안고 있던 가지가지 전제(앞서 말한 ‘합의점’)를 한 번 무화無化하고 공중公衆에게 보다 폭넓게 이야기하기 위한 수법으로 도입된 것이라 파악된다. 그 무화의 과정이 사생이다. 따라서 우리들은 라이트노벨의 수법(데이터베이스의 참조)을 이용해 SF나 미스터리나 판타지나 포르노를 쓸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연주의의 수법을 이용해 그러한 작품들을 자유롭게 쓸 수 있다. 아니,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근대문학은 지금까지 파생형으로써 다양한 장르소설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아마도 순문학은 애당초 자연주의가 지닌 이 메타-장르성을 가리키는 개념이었으리라. ‘SF매거진SFマガジン’에는 SF밖에 못 싣고 ‘소설추리小説推理’에는 미스터리밖에 못 싣지만 ‘군상群像’이나 ‘문학계文學界’ 같은 문예지엔 ‘문학성이 높다’고 편집자가 판단하기만 하면 SF든 미스터리든 자유롭게 게재할 수 있다.

정리하자면 우리는 문학적 상상력을 기반으로 하여 자연주의적 리얼리즘과 만화・애니메이션적 리얼리즘이라는 두 개의 서로 다른 메타-장르의 환경을 눈앞에 두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전자는 메이지 시대에 유럽에서 도입되었고 후자는 전후에 국내에서 생겨났다. 그리고 지금 두 개의 리얼리즘=환경은 일본의 소설시장을 크게 이분하여 각자 전혀 다른 원리로 생산되고 소비되고 복수의 장르를 내부에 끌어안고 있다.


순환적인 이야기 생성


포스트모던화는 커다란 이야기의 쇠퇴를 의미한다. 커다란 이야기의 쇠퇴는 현실인식의 다양화를 의미한다. 따라서 포스트모던에서는 많은 이야기가 현실에 의거하는 게 아니라 팝 컬처의 기억으로부터 형성되는 인공 환경에 의거하게 된다. 일본에선 그 변화가 라이트노벨의 대두에서 가장 알기 쉽게 나타나고 있다. 지금 일본 소설을 지탱하는 상상력의 환경은 근대적인 현실을 믿는 자연주의적 리얼리즘과 근대적 현실에서 결별한 만화・애니메이션적 리얼리즘으로 크게 나뉜다. 그리고 앞으로 후자의 세력은 확대될지언정 축소될 일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즉 이야기가 성립하지 않는, 혹은 너무나도 손쉽게 성립해 버리는 환경에서는 이야기는 현실에서 동떨어져 자신을 지탱하는 환경을 재귀적으로 구축하며 간신히 살아남을 것이다. 그런 환경에서 이야기는 현실에 직면하지 않고 그럴 필요도 없다. 캐릭터 소설은 데이터베이스를 참조하여 만들어졌고 그렇게 만들어진 캐릭터 소설이 또 다시 데이터베이스를 보강한다. 우리 눈앞에는 그러한 순환적인 이야기 생성의 광경이 펼쳐지고 있다.



② 그리고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의사疑似 일본의 오타쿠들


‘허구의 시대’ 이후


오타쿠에게는 이미 ‘서사’라는 프레임 자체가 거의 필요하지 않다. 그들이 ‘애착’(모에)를 갖는 것은 오로지 캐릭터의 비주얼한 모습, 좀 더 말하자면 그것의 ‘부분’이기 때문에(즉 오타쿠는 우선 ‘그림’에 열광하고 다시 그 ‘특징’에 열광한다), 단지 데이터베이스화된 모에 요소의 입/출력만 있으면 충분한 것이다. 아즈마는 디지캐럿デ・ジ・キャラット이라는 ‘캐릭터’를 분석함으로써 에반게리온 이후 생겨난 이런 오타쿠おたく에서 오타쿠オタク로의 변화를 아주 명쾌하게 정리한다.

이러한 데이터베이스를 아즈마는 ‘커다란 비非이야기’라고 부른다. 오오츠카의 『이야기 소비론』에서는 개개의 상품=작은 서사의 배후에 있는 ‘이야기 생산 시스템=프로그램’이 ‘커다란 이야기’라 불렸는데 오타쿠에게는 ‘이야기’ 자체가 이미 필수적인 것이 아니게 되었으므로 ‘비=이야기’라 명명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커다란 비=이야기’=‘데이터베이스’군群은 더욱 상위, 더욱 커다란 데이터베이스에 접속되어 있다.


<디지캐럿을 소비하는 것은 단순히 작품(작은 이야기)이나 그 배후에 있는 세계관(커다란 이야기), 나아가 설정이나 캐릭터(커다란 비=이야기)를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 깊숙한 곳에 있으며 더욱 광대한 오타쿠계 문화 전체의 데이터베이스를 소비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Ⅰ』(아즈마 히로키 著) 中


아즈마의 논의는 기본적으로 오오츠카가 『이야기 소비론』에서 깔아 놓은 것의 연장선 위에 있다. 그러나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의 목적인 이 ‘데이터베이스 소비=오타쿠론’을 리오타르 이후의 포스트모던론으로 연결하는 데 있다. 오오츠카는 ‘커다란 이야기/작은 이야기’라는 용어를 이용하면서 의도적으로 『포스트모던의 조건』 이후의 포스트모던 운운하는 건 다루지 않았다. 그러나 아즈마는 ‘오타쿠おたく’, ‘이야기 소비’의 디지털 인프라를 통한 진화 버전인 ‘오타쿠オタク’의 데이터베이스 소비를 분명히 포스트모던적인 것이라 단언한다.


<1990년대의 오타쿠계 문화를 특징짓는 ‘캐릭터 모에’란 사실 오타쿠 자신들이 믿고 싶어 하는 것 같은 단순한 감정 이입이 아니라 캐릭터(시뮬라르크)와 모에 요소(데이터베이스)의 2층 구조 사이를 왕복함으로써 지탱되는, 극히 포스트모던적인 소비 행동이다. 특정 캐릭터에 열광하는萌える 소비 행동에는 맹목적인 몰입과 함께 그 대상을 모에 요소로 분해하고 데이터베이스 속에서 상대화하는 기묘하게 냉정한 측면이 감추어져 있다.>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Ⅰ』(아즈마 히로키 著) 中


아즈마는 이러한 오타쿠의 포스트모던적인 행동 양식과 심성을 동물화라고 부르는데,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우선 오사와 마사치에 의한 시대 구분을 소개해야 한다. ‘옴진리교 사건’을 계기로 저술한 『허구 시대의 끝』에서 오사와는 스승이기도 한 사회학자 미타 무네스케見田宗介의 분석을 상세히 설명하면서 ‘전후 일본의 이데올로기 상황’을 1945년부터 1970년까지의 ‘이상의 시대’와 1970년부터 1995년까지의 ‘허구의 시대’로 나눈다. ‘이상의 시대’는 리오타르적인 정의에서 ‘커다란 이야기’가 아직 기능하고 그것들을 추구할 수 있던 시대, ‘허구의 시대’는 ‘커다란 이야기’가 상실되고 이미 픽션으로만 통용하게 된 시대를 말한다.

다시 말해 종전 후 내세워진 ‘이상=이념’이 연합 적군에 의해 붕괴되었고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요청된 ‘허구=픽션’조차 옴진리교 사건에 의해 붕괴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오사와의 이 논의는 오오츠카가 옴진리교 사건 후에 말했던 것과 동형이다. 오오츠카는 “이제 위사僞史는 통용되지 않기 때문에 이번에야말로 정사를 쓸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것은 곧 ‘이상=커다란 이야기’로 다시 한 번 되돌아가는 것이다. 옴진리교 사건 이후 24년이 지난 지금,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지 새삼 깨닫게 된다.


데이터베이스 소비


그래서 아즈마가 내세운 것이 ‘동물화’이다. 본문에서 인용해 보도록 하자.


<냉정한 판단력에 기초하는 지적인 감상자(의식적인 인간)와도, 페티시에 탐닉하는 성적인 주체(무의식적인 인간)와도 다른, 더욱 단순하고 즉물적인 약물 의존자의 행동 원리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어떤 캐릭터 디자인이나 어떤 성우의 목소리를 접한 이래 뇌의 배선이 바뀌어 버린 것처럼, 같은 그림이나 목소리가 머릿속에 계속 맴돌아 마치 홀린 것 같다는 것은 많은 오타쿠들이 실감 있게 하는 이야기다. 그것은 취미보다는 약물 의존에 가깝다.>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Ⅰ』(아즈마 히로키 著) 中


‘약물 의존자’의 ‘약’이 ‘모에 요소’로 바뀐 것이 오타쿠이고, 그들의 ‘단순하고 또 즉물적’인 ‘의존’ 양상이 ‘동물화’로 불린다. 그것은 애완동물이 먹을 것에 ‘홀리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커다란 이야기의 날조에서 단순한 폐기로, 건담에서 디지캐럿으로, 이야기 소비에서 데이터베이스 소비로, 즉 부분적인 포스트모던에서 전면적인 포스트모던으로의 커다란 흐름은 이처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동물화를 의미한다.>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Ⅰ』(아즈마 히로키 著) 中


이것이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이다. 이어서 아즈마는 ‘데이터베이스(소비)’의 가속으로 이전에는 문화나 사회 전반에서 기능했던 ‘보인다/보이지 않는다’는 대립 구조가 무너지고 모든 것이 ‘너무 잘 보이게(=과시적으로)’ 되는 모습을 ‘초평면적’이라고 명명하며, 또 ‘너무 잘 보이는’ 것이 오히려 한층 ‘불不과시적인 것’을 요구하는 욕망을 구동시킨다는 논의를 전개한다. ‘이상의 시대’, ‘허구의 시대’에 이어지는 1995년 이후의 시대를 아즈마는 ‘동물의 시대’라고 명명한다.



마치며



최근까지 게임계를 뜨겁게 달군 이슈로 ‘라스트 오브 어스 파트 2’ 사태, 속칭 ‘라오어’ 사태가 있다. 1편의 주인공이었던 조엘 밀러가 게임 초중반에 2편의 주인공인 애비 앤더슨으로 교체되는데, 그 과정에서 애비가 조엘을 골프채로 죽이는 충격적인 전개에 구매자들의 비난이 빗발친 것이다. 그 와중에 애비의 동성애 코드까지 게임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걸 보고 라오어 파트 2는 PC(정치적 올바름) 성향의 게임으로 단단히 인식되기에 이른다.

사건이 심화되자 프로듀서 닐 드럭만이 이를 보고 “당신들이 분노할 줄 알고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구시대적 발상에 갇혀 있는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리고자 했던 내 목적이 성취된 셈이다” 식으로 현학적인 태도를 보였고, 이에 걷잡을 수 없이 가열된 팬덤의 민심은 수습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지금까지 말한 포스트모던식 접근을 적용하면 제작사 측을 옹호할 수도 있고, 거꾸로 가열차게 비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드럭만식 현학, 수동적 데카당스에서 더 나아가긴 힘들 것이다. 『헤테로토피아』에서 푸코가 지적했듯 ‘합리의 나선문’이 발생할 것이기 때문이다. 언어와 지식은 푸코가 걱정하던 대로 권력이 되고, 소칼이 지적한 대로 정치 싸움의 도구가 되었다.

전편과 이번 편에서 우린 20세기 철학의 저변,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과 그 비판을 살펴보며 사소하게나마 눈치챈 게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나' 역시 철학의 해체 대상이 될 수 있고, 비판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걸 잊어버린 순간 모든 학문, 모든 사유는 포스트모던의 부정신학성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이에 대한 나의 입장은 전편에서 이미 밝힌 적 있다. 태생이 마이너였고 비주류였으며 지금까지도 그것만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롤 모델도 당연히 없고, 어떻게든 대중에 영합해서 공명심을 채워보리란 기대 자체를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나의 시도들은 늘 내가 첫 번째일 수 있으며, 나의 ‘작은 이야기’들은 데이터베이스 중에서도 희소성을 가질 수 있다. 무엇보다 이를 두고 당당히 ‘이것이 내 욕망이다’라 말할 수 있다. 정리하자면 포스트모던의 시대 속에서도 어떻게든 능동성을 찾아 몸부림친다고 할 수 있겠다. 누군가는 ‘결국 그 또한 너의 스노비즘일 뿐’이라는 환원론적 회의주의를 들이댈 지도 모르겠지만.



참고 문헌


『動物化するポストモダン』 東浩樹 著

『ゲーム的リアリズムの誕生∼動物化するポストモダン2∼』 東浩樹 著

『포스트모더니즘』 신국원 著

『지적 사기』 앨런 소칼, 장 브리크몽 著, 이희재 譯

『現代日本思想』 佐々木敦 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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