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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ghoo Kim Feb 15. 2020

허무주의, 반지성주의, 그리고 파시즘

(3) 허위의식이 불러일으키는 파시즘의 유혹

들어가며


<‘소유’는 현대 산업사회에 있어서 기본적인 생존양식이며,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자기의 가치, 자기의 주체성, 혹은 자기의 존재를 증명하는 데 익숙해졌다. 이러한 관계는 물건뿐 아니라 인간, 지식・관념・신, 나아가서는 건강이나 질병에까지 미치고 있다. 그것은 주체와 객체를 ‘물건’으로 환원시켜 버리기 때문에 그 관계는 살아 있는 관계가 아니라 죽은 관계이다. 따라서 그것은 끝없는 생산과 끝없는 소비라는 악순환을 낳게 되고 우리는 만성의 기아상태에 빠진다.>


<지금 유행하고 있는 기술주의적technocratic 견해로는 일이나 오락에 악착스럽게 매달리거나 아무것도 느끼지 않게 되었더라도 그것은 결코 중대한 잘못은 아니며, ‘설사’ 잘못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결국에 가서는 기술주의적 파시즘은 별로 나쁜 것은 아닐 거라고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비현실적인 희망이다. 기술주의적 파시즘은 필연적으로 파국을 초래할 것이다. 비인간화된 ‘인간’은 미쳐버려 장기적으로는 활력에 찬 사회를 유지할 수가 없을 것이며, 단기적으로는 핵무기나 세균무기의 자살적인 사용을 억제할 수 없게 될 것이다.(하략)>


- 에리히 프롬Erich Fromm, 『소유냐 존재냐To Have or To Be』 中 


프롬의 이 예언자적인 외침을 도처에 널린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한갓된 방언으로 취급하기에는 그의 말을 곱씹을 때마다 등줄기에 느껴지는 오한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이 오한을 단순히 평균보다 조금 더 지적 긴장감이 강한 사람의 자칫 냉소로 흐를 수 있는 지적 유희로 남기지 않고, 성취감 2할, 고통 8할, 그리고 미지수의 효용성을 동반한 문서 작업으로 심화시키는 시점에서 “나는 존재에 가깝다” 는 메타성 발언이 미네르바의 부엉이 발톱 때만큼이나마 설득력을 얻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해 본다.

무언가를 소유하고 있음을 증명함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고 심지어 남을 폄훼하고 깎아내리는 속물주의snobbism의 대상은 작게는 집, 차 등 물질적 소유부터 크게는 이데올로그의 소유까지 폭넓고도 뿌리 깊게 우리 사회에 만연하고 있다. 이것이 어떻게 잠재적인 파시즘까지 연계되는지를 이번 글에서 다룰 것이다.

그보다 앞서 과연 파시즘이 정확히 무엇인지 사토 마사루佐藤優의 『파시즘의 정체ファシズムの正体』를 읽으며 윤곽을 잡아 볼 것이다. 그리고 저번 글에서 ‘일본은 반지성주의의 면모로 인해 극단의 파시즘에 치닫지는 않을 것이다’ 며 정리했는데 이에 대해서는 사토 마사루 씨와 사이토 타마키 씨의 대담집 『반지성주의와 파시즘反知性主義とファシズム』의 몇몇 단락을 소개하며 이해를 도울 것이다.


3장 파시즘과 일본, 그리고 한국


1 파시즘의 정체


(1) 등장 배경


19세기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유럽과 미국의 제국주의 열강들은 군비 확대에 열을 올렸으며 식민지 확보를 두고 끊임없는 각축을 벌이고 있었다. 이것이 가열된 결과가 제 1차 세계 대전이었다. 그와 대비되는 21세기의 신제국주의는 식민지를 추구하지 않는다. 인류가 문명적으로 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저 식민지를 유지할 비용이 커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제국주의의 시대에도 외부로부터의 착취와 수탈을 통해 생존을 도모하는 제국주의의 본질이나 행동양식 자체는 변하지 않았다.

이러한 신제국주의의 시대에는 두 가지 상이한 벡터의 인력이 펼쳐지고 있다. 하나는 세계화의 진전이며 또 하나는 국가 기능의 강화이다. 19세기 후반 역시 세계화의 시대였다. 19세기는 ‘이민의 시대’라 불렸으며 1차 대전 발발까지의 백 년 동안 신대륙에 발을 디딘 유럽인들은 약 육천만 명을 웃돈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동하면 당연히 국경을 넘어선 자본의 이동도 활발해진다. 세계화의 진전으로 유럽과 미국의 열강들은 이윽고 국가와 독점자본(생산과 시장을 독점적으로 지배하는 대자본)이 연계하여 힘에 의한 시장 확대와 식민지화를 추구하게 되었다. 이 구조는 냉전이 종식된 현재에도 마찬가지이다.

이 신 제국주의 시대의 국가가 어떻게 파시즘과 이어지느냐? 역사상 글로벌 자본주의에 대한 처방책은 세 가지밖에 존재하지 않았는데, 첫째, 외부로부터 수탈하는 기존 제국주의를 더욱 강화하는 것, 둘째, 공산주의 혁명, 그리고 셋째가 파시즘이다. 첫째 방책은 제 1차 세계 대전을 통해 실패를 증명했고, 둘째 방책은 소련의 붕괴에 따른 냉전의 종식이 같은 귀결을 증명했다. 미리 말해둘 것은 파시즘이란 본래 ‘국가의 개입을 통해 국민을 통합하고, 자유주의적인 자본주의가 낳는 문제를 극복하고자 했던’ 사상이었다. 그런 면에선 복지 국가의 이미지와도 지극히 겹친다.


동시대에 활동한 경제 이론가인 토마 피케티Thomas Piketty와 칼 마르크스Karl Marx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격차가 확대되는 원인에 대해 의견을 달리했는데, 그 골자는 다음과 같다. 피케티는 근대 경제학에 근거하여 격차 확대를 ‘분배’의 불충분에서 기인했다고 보았다. 즉 노동자에 대한 이윤 분배의 불충분이 격차를 확대시키는 원인이라고 판단했다. 자본가와 노동자가 이윤을 나눠 갖는다는 분배론에 근거한 생각이었다. 한편 마르크스는 자신의 경제학에서 노동자의 임금이 ‘생산론’에 따라 정해진다고 보았다. 즉 노동력의 재생산 비용에 따라 임금이 정해진다는 뜻이다. 노동력 재생산 비용에는 세 가지 요소가 있다. 첫째, 식비, 주거비, 피복비 등 오직 노동자가 노동을 지속하는 데 불가결한 돈, 둘째, 노동자 계급을 재생산하는 비용 ─ 즉 가족을 갖고 아이를 길러 노동자로 일하게 하는 데 드는 돈, 셋째는 자기 교육을 위한 돈이다. 이 세 요소가 임금을 결정하기 때문에 노동을 재생산하는 것 이상의 임금이 지불될 일은 없다. 이윤의 분배 같은 건 자본가들 사이에서나 오가는 문제이다.

당연히 두 사람의 처방책도 달라지는데, 이미 잘 알려졌듯 마르크스가 생산 수단의 철저한 공유화를 역설한 한편 피케티는 국가가 개입하여 누진적인 소득세 및 상속세에 더해 자본세를 징수하는 게 효과적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경제의 세계화에 따라 ‘사람’ ‘물건’ ‘돈’이 자유롭게 이동하게 된 데 대응하여 초국가적인 징수기관의 창설도 시야에 넣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경쟁을 통해 살아남은 자본가들이 순순히 빈곤자에 대한 재분배를 위해 지갑을 열 리 없으니 (어디까지나 분배론적 입장에서) 합법적인 폭력 장치를 지닌 국가가 징수를 통해 행해야 한다는 것 역시 피케티식 경제 모델에 수렴하는 귀결이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선 강력한 국가와 다대한 권한을 가진 관료군이 자본가들을 억누르지 않으면 안 된다. 바로 이것이 당시 이탈리아 파시즘과 가장 친화적인 모델이었다.


위 단락에서 설명한 차이를 통해 파시즘의 주요 특징 중 하나를 엿볼 수 있는데, 이탈리아 파시스트들 역시 엘리트주의의 성향이 강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탈리아 중근대사를 짚어보며 지적할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이 있다. 1800년대 중반 두 차례 오스트리아로부터의 독립을 위한 전쟁을 벌이고 1860년 사르데냐 공국이 중부 이탈리아를 합병하여 이듬해 통일 왕국이 들어설 정도로, 이탈리아가 하나의 통합된 국가로 역사에 등장한 시기는 타 유럽 국가들에 비해 늦다. 그 전까지는 그 유명한 피렌체, 밀라노 등 유력 영주 가문들이 자기 영토 내에서 실질적인 주인 노릇을 했고, 시민들의 구심점이라 하면 해당 가문과 그들과 유착한 가톨릭 교계였다. 통일 이탈리아 왕국이 강제로 바티칸을 점거하자 교황은 자신을 ‘바티칸에 수감된 수인’ 이라 표현하며 ‘가톨릭 신자가 국정 선거에 참여하는 것’을 금지시키기까지 했다.

또한 가톨릭과 국가의 대립은 어원을 따져 보면 필연적인데, 어원인 그리스어 카톨리코스καθολικός는 ‘보편적인’ ‘만인 공통의’ 라는 형용사이다. 처음부터 민족이란 틀을 벗어나 있으니 민족주의나 국가주의와는 상성이 나쁠 수밖에 없다. 그 영향을 받았는지 당시 이탈리아에는 영국과 프랑스처럼 유력 정당이 기 싸움을 하는 게 아니라 수많은 군소 정당들이 분립해 있었고 이는 안정적인 정당 정치를 구축하는 데 근본적인 장애물이었다.  


(2) 무솔리니의 대두에서 파시즘 통치까지


후대 사람들의 무솔리니에 대한 인상은 동맹국 수장이었던 히틀러에 비하면 약한 편이다. 심지어는 찰리 채플린Sir Charles Spencer "Charlie" Chaplin의 영화 『독재자The Great Dictator』의 영향으로 다소 익살스러운 이미지(머리 나쁜 독재자)기까지 하다. 그러나 무솔리니 전문가들이 지적하듯 이는 이탈리아인에 대한 모욕에 불과하며 비현실적이기까지 하다. 실제 그는 행동주의자요, 지식인이었다. 사범학교 졸업 이후 정규 교육을 받진 않았지만 독학으로 폭넓은 교양을 쌓았고, 특히 철학에 관심이 많아 19세기말부터 20세기초까지의 사조에 통달했으며, 문학, 음악, 예술에도 조예가 깊어 당시 이탈리아의 소장파 지식인들과 교류했다.

제창자가 이런 만큼 파시즘의 이론적 수준은 아주 높다. 나치즘이 ‘독일인을 중심으로 한 아리아인은 우월하다’ 는 황당무계한 신화로 세계를 지배하려 했던 것과는 시작 단계부터 판이했다.

사범학교를 졸업한 무솔리니는 유럽 곳곳을 전전했는데 스위스에서 그의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을 만나게 된다. 파레토 법칙으로 유명한 경제학자 빌프레드 파레토Vilfredo Federico Damaso Pareto는 당시 스위스 로잔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고, 인간 행동에 따른 비합리적 측면을 중시하여 ‘역사를 움직이는 것은 힘(폭력)’이라고 본 그의 주장은 무솔리니의 감정적 혁명주의에 이론상의 근거를 부여했다. 이 주장은 훗날 파시즘의 역사관이 되었다. 또한 무솔리니는 파레토의 엘리트 주류周流설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받아 그 결과 엘리트가 정치 투쟁의 주역이라는 확신을 가졌고 이는 그의 사상의 중핵이 되었다. 그리고 파레토를 따라 마르크스주의의 계급투쟁 역시 ‘엘리트의 교대’ 로 해석하게 되었다.

후생경제학에서 특히 중요하게 다루는 파레토 최적Pareto efficiency에서도 볼 수 있듯 파레토의 사상은 ‘국가 엘리트가 힘을 사용해 민중에게 재분배를 행하는’ 복지국가론으로 연계된다.

그리고 『폭력론Réflexions sur la violence』 의 조르주 소렐Georges Eugène Sorel 역시 마르크스주의와 함께 스위스에 체류하던 무솔리니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소렐은 ‘폭력은 야만스럽고 파괴적’ 이란 종래의 인식을 비판하며 오히려 ‘세계를 구할 창조적인 힘’ 이라 긍정했다. 현대 사회까지 이어지는 계급투쟁 역시 지배 계급의 권력에 대한 피지배 계급의 폭력으로 파악했다.

파레토, 소렐, 마르크스주의의 공통점은 ‘의회 정치를 믿지 않고’ ‘폭력을 긍정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점은 파시스트 활동기 당시의 무솔리니 역시 그대로 답습했다. 이탈리아 사회당에 입당해 2년 만에 당 기관지 편집장이 된 무솔리니는 발행부수를 폭발적으로 늘리는 데 공헌했다. 당시 그의 주장은 ‘당의 조직 중 정치의식이 높고 유능한 엘리트를 육성하여 대중의 긴장감을 유지하며 혁명을 위한 적절한 기회를 기다린다’ 는 것이었다.

1차 대전 발발 당시 이탈리아 사회당의 입장은 일관적인 중립이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국제적인 연대를 도모한다’ 는 대의에 따르면 이는 당연했다. 그러나 무솔리니는 ‘국가적・민족적 권리를 단호히 옹호하자면 싸워야 한다’ 고 주장했다. 또한 무솔리니가 공감을 표하던 혁명적 생디칼리스트(노동조합 운동을 통해 혁명을 달성하려 하는 운동조직)들이 참전을 부르짖게 되자 그는 대중 교육의 관점에서 더욱 전쟁을 환영하게 되었다.

마르크스의 견해를 넘어 무솔리니는 전쟁의 결과로 대중이 민족의식에 눈떠 국민공동체로 진전하리라 예측하고 그에 따른 사회 격변이 의식이 강한 엘리트들에게 정권 획득의 기회를 부여할 거라 기대한 것이다. 1차 대전에서 이탈리아가 참가한 협상국 측은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탈리아는 충분한 보상을 받지 못했고, 이를 계기로 이탈리아는 파시즘으로 흐르는 국면을 맞게 된다.

각지의 노동자들이 사회혁명을 부르짖으며 공장을 점거했고 이 흐름에 편승한 무솔리니의 파시스트당(1919년 결성)은 세력을 확대했다. 무솔리니는 1차 대전 참전을 통해 사회주의와 민족주의가 혼합된 ‘프롤레타리아트의 국제적 연대와는 구별된 혁명사상’을 만들어내었다. 그의 혁명은 하나의 계급의 대두가 아닌 민족 전체를 끌어들이는 사업으로서 보다 올바른 사회 구축을 목적으로 하며, 또한 세계의 자원 재분배를 시야에 넣어 국가를 강화시켜 모든 계급의 생활수준을 향상시키고자 했다.

밀라노에서 무솔리니가 결성한 전투 파쇼는 사회당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유럽 전역을 휩쓴 ‘붉은 2년’ 이라 불리는 사회주의의 물결 속에서 전투 파쇼는 계급투쟁을 부정하고 노사협조를 주장하며 사회주의 운동과의 항쟁을 펼쳤다. 1920년 여름에 일어난 사회당이 정부와 타협한 사건을 계기로 노동자들은 크게 실망하여 등을 돌리기 시작했고 이를 계기로 파시스트에 대한 기대가 이탈리아 전역으로 퍼져나가게 된다.

1921년 총선거에서 전투 파쇼는 국회의 의석을 획득하고 동년 11월 무솔리니는 전투 파쇼를 파시스트당으로 개조, 각지의 파시즘 운동의 조직화를 성공시킨다. 이때부터 그는 실력 행사와 대화 자세를 적절히 교대하며 정권 획득 계획을 적극적으로 밀어붙인다. 각지의 파시스트들에게 항시 전투태세를 갖추게 하면서 기성 정치세력에게는 정국을 안정시킬 유일한 선택지는 파시스트당의 정권 참가임을 피력했다.

그리고 마침내 막강한 세력을 보유하던 사회당 계열 노동조합의 총파업general strike을 파시스트당이 붕괴시키며 무솔리니는 정권 탈취를 결의한다. 1922년 10월 파시스트당 행동대는 쿠데타를 일으켜 로마로 진군했고, 국왕은 내각의 계엄령 권고를 거부하고 무솔리니에게 혼란을 진정시키도록 내각을 재정비할 것을 명령한다. 무솔리니는 곧바로 파시스트당, 국민당, 민주당, 자유당의 연립 정권을 수립하고 자신은 수상에 오른다. 이때 그의 나이 39세, 이탈리아 최연소 수상의 탄생이었다.


(3) 파시즘 독재의 탄생과 죽음


무력한 정부를 낳은 죠리티Giovanni Giolitti식 타협 정책에 실망한 국민은 권력을 구사하여 정책을 실행할 능력 있는 정권을 기대했다. 좌파와 우파 각각의 이해를 조정하며 다수파를 형성하던 죠리티의 ‘정해지지 않는 정치’ 에 학을 뗀 국민들은 강한 카리스마적 매력을 지닌 무솔리니의 파시스트당을 지지하게 되었다.

단 이 시점에서 무솔리니의 권력 기반은 강고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의 주요 지지층인 지주, 산업계, 군, 일부 왕실은 결국 시국적인 형편에서 그를 밀어줄 뿐 영구적인 동맹관계는 아니었다. 수상 취임 후 얼마 되지 않아 그는 파시즘 대평의회를 설립하여 지도권의 강화를 꾀했다. 이윽고 1923년, 독재 체제를 강고히 하고자 선거법을 크게 개정했다. 골자는 ‘정부의 안정적 기반 확보를 위해 선거에서 25% 이상 득표한 제1당이 의회 의석의 3/4을 획득한다’ 는 것이었다. 결과 파시스트당을 위시한 연립세력의 득표율은 65%를 기록하고 374석을 점유하는데 이 중 파시스트당은 275석이었다. 마테오티 살해 사건을 극복하며 무솔리니의 독재 체제는 더욱 확고해졌고 이듬해 파시스트당을 제외한 모든 정당들은 해산된다.


무솔리니는 조합조직을 국가의 기반으로 생각했다. 그 중추적 기관이 1926년 설립된 코포라치오니Corporazioni로, 파시즘의 주요 방침인 ‘국가의 조합 지배 및 노동과 자본의 협조’ 의 구체화를 위해 노동과 자본의 관계를 통제하는 지도적 기관이었다. 이탈리아 파시즘에서 노동은 사회적 의무이며, 더 나아가 노동조합도 국가의 승인이나 보호를 받아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노동 분쟁까지 국가의 관리 하에 두어 노동재판제도가 도입되고 이에 따라 파업은 금지되었다. 당연히 시장 경제의 원리는 부정되고, 경제와 생산을 조정하는 것이 국가의 역할이라는 ‘파시즘의 경제론’이 확립되었다.

이러한 네오 코포라치즘이 1927년 노동헌장憲章의 원리로 채택되는데, 골자는 정부와 이익집단(노동조합이나 경영자단체 등)이 협조하여 경제정책을 행하는 것으로, 이것이 도모하는 것은 시장 원리에 따른 이윤 추구가 아니라 사회 집단의 이익을 우선하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파레토 최적’의 골자는 간단히 말하자면 ‘유한한 자원(자재)의 효용을 최대화’하는 것이다. 단 누군가의 효용을 올리려면 어떻게 자원 분배를 바꾸더라도 다른 사람의 효용을 낮추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파레토의 방식은 자본주의가 폭주해 격차나 빈곤이 확대된 경우 국가가 경제에 개입해서 사회적 공정성을 되돌려야 한다는 발상으로 이어진다.

또한 이 발상은 두터운 사회 복지 정책의 실시에도 영향을 준다. 실제로 파시즘 정책 아래 이탈리아에선 노동임금의 보장이나 건강보험, 유급 휴가 제도와 같은 사회 복지 정책이 차례로 도입되었다.


무솔리니에 대한 연구자들의 또다른 평은 ‘교육자의 자질을 갖췄다’는 것이다. 그는 나라 최고의 교사로서 자기 자신을 모범으로 하여 ‘이탈리아인’을 형성하려 했다. 민족의 자긍심 회복을 원하던 이탈리아인들은 기꺼이 자신들을 고대 로마인의 후손에 걸맞은 국민으로 만들려 한 무솔리니의 학생이 되었다.

무솔리니는 국가를 ‘학교 모델’로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 대중 그 자체가 정치적 역할을 해내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민족 공동체의 완성을 위해서는 대중이 대두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려면 대중의 정신적・지적 수준을 끌어올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 역할을 엘리트가 받아들인다는 ‘엘리트주의’가 무솔리니의 신념이었다. 대중 역시 마치 학교 선생처럼 무솔리니가 ‘무의식중에 느끼고 있던 걸 명확히 해 준’ 인상을 받았다.


유례없는 경제 공황이 밀어닥치자 식민지가 없던 이탈리아의 경제 기반은 크게 흔들렸고,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무솔리니는 에티오피아 침공을 강행한다. 그리고 1936년 나치 독일과 베를린-로마 구축을 통해 동맹국이 된다. 1940년, 독일, 이탈리아, 일본은 추축국으로서 동맹을 이루게 된다.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최대의 차이는, 무솔리니가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친일이었다는 것이다. 무솔리니는 일본이 전 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는 것을 환영하는 반면, 히틀러는 일본이 대미美 전쟁에 끼어드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치 독일이 영국과는 화평을 맺길 원했기 때문이다.

히틀러의 인종 이론에 따르면 앵글로색슨 역시 게르만 민족의 동료다. 뿌리가 같으니 영국과 독일이 싸울 필연성이 없다. 미국만 개입하지 않고 영국을 고립시키면 조만간 화평을 맺을 수 있다는 게 히틀러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추축국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했고, 당연히 동맹국 독일은 미국과의 전쟁을 피할 수 없었고, 미국과 영국의 동맹은 강고해졌다.

무엇보다 히틀러가 자서전 『나의 투쟁Mein Kampf』에도 썼듯 정치적 관점에서 일본과의 동맹을 찬성할지라도 인종적 관점에서 비난받을 일이라 할 정도로 인종 차별주의적 관점에서 달갑지 않았다. 더욱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황인종이 백인 국가에게 총부리를 겨누는 것 자체를 원치 않았다.

그러나 무솔리니는 19세기말부터 20세기전반에 걸쳐 구미歐美 백인 국가들이 보인 황화론黃禍論(황인종의 대두가 백인 사회를 위협한다는 여론)을 두고 “황화론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무역 면에서 일본의 경쟁력의 문제에 지나지 않다.” 며 부정했다. 쇠퇴해가는 백인종에 대한 경종으로 받아들이며 ‘일본을 대할 때는 인종 문제를 초극超克해야 한다’ 고 생각했다.

이런 만큼 전쟁의 목적 역시 히틀러와 무솔리니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무솔리니에게 세계 전쟁은 파시스트 혁명의 연장으로 서양 민주주의 국가의 패권주의를 타도하고 세계의 재편성을 실시하는 것이 지상 목적이었다. 히틀러의 사고방식은 ‘보편주의’로, 아리아 인종에 의한 세계의 일원적인 지배가 목적이었다. 반면 무솔리니의 사고방식은 ‘다원주의’였다. 기존 열강인 영국, 미국, 프랑스의 힘이 약해지고, 지금까지 약소국이었던 독일, 일본, 이탈리아의 영향력이 커지는 형태의 세계의 청사진을 그는 그리고 있었다. 철학에서 찾자면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의 모나드monad 이론과 근접하다.

모나드 이론은 라이프니츠가 고안한 ‘공간을 설명하는 형이상학적 개념’이다. 우주는 ‘부분을 갖지 않은 단순한 실체’인 무수한 모나드로 성립되어 있다고 그는 주장했다. 모나드는 삼라만상을 구성하는 궁극적인 실체이다. 그리스 철학의 원자론을 구성하는 원자atom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모나드 이론의 세계관은 ‘균질한 원자로부터 세계가 구성을 이룬다.’ 는 원자의 세계관과는 크게 다르다. 모나드는 물질적인 확장을 갖지 않는다. 굳이 말하자면 ‘정신 존재의 기본 단위’와 같은 것이다.

이 모나드라는 어원은 그리스어 ‘일一’을 의미하는 모나스μοναζ에서 유래했다. 모나드 하나하나의 존재 방식은 다르지만 전체로서는 조화를 이루고 있다. 예를 들면 각기 다른 악기를 연주하는 연주자들이 상대의 악기음을 들으며 연주하여 선율이 어우러지고 전체로서의 밸런스가 잡힌 좋은 음악을 연주하는 오케스트라가 된다. 즉 각각의 모나드는 다른 모나드를 관찰하며 자신을 표현한다.

무솔리니는 이런 식으로 ‘각 국가가 개성을 발휘하는 형태로 세계를 재편성’하고자 했다. 이런 다원주의적 사고방식은 당연히 관용성과의 친화도가 높다. 이 관용성이란 개념이 본래 ‘이교異敎를 허용하는 종교상의 태도’ 로 쓰인 걸 생각하면 위의 황화론과 더불어 제 2차 세계 대전은 단순히 선악 대립 구도로 보기에는 대중의 인식 이상의 복잡한 배경을 지녔다고 새삼 말할 수 있겠다. 정리하자면 파시스트 이탈리아는 나치 독일보다 훨씬 관용적이었고, 그것만으로도 무솔리니를 히틀러와 동격으로 놓기엔 무리가 있다.


전쟁의 폐색이 짙어지자 1943년, 파시스트 평의회는 무솔리니의 전권을 국왕에게 반환하는 안을 채택한다. 국왕과 대면한 자리에서 수상 해임을 선고받은 무솔리니는 곧바로 헌병에게 체포되어 끌려갔다. 이후 그를 구출한 히틀러가 이탈리아 북부에 세운 괴뢰국 ‘이탈리아 사회공화국’에서 1년 반 동안 농성하지만, 독일의 패전이 확실시되자 레지스탕스의 무장 봉기가 일어나 이탈리아 북부를 해방시킨다. 1945년 4월, 무솔리니는 파르티잔(일반 시민으로 이루어진 정규군)에게 총살되고, 그의 시체는 다른 파시스트들과 함께 밀라노의 롤레토 광장에 거꾸로 매달린다. 이렇게 이탈리아 파시즘의 시대는 완전히 종결된다.


(4) 파시즘의 내재적 윤리


과연 파시즘이란 어떤 사상일까, 그리고 그 내재적 윤리는 무엇일까? 사실 이미 유럽 몇몇 국가에서는 대놓고 파시즘을 표방하는 정권이나 정당이 2차 대전 종전 이후 존재해 왔고 특히 이 시대에는 더욱 활성화된 경향이 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1945년 이전의 시대에도 파시즘의 영향이 없었던 곳은 세계 어디에도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흔히들 파시즘과 자민족중심주의ethnocentrism, 순혈주의, 초국가주의ultranationalism, 전체주의, 나치즘, 독재주의 등을 혼동하고는 한다. 이를 무턱대고 파시즘이라 말하기에는 열거한 사례들 사이에서도 제각각 미묘한 차이가 있다. 이 미묘한 차이를 간과하고서는 20세기 파시즘의 매력과 위험성, 그리고 과오를 정확히 평가할 수 없다.

이탈리아 파시스트들의 사상적 기초가 된 조반니 젠틸레Giovanni Gentile의 파시즘 사상에 대해 다시 한 번 짚고 넘어가보자. 파시즘은 하나의 인생관에 입각한 사회관이다. 무솔리니는 근본적으로 인생관이 아닌 국가관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전제 아래, 파시즘을 이해하려면 정신주의적 체계라 불리는 그 전반적 인생관을 파악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파시즘에서 세계는 모든 인간이 자기 자신만을 위해 존재하는 개개의 피상적인 물질적 세계관이 아니다. 또 파시즘에서 일컫는 인간은 동시에 국민이며, 조국을 가진 개인이며, 하나의 현실적 전통 속에서 사는 도덕적 법칙이기까지 하다. 간단히 말하면 인간은 제각각 개개로 실존하지 않는다. 국가 역시 인간이 사회계약으로 성립시킨 것이 아니며, 하나하나의 인간과 한 몸이다.

“한 사람은 만인을 위해, 만인은 한 사람을 위해” 옛날 생협 회원증에 있던 문구다. 여기서 ‘만인’을 ‘국가’로 치환하면 파시즘의 슬로건이 된다. 인간은 사회를 위해, 국가를 위해 능동적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이러한 인생관을 기반으로 파시즘의 사회관은 세워진 것이다.

무솔리니는 ‘국민 모두가 전투의 정신으로 살아야 한다’ 고 역설했다. 내가 살고자 하고, 동료를 살리고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품성을 강조하는 게 그의 파시즘 인생관이었으며, 전쟁이 야기한 의무와 희생정신이 이탈리아 국민에게 시련을 주어, 그를 통해 새로운 지도층이 형성되리라고 그는 확신했다. 이 새로운 엘리트를 정의하기 위해 그는 참호 귀족Trincealocrazia이라는 신조어를 만들고, 참호의 경험에서 생겨난 공통의 정신 아래 결속한 새로운 세대에게 이탈리아를 지도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전쟁은 국민의식을 각성시키고 공동체의 결속을 강고히 한다.” 고 확신한 무솔리니는 파시즘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하나의 역사적 관념인 파시즘에 따르면 인간은 지적・도덕적 관점에서 볼 때, 그가 가족적・사회적 집단 내에 국민과 더불어 ‘모든 국민이 협력하는 역사 속에 점하는 위치’로서 기능할 때에만 존재한다.” 모든 국민은 지적・도덕적 관점에서, 가족이나 사회적 단체 내에서 서로 협력하는 존재라는 뜻이다. 국민 공동체로서의 연대의식이 고양되면 국가는 강해진다. 그에 따라 중요해지는 것이 전쟁 정신을 일상에서 발휘하는 것이다. 자연스레 ‘여러 분야에서 국민은 협력하여 국가를 위해 일하지 않으면 안 된다.’ 는 논리로 흘러간다.

사회당 좌파 출신인 만큼 그 자신의 사유는 마르크스주의자의 ‘노동가치설’에 입각해 있다. ‘노동가치설’은 ‘상품의 가치는 그 생산에 지출된 사회적 노동량으로 결정된다’ 는 학설이다. 이에 따르면 많은 노동자가 열심히 일하는 것이 최대의 가치를 창출하고 그 이익을 기반으로 마침내 강한 국가가 되어 간다는 사상과 결부된다.


파시즘은 “인간은 개인의 사적 이해나 욕망보다도 숭고한 이념과 관계하여 삶의 의미를 부여 받는다. 가족, 사회, 국민의 일원으로 협력하며 국가를 위해 전력을 다하여 역사 형성에 참여할 수 있다. 그러한 역사적 사명에 참가할 수 없는 인간은 존재 자체에 의미가 없다” 고 역설한다. 개인주의와는 철저히 상극인데, 무솔리니는 프랑스 혁명기의 계몽주의 사상의 원자적 세계관이 20세기와는 맞지 않는 옛것이라 보았다. 또한 파시즘은 유토피아와도 거리가 멀었는데, 이상향에의 도달을 최종 목적으로 하는 목적론적 발상을 일절 취하지 않았다. 역사를 종교적으로 보되 유대교나 그리스도교처럼 종말론적 관점을 취하지 않았다. 이는 역사를 두고 ‘끊임없이 변화하고 진화하는’, ‘생성’의 개념으로 파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관에 따르면 개인이 국가를 위해 죽는 것도 얼마든지 정당화된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생은 유한하지만 유구한 대의를 위해 삶으로써, 혹은 죽음으로써 영원히 살 수 있으며, 따라서 국가를 위해 죽는 것이야말로 ‘잘 사는’ 것이라는 논리가 구성된다. 바로 여기에 우리가 파시즘의 논리를 이해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가 있다. 파시즘을 공부한다는 것은 ‘사는 것은 죽는 것’ ‘유구한 대의에 투신한 자는 영원히 산다.’ 는 위험 사상에 대한 예방접종을 하는 것이라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파시즘 교양의 전체적 성질은 단순히 정치적인 질서나 제도에 관한 것이 아니다. 더 나아가 국민의 모든 의사意思・감정에 대해 통일적이며 전체적인 것이다. 그 지향점은 다름 아닌 국가에 있다. 그래서 앞서 오케스트라에 비유한 것이다. 모나드적, 다원주의적 세계관을 지향하던 이탈리아 파시즘의 블록 경제나 일본의 대동아공영권 구상은 이론적으로는 같은 논리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파시즘은 보편적인 의미의 철학도 아니거니와 종교는 더더욱 아니다. 파시즘의 교의는 완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서 특정 테제로부터 출발하지도 않았다. 또한 사색과 행위는 불가분한 것이라 여겨, 행동으로 귀결되지 않는 사색을 존중하지 않는다. 행동을 하려면 무언가의 사상이 전제되며, 사상을 갖고 있다면 실천하는 게 당연하다고 여긴다. 여기에 파시즘의 유동성・생명성이 있다.

그리고 파시즘의 체계는 사변적 체계가 아니다. 파시즘은 전후 대중의 고뇌를 구제하기 위해 들고 일어난지라 선결적으로 국가관으로 이해되며 따라서 정치적 방법으로서 존재한다. 모든 정치적 문제의 해석과 해결에 대해 독자적인 방법을 갖고 있고, 모든 문화적 문제와의 통일 역시 그 이면의 정치를 이해하고 대처하려는 ‘전체’ ‘보편’의 성질을 지닌다. 그에 따라 파시즘은 진전에 따른 내용을 표현해 나가려는 경향이 있다.


민족주의와 파시즘의 차이는 민족의 개념에서부터 나타난다. 민족주의자는 민족을 하나의 정신의 힘으로 이해하지 않고 자연적인 소여所與・사실로 성립된 것으로 이해한다. 파시즘은 민족을 정신의 힘으로 이해하며, 따라서 그것은 늘 발전・생성하는 것이라 파악한다. 달리 말해 적籍을 두고 있는 여부에 상관없이 출신 성분으로 따지는 민족주의와 달리 파시즘은 그걸 따지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파시즘의 민족관은 보다 동적이라, ‘자국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국민’ 이다. 당연히 이에는 성의 차이도, 출신 인종의 차이도 없다. 민족주의의 ‘국민으로서 있는being’ 것이 아니라 ‘국민이 되어 가는becoming’ 생성의 개념이다.


앞서 말했듯 파시즘은 전체의 입장에 반하는 개個를 원리적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국가라는 틀이 없으면 파시즘과 자유주의 원리는 기본적으로 양립하지 않는 개념이다. 한편 파시즘과 민주주의의 관계는 이와는 또 다르다. 민주주의의 최대의 이론적 문제는 ‘어느 정도 규모로 민의를 잴 수 있는가’ 이다. 의회제 민주주의의 대전제에는 권리를 의원에게 위임한다는 의제擬制fiction가 있다.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여 법적 효력이 발생한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이런 논리대로라면 의원이 점점 줄어 한 명이 되더라도 의제상으로는 문제가 없게 된다. 즉 민주주의의 원리인 ‘민의를 반영함’을 생각하면 의원내각제도 대통령제도 파시즘도 본질적으로 문제가 없게 된다. 이렇듯 민주주의의 원리는 늘 파시즘으로 치닫는 잠재적인 가능성을 품고 있다.

그렇다면 민주적으로 실현된 파시즘은 정말 전체를 대표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현실에서는 당장 남성과 여성 사이에서부터 이해관계를 달리한다. 더 나아가면 고령자와 연소자, 농촌과 어촌과 월급쟁이, 도시인과 시골인 등 수많은 계층의 이해관계가 늘 존재한다. 이런 상황에 전체를 대표한다는 개념 같은 건 거의 의미가 없다.

18세기 중반 유럽에서 가장 민주적인 의회제도가 마련된 프랑스에서 선거를 통해 나폴레옹 3세의 제정帝政이 성립된 과정을 보자. 프랑스 국민의 대다수는 같은 단위의 양의 단순한 덧셈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수백만의 가족이 자신의 생활양식, 이해, 교양을 다른 계급의 생활양식 등등으로부터 분리시켜 그들에게 적대적으로 대치하는 경제적 생존 조건 아래 생활하는 한에서 그들은 하나의 계급을 형성한다. 분할지 농민 사이에선 국지적인 관련성밖에 존재하지 않았고 그들의 이해의 동일성이 그들 사이에 연대도, 민족적 결합도, 정치적 조직도 이끌어내지 않는 한 그들은 계급을 형성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계급 이해를 의회를 통해서든 국민 공회를 통해서든 자신의 이름으로 주장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들은 자신들을 대표하지 못하면서도 대표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들의 대표자는 동시에 그들의 주인으로서, 지배하는 권위로서 나타나지 않으면 안 되었으며, 그들을 다른 모든 계급으로부터 보호하고 그들 위에서 비와 햇빛을 전달하는 무제한의 통치 권력으로서 나타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현재 한국 국민 대다수는 상기한 분할지 농민과 비슷한 상황에 놓여 있다. 즉 자신들의 이해를 의회에서 반영해 줄 후보자나 정당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해의 동일성은 있을 텐데 자신들의 요구를 통하게 할 정치적 조직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그렇기에 자신에게 고통을 주는 법안을 통과시키는 정당이라도 지지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 계속 일어난다. 국민 대다수가 그러한 상황까지 몰렸을 때 위정자들은 외부에 적敵을 만들어 불안정한 신뢰와 지지를 바로 세우려 한다. 이렇게 배외주의가 점차 만연하게 되고 국내의 민심을 확보하는 와중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국민이 아니라 배제하는 슬로건까지 등장한다.

무엇보다 파시즘은 궁극적인 목적이나 비전을 설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어떤 방향으로든 조타가 가능하다. 설령 실패하더라도 애당초 목표가 명확하지 않으니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 ‘전체’를 대표하는 ‘무無대표’, ‘생성’이라는 무책임한 점에 파시즘의 부정적인 특징이 있다고 말해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2 파시즘으로 흐르지 못하는 양키와 오타쿠, 파시즘을 방관한 헬조선 좌파와 룸펜들


서두에서 말했듯 우선 사이토와 사토의 대담집 『반지성주의와 파시즘反知性主義とファシズム』 의 단락 일부를 보며 어째서 일본은 파시즘으로 흐르지 않는지 구체적으로 짚어 볼 것이다. 그리고 도대체 어쩌다가 한국의 사회적・정치적 상황이 파시즘 소리를 듣는 지경까지 이르렀는지 대안연구공동체의 장의준 박사의 『웃지 마, 니들 얘기야~잊힌 룸펜 흙수저와 문화자본가로 전락한 좌파~』와 몇몇 도서를 함께 보며 반성해 볼 것이다.


(1) 반지성주의와 파시즘


일본에서 파시즘이 일어난다면…


사이토  뇌과학에서 지브리 애니메이션에 이르기까지 일본 사회에 파시즘의 맹아는 정말 도처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만 저는 아마 이들이 성숙체 형태에 이르지는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안전하다’는 말은 물론 아닙니다. 그런 짜임새를 이루고 있는지의 여부가, 그런 심성을 이루고 있는지의 여부가 논의의 대전제입니다.

사토  파시즘의 싹이 성장하는 계기는 어디에 있을까요?

사이토  파시즘의 성숙까지 다다르지 않는 일본의 시스템에 대해 카타야마 모리히데片山杜秀 씨의 『미완의 파시즘未完のファシズム』은 매우 시사적이었습니다. 책 본문에서도 파시즘의 싹이 일본에 잔뜩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특히 생명주의나 카타야마 씨가 말하는 정신주의의 대목에서 그렇습니다. 정신주의의 뿌리는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다만 그것이 제대로 성숙하지 않는 건 왜인가 하니, 바로 ‘천황 제도에 대한 생각’이라고 저자는 제일 강조하고 있습니다. 카타야마 씨의 대전제에 따르면 일본에서 파시즘을 실현한다면 천황 독재 외에는 없습니다. 단지 소유하고 군림하는うしはく 길과 사랑하고 아끼는しらす 길이라는 두 가지 지배형태가 있습니다만 천황 제도는 소유하고 군림하는 강권적인 지배는 금지되어 있고 사랑하고 아끼는 형태로 이어졌습니다. 사랑하고 아낀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초월적인 거울이 되어 국민을 비추는 형태입니다. 천황 제도에 ‘사랑하고 아끼는’ 지배 체계가 설치된 채 성장해왔기에 도저히 강권적인 지배가 될 수 없는 귀결이 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정말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카타야마 씨의 견해로는 메이지 헌법하의 정치 체계에선 개인이 전체를 통괄하기가 굉장히 어려웠다는 게 파시즘의 성숙에 장애가 되었다고 합니다. 좋게 말하면 종적縱的 체계가 경직되어 있었다는 뜻입니다.

사토  그래서 마지막에 천황의 이름으로 여러 가지를 공표했지요. 거기서 거울 이야기가 나오는 거고요.

사이토  그렇습니다. 카타야마 씨에 따르면 예를 들어 도조 히데키東條英機가 최고 독재자라 불렸지만 그 도조조차 정권을 잡고 있을 때부터 ‘독재’란 비판을 받았다든지, 독재를 하고 싶어도 굉장히 고생스러워서 결국은 학을 뗐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북한의 파시즘


사토  북한은 파시즘에 굉장히 근접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이토  근접하달까 파시즘 자체가 아닙니까!? 기술주의와 생명주의가 그야말로 굉장히 밀접한 형태로 엮여 있는 나라입니다. 아직까지 이런 상태가 성립해 있는 것 자체가 믿기 힘들 지경입니다. 뭐 쿠데타는 일어날 뻔했지만 말입니다.

사토  위태위태한 기술주의지요. 실은 2013년 12월 5일 밤에 안토니오 이노키 선생님에게 불려갔습니다.

사이토  (웃음) 북한통인가요.

사토  네. 이노키 선생님은 13년 11월에 북한에 다녀오셨지요. 때문에 60일간 당원 자격이 정지되어서 12월 5일 시점엔 아직 링에 오르지 못하는 상태였습니다. 선생님이 지루하신 듯해서 제가 불려갔습니다. 마침 5일 오전에 장성택의 측근 두 명이 총살당했습니다. 장성택도 실각되는 게 아닌가 하는 설이 한국발 정보를 통해 들어왔습니다. 이노키 선생님은 바로 그 장성택을 만나고 오셨습니다.

사이토  무슨 이야기를 하셨습니까?

사토  이노키 선생님 말씀으로는 장성택은 “1월에 북한에 다 같이 오시오.” 라 했다고 합니다. 일본 외무성의 사람들도 대환영한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건 그렇고 얘기 도중 뭔가 신경 쓰이는 점은 없으셨습니까?” 라 여쭈었습니다. (웃음) 그러자 선생께서 “음.” 하고 잠시 생각하시더니 “아, 그러고 보니.” 하고 떠올리시길 장성택이 “이노키 선생, 용기 있게 잘 오셨소이다. 귀하의 옳은 선택은 역사가 증명할 것이오.” 라고 했다는 겁니다.

사이토  (웃음)

사토  (웃음) 그래서 제가 “선생님. 독재 국가의 사람이 ‘역사가 증명한다.’ 운운할 때는 정쟁에 말려들어 질 것을 예측했을 때입니다.” 라 설명을 드렸습니다. “사형을 당할지 어떨지는 몰라도 실각당하리라는 것을 알고 이노키 선생님께 전갈을 맡긴 것입니다.” 라고 말이지요. 그러자 선생님은 “듣고 보니 장성택이 신묘한 얼굴을 하고 있었네.” 하고 떠올렸습니다. 걸작이었던 건 제가 “일본 관저든 내각정보조사실이든 외무성이든 (저 이전에) 관계자와 접촉하신 바 있습니까?” 하고 여쭙자 “아니, 아무도 안 왔네.” 라 하셨습니다.

사이토  아무도 상대를 안 했군요. (웃음)

사토  “외국의 정보기관 출신인가 싶은 녀석은 왔지만 말이야. 일본인은 아무도 안 왔어.” 라고 하셨지요. 제가 “장성택이 선생님께 ‘옳은 선택은 역사가 증명한다’ 고 말한 건 지금 처음 말씀하시는 겁니까?” 라 여쭙자 선생께선 “그래, 지금 떠올렸으니까 말이네.” 라 하셨습니다. 이런 느낌이었습니다.

사이토  기억에 의존한 기록이라니요!?

사토  하지만 대화를 전부 비디오로 찍고 있었나 봅니다. 이런 건 기자가 잘만 추적하면 다음날 기사 1면을 장식할 건수가 아닙니까.

사이토  아무도 기대하지 않겠지요.

사토  게다가 음원과 영상이 있으니 “보여 달라” 말하면 됩니다. 그런데 다들 이노키 선생을 한물 간 사람 취급하며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웃음) 12월 중순에야 이노키 선생과 장성택의 정보가 흘러나올 정도였으니까요.

사이토  그건 그야말로 일본의 양키 정치의 상징이라 할 만한 이야기입니다. 톱기사에 그런 사람을 싣는 점이 우리의 귀여운 구석이라 할까요…

사토  그러니까 이노키 씨도 신경이 쓰여서 저에게 연락한 거겠지요. (웃음) “북한에 갔다 왔는데,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까?”를 물으러 말이지요.

사이토  가기 전에 부르면 되지 않습니까.

사토  같이 가자고 권유를 받았습니다.

사이토  아, 그렇습니까?

사토  “다음 기회에 꼭 갔으면 좋겠습니다.” 하고 거절했습니다.

사이토  (웃음)

사토  오자와 이치로小沢一浪 씨의 비서 이시카와 토모히로石川裕 씨가 이전 평양에 다녀왔습니다. 그때 선물로 고려호텔의 매점에서 산 김정은의 저서 『최후의 승리를 향해』를 받았습니다. 재미있는 책입니다. 이데올로기 조작을 하고 있어요. 김일성주의를 변경해 김일정・김정은주의라는 것으로 바꿔 놨더군요.

사이토  과연.

사토  스탈린이 마르크스주의를 고쳐 레닌주의(마르크스・레닌주의)라 하여 정치체제를 확립한 과정과 아주 흡사합니다. 레닌주의를 확립한 절차로서 부하린 재판이 있었습니다. 이번 장성택의 처형은 이 부하린 재판과 굉장히 닮은 느낌이 듭니다.

사이토  『최후의 승리를 향해』는 일본어로 쓰여 있지요? 북한에서 출판되었습니까?

사토  물론 제대로 일역되어 나왔습니다.

사이토  그렇습니까. 납치한 사람이 잔뜩 있다 보니 제대로 일본어판도 나왔군요. 강령이라든지 이상이 쓰여 있다든지 합니까?

사토  김일성・김정일주의 대목을 인용하자면 <김일성주의를 시대와 혁명에 즉하여 요구하고 발전시켜 풍부히 한 김일성 동지의 출생과 별개로 김일성・김정일주의는 우리 당의 지도 사상으로 인정되어 왔다. 그러나 한없이 겸허한 김정일 동지는 김정일주의는 아무리 구명해도 김일성주의 외의 것이 아니라며, 우리 당의 지도사상에 당신의 존명을 이어붙이는 것을 엄격히 금지하셨다. 오늘 이 나라와 조선 혁명은 김일성・김정일주의를 영원한 지도자로서 훈시해 나갈 것을 결정한다.> 고 쓰여 있습니다. 요컨대 아버지가 금지한 유훈에 반하여 김일성・김정일주의라는 사상을 만들었다는 논리입니다. 김정은은 사상을 만듦으로써 아버지를 뛰어넘었습니다.

 그리고는 굉장히 섬뜩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혁명가의 핏줄을 이어받았다고 자식이 저절로 혁명가가 되는 게 아니다. 흔히들 위대한 대가들이 NO라 말하듯 사람의 피는 유전될지언정 사상은 유전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말하자면 “부모자식간이든 뭐든 간에 용납하지 않겠다.” 는 자세입니다. 이런 걸 읽으면 저는 흥분됩니다. 글러먹었군요.

사이토  (웃음)

사토  새로운 사상을 주입해서 그를 몸에 익혔는지 확인을 받은 사람만 살려두겠다는 이야기입니다. 엘리트층을 갈아치우겠다는 의미지요.

사이토  결국 북한은 세습이지요.

사토  피가 이어진데다, 더군다나 사상도 깔려 있다는 두 요소를 달성하지 않으면 성립하지 않지요. 그리고 이제부턴 수학을 공부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합니다.

사이토  그건 IT 관련 이야기인가요?

사토  IT지요.

사이토  제대로 된 이론이 있군요. 한 나라의 이론 무장으로선 좀 담백한 것 같습니다만. (웃음)

사토  아직 서른 살이니까요.

사이토  김정은 본인이 쓴 것으로 되어 있습니까?

사토  물론 실제로는 휘하에 편성된 조組가 썼겠지요.

사이토  단지 『최후의 승리를 향하여』에는 기합은 잔뜩 들어가 있지만 이론은 옅은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어서 말입니다… 어떻게 보십니까?

사토  나름대로 깊이는 있지 않을까요?

사이토  확실히 미사여구는 늘어놓고 있습니다만…

사토  저는 소련 관련으로 오래 일하다보니 이런 문장에 익숙합니다.

사이토  닮기 마련인가 보군요.

사토  ‘김일성・김정일주의’라는 말을 듣는 순간 이데올로기 전환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알았으니까요. ‘으으, 무서운 숙청의 시간이구나.’ 라고 곧바로 생각했고요. (웃음)

사이토  북한은 정신주의인가요?

사토  『최후의 승리를 향하여』에도 등장하지요.

사이토  어떤 식으로 선동하고 있습니까? 그쪽 뉴스 캐스터가 곧잘 지엄한 말투로 이야기하는데 말이지요.

사토  한국전쟁 당시의 위인전에는 “최후의 순간에는 심장을 뽑아 던진다” 는 이야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사이토  심장을 뽑아 던진다고요!?

사토  ‘혼백’인가 하더라고요. 『전진훈戦陣訓』 같은 이야기가 잔뜩 실려 있습니다.

사이토  『최후의 승리를 향하여』는 북한의 『전진훈』이군요. 혹시 북한은 유교 문화의 자취가 남아 있습니까?

사토  사람에 따라 다릅니다만 스즈키 마사유키鐸木昌之 선생은 유교라고 말합니다. 대조적으로 와다 하루키和田春樹 선생은 아말감(합금)이라 합니다. 그리스도교의 요소도 꽤 들어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이토  (어느 쪽이든)유교가 포함되어 있군요.

사토  유교의 흔적은 강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이토  세습도 그에 따른 경향일까요. 숙청된 장성택은 고모부니…

사토  피가 이어져 있지 않죠.

사이토  혈연주의와 그리스도교가 혼재되면 질이 나쁘군요. (웃음)


IT가 파시즘의 장벽


사이토  저는 파시즘은 북한 같은 형태로밖에 잔존할 수 없다는 인상이 있습니다. 게다가 북한의 형태도 이제 무리가 아닐까 느끼고 있고요.

사토  말씀대로라면 인구 천만 명이 넘는 나라에서 이런 체제가 유지될 수 있다는 건 기적이군요. 마치 거대한 블랙 기업과도 같습니다.

사이토  이익을 창출하고 있는지의 여부는 모르겠습니다만 블랙은 부인할 수 없겠지요. 아마 북한은 남한에 비해 IT 보급률이 현저히 낮았지요?

사토  차원이 다르지요.

사이토  그게 눈여겨볼 주안점인 듯합니다.

사토  그렇지요. 북한의 IT는 특별하니까요.

사이토  그렇습니다.

사토  IT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건 사이버 공격을 받을 일이 없다는 말이니 굉장한 강점이지요. 북한은 열차 운행표도 옛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고 하니까요. 거꾸로 공격은 일방적으로 할 수 있지요. 그 점이 비대칭적으로 강하다고 봅니다.

사이토  중국도 꽤 강력한 방화벽 같은 게 있습니다만 북한에 비할 바가 못 됩니다. IT가 해방되어 버리면 파시즘의 싹이 나도 곧바로 좌절되는 양상이 되지 않을 수 없다고 할까요. 어떤 의미에서는 네트워크화가 진행되며 안전장치가 생겼다고 말하지 못할 것도 없습니다.

사토  확실히 그건 말씀대로입니다. 파시즘은 역시 ‘안’과 ‘밖’을 나누는 구조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되니까요. 

사이토  그렇습니다.

사토  그런데 네트워크가 있으면 확산되어 버리죠.

사이토  필연적으로요. 금방 외부에 열린 상태가 되어 버리면 파시즘은 성립하기 힘듭니다. 닫지 않고서는 안됩니다.

사토  동의합니다. 열린 상태에서 어떻게 하면 닫을 수 있을까요.

사이토  중국처럼 인해전술로 방화벽을 만드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웃음)

사토  인해전술…

사이토  정보의 필터링입니다. 예를 들면 중국은 페이스북이나 트위터가 금지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다운로드를 허용하지 않아서 누군가 다운로드를 시작하면 그를 막는 교환수 같은 사람이 잔뜩 있습니다. 다운로드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로는 제어할 수 없으니 인간이 감시하지 않으면 무리입니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인해전술로 틀어막고 있습니다. 중국 정도로 완벽하게 IT를 필터링하고 있는 나라는 없지 않을까요. 그런 의미에선 중국은 일종의 닫힌 공간입니다. 경제 측면과 비대칭은 있지만 말입니다.

사토  그리고 또 무언가 방법이 있지 않을까요. 이데올로기 측면에서 바깥의 정보를 보지 못하게끔 하는…

사이토  필터링 외의 방법 말입니까?

사토  예.

사이토  그건 굉장히 어렵겠지요.

사토  그렇게 되면 네트워크 안에서의 사람들의 주장이 국가 정책이나 엘리트의 정책으로 이어질 수 없게 하는 차단 시스템을 만든다는 이야기가 되니까요.

사이토  하지만 일본은 실질적으로 차단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치 운동부터 인터넷과 현실은 괴리되어 있으니까요. 이 사태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인터넷 선거의 의논은 화제를 불러일으키지 않으니 아베 정권도 안심하고 인터넷에서의 선거 운동은 해금하지 않았습니까. 아무리 해금해도 전혀 영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토  그건 말씀대로입니다.

사이토  한국에서는 IT가 선거에 꽤 영향력을 가집니다. 미국에서도 오바마는 인터넷의 힘으로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일본만 다릅니다.

사토  그래서 지금 일본에선 허핑턴포스트가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군요.

사이토  오마이뉴스도 실패했고요. 그런 게 전혀 유행하지 않습니다. 현실real과 가상virtual을 이을 의사가 없다고 할까요.

사토  그렇다면 역시 AKB같은 게 좋은가 보군요.

사이토  기껏해야 아이돌과의 악수가 현실이지요. (웃음)

사토  안겨들 순 없지만 악수까지는 가능하다…

사이토  옛날에 유행하던 말입니다만 “품을(같이 잘) 수 없지만 끌어안을(포용할) 수 있다” 는 거지요. (웃음)


오타쿠는 파시즘에 삼켜지지 않는다


사토  그나저나 최근에 애니메이션에서 전함이 여자아이가 된다든지 하는 작품이 있지 않습니까?

사이토  웹게임ブラウザーゲーム ‘칸코레艦コレ’군요. ‘함대 콜렉션艦隊これくしょん’이라고 하는 녀석입니다.

사토  그건 어떤 식으로 보면 좋을까요?

사이토  칸코레는 의인화물이라 하는데 그에는 오랜 전통이 있습니다. 옛날부터 전투기나 전차의 의인화란 게 있었습니다만 예를 들면 하야부사隼나 제로센零戦도 의인화되곤 했습니다.

 칸코레 이전에 히트한 게 ‘걸즈&판저ガールズ&パンツァー’라는 이바라키현 오오아라이마치茨城県大洗町의 마을 부흥에 쓰인 애니메이션입니다. 작중에는 오오아라이 해안에 항공모함이 정박해 있고 그곳에 여학교가 있습니다. (웃음) 꽃꽂이나 다도처럼 전차를 사용한 무사도인 ‘전차도戰車道’가 있다는 설정으로 여자아이가 학교에서 전차에 타고 싸웁니다. 싸운다고 해도 살상능력은 없습니다. 굉장한 인기몰이를 한 작품으로 실제로 마을 부흥에 성공했다고 하지요. 자위대가 협력하여 오오아라이마치에 최신예 전차를 파견하기도 했고요. 가히 선풍적이었습니다. 현 바깥에도 이 현상의 불똥이 튀었지요. 칸코레는 ‘걸즈&판저’의 계보에 속하는 작품입니다. 함대를 여체화해서 캐릭터로 만들었지요.

 이런 의인화물의 장점은 오타쿠의 페티시즘에 굉장히 적응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제로센을 의인화한 것도 비슷한 이치입니다. ‘전투기도 좋지만 여자도 좋다’ 즉 오타쿠는 과학기술도 좋아하지만 에로스(모에萌え)도 추구하고픈 성향이 있다는 말입니다.

사토  그렇군요.

사이토  오타쿠의 이 성향을 양쪽 동시에 만족시키기에 의인화가 딱 알맞습니다. ‘과학기술도 말하고 싶어. 하지만 여자아이도 사랑하고 싶어.’ 라는 욕망은 본래라면 모순되는 것입니다만…

사토  그런 캐릭터 같은 걸 만들면 오타쿠들은 굉장히 기뻐한다는 거군요.

사이토  그야 기뻐하겠지요. 여자아이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지만 화장 지식도 모르고 패션 지식도 마찬가지ー여자아이에 관한 아무 지식도 없습니다. 하지만 함대의 스펙에 대해선 빠삭하지요. 그러니 “이 캐릭터는 함대로서 △△한 기능을 갖고 있어서 이것과 □□을 조합하면 강할 거야.” 같은 이야기는 얼마든지 할 수 있지요.

사토  그런 것에 열중하는 인구와 예비인구는 얼마나 있습니까?

사이토  그건 모릅니다만(웃음) 노무라 총연野村総研에는 오타쿠 인구가 270만 명이라는 통계가 있습니다. DVD 매상 등을 통해 어림잡은 수치라고 합니다.

사토  에스토니아 인구 134만 명의 두 배 정도군요.

사이토  아하하하하(웃음). 다만 상징적이라면 코미케コミックマーケット겠습니다. 연인원 50만 명이 매해 모인다고 하지요, 거기 모이는 사람들은 오타쿠 밀교라고나 할까요, 꽤나 농도 짙은 부류라고 생각해도 무방합니다. 오타쿠 활동을 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특히 동인지를 만든다든지 판다든지 산다든지 하는 종류의 사람들이 모입니다. 그 열 배로 어림잡으면 전체 오타쿠는 500만 명은 있다는 개산槪算이 가능합니다.

사토  그 500만 명은 파시즘에 대한 내성을 가질 만한 사람들이 될까요?

사이토  그러리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셀프 컬트self-cult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제일 잘났어’ 와는 다릅니다만 ‘나 이외의 녀석에게 전면적으로 귀의한다는 건 있을 수 없어’ 란 자의식을 가진 사람들이니까요.

사토  전전戰前의 예를 들자면 다다이스트 츠지 쥰辻潤이 떠오르는군요. 이토 노에伊藤野枝의 첫 번째 남편으로 그녀가 오오스기 사카에大杉栄에게 달려간 후 츠지 쥰은 세상을 던져버리고 퉁소만 불었습니다. 게다가 전시 체제에 일절 협력하지 않은 채 아파트에서 아사餓死했습니다.

사이토  오타쿠들이 그렇게까지 고결한 삶의 방식을 취하리라곤 생각되지 않습니다만. (웃음)

사토  ‘날 건드리지 마’ 가 기본적인 선긋기입니다.

사이토  ‘날 건드리지 마’ 말입니까, 오타쿠는 자기들끼리는 연결되고 싶어 하는 감각이 있습니다. 그래서 꼭 고립하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의외로 사교적이고 취미가 맞는 사람들과는 적당히 어울리고 싶어 하는 지향성이 굉장히 강합니다. 밀착만은 진저리치게 싫어하지만요.

사토  고양이들의 집회 같은 느낌이군요.

사이토  오타쿠들은 고양이를 아주 좋아하니까요.

사토  고양이들의 집회에서도 일정한 거리를 두며 다들 앉아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곁에 다가가도 모른 체 하는 게 호의를 갖고 있다는 증거고요.

사이토  고양이와 근접한 면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정한 거리감으로 모이고 싶어 하는 감각 말입니다. 코믹 마켓 같은 데는 굉장합니다. 입추의 여지도 없을 정도로 밀집해 있는데도 거리감이 있으니까요.

사토  좋군요.

사이토  굉장히 좋은 모델입니다.

사토  사이토 선생님도 그들 사이에서 굉장히 편안한 느낌이 아니신지요.

사이토  느낌이 편합니다. 냄새는 굉장하지만 말입니다. (웃음) 냉방이 소용없는 회장에서 다들 땀투성이니까요. 목욕을 하지 않은 사람들이 그렇게나 모여 있으면 큰일입니다.

사토  목욕을 싫어하는 사람이 많나요?

사이토  많습니다. 오타쿠들 중에는 ‘냄새만 어떻게 하면 어딜 가도 받아들여질 텐데’ 싶은 사람이 많습니다. 코믹 마켓 때 회장 근처의 열차 안은 굉장한 악취를 풍긴다는 건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사토  탈레반 대표가 방문할 때 딱 그렇습니다. 한 번도 목욕을 하지 않은 사람들뿐이라 왔다가고 당분간은 방에서 냄새가 빠지지 않습니다.

사이토  어느 정도는 향료 같은 걸 뿌리고 다니지 않나요?

사토  오히려 향냄새가 섞여서 한층 지독한 냄새가 납니다.

사이토  그렇겠군요.

사토  한동안은 방에서 냄새가 안 빠집니다. 말인즉슨 이삼일 동안 말입니다.

사이토  (웃음) 체취는 남기 마련이죠.


양키도 파시즘에 삼켜지지 않는다


사토  저도 아마 일본에선 파시즘이란 게 오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사이토  파시즘의 형태는 띠지 않으리라는 느낌이 있지요. 다른 위기는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사토  사이토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양키 정치 말이군요. 자민당 일당 체제 아래 논리 전개를 무시하는 반지성주의가 횡행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향후 어느 방향으로 흘러 어떤 모델이 되어갈지 예상하십니까?

사이토  모델도 향방도 없기 때문에 ‘양키주의’라 이름을 붙일 수밖에 없었다고 할까요. 단 일종의 미학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토  『영원의 영(零)永遠の〇』 같은 미학 말이군요.

사이토  그렇지요. ‘아름다운 나라’ 같은 미학은 있겠지요. 그런 미학에도 다소 위험성이 있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그 미학에는 논리가 전혀 없지요. 양키주의는 원래 이론무장이 되어 있던 사람조차 바보가 되어 버리는 공간입니다. 그런 의미에선 파시즘의 폭주 위험도 적겠지요.

 그리고 양키주의는 일종의 에토스ethos입니다. 그래서 한편으론 윤리성을 띱니다. 도덕성이라 말해도 손색은 없겠군요. 자민당도 그렇지만 양키는 도덕을 아주 좋아합니다. 가령 ‘부모를 중히 여기자’ 라든지 ‘남에게 폐를 끼치지 말자’ 라든지 ‘인연을 중히 여기자’ 라든지, 이런 소박한 면으로 회귀하려는 회로가 그들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파시즘의 비뚤어진 폭주에 도달하기 힘들다고 할까, 그런 방향으로 가려 하면 다들 질리고 만다는 느낌입니다. 이것도 토나리구미隣組 같은 동조압력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래도 꽤 안전장치가 되는 듯합니다.

 일본의 낮은 범죄율 같은 것도 양키 성질이 불량 기질을 회수하는 부분이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이겠습니다. 요사코이소란축제よさこいソーラン祭り로 대표되듯 군무로 불량 기질의 충동을 흡수해 버립니다. 누가 생각해냈는지는 몰라도 굉장히 잘 짜인 구조입니다. (웃음)

사토  이탈리아의 파시스트당처럼 군부로부터 중심을 향한 행진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이야기군요.

사이토  단체 유희mass game도 행진도 되지 않는 군무의 문화입니다. 군무는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지 알 것 같으면서도 알 수 없는 면모 역시 포함하고 있지만요. 군무 중에도 꼭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남의 일 마냥 보는 시선은 기분이 나쁩니다. 물론 단체 유희만큼 극단적이지는 않습니다. 그야말로 양키 중간집단의 최종 형태라고밖에 표현할 말이 없습니다.

사토  중간집단으로서의 결집의 축은 상징symbol인가요?

사이토  그런 면모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토  중간집단 속에서는 실제로 서로 돕나요?

사이토  서로 돕지요. ‘인연’ 이니까요.

사토  돈을 내준다든지, 밥을 먹여 준다든지.

사이토  그 정도는 합니다. 유교 문화권의 특징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인연으로 이어져 있을 때는 서로 지탱합니다. 단 선을 넘으면 적극적으로 배제하는 ‘선을 지킨다’ 는 원칙이 있습니다.

사토  그 선이란 건 움직일 수 있는 겁니까?

사이토  꽤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집단에 따라서도 다르다고 보고요.

사토  같은 집단 내에서도 시대 상황 등의 여건이 바뀌면 선이란 것도 바뀌나 보군요.

사이토  예. 파시즘과 관계 지어 말하자면 나이토 아사오内藤朝雄 씨가 말하는 ‘중간집단 전체주의’란 형태라고 생각합니다. 이른바 파시즘하고는 다릅니다만 아까 사토 씨가 말씀하신 동조압력처럼 중간집단, 이를테면 학교의 학급에서 스쿨 카스트를 만든다든지 따돌림의 온상이 된다든지 하는 수준의 문제가 일어나게 됩니다. 스쿨 카스트처럼 계층이 있으면 닫히기 쉬운 구조가 여기저기서 나타나고 있는 게 아닐까요.

사토  그렇게 되면 신자유주의에 따른 원자적 인간관이나 사회관과는 당연히 충돌하겠지요.

사이토  예. 개인주의의 부정이니까요.

사토  그래서 신자유주의적인 흐름이 나타나는 데 대한 반발로서 지금 말씀하신 신분적인 혹은 전前파시즘적인 처방책이 나올 수 있다는 거고요.

사이토  처방책…

사토  전체로 합성되면 잘 보이지 않게 되지요.

사이토  전체의 합성을 고려하지 않는 체제가 되니까요.

사토  그렇지만 체제로서 분명 어딘가 합성되어있을 것입니다.

사이토  뭐 그렇지요. 양키적인 것이 굉장히 꺼림칙한 이유는 딱히 통제하려는 의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세간의 윤리관에서 가치관이 형성되고 만다는 데 있습니다.

사토  양키적인 것, 파시즘적인 것, 그리고 신자유주의적인 것에 대해 교양주의가 대항의 축이 될까요?

사이토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사토  처방책이란 걸 생각하면 역시 교양주의적인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사이토  동감입니다.


파시즘보다 무서운 것


사토  일본에선 가벼이 ‘파시즘이 성립한다’ 는 경종을 울리지 않는 편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양치기 소년이 되니까 말이지요.

사이토  그렇지요.

사토  그보다 파시즘과 민족의 관계를 진지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의 인텔리들 사이의 민족주의nationalism에 따른 이중 잣대double standard가 한 요인입니다. 요컨대 인텔리는 대민족의 민족주의에 관해서는 동포주의적입니다. ‘지배의 도구로서의 민족은 근대에 생긴 개념으로 터무니없는 것이다’ 며 말입니다. 민족 위에 군림하는 것은 억압의 논리라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소민족의 논리에서는 갑자기 원초주의로 전환해 ‘민족은 예전부터 있었으니 자결권을 존중해야 한다’ 고 합니다. 어디까지 큰 민족이고 어디까지 작은 민족인지 구별이 매우 애매해서 대부분 의미 없는 논의로 귀결됩니다.

사이토  과연.

사토  단 무서운 사실은 일본인은 민족에 대해 둔감하다는 것입니다. 민족에 대해 둔감한데 (파시즘의 내재적 원리인)‘안’과 ‘밖’을 어떻게 만드느냐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재일 한국인이나 중국인 등 외부로서의 민족에 대해 굉장히 둔감합니다. 오키나와인도 해당 담론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이토  또 그 둔감함이 파시즘의 행보를 어렵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사토  그렇게 생각합니다. 파시즘은 역시 ‘안’과 ‘밖’이란 구분이 필요하니까요.

사이토  그렇지요.

사토  저는 왜 파시즘은 안 된다고 생각하느냐면, 필연적으로 비국민을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사이토  예.

사토  파시즘의 내부에 있는 사람은 그를 모르니 ‘파시즘은 좋은 것’이라 생각하고 맙니다. 그렇지만 비국민으로 간주된 쪽에서는 이런 체제는 견딜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이탈리아 파시즘은 ‘안’과 ‘밖’이란 구분을 하고도 나치처럼 극단적인 형태는 되지 않았습니다. 거꾸로 나치의 형태로 인종이나 이데올로기 등 여러 가지가 파시즘(의 원리)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유태인의 절멸 같은 이야기가 일어난 것입니다.

사이토  그렇군요.

사토  거꾸로 일본은 파시즘조차 성립하지 않는 무서운 상태가 되고 있다ー

사이토  말씀하신 표현이 훨씬 설득력이 있군요. 아베 총리를 히틀러에 빗대는 얕은 수작이나 부리고 있으면 정말로 불만을 품고 있는 사람들의 불만을 구제할 수 없겠지요. 불만을 가진 사람들 대다수가 “저놈들과 도매금 취급받고 싶지 않다”고 반발할 테니까요. 지금 상황을 파시즘에 그다지 갖다 붙이지 않는 게 유효한 비판을 할 수 있는 길이라 제안하고 싶습니다.


(2) 파시즘을 방관하는 헬조선 좌파와 룸펜들


1 소비 사회와 냉소주의


2장과 3장의 막간에 쓴 <현대 사회를 지배해 온 냉소주의>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다 알고 있는데도 말과 행동은 전혀 모르는 것처럼 굴며 ‘난 전부 간파하고 있으니 상관없어.’ 라 대하는 태도가 나치 독일을 비롯한 근현대의 비극을 낳았다’는 골자였고, 보다 상세한 20세기 초 독일 지식인들의 상황에 대해서는 1장에서 다루었다.

이쯤에서 눈치 챌 수 있는 사실은 허무주의, 냉소주의에서 파시즘으로 연계되는 정신사의 배후에는 ‘지성인의 방관’ 또는 ‘지성의 방관’ 이 있다는 것이다. 앞서 다룬 일본, 그에 앞서 미국의 반지성주의의 경우 오히려 인텔리조차 양키의 굴레에 빠져버린다는 함몰성의 문제가 제기되었다면, 파시즘은 냉소주의의 수동성 때문에 제동을 걸지 못한다는 게 문제라 해도 무방하겠다.

20세기 이전과 이후, 문맹률 감소 및 고등 교육 기회의 증가에 따라 지식인의 스펙트럼에 분명한 차이가 있듯, ‘방관하는 지성’의 범주 역시 현대 사회에서는 전근대와는 다소 다른 기준을 두고 잡아야 할 것이다. 물론 2장에서 이미 보았듯 지식인과 지성인은 다르다. 이 차이를 통찰해내지 못하는 데서 허무주의의, 나아가 파시즘의 위기가 시작된다.

여기서 우선 필자는 2장과 3장 사이 막간에서 언급한 코제브의 일본적 스노비즘snobbism의 측면을 다루려고 한다. 서두에서 인용한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를 좀 더 파고들어보자.


* * * * *


에크하르트의 소유의 개념


소유양식에 관한 에크하르트의 견해로 대표적인 것은 빈곤에 대한 그의 설교인데, 그것은 마태복음 5장 13절의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라는 구절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 설교에서 에크하르트는 ‘마음의 가난함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관해 논하고 있다. 그는 우선 ‘외면적’인 빈곤, 즉 물질적인 빈곤도 미덕이며 권장할 만한 것이지만 자기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러한 종류의 빈곤이 아니라고 한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내면적’인 빈곤, 즉 복음서 구절에 언급되어 있는 빈곤이며, 그것을 정의하여 그는 이렇게 말한다.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은 자는 가난한 인간이다.” (블래크니 28, 퀸트 D.W. 52, 퀸트 D.P.T. 32)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인가? 금욕적인 생활을 택한 남자나 혹은 여자가 그에 대한 대답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에크하르트가 의미하는 바가 아니며, 그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음을 참회의 고행이나 외면적인 종교적 실천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을 비난한다. 그는 이러한 개념에 찬성하는 사람들을 이기적인 자아에 집착하는 사람들로 간주한다. “이러한 사람들은 외관外觀에 의해서 성자와 같다는 평판을 얻지만 내면에 있어서는 그들은 바보이다. 그들은 신성한 진리의 참뜻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퀸트의 텍스트에서 내가 번역하였다)

이것은 에크하르트가 관심을 갖고 있는 문제는 불교사상에서도 역시 근본적인 문제인 ‘욕망’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탐욕, 즉 물건과 자신의 자아에 대한 갈망이다. 불타佛陀는 이 욕망을 인간의 즐거움이 아니라 고통의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에크하르트는 다시 이어 의지意志를 갖지 않는 것에 관해서 말하는데, 그는 인간은 허약해야만 한다는 뜻으로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말하는 의지는 인간이 그것에 의해 ‘움직여지는’ 의지, 즉 갈망과 동일한 뜻이다. 그것은 참다운 의미에서 의지가 ‘아니다’. 에크하르트는 다시 나아가 인간이 신의 의지를 행하고 싶어해서도 안 된다고까지 주장한다. 왜냐하면 이것도 일종의 갈망이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사람은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탐욕을 갖지 않는 사람이다’─이것이 에크하르트의 비집착非執着 개념의 본질이다.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사람이란 어떠한 사람인가? 에크하르트는 그것을 무지無知하고 바보 같으며, 교육도 받지 못하고 교양도 없는 사람이라고 단정하고 있는 것일까? 설마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주된 노력은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을 교육하는 데 기울여졌고, 또 그 자신이 위대한 학식과 지식의 소유자였으며, 그러한 사실을 숨기거나 과소평가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에크하르트의 개념은 지식을 ‘소유’하는 것과 ‘인식행위’, 즉 근본까지 나아가서 사물의 원인까지 통찰하는 것과의 차이와 관계가 있다. 에크하르트는 어떤 특정한 사고와 사고의 ‘과정’을 아주 명백히 구별한다. 그는 신을 사랑하는 것보다 신을 아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이렇게 쓰고 있다. “사랑은 욕망이나 목적과 관계가 있지만, 반면에 지식은 특정한 사고가 아니라 오히려 모든 ‘덮개를’ 벗겨내고 사심이 없이 적나라하게 신에게 달려가 그와 접촉하고 그를 끌어안는 것이다”(블래크니 단편 27, 퀸트는 에크하르트의 말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또 다른 차원次元에서 (에크하르트는 여러 가지 차원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에크하르트는 훨씬 더 나아가고 있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다시 말하거니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은 가난하다. 나는 때때로 말해 왔다. 인간은 자기를 위해서도, 진리를 위해서도, ‘신’을 위해서도 살고 있지 않는 것처럼 살아야만 한다고. 그러나 이 점에 우리는 다른 어떤 말을 덧붙여 다시 더 나아가야만 한다. 이 빈곤에 도달하려는 인간은 자신을 위해서도, 진리를 위해서도, 신을 위해서도 살고 있지 않다는 것조차 모르는 사람으로서 살아야만 한다. 게다가 그는 신에 관한 지식도 그의 속에 존재하지 않을 때까지 모든 지식을 없애버려야만 한다. 왜냐하면 어떤 인간의 존재가 ‘신’의 외면적인 종種에 속하는 것이라면 그의 속에는 다른 생명은 없고 그의 생명이 그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말한다. 인간은 그가 존재하지 않았을 때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지식을 버리고 ‘신’으로 하여금 그의 뜻대로 달성하도록 하고 인간으로 하여금 자유롭게 해야만 한다고(블래크니 28, 퀸트 D.W. 52, 퀸트 D.P.T. 32, 일부분은 퀸트의 독일어 텍스트에서 내가 번역했다).>


에크하르트의 입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말의 참된 뜻을 파악해야만 한다. 그가 “인간은 자신의 지식을 버려야만 한다”고 말할 때, 그는 그것을 알고 있는 ‘것’을 잊어버려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알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잊어버려야 한다는 뜻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곧 지식을 우리에게 안정감을 주는, 우리가 그 속에서 안전을 얻는 하나의 소유물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또 우리는 자기의 지식으로 충만되거나 지식에 매달리거나 지식을 갈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지식은 도그마敎條의 특질을 띠어서는 안 된다. 도그마는 우리를 노예로 만들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모두 소유양식에 속한다. 존재양식에 있어서는 지식은 사고의 통찰적 능동성─확실성을 찾아내기 위해 결코 멈추어 서는 일이 없는─일 뿐이다. 에크하르트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은 아무것도 ‘소유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점에 진지한 주의를 기울여주기 바란다. 내가 자주 말한 바 있고, 위대한 대가들이 동의하고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즉 ‘신’을 받아들일 만한 거소居所가 되고, ‘신’이 행동하기에 적합한 거소가 되기 위해서는 인간은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모든 ‘자신의’ 소유물과 ‘자신의’ 행동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젠 다른 것을 말해야겠다. 만일 인간이 물건이나 생물, 혹은 그 자신이나 신을 포기했는데 신이 여전히 인간 속에서 자신이 행동할 수 있는 장소를 발견할 수 있다면 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 ‘장소’가 존재하는 한 이 인간은 가장 직접적인 빈곤에도 불구하고 가난하지 않다고 말이다. 왜냐하면 ‘신’이 행동하기 위한 장소를 인간이 마련하는 것은 ‘신’의 의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 까닭은 진정한 마음의 가난은 인간이 ‘신’과 그의 모든 행위까지도 버릴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일 ‘신’이 영혼 속에서 행동하기를 바란다면 그 자신이 그가 행동하는 장소가 되어야 한다─그리고 그것을 그는 바랄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신이 행동할 장소도 갖지 못할 만큼 아주 가난해야 한다는 말이다. 어떤 장소를 마련한다는 것은 구별을 유지하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신’께 나를 신으로부터 해방시켜 달라고 기도한다”(블래크니, 230~231페이지)>


에크하르트는 갖지 않는다는 그의 개념을 이 이상 철저하게 표현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우선 우리는 우리가 가진 물건과 행위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이 말은 아무것도 소유하지 말고 아무 일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이 말은 우리가 갖고 있는 것, 소유물에게, 심지어 신에게도 얽매이거나 속박당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에크하르트는 또 다른 차원에서 소유의 문제에 접근하여 소유와 자유의 관계를 논한다. 인간의 자유는 우리의 소유물, 일 그리고 마지막에는 자아에 얽매이는 정도에 따라 제약된다. 우리의 자아에 얽매임(퀸트는 원문인 중세 독일어의 Eigenschaft를 Ich-bindung 또는 Ichsucht, 즉 ‘자아의 속박’ 혹은 ‘병적 자기중심성’이라고 번역하고 있다)으로써 우리는 자신을 저해하며 결실을 방해당하고 자기를 완전히 실현하는 일도 방해를 받는다(퀸트 D.P.T. 서론 29페이지). 내 생각으로는 미트D.Mieth의 다음과 같은 말이 전적으로 옳은 것 같다. 즉 그는 참된 생산성의 조건으로서의 자유는 자아를 버리는 것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며, 그것은 바울적 의미로서의 사랑이 모든 자아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주장한다. 속박당하지 않고 물건과 자기의 자아에 집착하려는 갈망에서 벗어난다는 의미의 자유는 사랑과 생산적 존재를 위한 조건이다. 에크하르트에 의하면 우리의 인간적 목적은 완전한 존재에 도달하기 위해서 자아의 속박, 자기중심성, 즉 ‘삶의 소유양식’의 차꼬를 제거하는 일이다. 에크하르트가 말하는 소유지향의 성질에 관해서 미트(1971)만큼 내 견해와 비슷한 생각을 표명表明한 저자를 본 적이 없다. 그는 Besitzstruktur des Menschen(사람들의 재산구조)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데, 그것은 내가 이해하는 한에서는 내가 ‘소유양식’ 또는 ‘삶의 소유구조’라고 말하는 것과 똑같다. 그는 인간의 내적 재산구조의 타파에 관해서 말할 때 마르크스주의의 ‘수탈’을 언급하면서 이것이야말로 가장 급진적인 형태의 수탈이라고 덧붙이고 있다.

삶의 소유방식에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은 소유하는 여러 가지 ‘대상’이 아니고 인간으로서의 우리의 전반적 태도이다. 모든 것이 다 갈망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물건들, 재산・의례・선행善行・지식・사상 등이 모두 갈망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것들은 그 자체로서는 ‘나쁘지’ 않은데 나쁘게 변한다. 즉 우리가 그것들에 집착할 때, 그것들이 자유를 해치는 쇠사슬이 될 때 그것들은 우리의 자기실현을 방해하는 것이다.


에크하르트의 존재의 개념


에크하르트는 ‘존재’를 서로 관련은 있지만 다른 두 가지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 협의狹義의 심리학적인 의미로는 존재가 나타내는 것은 인간을 움직이는 ‘실제적인’, 그리고 흔히 의식되지 않는 동인動因이며, 그것은 행위나 의견 자체, 또는 행동하고 생각하는 인물과는 유리遊離된 의견과 대조를 이룬다. 퀸트는 에크하르트를 영혼의 비범한 분석자genialer Seelenanalytiker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매우 적절한 평가인 것 같다. “에크하르트는 결코 인간행동의 가장 은밀한 관계, 가장 깊이 숨겨진 이기심과 의도 및 의견의 움직임을 밝혀내고 감사와 보상을 열렬히 바라는 마음을 탄핵하는 데 싫증을 내지 않았다”(퀸트 D.P.T. 서론 29페이지, 번역은 내가 했다). 숨겨진 동기에 대한 이 통찰로 인해 에크하르트는 프로이트 이후 독자들에게 대단한 호소력은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을 통해 독자들은 프로이트 이전의 산물로서 지금도 역시 유행하고 있는 행동주의적 견해, 즉 금세기초에 원자가 그렇게 생각되고 있었던 것과 같이 행동과 의견은 분할할 수 없는 두 가지 궁극적 데이터라고 주장하는 단순한 견해를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에크하르트는 이 견해를 여러 논술에서 표명했지만 그중에서도 다음에 드는 글이 가장 특색이 있다. “사람은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하느냐보다도 자기가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따라서 선善하게 ‘되는’ 데 중점을 두고 행해진 일의 수數나 종류를 강조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사람은 작업의 토대가 되는 기본적인 것을 중요시하여야 한다.” 우리의 존재야말로 실재實在이며 우리를 움직이는 정신이며 우리 행동을 몰아가는 성격이다. 대조적으로 우리의 동적動的인 핵심에서 유리된 행위나 의견은 실재성實在性을 갖지 못한다.

두 번째 의미는 보다 광범위하고 근본적이다. 즉 존재는 생명・능동성・탄생・재생・분출・횡일橫溢・생산성이다. 이런 의미에서의 존재는 소유・자기속박・자기중심주의의 반대이다. 에크하르트에게 있어 존재는 분주하다는 현대적인 의미가 아니라 자기의 인간적인 힘의 생산적 표현이라는 고전적 의미에서 능동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능동성은 그에게 있어서는 ‘자기 밖으로 나오는 것’(퀸트 D.P.T. 6, 번역은 내가 했다)을 의미하며, 그는 그것을 여러 가지 회화적인 묘사로 표현하고 있다. 그는 존재를 ‘끓는’ 과정, ‘낳는’ 과정이라고 부르고, ‘자기 안에도 밖에도 흐르고 또 흐르는’ 무엇이라고 부른다(벤츠E.Benz 그 외에 퀸트 D.P.T. 35페이지에서 인용, 번역은 내가 했다). 때로 그 능동적 성격을 나타내기 위해서 ‘달린다running’는 상징도 사용한다. “평화로 달려라! 달리는 상태, 평화를 지향하여 끊임없이 달리는 상태에 있는 인간은 성스러운 인간이다. 그는 끊임없이 달리고 움직이며 달리면서 평화를 추구한다”(퀸트 D.P.T. 8, 번역은 내가 했다). 능동성의 또 하나의 정의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능동적이고 살아 있는 인간은 ‘채워짐에 따라 커지며 결코 채워지지 않는 그릇’과 같다(블래크니 233페이지, 퀸트는 에크하르트의 말로 인정하지 않는다).

소유양식을 타파하는 것이 모든 진정한 능동성의 조건이다. 에크하르트의 윤리체계에 있어서 최고의 미덕은 생산적인 내적 능동성의 상태이며, 그 전제는 모든 형태의 자아 속박과 갈망을 극복하는 일이다(하략)


* * * * *


80년대에 철학자 아사다 아키라浅田彰는 『구조와 힘構造と力』이라는 대중서를 출간했다. 이 책은 마치 교과서와 같은 구조로 되어 있어, 사상 내지 지知, 학學을 기호의 차이로, 소비의 대상으로 삼은 실험적 시도였다. 아사다의 의도는 지知의 이러한 소비를 통해 그러한 것이 바보스러운 짓임을 직접 드러내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구조와 힘』의 결과는 그저 사상을 기호처럼 소비하는 수많은 젊은이들의 양산일 뿐이었다.


<스노비즘은 주어진 환경을 부정할 실질적인 이유가 아무 것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형식화된 가치에 입각해' 그것을 부정하는 행동양식이다. 스놉은 환경과 조화하지 않는다. 비록 거기에 부정의 계기가 전혀 없다고 해도 스놉은 그것을 굳이 부정하고 형식적인 대립을 만들어내어 그 대립을 즐기고 애호한다. 이와 같은 삶의 방식은 부정의 계기가 있다는 점에서 결코 '동물적' 이지는 않다. 그러나 그것은 또 역사시대의 인간적인 삶의 방식과는 다르다. 스놉들의 자연과의 대립은 이미 어떤 의미에서도 역사를 움직일 수 없기 때문이다.


포스트 역사의 인간은 그 형식을 내용에서 계속 분리해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그것은 내용을 행동에 의해 변질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순수한 형식으로서의 자기를 어떠한 내용으로서 파악된 자기 및 타자에 대립시키기 위함이다.> - 알렉상드르 코제브Alexandre Kojeve, 『헤겔 독해 입문』(1968) P.247


한국 철학계와 출판계에서는 팔, 구십 년대를 두고 ‘철학의 부흥기’로 여기고 있다. 대학에 들어간 당시 젊은이들은 번역된 문학서, 철학서를 읽으며 교양을 쌓았고, 독재 정권하라는 시대 상황과 맞물려 그 당시를 살던 청년들에겐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의 『마음心』 내지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Die Leiden des jungen Werthers』의 화자 같은 고독한 식자의 우울질적인 향수가 공감대로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이제 소위 팔구십년대의 향수에 대해 회의를 가져볼 때도 됐다. 그것은 과연 마치 전염병 같은 범용의 유혹일 뿐이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면 왜 오늘날 그들의 모습은 이렇게 되었을까? 정의를 외치던 그들은, 노동자의 인권을 외치던 그들은,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말라던 그들은, 오늘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가? 그 진보 정신은 대체 어디로 간 걸까?


2 나, 당신들, 우리들의 이야기


<“Ich glaube, man sollte überhaupt nur solche Bücher lesen, die einen beißen und stechen. Wenn das Buch, das wir lesen, uns nicht mit einem Faustschlag auf den Schädel weckt, wozu lesen wir dann das Buch? Damit es uns glücklich macht, wir Du schreibst? Mein Gott, glücklich wären wir eben auch, wenn wir keine Bücher hätten, und solche Bücher, die uns glücklich machen, könnten wir zur Not selber schreiben. Wir brauchen aber die Bücher, die auf uns wirken wie ein Unglück, das uns sehr schmerzt, wie der Tod eines, den wir lieber hatten als uns,  wie wenn wir in Wälder verstoßen würden, von allen Menschen weg, wie ein Selbstmord, ein Buch muß die Axt sein für das gefrorene Meer in uns. Das glaube ich.”

“내 생각에는 읽는 사람을 물어뜯고 찔러 대는 책들만을 읽어야만 할 것 같아. 만일 우리가 읽는 책이 머리통을 주먹으로 후려쳐서 우리를 잠에서 깨우지 않는다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우리가 그 책을 읽는 거지? 네가 편지에 쓴 것처럼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니까? 우아, 설령 책이 단 한 권도 없다 할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행복할 수 있을 거라고. 그리고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책은 불가피할 경우 우리가 직접 쓸 수도 있겠지. 하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책은 마치 우리를 아주 고통스럽게 하는 고난과도 같이, 마치 우리 자신처럼 여겼었던 누군가의 죽음과도 같이, 마치 우리가 모든 사람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숲 속으로 쫓겨나게 되었을 때와도 같이, 마치 자살과도 같이, 그렇게 우리에게 영향을 주는 책인 거야. 무릇 책이란 우리 안에 얼어붙은 바다를 깨부수기 위한 도끼이어야만 한다는 말이지. 나는 그렇게 생각해.”> 프란츠 카프카가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中


좌파 이데올로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카프카가 말하는 책과도 같은 것이다. 즉 자본주의 체제라는 잠에 빠져 들어서 행복한 삶을 꿈꾸도록 몹시 지루하게 만들어 버리거나 아니면 잠에서 깨어나 혁명이라는 꿈을 살아 내도록 몹시 괴롭히거나.

그러나 지금 한국의 좌파는 어떠한가. 체제를 유지하고 재생산하며, 구원을 약속해 주는 듯 보이지만 그저 미몽 속에 지루하게 살게 하는 게 실상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소비를 이념적으로 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이념 자체를 소비한다. 무엇이 변한 것일까?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에 의하면 인간과 실재의 관계는 언어적 기호에 의해 형성되고 구성되며, 이러한 의미에서 인간은 실재 그 자체를 결코 날것으로 만날 수 없다. 알튀세르는 소쉬르의 이러한 통찰을 급진화시키는 가운데 마르크스주의적 인식론을 구조주의적으로 재구성하였다. 알튀세르에 의하면 이데올로기는 단순한 허위의식이 아니라 주체가 세계와 접하고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이다.

이데올로기를 계급 관계를 필연적으로 왜곡하고 은폐하는 허위의식과 동일시한 마르크스주의자들과 달리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가 개인이 그것을 통하지 않고서는 세계와 만나거나 관계 맺을 수 없는 필수적인 도구라 역설했다. 이 말은 바꿔 말하면 개인과 세계의 관계는 투명하지 않고 은폐되고 왜곡되어 있다는 뜻도 된다. 소위 잘못된 생각, 오개념이란 단편적, 파편적이 아니라 체계적이며, 개인은 자신도 모르게 그 속에 안주한다. 

또한 계급관계를 은폐하기 위해 작동하는 국가 이데올로기 장치가 있는데 개인은 이 속에서 지배 이데올로기를 진리라고 믿는 가운데 그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체계화한다. 따라서 알튀세르는 경제 관계의 변화만으로 이데올로기가 깨어진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노동자가 의식을 갖는다는 것도 거의 불가능한 과제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이데올로기로부터의 출구는 없다는 알튀세르의 주장은 그것이 극복되리라는 루카치György Lukäcs나 그것이 허위의식일 뿐이라는 경제주의의 입장과 달리, 이데올로기를 인간과 세계의 관계 자체로 본다는 데서 주목해야 한다. 설령 정말로 사회주의적 유토피아가 이루어진다고 해도 이데올로기는 늘 기능할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인식론의 ‘모든 사회적 모순들이 지양된 유토피아’에서 이데올로기는 한물간 허위의식일 뿐이지만, 소쉬르에 따르면 인간의 의식은 실재 그 자체를 결코 알 수 없기에 이론적 실천과 이데올로기는 근본적으로 구별되지 않고,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데올로기의 역할은 단지 인간과 세계 간의 관계를 중재해 주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더 나아가서 인간 주체 자체가 바로 이데올로기의 산물이다. 알튀세르의 어휘로 말해 이데올로기는 주체를 호명interpellation한다. 상황은 다음과 같은데, 인간 주체는 자신이 항상 중립적이며 자유롭고 객관적인 인식을 하고 있고, 그렇기에 자신의 행위에 책임을 져야만 한다고 믿는다. 그런데 이러한 믿음은 사실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산물이다. 인간 주체는 자신의 믿음과 행동을 무의식적으로 지배하는 이데올로기의 존재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결국 인간 주체는 계급 관계 속에서 지배하고 있는 이데올로기가 지배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이데올로기라는 사실을 알 수 없으며 바로 이러한 무지로 인해 주체는 지배 이데올로기에 봉사하며 자본주의의 재생산에 기여한다. 이데올로기가 주체를 호명한다는 것은 이렇게 이데올로기를 통해 주체가 만들어지는 상황을 말하는 것이다. 주체는 이데올로기적 호명을 자신이 자유롭게 선택하는 개인적 행동이라고 착각하는 가운데 이데올로기에 종속되며 이데올로기의 유지 및 재생산에 기여한다. 이데올로기가 초래하는 주체의 착각을 스피노자Baruch de Spinoza의 언어로 표현하면 젖먹이는 자기가 자유의지로 젖을 원한다고 믿고, 겁쟁이는 자기가 자유의지로 도망간다고 믿고, 술주정뱅이는 자기가 술기운에 취해 자유의지로 지껄인다고 믿는다. 오늘날의 좌파 이론가들 또한 그들이 체제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부름받았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른 채 자신들이 자유의지로 체제와 체제의 이데올로기에 저항한다고 믿고 있으리라.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데올로기적 구조를 통해서 개인이 체제 유지 및 체제 재생산에 기여하게 된다는 사실, 그리고 체제가 정당화된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는 곧 개인에게 가해진 체제의 착취나 폭력이 덜 투박해지고 더 정교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아도르노의 어휘로 말하면 체제의 구조가 보다 유연해짐으로써 오히려 체제를 강화시키게 된 것이다.> 장의준, 『웃지 마, 니들 얘기야』 中


아도르노는 ‘문화산업Kulturindustrie’ 이론을 통해서 체제가 그 구성원들에게 행사하는 폭력을 설명하고자 시도하였다. 문화산업에 의해 개인들은 자본주의 사회의 총체성 안으로 흡수, 통합되도록 길들여진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에 의하면 합리적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문화는 상품화되는데, 이렇게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품화된 문화가 바로 대중문화이며, 대중문화의 본질이 바로 문화산업이다.

현대인들은 문화산업에 의해 자신들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총체적 물화에 빠져들게 되며 반성 능력과 비판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이러한 개인은 지배 체제에 보다 잘 흡수되고, 통합될 수 있도록 길들여진다. 요컨대 문화산업의 궁극적 효과는 바로 체제에 저항하지 않는 개인들을 길러 내는 것, 체제에 철저하게 순응하는 개인들을 키워 내는 것이다.


<문화산업의 효과가 정치적 무관심이라는 아도르노의 주장을 한국사회에 그대로 적용시키기에는 적지 않은 무리가 따를 수 있다. 정치에 대한 무관심désintérêt보다는 지나친 관심hyper-intérêt이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한국사회에서 대중은 바로 정치에 대한 지나친 관심 때문에 체제에 흡수되고 통합되는 것이 아닐까? 아도르노에 의하면 문화산업은 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주입하고 사회를 통제하는 수단이며 이것이 제공하는 오락거리가 대중의 비판적 사유와 저항의 계기를 제거한다. ‘유흥Vergnügtsein’은 곧 ‘동의Einverstandensein’를 뜻하기 때문이다. 왜 유흥이 곧 동의인가? 문화산업의 소비자들은 문화상품이라는 유흥에 자신들을 내맡기는 가운데 노동으로부터 휴식을 취한다. 즉 여가시간을 보낸다. 그런데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에 따르면, 유흥이 제공하는 즐거움을 향유하는 사람은 긴장이 완화된 상태에서 그 즐거움이 연상시키는 미리 계획된 반응들과 지시들에 전적으로 내맡겨진다. 유흥 참여자는 그 어떠한 적극적인 참여도 하지 않고 기계적으로 기분의 전환을 따라가는 가운데 문화상품이 지시하는 자본주의의 상업주의적 이데올로기에 순응하도록 길들여지는 것이다. (이 글을 읽으면서 즐거운가? 그렇다면 당신은 동의한 것이다. 짜증나거나 불쾌하거나 지루한가? 그렇다면 당신은 저항을 위한 최소한의 거리를 두고 비판적으로 읽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든 저것이든, 둘 다 이 글의 목적에 부응한다. 고로 필자는 성공한 셈이다. 훗.) 그런데 한국 사회에서는 집권세력에 대한 저항 자체가 유흥이나 오락거리, 즉 ‘동의’로 보인다. 우리 사회의 대중은 체제에 저항한다고 믿는 가운데 실제로는 체제에 순응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문화산업은 체제에 도전하려는 욕망을, 체제에 반항하려는 욕망을 북돋고 자극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렇게 자극된 대중의 체제에 대한 저항의 욕망은 일종의 사이비 욕망, 즉 환상일 뿐이다. 실제적인 저항의 계기는 오락으로서의 사이비 저항을 통해, 체제 순응적 저항을 통한 대리만족을 통해 미리 차단된다. 요컨대, 한국사회에서 대중은 저항과 정치적 이념을 오락거리로서 소비하고 있으며, 이러한 이념적 유흥은 곧 체제에 대한 동의를 의미한다. 물론 이러한 오락거리를 끊임없이 생산해서 공급해 주고 있는 이들은 참된 저항에 대한 대중들의 욕구를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순응하는 도착된 저항, 사이비 저항 속에서 해소시켜 줌으로써 혁명의 가능성을 미리 차단해 버린다. 그리고 자본주의 체제의 정당화와 유지 및 보수에 기여하고 있는 이들은 뒤에서 보게 되겠지만, 바로 좌파 문화자본가들이다.

(중략)구별짓기를 하기 위해 그들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그저 기존의 존재 방식을 고수하고 있을 뿐인데도 좌파 이데올로그들은 상징자본을 취득하고 타인들로부터 존경받는다. 물론 그들이 말 그대로 정말로 아무 것도 하고 있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들은 해 왔던 것들을 계속해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무엇을 해 왔던가? 그간 그들은 문화장 및 정치장에서 자본을 독점하기 위한 게임을 질리지도 않고 끊임없이 수행해 왔다. 특히 그들은 문화장 내에서 이미 그들이 거의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는 문화자본을 유지 및 증식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문화상품, 문화 콘텐츠를 생산해 내고 있는데, 이러한 상품들의 주제는 집권 여당에 대한 비난이 대부분이고, 비판은 아주 약간 섞여 있다.> 장의준, 『웃지 마, 니들 얘기야』 中


이 사회가 좌경화되었다고 생각한다면 반은 맞고 반은 틀릴 것이다. 개인의 생각을 통제하는 이데올로기로서, 사관으로서의 좌경화는 분명하지만, 더 이상 그들은 혁명을 말하지 않고, 회의를 고무시키지도 않는다. 이미 그들의 모든 레토릭은 도그마로써 적재적소에 배치되었고, 그들의 세계관은 수많은 문화상품으로써 우리 안에 스며들고 있다.

좌파를 정의로서 소비하는 사회가, 운동권 세대 정치인들이 여전히 사십여 년 전 멘탈리티를 버리지 못하고 있는 사회가, 이 모든 걸 보고도 마찬가지로 ‘좌파 문화자본가들의 문화에 함몰된 대깨문’이나 ‘정치하는 놈들이나 예술 하는 놈들이나 거기서 거기지’ 하고 냉소나 뱉을 줄 아는 ‘쿨병’ 걸린 냉소주의자들로 가득한 사회가 바로 지금의 한국 사회이다.

문화 자본가로 전락한 전직 운동권들과, 우리의 불쌍한 오유, 일베 룸펜프롤레타리아트가 얼마나 차이가 있을 것 같은가?


<이 모든 것에 있어서의 문제는 소비자로 하여금 첫째 소비주의에 대한 그들의 반(半)무의식적인 항의와, 둘째 휴머니즘 정신을 지닌 소비자가 일단 조직화되면 갖게 될 잠재적인 힘을 깨닫도록 해주는 것이다. 이런 소비자운동은 참된 민주주의의 발로가 되어 개인은 직접 자기를 표현하게 되고 능동적이고 소외되지 않는 방식으로 사회발달의 방향을 바꾸려고 할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정치적인 슬로건이 아닌 개인적인 경험에 그 바탕을 두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효과적인 소비자운동이라도 대기업의 힘이 오늘날처럼 강하게 유지되는 한은 충분한 힘을 발휘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날이 커지고 있는 대기업의 정부에 대한 지배나 ‘세뇌에 의한 사상 지배를 통한’ 국민에 대한 지배가 분쇄되지 않는다면 아직은 존재하는 민주주의의 잔재마저 기술주의적 파시즘이나 사고할 줄 모르는 살찐 로봇의 사회ー우리가 두려워하는 ‘공산주의’라는 이름의 사회유형ー에 굴복하게 될 운명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미국에는 반트러스트(독점금지법)의 여러 법령에 표현되어 있듯이 대기업의 힘을 제한하는 전통이 있다. 이런 법률의 정신을 현재의 법인(法人)조직의 초강대세력에 적용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그것들을 좀더 작은 단위로 해체시키는 발의(發議)를 강력한 사회감정에 의해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존재에 바탕을 둔 사회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들이 시민으로서 그들의 경제적 기능에 능동적으로 참여하여야 한다. 따라서 생존의 소유양식으로부터의 해방은 산업적・정치적 참여민주주의를 완전히 실현함으로써만 가능하다.’> 에리히 프롬, 『소유냐 존재냐』 中


북한과 같은 형태의 파시즘은 더 이상 현대 국가에서 등장하지 않겠지만, 파시즘 자체가 보유한 세기말적인 미학의 흡인력은 가공할 위력을 지니고 있다. 지금의 한국만큼 ‘안’과 ‘밖’을 나누는 구별 짓기를 본 적이 없었고, 비뚤어진 민족주의에 천착하는 꼴을 본 적이 없었고, 결과의 평등에 연연하여 과정을 무시하는 꼴을 본 적이 없었고, 이 모든 것을 정부가 주도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들이 가려는 방향은 흔히 언급되는 북한식 독재도, 사회주의의 유토피아도 아니다. 경과를 보면 그 정도로 치밀하지도 않다. 그저 ‘자기들이 피로써 이루어 냈고 그에 상응하는 대우를 받는’ 나라, ‘자신들이 곧 이데올로기를 생산하는 지배 체제’인 나라를 고수하고 싶고, 그것을 자식들에게 유산으로 물려주고 싶을 뿐이다. 일본이 ‘파시즘조차 되지 못하는 나라’라면 한국은 ‘파시스트를 흉내 내는 뼛속까지 자본주의자인 돼지들과 그들을 숭상하거나 냉소하며 말라죽어가는 룸펜들의 나라’ 인 셈이다.


총론


허무주의, 반지성주의, 파시즘은 모두 허위의식을 기반으로 한 극한의 관념론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허무주의라는 메타적 시점의 이데올로기에서 ‘허위를 알면서도 모른 체 하는’ 자세를 현대 일본의 반지성주의와 한국의 유사 파시즘이 물려받은 셈이다. 그러니 ‘허무주의적 반지성주의’와 ‘허무주의적 유사 파시즘’이라 이름붙이는 게 적절할 것이다. 

소비사회적 허무주의 속에서 범용의 함정에 빠진 채 파시즘의 위기까지 겪고 있는 한국 사회는 아도르노식으로 표현하면 ‘자본주의의 총체성에 함몰된 관리되는 사회’ 에 가깝다.

주체적 의식이 역사적 발전의 동인이 된다고 본 루카치Georg Lukacs는 마르크스Karl Marx의 『자본론』을 토대로 해서 자본주의적 사회의 모든 현상들을 ‘상품’과 ‘상품 생산’의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본래 인간이 노동에 의해 만들어 내었던 생산물에 지나지 않는 상품이 마치 그 스스로 고유한 힘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생산 상 관계와 무관하게 독자적으로 행동하는 것처럼 여겨지는 바람에, ‘사회적 관계의 표현’으로서의 상품의 가치는 은폐되고, 더불어 상품의 가치가 마치 자연적이고 고유한 성질인 것처럼 나타나게 한다. 인간이 그런 상품을 숭배한다는 것은 곧 상품이 인간을 지배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은 결국 모든 인간관계가 상품으로 귀착되고 만다는 것, 즉 물상화Versachlichung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르크스의 이 개념을 루카치는 물화Verdinglichung 개념으로 나타내는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들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우선적으로 등가물의 교환을 통해 조절하며 이를 통해 인간들은 자신들의 환경 세계와 물화하는 관계를 맺도록 강제된다는 것이다. 물화에 따라 자기 인식 및 타자 인식의 왜곡은 필연적이다.

아도르노Theodor Ludwig Adorno는 마르크스와 루카치의 물화 개념을 받아들이는 가운데 물화의 토대인 교환 원리가 삶의 전 영역, 즉 문화적인 삶 전반으로까지 침투하였다고 주장하였다. 두 선배와 달리 물화의 원인을 이성 속에서 찾은 아도르노는 『계몽의 변증법』에서 인류가 계몽Aufklärung과 더불어 참으로 인간적인 상태에 도달하지 못하고 파시즘적 폭력이라는 새로운 야만의 상태에 빠져들게 되었던 원인을 근대화의 동인이었던 계몽의 이성이 그 시초부터 지배와 자기 보존을 위한 의지에 감염되어 있었다는 사실에서 찾았다. 본래 전체적이고 유기적인 이성Vermunft이었던 계몽적인 사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보존의 의지라는 야만의 씨앗을 보존하고 있었기에 어느새 분석적이고 도구적인 오성Vestand으로 변질되어 버리고 말았다.

계몽주의적 이성은 도구적 이성으로 변질되어 가는 가운데, 실증주의 혹은 과학주의라는 물화된 사유의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고, 종국에는 파시즘에 봉사하는 도구로 전락하고 만다. 그리고 소위 문화산업에 의해 개인들은 자본주의 사회의 ‘총체성’ 안으로 흡수 통합되도록 길들여진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총체적 물화에 빠진 것이다. 이로 인해 물화는 관리되는 사회verwaltete Gesellschaft의 보편적 현상이 되고, 인간 역시 반성과 비판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관리되는 사회는 체제에 반대하는 모든 세력을 자신 속에 품을 수 있는 유연한 구조를 가진다. 따라서 노동자 계급이나 노동자 계급의 이해를 대변하는 정당 역시 이미 사회 체제 속에 편입되어 체제 및 내화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체제에 반대하는 모든 목소리들은 이미 체제 안으로 통합되어 울려 퍼지고 있다. 그래서 ‘촛불’은 권력을 태워 버리기보다는 연단시켜 강화시켰으며, 모든 체제 비판적 정치 담론은 체제 유지적 이데올로기로 변질된 것이다. 아도르노에 따르면 관리되는 사회로서의 총체적인 사회에서 모든 정치적 행동은 이미 언제나 물화된 행동이기 때문에 우리는 왜곡된 타자 인식에서 기인하는 병든 정치적 행동과 참된 타자 인식에서 기인하는 건강한 정치적 행동을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을 갖기 힘들다.


여기서 중뿔나게 대안이나 해결책을 감히 말할 수는 없다. 모든 올바른 실천은 올바른 인식을 전제로 하는데, 하나의 사회적 주제에 대한 올바른 인식에는 언제나 타자 인식이 포함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청년 마르크스가 하부구조에, 생산 양태에, 빵에, 물질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이유, 자본주의에 대항하게piéter 만들었던 이유는 바로 노동자들에 대한 불쌍히 여김pietà, 즉 도덕적 진정성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자신의 도덕적 진정성을 믿는 것부터 시작해보는 건 어떨지 조심스럽게 건네 본다. 데리다 식으로 극한까지 해체deconstruction해 볼 수도 있고, 칸트 식으로 정언 명령에 따라 볼 수도 있고, 레비나스 식으로 무한히 타자에게 대답하고 제삼자에게 대답하는 존재임을 절실히 받아들일 수도 있다. 대개 총체적인 사회 속의 이미 물화된 행동일 가능성이 높지만 최소한 그 사실을 알면 메타적으로 대할 수 있는 가능성도 커진다. 그 지변의 z축을 찾아낼 철학의 등장을 기대한다.


참고 문헌


Erich Fromm, 『To Have or To Be』 (최혁순 譯)

斎藤環、佐藤優 『反知性主義とファシズム』

佐藤優 『ファシズムの正体』

장의준, 『웃지 마, 니들 얘기야 ~잊힌 룸펜 흙수저와 문화자본가로 전락한 좌파~』

Alexandre Kojeve, 『Introduction à la Lecture de Heg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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