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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ghoo Kim Jul 17. 2020

하이데거, 지젝, 그리고 들뢰즈와 가타리

아즈마 히로키 (1) : 『존재론적, 우편적』의 저변들


들어가며



1998년에 아즈마가 발표한 이 책은 그가 23살부터 26살까지 일 년에 한 편씩 발표한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에 관한 논문을 집대성한 것이다. 1994년, 앨런 소칼Alan David Sokal이 『소셜 텍스트』에 포스트모던 철학을 겨냥한 가짜 논문을 투고한 지적 사기 사건Sokal affair이 일어나던 해, 철학자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과 아사다 아키라浅田彰가 편집 위원을 맡고 있던 『히효쿠칸批評空間』에 게재한 『유령에 홀린 철학 – 데리다 시론幽霊に憑かれた哲学 デリダ試論』을 시작으로 장장 사 년간의 집필 끝에 완성한 데리다 연구서는 그를 학계의 일약 스타로 만들어 주었다. 그에 대한 아사다와 가라타니의 총애는 지금까지도 공공연하게 그를 호평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83년도에 그와 비슷한 스물여섯의 나이에 『구조와 힘構造と力』 으로 베스트셀러 저자가 되었던 아사다는 “『구조와 힘』이 드디어 완전히 과거의 것이 되었음을 인정했다.”고 극찬할 정도였다.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의 한국어판 정발로 아즈마의 이름이 국내에도 알려지기 시작할 때쯤 『존재론적, 우편적存在論的、郵便的』을 구입해 읽은 바 있으나 2015년도에 비평가 조영일 씨가 이 어마어마한 분량의 학술서를 탁월하게 번역한 덕분에 좀 더 명쾌하게 내용을 읽어나갈 수 있었다. 이 책은 아즈마의 글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도식적인 구조 덕분에 고등학생 이상의 학력과 교양을 지닌 사람이라면 누구나 용어를 찾아가며 내용을 따라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의 내용에 대해 어떻게 주관적으로 요약하고 정리하든 그저 열화 복사판에 지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적어도 이 책에서 저자가 참조하는, 그리고 데리다가 모티프를 얻은 학자들의 면면을 책 밖의 자료와 논문의 알기 쉬운 문장과 표현으로 정리하여 본서를, 나아가 데리다를 읽는 데 좋은 참고자료로 삼을 수 있는 글을 쓰는 것이 그나마 내가 발휘할 수 있는 역량일 것이다.

필자는 우선 비트겐슈타인Ludwig Josef Johann Wittgenstein의 논리실증주의와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의 세계-내-존재를 비교할 것이다. 그 다음은 라캉Jacques-Marie-Émile Lacan 이론과 이에 근거하여 논의를 진전시킨 지젝Slavoj Žižek의 이론을 검토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들뢰즈Gilles Deleuze의 초기 저작과 가타리Pierre-Félix Guattari와 공동 저술한 『안티 오이디푸스』를 소개할 것이다. 그리고 각 단락 말미마다 데리다가 어떤 부분에서 영감을 얻고 또 비판했는지 본서에서 인용하며 정리할 것이다.



(1) 비트겐슈타인 그리고 하이데거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실증주의



우리는 언어를 매개로 일상생활을 영위해 나간다. 세계는 언어로 채워져 있다고 말할 수 있는데, 이런 소극적인 관계를 뛰어넘어 좀 더 적극적인 관계를 제기한 철학 개념이 비트겐슈타인의 ‘그림 이론’이다. 그림 이론의 골자는 “언어는 세계에 대한 그림을 그린다.”이다. 『논리─철학 논고Tractatus Logico-Philosophicus』에서 규정한 바에 따르면 언어와 세계의 구조는 동일한 대응 관계를 가지며, 언어의 구조가 세계의 구조를 그대로 나타낸다.

언어는 이름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요소 명제(더 이상 분석될 수 없는 단순한 명제)와 그 진리 함수로 구성되어 있다. 즉 이름은 어떤 대상을 가리킬 때 비로소 의미를 갖게 되고, 요소 명제에서 이름들끼리의 관계가 이름이 가리키고 있는 대상끼리의 관계와 대응할 때, 요소 명제는 참이 될 수 있다.





이런 논리를 발전시켜 나가면 전 세계의 구조를 언어로 설명할 수 있다. 즉 이는 세계가 언어를 매개로 말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뒤집어 말하자면 자연과학의 세계와는 달리, 도덕이나 자아, 신과 같은 철학의 형이상학적(≒존재론적) 주제는 뚜렷한 대상을 지니지 않는 명제로 이런 명제는 언어로 규정할 수가 없다. 이와 관련해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른바 언어의 한계가 세계의 한계가 되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사유에 따라 철학은 실증을 위한 도구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그리고 그의 그림 이론은 훗날 과학의 논리적 분석 방법을 철학에 적용하고자 하는 사상인 논리 실증주의로 계승되었다.


하이데거의 세계-내-존재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에서 표현한 ‘세계-내-존재’란 세계라는 테두리 안에서 다양한 사물과 관련을 맺고 서로 배려하면서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우리가 아침에 일어나 잠자리에 들기까지 사용하는 모든 사물은 우리에게 도구이며, 우리는 그 도구에 둘러싸여 생활한다. 하이데거는 이처럼 세계와 함께하는 인간 존재의 특성을 포착해 인간을 ‘현존재’라고 불렀는데, 그런 의미에서 현존재가 곧 세계-내-존재인 것이다.

다만 인간이 사물과 관련을 맺고 살아간다는 것은 단순히 사물에 둘러싸여 의식주를 해결하며 살아가는 삶을 뜻하지 않는다. 그런 식의 존재였다면 나라는 존재는 누가 되어도 상관없다. 하이데거는 이런 존재를 그저 인간, 곧 익명의 세인世人das Man이라고 불렀다. 문제는 이럴 경우 궁극의 목적이어야 할 인간이 교환 가능한, 대체 가능한 존재로 전락한다는 사실이다. 만약 인간이 도구적 목적에 그친다면, 반드시 ‘나’일 필요는 없다. 따라서 하이데거는 교환 가능한 인간의 삶을 비본질적인 존재 방식으로 파악하고, 본질적인 삶을 강조했다. 

‘세계-내-존재’라는 개념을 하이데거는 생물학의 환경세계 개념에서 참고했다. 오직 인간의 세계가 형성적이며 인간만이 스스로 세계를 만들어내는 생물이라는 아이디어에서 비롯되었다. 하이데거 본인은 자신의 사상이 실존주의로 일컬어지는 것을 부정했지만, 이런 이유로 그의 철학은 스스로 인생을 개척하는 실존철학으로 분류된다.


『존재와 시간』 1부 3편, 그리고 전회轉回


후기 하이데거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전회’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해보도록 하자. 당초 『존재와 시간』 은 현존재의 시간성과 지평을 다루는 1부와 이를 토대로 존재론의 역사의 현상학적 해체를 꾀한 2부로 구성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1927년에 1부 2편까지 발표하고 나서 하이데거는 1부 3편부터 2부까지의 집필을 단념하겠다고 선언한다. 미완의 1부 3편의 표제 ‘시간과 존재’는, 이 저서 전체의 표제인 ‘존재와 시간’의 어순을 바꾸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한낱 어순을 바꾼 것에 그치는 단순한 문제만은 아니다. 본편의 ‘시간성’은 현존재의 존재의 의미로서만 이해되었을 뿐이며, 한걸음 더 나아가 존재자의 존재의미와는 무관하였다. 그러나 한편 현존재가 막연하나마 존재를 이해할 수 있는 존재자로서 존재에의 방법적 통로라는 사실에 그 본질을 두고 있다면 시간성은 한낱 현존재의 존재의 의미로서만 머무르지 않고, 존재자의 존재의 의미에까지 관계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존재 일반에 있어서 그를 가능케 하는 시간성, 나아가 현존재의 존재방식까지 규정하는 시간성. 바꾸어 말해 현존재로부터 그의 존재를 통하여 시간성으로 나아가던 방향이 반대로 근원적 시간으로부터 존재 일반을 통하여 현존재로 나아가는 것을 ‘전회’라고 한다. 『존재와 시간』이 미완으로 그치게 된 건 주제에 관한 것 때문이 아니라 그 방법에 관한 것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우연적으로 떠오른 게 아니라 『존재와 시간』 당시의 구상이었음을 증명하듯 이후 그의 논고들은 일관되게 전회를 뒷받침한다. 하이데거 자신이 ‘전회’ 자체에 대해 처음 언급한 것은 1947년 간행한 『「휴머니즘」에 대한 서간』에서이다. <(…)1부 3편 『시간과 존재』가 유보된 데 곤란을 겪고 있다. […] 여기서 전체가 반전한다. 유보의 이유는 (당시의) 사색이 이 전회에 있어서 충분한 언어Sagen로 구성되지 않았고, 이는 형이상학의 조력으로는 극복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930년에 사유를 시작해 1943년에 처음 인쇄된 강연 『진리의 본질에 대하여』 원고에서 『존재와 시간』에서 『시간과 존재』로의 전회의 확고한 통찰을 전달하고 있다.>

하이데거의 논고 『교설』, 『진리의 본질』, 『휴머니즘』에는 공통적으로 사색되는 사항이 있으니, ‘인간’, ‘진리’, 양자의 ‘연관’과 그 ‘진리의 변용’이다. 이로써 이끌어지는 유일한 질문이란 “어떻게 인간은 진리와 본질적으로 엮일 수 있는가?”이다. 플라톤의 성찰에 따르면 ‘드러남’으로서의 진리는 사물 자신의 성격이 아니라, 그 사물이 ‘무엇으로 보이는가’ 즉 ‘사물의 현전하는 방식(이데아)의 성격’으로 파악된다. 하이데거는 여기서 진리의 본질의 전향을 본다. 오늘날 진리는 보이는 것에 한해서만 부여되는 사물의 드러남에 제한된 것이다. 이 사태는 도야와 더불어 생겨난 진리의 본질 변용과는 결정적으로 구별된다고 말할 수 있다. 거꾸로 말하자면 오직 이 전향에 기반을 두고서야 도야는 사물의 드러남의 변용으로서 처음으로 말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결정적인 본질 변용이야말로 플라톤이 결코 말하지 않은, 아니 원리적으로 말할 수 없던 엄밀한 의미에서의 ‘진리에 대한 교설’에 다름없다. 그리고 여기서 처음으로 인간은 제 사물의 본질을 그것이 ‘무엇인지(이데아)’를 향해 ‘올바르게richtig’ 꿰뚫어볼 힘, 이후에는 이해력 내지는 인지력이라 불리는 능력을 손에 넣을 수 있다. 이는 사물의 보이는 형태를 향하는 것Sichrigtung만이 일체의 올바름Richtigkeit으로서의 진리를 보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거꾸로 말하자면 ‘올바르게 향하여 본 사물’만이 그 자신의 보이는 형태를 본질로써 인간에게 맡길 수 있다.


분석철학자들을 위시한 하이데거 비판


<근대에 들어서 자연과학이 성공을 거두고 그 권위를 쌓아가면서 “만유萬有에 대한 가장 숭고한 탐구(Plato, 『국가Republic』 489c)였던 철학은 설 땅을 잃고 말았다. (대체로 하이데거의 작품을 무시해버리는)분석철학자들은 철학의 구실을 낮추어 보는 견해를 채택해왔는데, 이것은 철학에 대한 그들의 전형적인 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이 볼 때, 철학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선택지 중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한다. 즉 철학은, 과거의 철학적 입장들에 대한 역사적인 연구가 되든지 개념적・언어적인 분석에 종사함으로써 경험과학의 보조물이 되든지 간에,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한다. 이렇게 보자면 결국 철학은 과학의 개념들을 명료히 하고, 그 이론적인 혼란들을 솎아내고 필시 우리가 이러저러한 방식을 동원해서 사고와 언어에서 세계를 표상할 때 봉착하게 마련인 한계들을 우리로 하여금 더욱더 분명히 자각하도록 함으로써 과학을 보조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 마크 A.래톨, <HOW TO READ 하이데거> 서문 中 


분석철학자뿐 아니라 교양 수준에서 철학 지식을 숙지한 사람들 중 실증주의에 경도된 사람일수록 하이데거를 형이상학적(비과학적) 사변의 불쾌한 옛 시절의 후퇴한 사람으로 본다. 그런데 그 저변에는 다분히 감정적인 요소까지 끼어 있어 종종 오히려 자신의 분석을 흐리게 만드는 경우도 있는 듯하다. 가령 나치 부역자였다든지 하는 이유로 말이다. 

『존재론적, 우편적』에 소개된 사례를 보자.(p.269~272) 1932년 루돌프 카르납Rudolf Carnap은 자신의 논문에서 논리실증주의의 관점에서 하이데거 철학을 비판하고 있다. 그의 비판의 골자는, “하이데거의 형이상학적 언명은 논리적으로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의 주장이 내용의 진위 이전에 애당초 형식적으로 올바르지가 않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하이데거는 “무無는 무엇인가”라고 묻는다. 하지만 카르납에 의하면 이런 물음은 논리적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무nothing’를 명제함수로 둘 때 자연언어문 ‘Nothing is outside’는 ‘밖엔 아무것도 없다’지 ‘바깥에 무가 있다’가 되지 않는다. 논리함수로 표현하면 ~∃(‘∃’는 존재를, ‘~’는 부정을 나타내는 논리 기호)일 뿐으로, nothing은 논리적으로 어떤 특정 구문론적 형식 ~∃χ를 지시하는 것에 지나지 않고, 명제변수가 될 수 없다. 따라서 ‘무nothing는 무엇인가’를 ?(nothing)이란 명제로 표기하면 논리적으로 성립하지 않게 된다.

비트겐슈타인은 사실事象의 총체를 ‘세계’라고 부르고, 모든 사실이 각기 대응하는 명제표현(논리상)을 갖는다고 규정한다. 그리고 그는 명제표현의 한계를 명확히 서술하고 있다. “명제는 모든 실재를 서술할 수 있다. 그러나 명제는 다음과 같은 것은 서술 불가능하다. 그것은 실재를 서술하기 위해 명제가 실재와 공유해야 하는 것, 즉 논리형식logische Form이다. 논리형식을 서술하기 위해서는(…)논리의 바깥, 즉 세계의 바깥쪽에 설 수 있어야 한다.(4.12)”

하지만 『논리철학논고』가 주의를 촉구하는 것처럼 명제 자체는 그것의 진위와 무관하게 존재한다.(4.05 이하 참조) 그리고 대상의 ‘존재’ 자체, 즉 ∃χ 자체의 의미를 바로 묻는 것은 결국 명제 자체의 존재근거를 묻는 것, 알기 쉽게 말하자면 “도대체 왜 우리는 페가수스에 대해 말하는가”를 묻는 것과 똑같다. 이런 탐구는 한계를 넘어선다. 사람은 명제의 진위에 대해서는 유의미하게 말할 수 있지만, 도대체 왜 그 명제가 존재하는지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다.

또 명제의 진위/명제의 존재라는 이 두 위상의 구별은 비트겐슈타인에 의해 “세계가 어떻게 존재하는지가 아니라 세계가 존재한다는 점이 신비다”(6.44)라는 명제에서도 명확히 표현되어 있다. 그 ‘신비’에 대한 태도를 상술했듯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1940년대 이후 분석철학자임을 자청하는 사람들 중에는 이 윤리적 영역에 관한 침묵, ‘윤리의 주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역설적 수단’(『비트겐슈타인과 세기말 빈』, 석기용 옮김, p.286 이하)을 계승하지 않은 사람들이 많은 듯 하다. 그들은 존재론적 문제를 간단히 말소하거나 무시한다. W.V.O. 콰인은 1948년의 논문 『무엇이 존재하는가에 대하여』에서 “존재한다는 것은 변항變項의 값이다(p.27)”라고 주장하고, 비트겐슈타인이 ‘신비’라고 부른 영역을 ‘오캄의 면도날’로 잘라내 버릴 것을 분명히 제안하고 있다.(『논리적 관점에서』, 허라금 옮김, p.14 이하) 여기에서 존재론적 문제는 의미론적 차원으로, 즉 명제를 둘러싼 해석의 차이로 완전히 환원되어 버린다.


클라인 관, 존재론적 탈구축, 그리고 부정신학 비판


<1930년대 초 이와 같은 대립은 철학사적으로 1940년대에서 1970년대에 걸쳐 생겨난 ‘철학’의 극단적인 이분화, 대륙계 존재론철학과 영미계 분석철학이라는 분열이 시작되었음을 상징하는 사건으로서 이해할 수 있다. 실제 카르납의 이와 같은 주장, 언어의 물상화는 이후 금세기 후반의 대륙철학(즉 프랑스 현대사상)에 대한 비판의 유력한 범례로서 기능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분석철학자의 비판에 그치지 않는다. (…) 대륙철학은 언어와 유희한다. 1930년대의 그와 같은 비판은 지금도 완전히 살아있다. 그렇기 때문에 제2기 데리다를 긍정적으로 읽는 우리, 즉 일반적으로 프랑스 현대사상에서 가장 언어를 물상화하고 있다고 간주되고 있는 철학자의, 그것도 가장 언어를 물상화하고 있다고 간주되고 있는 시기의 텍스트에 대한 이론적 독해가 가능하다고 믿고 있는 우리에게는 특히 그런 비판의 의미와 필연성을 미리 이해하고 그에 대해 답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된다.> 본서 p.272



논리실증주의는 사고의 한계를 그 구체적 대상성을 뒷받침하는 형식, 즉 사고의 메타레벨로서 파악했다. 메타레벨은 정의상 사고대상(오브젝트레벨)이 결코 될 수 없다. 이런 발상은 칸트에 의한 오성/이성이라는 이분법의 직접적인 계승이며, 철학사적으로 매우 오소독스orthodox한 것이다. 이런 설정은 한계에 대한 사고를 정의상 불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그런 전통에 저항하여(또는 그런 칸트적 전통에 저항하는 다른 전통, 소위 독일낭만파를 계승하여) 칸트/비트겐슈타인이 금지한 한계=기초에 대한 물음을 철학적으로 다시 조직하려고 한다. 따라서 그의 작업은 논리적으로는 사고의 메타레벨(Grund는 상하관계를 반전시키면 über=mata도 된다) 그 자체를 사고의 대상으로 삼는 것, 즉 메타레벨과 오브젝트레벨을 어떤 형태로 매개하는 것을 요청하게 된다.

하이데거는 사고대상의 총체 또는 세계, 즉 존재자의 집합 속에서 사고대상과 사고형식이 포개어지는 특정한 존재자를 발견한다. 하이데거는 자주 그런 상태를 이중주름Zweifalt이라고 부르고 있다. 독특한 이중구조를 가진 그런 특이한 존재자를 통해 한계에 대한 사고가 간접적으로 가능하게 된다. 그런 존재자에 대해 사고하는 것, 즉 그것을 사고대상으로 삼는 것은 그대로 동시에 사고형식(존재)에 대한 물음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점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하이데거는 그것이 바로 인간, 그의 술어로 말하자면 ‘현존재Dasein’라고 주장한다(『존재와 시간』 제4절). 논리형식은 인간에 의해 산출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인간은 한 사물로서 논리형식을 따른다. 그러므로 세계=사고의 한계에 대한 물음Frage은 세계=사고 자체를 산출하는 인간이라는 존재자의 ‘실존론적 구조’에 질문을 던짐으로써 탐구된다.



논리형식(존재)은 실존론적 구조를 매개로 하여 어떤 특이한 존재자, 즉 현존재와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존재/존재자라는 두 레벨이 단락된 시스템을 아사다 아키라가 『구조와 힘』에서 사용한 그림을 전용하여 ‘클라인의 병’으로 표현하고 싶다. 하이데거는 사고대상과 그 조건과의 관계를 클라인의 병甁적 뒤틀림 속에서 파악했다. 그가 ‘논리학’의 유효성을 단호하게 거절한 것은 그런 학문이 ‘뒤틀림’을 소거한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거부에도 불구하고 하이데거의 이런 착상은 그야말로 논리학적으로 엄밀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내용적으로나 시기적으로나 명확히 수학사에서 프린키피아 마테마티카Principia Mathematica 체계(논리실증주의의 수학적 대응물)의 내재적 비판으로서 등장한 1931년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에 대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잠시 본서에서 다루는 ‘탈구축’들을 소묘해보도록 하자. 

ⓞ 우선 기존의 형이상학 체계가 있다. 후설Edmund Husserl은 자신의 초월론적 현상학에서 ‘현상 자체로서 예속하는(괄호치는)’ 연구 방법을 통해 확보된 역사의 유일성을 역설한다. 이는 초월론적 시니피에(기의)로 대표되는 전체성이다. 전기 데리다의 주요 연구는 바로 이러한 사고에 대한 비판에서 시작되었다.

① 비트겐슈타인과 러셀은 이러한 세계의 전체성에 대해 오브젝트레벨과 메타레벨, 존재자와 존재(하이데거의 정의)라는 이분법으로 준별을 시도한다. 그리고 표상적 언어를 통해 이해되고 설명되는 범위까지 선을 긋고, 그 외에 대해선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해야 한다.’고 한다.

② 전기 하이데거는 그런 전통에 저항하여(또는 그런 칸트적 전통에 저항하는 다른 전통, 소위 독일낭만파를 계승하여) 칸트/비트겐슈타인이 금지한 한계=기초에 대한 물음을 철학적으로 다시 조직하려고 한다. 따라서 그의 작업은 논리적으로는 사고의 메타레벨(Grund는 상하관계를 반전시키면 über=mata도 된다) 그 자체를 사고의 대상으로 삼는 것, 즉 메타레벨과 오브젝트레벨을 어떤 형태로 매개하는 것을 요청하게 된다.

③ 괴델과 후기 하이데거는 “페아노 공리계를 포함하는 어떠한 공리계도 무모순인 동시에 완전할 수 없다. 또한 무모순일 경우 그 공리계로부터 그 공리계 자신의 무모순성을 도출할 수 없다” 는 불완전성 원리, 상술한 클라인 관의 ‘현존재’ 개념을 들어 이를 비판한다. 데리다는 이들의 업적을 평가하면서도, 그 부정성(불가능한 것)의 근거가 단單수적이고 추상적이며 따라서 (자신이 주장한)오배송의 가능성을 파악하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이것이 초월론적 시니피앙(기표)으로 대표되는 부정신학 시스템이다.

④ 마침내 데리다는 앞선 학자들의 맹점을 보완한 ‘우편적 탈구축’을 발견한다. 이는 동일성의 함정인 오배송이 누적된 유령 공간의 복수성과 ‘전이’라는 무의식의 연결을 통해 보완된다. 이러한 사유를 컨스터티브하게 정리하던 전기 데리다는 스스로 내포한 괴델적 부정신학을 극복하고자 했고, 이에 따라 후기 데리다는 퍼포머티브한 입장에서 실험적이고 실천적인 글을 발표해나간다.


(2) 라캉 그리고 지젝


본서에서도 지적하고 있지만 라캉은 생전 빈틈없는 이론 구축보단 실천을 통해 원래의 아이디어를 더욱 풍성하게 진전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았고, 데리다의 비판 대상도 엄밀히는 라캉 본인의 저작보단 라캉에 영향을 받은 학자들(의 저작)에 맞추어져 있다. 지젝은 라캉 이론을 기반으로 자신의 독창적인 사유를 전개한 대표적인 학자이며 여기서 인용하는 라캉 관련 서적도 그가 저술한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소개하는 라캉의 대표 개념들은 이미 지젝의 실천적 관점이 반영되었음을 미리 밝힌다. 또한 그에 따라 어디까지가 라캉이고 어디까지가 지젝인지 구분하기에 애로 사항이 있는 관계로 인물에 관계없이 개념 서술을 병렬식으로 나열하겠다. 상기했듯 어차피 데리다의 비판 대상은 라캉과 지젝의 공통분모인 부정신학성이므로 큰 문제는 없을 거라고 본다.


상징계, 상상계, 실재계 그리고 대타자


<라캉에게 인간존재의 현실은 상징계, 상상계, 실재계 등 얽혀 있는 세 차원으로 구성된다. 이 세 영역은 체스 게임에서 간명하게 예증된다. 체스를 하기 위해 따라야 하는 규칙은 체스의 상징적 차원이다. 순전히 형식적인 상징적 관점에서 ‘기사(knight)’는 이것을 둠으로써 일어날 수 있는 변동 안에서만 정의된다. 이 상징적 차원은 상상적 차원과 명확히 대비된다. 상상적 차원에서 각각의 말들은 특유의 형태를 가지며 서로 다른 이름(왕, 왕비, 기사)으로 개별화된다. 그래서 규칙은 같지만 서로 다른 상상계, 즉 ‘메신저’ ‘러너’ 따위의 이름으로 불릴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실재계는 게임의 과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연속적인 환경의 전체집합이다. 경기자의 지능이나 경기자를 당황하게 하고 갑자기 게임을 중단시키는 예기치 못한 침범 같은 것이다.> 『HOW TO READ 라캉』 (슬라보예 지젝 著, 박정수 譯) 中


상징적 질서는 말하는 모든 존재에게 제2의 자연이다. 그것은 지금 여기에서 내 행동을 조종하고 통제한다. 우리, 즉 언어의 주체들은 마치 익명의 전능한 조종자가 시키는 대로만 말을 하고 행동하는 꼭두각시와 같다. 이 익명의 전능한 조종자를 라캉은 ‘대타자’라 가정한다. 대타자는 상징적 차원에서 작동한다. 상징적 질서의 구성은 맹목적이고 자연적으로 터득해야 하는 문법 규칙, 그리고 동일한 생활 세계의 참여로 이루어진다.

상징적 공간은 우리 자신을 측정할 수 있는 척도처럼 작용하며, 이로 인해 대타자는 어떤 단일한 대행자로 인격화될 수 있다. ‘신’, 실제 개인, 이데올로기 등의 대의처럼 말이다. 말을 하는 동안 나는 단순히 ‘소문자 타자’로서의 다른 사람들과 상호 작용하는 ‘소문자 타자(개인)’일 수는 없다. 대타자가 항상 거기 있고 필수적으로 참조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대타자는 주관적 전제라는 위상 속에서 비실체적, 혹은 문자 그대로 가상적이며 부서지기 쉬운 것이다. 대타자는 주체가 마치 그것이 존재하는 것처럼 행위하는 한에서만 존재한다. 대타자의 위상은 공산주의나 민족 같은 이데올로기적 대의의 위상과 같다. 그것은 자신이 대타자 속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개인들의 실체적 토대이며, 개인들의 존재적 기반이며, 삶의 의미 전체를 제공하는 참조점이다. 그것을 위해서는 자신의 생명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지만, 존재하는 것은 개인들과 그들의 행위뿐이다. 그래서 이 실체는 개인들이 그것을 믿고 따르는 한에서만 현실적으로 작동한다.


대상 a


라캉은 안티 포스트모더니스트이다. 그는 과학을 단지 우리가 자신에 대해 말하는 또 하나의 스토리라고 생각하는 관념, 신화적 이야기나 예술적 서사에 대한 과학의 우월성은 단지 역사적으로 우연히 형성된 서구의 ‘진리 체제(푸코Michael Foucault에 의해 대중화된 용어)’에 기반을 두고 있는 서사일 뿐이라는 생각에 반대한다.

라캉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이 과학적 실재가 정확히 우리에게 결여된 것이다. 우리는 그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과학이 겨냥하는 ‘실재계’에서 그 실재에 접근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다름아닌 또 다른 실재다. 라캉에게 이 실재는 섹슈얼리티의 중심에 새겨진 실재다. “성관계는 없다.” 인간의 성은 어쩔 수 없는 결핍으로 특징지어져 있으며, 성적 차이는 어떤 공통분모도 없는 두 개의 성적 위치의 대립이고, 따라서 향락은 근본적인 상실을 배경으로 해서만 획득될 수 있다. 

실재는 살아 있는 존재가 성적 차이의 (상징적으로 통제된)체제로 들어갈 때 상실한 것을 구현하는 환영적 실체를 제공하는, 끔찍한 무정형의 사물로서의 라멜라적 실재가 있고, 그 다음 자연의 기계적이고 무의미한 작용을 함축한 공식, 즉 과학적 실재가 있다. 그리고 평범한 대상을 숭고하게 만드는 불가해한 ‘어떤 것’으로, 라캉이 대상 a라 부른 세 번째 실재가 있다.

대상 a는 한편으로 욕망의 원인으로서, 다른 한편으로 욕망의 대상으로서 구분된다. 욕망의 대상이 단순히 욕망된 대상이라면, 욕망의 원인은 그 때문에 우리가 대상을 욕망하게 되는 특질, 즉 보통은 지각되지 않고 가끔은 장애물로 인식되기까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지닌 대상을 욕망하게 되는 어떤 디테일이나 틱 같은 것이다.

어떠한 실체적 일관성도 갖고 있지 않은, 그 자체로는 ‘혼돈 외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가 주체의 욕망과 두려움에 의해 왜곡된 입장에서 볼 때만 확정적인 형태를 갖게 되는 ‘실체가 아닌 것의 그림자’, 이것이 대상 a다.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지젝 이론의 근본은 뒤집기이다. 논리를 ‘전도’시켜 이데올로기를 ‘전복’시키는 것이다. 이는 내용을 바꾸는 게 아니라 형식 자체를 바꾸는 것이다. 동전은 뒤집혀도 동전인 채이니 주사위나 다트 등으로 바꾼다는 게 지젝의 생각이다. 지젝은 미국의 정치 전략에서, 세계 경찰을 자처하는 미국이 ‘자유’와 ‘인권’을 수호하기 위해 테러리즘에 대해 전쟁을 선포하고 그렇게 테러분자 체포에 몰두하다 보니 소탕만 할 수 있다면 ‘자유’나 ‘인권’은 희생해도 좋다는 ‘뒤집힌 논리’를 발견한다.

또한 포스트주의자들에 대한 비판도 가열차다. 지젝이 보기에 포스트주의자들이 점점 더 개인의 미학적 삶에 몰두하면서 정작 정치적 실천은 뒷전이 되었다. 그들은 그저 냉소주의에 빠져 있을 뿐이다. 지젝의 이데올로기 비판이 반냉소주의적 ‘행위’를 지향하는 건 그가 가장 경계하는 이데올로기가 냉소주의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정해진 동일성의 체계 내부에서 사유하도록 프로그램화되어 있다. 지젝은 우리에게 주어진 세계의 논리 전제 자체를 뒤집어 볼 것을 권한다. 뒤집기 결론에 이르려면 먼저 동일성의 논리에 따라 잘못된 결론에 이르는 과정을 겪어야 한다. 이것이 ‘오류의 구조적 필연성’이다. 지젝이 사뮈엘 베게트Samuel Beckett의 ‘실패의 변증법’을 인용하는 이유다. 그렇게 동일성의 세계를 극복한 차이의 세계에서 “정신은 뼈다,” “부富가 자기自己다” 등의 ‘모순어법적 사유 방식’이 가능하다. 

지젝의 저술인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을 떠받치고 있는 마르크스의 이데올로기, 헤겔의 변증법, 라캉의 정신분석조차 주류적 관점을 전도시킨 것들이다. 지젝은 이데올로기에서 앎의 문제를 행위의 문제로, 변증법은 동일성에서 차이로, 정신분석은 상징계에서 실재계로 강조점을 전도시켜 독특한 철학을 구성한다. 이데올로기론은 실천철학이 되고, 주류적 해석을 뒤집은 차이 변증법은 지젝의 사유 논리가 되며, 정신분석은 지젝에게 분석 용어와 개념 틀을 제공한다.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에서 ‘숭고한 대상’은 일반적 대상이 실재계의 물(物, Ding)의 지위로 상승한 것을 가리킨다. 일반적 대상이 주이상스Jouissance를 유발하는 대상 a 또는 잉여 주이상스가 된 것이다. 상징계에서는 소외된 주체가 자신의 결여를 메우고자 욕망하는 대상 a가 숭고한 대상이다. 대상 a가 숭고한 이유는 그것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주이상스는 상징계 바깥을 넘보는 실재계의 개념이다.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향락, 즉 고통도 불사하는 쾌락 같은 것이다. 대상 a가 상징계 차원의 일반 대상이라면, 잉여 주이상스는 존재 자체로부터 유발된다.



지젝이 채택한 라캉의 욕망의 그래프가 보여 주는 세계는 주체도 타자도 온통 분열되어 있고 비어 있다. 라캉식으로 읽어 내는 헤겔 변증법은 곧 동일성을 뒤집는 차이, 부정, 결여, 공백의 논리다. 두 사람 모두 전복이라는 키워드를 공유한다. 헤겔 변증법이 최초의 관점을 전복하는 또 다른 관점의 논리라면, 라캉 정신분석학은 상징계를 전복하는 실재계의 입장에 서 있다.

상상계로부터 인간은 소외를 통해 자아를 형성한다. 상징계는 언어와 법을 비롯한 사회적 체계를 가리킨다. 인간은 상징계로 진입하면서 타자에 의해 ‘소외’되어 분열된 주체가 된다. 이 분열의 과정을 인정하면서 어엿한 주체가 되지만, 동시에 타자는 이데올로기로 작동한다. 상징계는 통합 불가능한 틈을 가지는데, 라캉은 이를 ‘비-전체성(not-all)’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상징계의 분열된 주체는 ‘케 보이(Che Vuoi,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실재계를 끌어들인다. 지젝에게 실재계는 변증법에서 절대적 부정성과 다르지 않다. 상징계에서 모순되는 것들이 실재계에서는 일치할 수 있다.

욕망 그래프의 하단부 사각형[상징계]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상단부 사각형[실재계]까지 나아가야 한다. 이것은 하단부의 ‘소외’와 상단부의 ‘분리’관계이기도 하다. ‘소외’가 대타자에 의해 주체가 분열되는 과정이라면, ‘분리’는 그 대타자조차 분열되어 있음을 확인하고 주체가 해방되는 과정이다.

라캉이 주체와 욕망의 문제에 머물러 있는 사이, 지젝은 그 주체들을 둘러싼 상징계의 구조적 배제를 다룬다. 라캉이 말하는 주체화는 철저하게 순수 욕망과 연관되며 소외되지 않는 자신의 욕망을 정립하는 과정인 데 반해, 지젝의 주체화는 결국 정치적 주체화, 즉 프롤레타리아 주체화로 귀결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는 상징계의 이성이나 인식, 합리성의 문제를 넘어 실재계의 욕망 차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단순히 우리 삶의 상징적 질서에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삶 자체를 만들어 가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비록 ~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마치 ~인 듯이’ 행동하는 이유는 무의식과 실재의 문제다. 지금까지 이데올로기 비판은 사회가 어떻게 개인을 구조화하는가를 주로 다루었지만, 개인의 심리 안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다루지 않았다. 이에 대한 답을 지젝은 라캉의 정신분석에서 찾았다.


라캉과 지젝에 내재된 부정신학에 대한 데리다와 저자의 비판


<라캉에게 ‘불가능한 것’은 단수, 하나이다. 그렇기 때문에 프로이트도 포도 자신도 똑같은 ‘불가능한 것’에 직면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똑같은 ‘불가능한 것’에 대한 인식은 소포클레스나 소크라테스부터 다양한 사상가를 통과하여 라캉에게도 배달되어 온다. 그가 행한 역사의 재구성=말소는 이상적인 우편제도에 의한 이런 보증에 의존하고 있다. 다른 한편, 데리다에게 ‘불가능한 것’은 복수이지 결코 하나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과 프로이트가 똑같은 ‘불가능한 것’에 직면한다는 보증도 없다. 『우편엽서』에서 제시된 은유에 따르면 ‘불가능한 것’은 오히려 소크라테스에게서 플라톤으로, 플라톤에게서 프로이트로, 다시 프로이트에게서 자신에게로 배달될 때, 어딘가에서 행방불명이 되어 버린 편지와 같은 것이다. 각자가 다루는 ‘불가능한 것’은 완전히 다른 편지일 수 있다. 즉 행방불명된 우편물을 모델로 ‘불가능한 것’에 대해 사고하는 데리다에게 있어, 그 역사=배달경로를 재구성하는 것은 정의상 불가능하다. 오히려 역사란 재구성이 불가능한, 잘못된 배송의 축적으로 파악된다.(…) 데리다는 라캉에게서 우리가 ‘괴델적 탈구축’이라 부르는 것의 정치精緻화를 발견하고 있다. 실제 라캉과 괴델의 깊은 관계는 데리다의 문맥을 참조하지 않아도 확실하다.(…) 라캉파 연구자들이 시사하고 있는 것처럼 ‘주체’의 구성을 둘러싼 라캉의 이론적 퍼스펙티브, 발화가 오브젝트레벨과 메타레벨로 항상 이중화되는 것이 주체의 근원적 분열Spaltung을 일으키고, 그 분열에서 향유(주이상스)의 심급이 열린다는 주장 자체가 형식체계의 괴델적 불완전성을 강하게 의식함으로써 성립하는 것이다.> 본서 p.120~121


<지젝의 논의에서는 ‘사물’의 레벨이야말로 분석의 중핵을 이루고 있지만, ‘사물’로서의 이데올로기는 정의상 모든 구체적 내용이 박탈되어 있다. 이것은 그의 고유명론과 똑같은 결함이다. 지젝에게 있어 고유명의 잉여도 이데올로기의 ‘사물’성도 모두 ‘현실계’의 대응물에 지나지 않다. 따라서 여기에서 현실réalité 수준의 설명은 모두 본질적 논의로부터 기각되어 버린다. 이름 ‘아리스토텔레스’의 잉여가 그 이름을 둘러싼 현실적 사정에는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스탈린주의가 기능하는 이유도 그런 구체적인 정치상황에 의존하지 않는다. 문제의 이데올로기가 자유주의든지 공산주의든지 그의 분석은 동형의 구조를 발견할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젝의 그와 같은 논의가 본질적으로 비정치적인 정치적 언설, 일종의 정치(부정)신학이라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의 논리적 틀에서는 이데올로기의 호명이 어디에서 어떻게 들려오든 그 수용에는 본질적인 관계가 없다. 지젝적 주체에서 진실의 ‘호명’은 항상 주체의 괴델적 균열에서, 그리고 그곳으로부터만 울려 퍼진다. 따라서 이데올로기, 즉 라캉과 정신분석의 술어에서 말하는 ‘공상fantasme’은 오로지 현실계가 메아리치게 하는 그런 붕괴壞亂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서만 요청되는 것에 지나지 않다. 이것은 지젝의 논의에 알튀세르가 강조한 ‘계급투쟁의 장’, 복수의 이데올로기장치가 교차하는 네트워크 공간이 완전히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본서 p.168~169


데리다의 해체deconstruction가 겨냥하는 것은 서구 철학과 문화의 기반인 진리/비진리의 대립 구조이며, 이 구분을 뒷받침하는 이론적 기반인 이른바 현전의 형이상학이다. 현전의 형이상학이란 ‘보는 것이 믿는 것’이라는 상식의 철학적 표현이다. 특히 영혼의 눈인 정신에 현재 떠오른 것이 가장 확실하다는 믿음이다. 눈앞에 존재하는 것은 확실하다는 소박한 이론에서 중시된 것은 또한 음성이다. 소리 나는 순간에 들은 것은 눈앞에 있는 것을 보는 것이나 다름없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이 의견의 통일과 일치를 보장한다고 믿는다는 이유도 있다. 이는 대화를 진리의 통로로 생각한 소크라테스처럼 음성 중심주의phonocentricism 또는 로고스 중심주의logocentricism와 통한다.

이에 데리다는 ‘앎의 기초는 현전이 아니며 말하고 듣기가 아니라 글쓰기와 해석’이라 주장한다. 말하는 순간부터 소리를 듣고 이해하기까지 지연이 있고, 말하는 이와 듣는 이 사이에 거리와 차이가 있다. 그리고 이 지연과 차이가 바로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근본 조건이다. 그렇기에 지연과 차이를 가장 분명하게 보여 주는 글쓰기와 읽기는 말하기와 듣기보다 근본적인 이해 형태가 되는 것이다.

결국 데리다의 의도는 이성과 음성이 담보하는 진리의 현전성을 편애해 온 서양 철학의 진리관, 다시 말해 현전의 형이상학과 로고스 중심주의를 비판하는 것이다. 


앞에서 소묘해 둔 탈구축의 경과를 좀 더 풀어 보자. 데리다는 형이상학과 부정신학, 초월론적 시니피에의 체제와 초월론적 시니피앙의 체제에 대한 이중의 저항을 시도했다. ‘형이상학’의 일관성은 초월론적 시니피에라는 최종심급의 확정, 한마디로 자기언급의 금지 위에서 유지된다. 괴델적 탈구축은 그것을 비판한다. 그런 비판은 구체적으로는 시스템 속에서 자기언급의 금지를 범함으로써 역설적 시니피앙(‘대리보충’)을 발견하고, 그로부터 체계 전체의 결정불가능성을 이끌어냄으로써 이루어진다. 하지만 그런 작업은 최종적으로는 비판의 지렛대로 이용했음이 분명한 시니피앙을 초월론화하고, 또 다른 타입의 시스템을 안정화시키는 것으로 귀결된다. 이것이 ‘부정신학’이라고 불린다. 데리다는 다시 그로부터 도주하기 위해 ‘불가능한 것’의 모델을 따로 구한다. ‘우편’, ‘유령’이라는 이론적 은유는 여기에서 요청된다. 시스템 전체를 탈구축한 잔여로서 얻을 수 있는 단수적 ‘외상’으로부터 시스템의 세부, 시니피앙의 송부 일회 일회의 미세한 어긋남(오배송)으로부터 생기는 복수적 ‘유령’으로. 여기에서는 시스템 전체를 상정할 수 없는 이상, 더 이상 괴델 문제도 생기지 않는다. 텍스트 전체를 읽을 수 없는 이상, 더 이상 틀의 은유로 이끌어진 탈구축적 독해가 불가능하듯이 말이다.


(3) 들뢰즈 그리고 가타리


질 들뢰즈는 1969년 『의미의 논리학』을 출판했다. ‘이중의 계열’과 그 ‘공명 관계’를 주제로 하는 이 저작은 실재성과 잠재성 사이의 매개에 대한 논의로 이해될 수 있다. “두 가지 계열의 상대적 전위 및 한쪽의 다른 쪽으로의 과잉을 보증하는 것은 계열의 어떤 항으로도, 그리고 항 사이의 어떤 관계로도 환원될 수 없는 매우 특수하고 역설적인 하나의 심급une instance이다.” (이정우 譯, p.103-104) 여기서 잠재성, 즉 초월론적 비세계는 역설적인 한 대상의 자기차이적 운동에 의해 가능하다고 간주된다.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의 ‘진리=섬망譫妄=병甁의 발생현장’과 대비되는 들뢰즈의 ‘병甁의 수집활동’은 필연적으로 수집의 기점, 어떤 특권적 시니피앙의 확정을 요청한다. 따라서 ‘진리=병’, 즉 비세계적이고 초월론적 세계로 향하는 철학의 병은 거기서 특권적인 시니피앙에 의해 해석되고 철학사가 된다.

이러한 들뢰즈의 부정신학성이 불과 3년 뒤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부정신학 비판으로 전환된 데에는 분명 펠릭스 가타리와의 교류, 그의 이론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이 틀림없다. 이 단락에서는 들뢰즈와 가타리 각 개인의 대표 저술과 첫 번째 공저 『안티 오이디푸스』를 소개할 것이다.


『시네마』


들뢰즈는 “영화의 상태는 상상적 참여가 아닌, 영화관에서 빠져나왔을 때 내리고 있는 비와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시네마 2』:333). 여기서 비는 은유가 아니라 실재다. 피부를 적시는 비처럼 영화는 실제 현실이라는 뜻이다. ‘영화는 곧 현실’이다. 『시네마』는 이 명제를 증명하려는 시도다.

‘스크린은 뇌다’라는 명제는 들뢰즈가 영화론을 가동시키는 위상학적 출발점이다. 들뢰즈의 영화론은 뇌가 스크린처럼 작동한다는 전제에서 시작된다. 스크린 위의 이미지가 곧 우리의 사유-이미지라는 것이다. 스크린 위로 흐르는 모든 들뢰즈의 이미지 개념은 베르그송의 정의를 따른다. 베르그송은 자신만의 이미지론을 통해 실재론과 관념론 사이에 벌어진 철학사의 오랜 대립을 종식시켰다. ‘직접 주어진 이미지’만 인정하는 베르그송의 이미지 개념이 들뢰즈의 『시네마』를 전개하는 한 축이 된다.


들뢰즈의 주된 철학적 개념 중 ‘현실적인 것’과 ‘잠재적인 것’이 있다. 『시네마』는 현실적인 것과 잠재적인 것의 대립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한다.

예컨대 우리가 극장에서 관람하게 되는 영화가 현실성의 층위에 있는 것이라면, 그 영화를 다르게 만들 수 있었던 수많은 다른 선택지들이 잠재성의 층위에 있는 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들뢰즈는 궁극적으로 ‘어떤 영화를 제작하는 정당한 방식이나 감상하는 본질적 방식은 없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잠재성의 층위를 우선 인정해야 현실화된 영화를 제대로 평가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들뢰즈는 영화를 구성하는 어떤 본질이 있다고 주장했던 ‘기호학’이나 ‘정신분석학’, ‘이데올로기적 장치론’(즉 기존 영화 이론서의 주요 목차들)을 비판하면서, 영화 이론을 일종의 ‘정보체계’로 읽을 것을 권한다(『시네마 1』:30). 영화적 의미는 스크린을 지배하는 하나의 현실화된 본질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스크린에서 주어지는 잠재적 정보에 의해 의미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베르그송의 ‘역원뿔도식’은 이미지 작동 공간을 근거로 『시네마 1』의 운동-이미지와 『시네마-2』의 시간-이미지를 구분해 주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평면이 우리의 감각-운동sensori-motrice 도식이 접하는 공간 세계를 가리킨다면, 역원뿔을 시간을 가리킨다. 역원뿔이 들뢰즈의 ‘잠재적인 것’이라면, 바닥 평면의 첨점尖點에서 ‘현실적인 것’이 생겨난다. 현재의 평면과 대상의 정보가 포함된 역원뿔의 기억은 동시에 촉발되며, 이렇게 현실성과 잠재성은 식별 불가능한 지점에서 들뢰즈가 궁극적으로 제시하는 결정체-이미지가 된다.

역원뿔 도식의 바닥 부분은 들뢰즈의 ‘현실성’과 연결되고 역원뿔 부분은 ‘잠재성’과 연결된다. 이는 현실성이 한편으로는 점점 더 강화되어 지층화하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 반대 방향으로 탈주하면서 지속적으로 잠재성을 참고하여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 가는 들뢰즈의 철학을 한눈에 도식화한다. 운동-이미지로 대표되는 인간론과 시간-이미지로 대표되는 존재론은 양자 모두 세계(진리, 우주, 존재, 생명)에 대해 말하지만 전자가 인간을 중심에 둔 관점에 머문다면, 후자는 그것을 벗어나 인간조차 그 세계 속의 한 구성 요소로 그린다.

『시네마』의 변증법을 간단히 살펴보자. 첫 단계에서는 운동과 정지를 대립적으로 다룬다. 두 번째 단계에서는 운동과 정지가 다르지 않음을 보여 준다. 정지는 운동의 일시적 정지이고 운동은 정지를 통해서 스스로를 규정한다는 것이다. 세 번째 단계는 모든 것이 운동이라는 두 번째 단계의 결론에 따라 정지조차 운동의 관점에서 재정립될 것을 요구한다. 그것은 운동하는 정지, 부동의 운동을 강조한다.

첫 단계에서는 잠재성과 현실성의 뚜렷한 대립을 다룬다. 두 번째 단계에서 존재의 일의성에 따라 현실성과 잠재성이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세 번째 단계에서는 현실성의 층위를 잠재화하는 역설을 고민한다. 즉 잠재적인 것의 우위라는 입장에서 첫 단계의 대립을 해소한다. 현실성의 층위에서 사는 우리들에게 잠재적인 것은 거의 실재적인 것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현실태와 잠재태의 대립을 해소시키는 방법으로 탈영토화, 탈중심화 등의 개념을 도출한다.


『분열분석적 지도작성법』


우리들의 주체성이나 준거는 각자의 가치나 사회 정세 안에서 형성된다. 권력(토지, 신체 ~ 외연적용법과 의미의 정확함, 외부 준거의 좌표축)이나 지식(자본 경제적인 생산 수단의 지배의 준거틀 ~ 탈영역)과 같은 바깥에서 안에서 형성되는 것으로부터, 자기 준거에 따른 다양한 연쇄(아장스망Agencement) 속에서 과정은 착종되고 인간 실재를 유한성 안에서 투묘投錨하는 목소리에 의해 영역이 유동적으로 작동한다. ~다양한 정보가 자기를 규정하는 듯, 혹은 규정하지 않는 듯 그 정보가 차지하는 영역은 무한한 과정에 입각하고 있다.

주체성이 새로운 ‘기계에의 의존’을 강화해 가는 것이 가타리의 문제의식이다. 이러한 주체성은 인간이 기계와 새로운 상호적인 연결을 만들어 가는 것에 의해 만들어지는 게 가타리의 통찰이다. 그리고 가타리는 기계에 진입하는 것이 결코 새로운 행위가 아니라 이미 중세에서도 ‘수도사 기계’가 있어 거기에 사람들이 진입했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분열분석적 지도작성법』에서 가타리의 논의에 접촉하자면 지금 사상계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문화적 지위cultural status의 문제의식과 연결점이 있단 걸 느낄 수 있다. 그것은 주체성 혹은 아이덴티티가 무언가의 중핵과 같은 것을 기반으로 하여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인식이다. 가타리가 기계라 읽는 것은 문화적 지위에 따라 ‘매체 문화media culture’라 불리는 것과 이어져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 경우 ‘culture’는 ‘문화’의 의미를 거의 상실하고, ‘환경’을 의미하게 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주체성은 사전에 부여되어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은 형성되고 ‘생산’되는 것이다. 현대에서는 ‘정보・전자전달적 주체성의 생산’이 요구된다. 또 현대의 주체성은 새로운 환경 안에서 생산된다. 따라서 ‘기계 환경과 자연 환경과의 관계에서 인간을 근본적으로 다시 위치 짓는’ 것이 필요하게 된다.

현대는 ‘지구 규모의 정보화의 시대’이며 거기선 대중 매체와 원격 통신의 발달, 신소재의 다양화, 마이크로프로세서에 의한 데이터 처리, 생물공학의 발달이란 특징을 인정할 수 있다. (가타리는 늘 ‘4’라는 숫자에 집착한다. 여기서도 네 가지 특징이 열거됐지만 그것은 전통적인 이원론에 대한 비판의 상징적인 수이다.)

그러한 다양한 요소가 인간과 환경과의 새로운 관계의 설정을 요구한다. 가타리가 말하는 ‘지도’란 다름 아닌 주체성이 생산되는 환경으로서의 장이다. 가타리의 새로운 주체의 생산 환경을 고찰하기 전에 지금까지 주체성의 생산이 어떻게 생각되어 왔는지에 대해 서술하고 그를 비판한다. 비판의 대상은 우선 무엇보다도 정신분석적 주체성의 생산이다. 기본적으로 프로이트, 라캉의 주체성의 생산이 환원주의라는 게 비판의 골자이다. 간단히 말하면 그들이 말하는 주체성은 유아의 체험에 환원되는 것에 지나지 않다. 프로이트의 구약 성서, 라캉의 신약 성서를 성전으로 떠받드는 정신분석이 주체성의 환원주의라는 비판이다.


가타리가 말하는 기계는 통상적인 의미의 기계가 아니다. “…다만 그 기계는 최근의 SF가 상상하는 것과 같은 전제적인 거대 기계가 아니고, 분말 상태에 분자적인 기계 형상 다양체로서의 기계이다.” “추상적・탈영역적・비물체적이라 규정된 기계”이다. 가타리는 기계와 구조를 대립시키고 있다. ‘구조는 외부에서 결정되며 수동적’이다.

사르트르Jean-Paul Sartre가 주장한 존재와 무의 이원론도 비판의 대상이 된다. 사르트르의 이원론에 대해 가타리는 ‘한없이 다양한 갖가지 실존적 강도强度’라는 사고를 드러낸다. 또한 ‘연장적이지 않고 강도적인 관계가 문제’, 강도에 의해 존재하는 것은 ‘기계’가 되지만 여기서 기계는 물론 통상적 의미의 기계가 아닌 ‘자기질서화 되어 사물의 시스템 안으로 강도적인 차이화가 삽입되고 있는’ 것이 아니면 안 된다.

‘강도’라는 개념은 지극히 난해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이질적인 것이 침투한다는 것만이 아니라 ‘이질 생성의 작동’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면 안 된다. 이러한 기계가 어떠한 것인지를 더욱 더 전개한 것이 지도작성법의 세 가지 차원이다. 그것은 ‘배타적임과 동시에 공존할 수 있는 관계의 영역’이며, ‘미적・종교적 비非의미 형성의 영역’이다. 그것은 로고스의 논리가 무효가 되는 세계이며 ‘두 개의 모순하는 명제’가 대립하는 것이 아니게 되는 지도이다.

실존주의・구조주의의 이원론에 대해 가타리가 제시하는 ‘기계’의 개념은 말할 것도 없이 다원적・다차원적이다. 거기서 행해지는 주체성의 생산은 당연한 일이지만 ‘본질적이자 중심적인 과정process’이 된다. 정신분석에 가해진 비판에서도 가타리는 ‘정신분석이 기능하는 표현의 구성 요소를 복수화하고 차이화할’ 것을 요구한다. 


‘리틀 네로와 실존적 정동情動’의 장에서 ‘우리들은 예룸슬레우Louis Hjelmslev에 의해, 실질과 소재의 차이성에 의해 지탱되는 표현형식과 내용 형식 사이의 가역성을 알게 됐다. 그러나 바흐친Михаил Михайлович Бахтин으로부터는 언표 작용의 중첩, 그 대위법polyphony, 그 다중심多中心성을 읽어내는 것을 배웠다.’ ‘표현 형성소素의 형식이 내용 형성소의 형식과 동일한 것임을 조정措定하는 데 데 다다른 예룸슬레우의 분석으로부터 일체의 귀결을 끌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 이처럼 내용과 표현이 교차하는 데 탈영역화된 동일한 기계 상태의 것이 있음을 긍정함으로써 모든 구조주의적 이원론은 완전히 무효가 된다.’ 표현과 내용이 교차한다는 게 예룸슬레우의 언어 이론에서 가타리가 도출한 중요한 논점이다.

정동이란 상호간에 힘이 걸린다는 의미이다. 능동이 수동을 낳고, 수동이 거듭 능동이 된다. 그 관계가 아장스망이며 기계이다. 이러한 장에서 생산되는 주체성은 전통적인 의미의 주체성과는 완전히 별개이다. ‘주체성은 왕성하게 활동을 하고 있어도 복원 불가능할 정도로 단편적이며 끊임없이 엇갈림을 생성하기’ 때문이다.

주네Jean Genet의 문학을 접할 때 사유할 만한 ‘현실적인 것과 상상적인 것과 창조를 서로 분리된 심급에 두는 것이 아닌, 그들이 서로 생성하게 하는 무언가’ 말이다. 어쨌든 가타리가 말하는 기계는 리좀rhizome이며, 아장스망이며, 카오스모제Chaos mose이다.


『안티 오이디푸스』


들뢰즈와 가타리의 가치를 두드러지게 하는 것은 ‘인터넷과 같은 네트워크가 거대 스케일의 네트워크와 신체의 네트워크를 연계하는 것이며 그리고 신체들 사이에 네트워크를 연계한다’는 사실이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어떠한 ‘기질과 아이덴티티와 같은 것들’을 ‘근본적 여건으로서 내재하고 있는 기계들의 결과물로서 유출되는 속성’으로 이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태, 환경, 유출된 인식 모두는 서로를 가로질러 연계되어 무엇인가로 접근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모든 다른 것으로 확대되어 어떠한 정치적이고 윤리적인 차원을 사유에 부여하는 것이다. 자본주의와 정신분열증에 관한 사유는 때때로 과학적으로 정보를 제공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광적이고 관념적으로 여겨진다. 시적인 이미지에 붙들려 있거나 무모한 추측들을 생산한다. 그러나 더욱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은 그것이 개념적이라는 것이다. 개념들에 관한 매우 지속적이고 정력적인 표현이다. 그것은 결코 관념이 아니다. 때때로 플라톤의 초월적 이데아로 오인되는 그것은 분명한 개념들이며, 어떠한 풍요로운 것으로 증명되었으며, 어떠한 소모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세계에서 신체는 배설하고 성교하는 것이다. 그것은 배설하고 성교하는 것이다. 그러한 인간의 신체는 생산과 소비의 과정들과 연관되어 있다. 그리고 외부와 마찬가지로 내부를 지니고 있다. 오히려 내부와 외부는 서로 분간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다종다양한 방식으로 그 자체로 내적으로 연관되어 있으며 그 외부와도 연결되어 있다.

가장 기본적인 상태에서 그것은 ‘기관 없는 신체’이다. 기관 없는 신체는 들뢰즈와 가타리가 많은 글에서 재영토화하고 있는 그들의 관념적인 개념들을 지칭하는 어휘이다. 그러나 그 기원은 매우 현실적인 사례에서 얻어졌다. 그것은 『잔혹의 극장Theatre of Cruelty』이라는, 극작가 아르또Antonin Artaud(1895-1948)가 말년 정신 요양소에서 투병 중 집필한 작품에서 나온 말이다. ‘기관보다 더 쓸모없는 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당신이 그를 기관 없는 신체로 만들고자 했을 때, 당신은 그를 모든 자동적인 반작용들로부터 해방시키고 진정한 자유로 돌려놓을 것이다.’ (Artaud, 1947, 571) 그러므로 기관 없는 신체는 여기에서 이상화된 상태로서 표현된다. 그러한 상태는 어떠한 것이라도 가능해지는 상태이다. 더욱 상식적인 표현을 하자면, 그러한 신체는 혼수상태이며, 가혹한 정신병적 혼란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어떠한 잃어버린 양의 상태이다. 무리와 멀리 떨어지고 어떠한 정치적 동기도 없고 자아도 존재하지 않는 탈영토화되고 탈사회화된 양이다. 이러한 혼란의 순간에, 양은 그곳에서 조상대대로 물려져 왔던 유산의 부분으로서 그리고 양육된 부분으로서 가져왔던 습관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아르또의 경우 그보다 더 멀리 나아갔다. 그는 자신의 정신적인 파괴의 시기 동안 아무런 형상과 형식도 가지지 못한 그 자신을 바로 그곳에서 그러한 시간에 발견한 것이다. 그는 세계 속에 존재하고 있다는 자신의 감각을 구축하는 사회화된 사람들의 집단으로부터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자신의 내부에서 자신에 대한 감각을 구축하는 욕망하는 기계들의 무리로부터 멀어져 있었다. 그의 아이덴티티는 사라지고 없었던 것이다.

기관 없는 신체에 관한 이러한 이해, 상호작용과 응답들 혹은 개념들에 의하여 구축되지 않는, 어떠한 긴장하고 있는 신체는 들뢰즈와 가타리에 의해 채택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 자체로 탈영토화된 것으로서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모든 습득된 관습과 아이덴티티가 제거된 상태로서 표현되는 유동적인 개념이 된다.

‘모든 기관 없는 신체는 스피노자의 후예이다.’ 기관 없는 신체는 순수한 내재성이며, 그 안에 외부로부터 부과되어진 어떠한 개념적인 장치도 가지고 있지 않은 내재성의 국면이며, 실질적으로 우리가 될 수 있는 모든 것이다. 기관 없는 신체는 모든 현실적 대안들을 넘어서 그리고 그 경계 이전에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는 현실적으로 전혀 그렇지 못한 상태에 있다. 그러한 본질을 현실화하기 위하여 우리는 그것을 아무런 개념이 없는 가능성으로 그리고 기관 없는 신체로 어떠한 단계들을 개념화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그렇게 함으로써 그것이 유지되는 한, 긴장된 상태에서 분리하여 포획하는 것이다.


<우리는 무엇으로 앓고 있을까? 과정으로서의 분열증 자체로 앓고 있을까? 아니면 우리가 빠져든 맹렬한 신경증화로 앓고 있을까? 이를 위해 정신분석은 오이디푸스와 거세라는 새로운 수단을 발명하지 않았던가. 우리는 과정으로서의 분열증을 앓고 있을까? 아니면 이 과정이 공백에서 무한히 계속되어, 끔찍하게 악화되는 것으로 인해 앓고 있을까(임상 존재로서의 분열자의 생산)? 아니면 과정과 목표의 혼동으로 앓고 있을까(인공적 변태의 생산)? 또 아니면 과정의 때 이른 중단으로 앓고 있을까(정신분석에 의한 신경증자의 생산)? 우리를 오이디푸스와 거세라는 십자가로 측정하기 위해, 또는 이 십자가로 우리가 측정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우리는 억지로 오이디푸스와 거세에 직면하여 이것들에 내몰린다. 하지만 어쨌든 나쁜 일이 생겼고, 치료는 오이디푸스화의 길을 선택했는데, 이 길에는 온통 오물이 뿌려져 있었다. 차라리 분열증화의 길을 선택했더라면 우리는 치료에서 치유되었을 텐데.> 『안티 오이디푸스』(김재인 譯, p.126) 


들뢰즈와 가타리가 만난 건 1969년 6월이었다. 한 달 후 들뢰즈는 가타리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낸다. “어쨌든 정신병의 형태는 반드시 일반 대중에게 전달되는 방식으로 오이디푸스적인 삼각형 구조화를 거쳐야 발생하는 것은 아니지요. 이 점이 우선 가장 중요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 다만 정신분석의 <가족주의>, 엄마・아빠 도식으로부터 탈출하는 건 어렵습니다(귀하가 읽은 저의 텍스트는 여지없이 그에 종속된 것입니다). … 그러므로 예를 들어 정신분석에서 사회=경제적 시스템이 어떻게 <직접> 작용할 수 있는지를 명확히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물론 이 메커니즘이 <있는 그대로> 작용한다(예를 들어 잉여 가치나 이윤율과 같이)고 말하고 싶은 게 아닙니다. 이건 더 복잡한 문제입니다. 일전에 귀하가 ‘광인은 단순히 우주론을 하는 것만이 아니라 정치경제학도 하고 있다.’고 했을 때 이 문제에 접근한 것입니다.”

대략적으로나마 두 사람의 공동작업의 방향이 나타나 있다. 이후 들뢰즈는 매일 아침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 가타리에게 보냈고, 아직 번듯한 저서 한 권 없던 가타리가 이를 차곡차곡 정리하여 『안티 오이디푸스』의 초고가 만들어진다. 이 초고에는 이미 ‘에크리튀르의 운동은 어떤 것도 지연시키는 분열증의 흐름이며 횡단적 사고를 발생시킨다.’는 테제와 더불어 독자적으로 여러 가지 분야에서 새로운 제 개념이 작동하고 있었다. 그것은 오이디푸스가 아닌 무엇이며, 코기토나 거세된 주체가 아닌 무엇이며, 시니피앙(의 연쇄와 전제)이 아닌 무엇이다. 무대에서 공장으로 나아가는 것이며, 구조(주체)에서 기계로 나아가는 것이며, 무의식이 생산의 장으로 변모하는 가운데 라캉 이론의 핵심 테제가 파내어져 붕괴되는 것이다.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지> 않는다.”

무의식 자체는 구조적이지도 인칭적이지도 않으며 그 자체가 현실적인 것이다. 즉 ‘불가능한 현실적인 것’이며 또한 그것의 생산이다. 그러므로 오이디푸스의 항쇄를 떼버리고 도처에서 욕망적 생산의 힘을 다시금 발견하고자 무의식의 영역도 역사적 영역도 분열증화함이 마땅하다.


마치며


본서 1장 <유령에 사로잡힌 철학>에 소개된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의 사례를 잠시 소개해 보겠다. 리오타르는 저서 『쟁이爭異』에서 아우슈비츠 학살에 대한 정치적 콘텍스트를 드러냈다.


<당시 유럽에서는 역사수정주의 담론, 즉 가스실에 대한 객관적 증거의 부재를 강조하여(가스실 경험자는 정의상 모두 죽었기 때문에 이것은 필연적이다) 유대인 학살이라는 사실 자체를 부인하는 담론의 힘이 확대되어 갔다. 리오타르는 이것에 저항하고 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역사수정주의자는 ‘측정가능’한 것만 인정한다. 그러나 아우슈비츠는 원래 측정가능한 사건이 아니다. 그러므로 수정주의자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본서 p.62


아우슈비츠의 기억은 기억불가능한 것의 기억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리오타르는 그렇게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철학은 그 불가능성을 다룬다. 이것은 데리다의 입장과 매우 닮아있다. “탈구축의 관심은 불가능한 것의 어떤 경험, 즉 타자의 경험이다.” 그러나 둘 사이엔 분명 결정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쟁이differend』의 논의를 좀 더 살펴보자. 고유명에는 단독성이 존재한다. 그것은 언어적 규정(확정기술)으로 회수될 수 없다. 리오타르는 바로 이 단독성에서 기억불가능한 것(쟁이)이 기억되는 역설적인 장을 발견한다. “쟁이는 하나의 잘못에서 생겨나고 침묵에 의해 신호가 보내진다. 그 침묵은 많은 문장이 그 사건에 의해 고통당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감정이란 그 고통을 말한다.” 즉 여기에서 기억불가능한 것의 기억, ‘사건’으로의 소행은 아우슈비츠라는 고유명의 절대성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생각되고 있다. 리오타르의 논의는 아우슈비츠라는 기원적 외상, 고유명과 그 전달 위에서 구성된다.

그러나 데리다는 ‘기억불가능한 것의 기억’에서 상기되는 것은 고유명의 절대성이 아니라 그런 절대성을 확산시키는(시킬지도 모르는) 위상이다. 모든 일회적인 ‘사건’은 날짜의 구조 그 자체에 의해 그 일회성을 위협하는 반복가능성 즉 복수성(망령적 재래)에 항상 노출되어 있다. 데리다의 사고가 관심을 갖는 것은 바로 이 반복가능성을 염두에 둔 일회성에 대해서이다. 이런 관점에서 리오타르의 논의는 역으로 일회성이 파악할 수 있는 사후적 구조를 무시하고, 그것을 ‘일찍이 있었던 것’으로서 실체화한 것이다. 즉 그의 ‘감정’은 산종을 다의성으로 실체화하고 있으며, 이는 데리다가 평생에 걸쳐 경계한 동일성, 로고스의 함정에 빠지는 것이다.

어떤 사건에 대한 어떤 ‘기억’, 보다 정확히는 기억의 부재는 그 위에 강고한 공동체를 조직할 수 있다. 리오타르는 앞서 서술한 대로 아우슈비츠의 기억을 역사수정주의에서 구출하기 위해, 바꿔 말하면 특정한 공동체에 의한 해석(언어게임에서의 북새통)을 피하기 위해 『쟁이』의 논의를 수립했다. 그러나 만약 그 논의가 ‘아우슈비츠’라는 외상을 절대화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레벨에서 하나의 폐쇄적 공동체를 낳는 것이 된다.


동일성의 함정을 순간순간 의식하며 지적 긴장을 유지하는 게 굉장히 고통스러운 일임을 잘 안다. 그러나 언어・지식의 권력화, 기억(부재)에 대한 폐쇄적 공동체화의 폐해를 잘 알고 있던 데리다를 비롯한 20세기 철학자들은 평생을 걸고 그를 경계해 왔다.

이는 기독교 복음주의자들이나 로고스 중심주의자들이 말 몇 마디로 폄하하고 평가 절하할 게 결코 아니다. 무슨 담론이든 자기 안으로 끌어들여 편입시키고 마는 오늘날의 세계에서 우리 모두가 그 무엇에도(심지어 자기 자신에게도) 지배당하지 않기 위한 이정표의 존재를 담지하는 게 그들의 역할이었던 것이다.



참고 문헌


『存在論的、郵便的』東浩紀 著, 조영일 驛

『西洋哲学史』小川 仁志 著

『HOW TO READ 하이데거』마크 A. 래톨 著, 권순홍 譯

『존재와 시간』M.Heidegger 著, 소광희 譯

『ハイデッガーにおける「転回」についての予備的な輪郭づけの試み  ―― 『道標』におさめられた3つの論考を手がかりにして』 田鍋 良臣 著

『HOW TO READ 라캉』 S.Zizek 著, 박정수 譯

『슬라보예 지젝,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최영송 著

『포스트모더니즘』 신국원 著

『질 들뢰즈, 시네마』 최영송 著

みすず書房 ( https://www.msz.co.jp/news/topics/07514.html )

分裂分析的地図作成法 ( http://www.asahi-net.or.jp/~uv3k-kmgi/gatari.html#1 )

『Deleuze & Guattari』Andrew Ballantyne 著, 장정제・송규만 譯

『안티 오이디푸스』Deleuze & Guattari 著, 김재인 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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