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1일 서울 서초구의 한 골목길, 전동 킥보드 한 대에 올라탄 중학생 남녀가 지나가던 고등학생을 들이받는 사고가 있었다. SBS 보도에 따르면 가해 중학생 중 한 명의 혈중알코올농도는 면허정지 수준. 2인 탑승 금지도 이미 어겼고 안전장비, 착용했을 리 만무하다.
천만다행으로 피해 학생은 크게 다치지 않았지만, 어쩌면 이 사고는 ‘서막’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
나라가 앞장서서 헬게이트(지옥문)를 오픈, 대체 무슨 생각인지…
실제로 여기저기서 이 같은 우려가 쏟아지는 중이다. 지난 5월 국회에서 통과돼 오는 12월 10일이면 시행되는 도로교통법 일부개정안이 원인. 개정안에 따르면 만 13살만 되면 전동 킥보드 등 개인형 이동장치(Personal Mobility, PM)를 면허 없이 이용할 수 있다. 속도 제한은 있지만 보호 장구 장착 의무는 없다.
초등학교를 갓 졸업한 어린 학생이, 헬멧도 안 쓴 채, 본인과 보행자 모두를 위태롭게 만드는 좌충우돌 질주를 벌여도, 제재할 근거가 없다는 말이다.
이는 이번 개정안이 전동 킥보드의 지위를 도로교통법상 오토바이와 유사한 ‘원동기장치 자전거’에서 그냥 ‘자전거’로 바꾸는 데 초점을 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음주 주행 적발 시 차량과 같은 처벌을 받던 게, 12월 10일부터는 자전거와 마찬가지로 범칙금 3만 원만 내면 되는 것이다.
여기에 이용 가능 나이도 대폭 낮췄고(16세→13세 이상) 이륜자동차 면허증과 안전장비의 필요성마저 모두 제거했다. 유례없는 수준의 ‘봉인해제’다.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하다. 사실 개정 전인 지금까지만 해도 사고는 차고 넘친다. 한국교통안전공단의 자료를 보면 2017년 117건이던 전동 킥보드 관련 사고 건수는 2018년 225건으로 두 배가 됐고, 지난해는 447건으로 급증했다.
사상자 역시 2017년과 2018년 각각 128명(사망 4명·부상 124명), 242명(사망 4명·부상 238명)에서 작년 481명(사망 8명·부상 473명)으로 증가했다. 당장 지난 10월만 해도 전동 킥보드 탑승자의 사망 사고 보도가 3건이나 됐다.
이유는 간단하다. 킥보드 이용량 자체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한국스마트이모빌리티협회(KEMA)에 따르면 2017년 7만 3,800대 규모였던 국내 개인형 이동장치 판매 대수는 지난해에는 2배 이상 증가해 16만 4,200대가 됐다. 2022년이면 20만 대를 넘어설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공유형 전동 킥보드의 확산세도 만만치 않은 추세. 2018년 150대가량이던 서울 내 기기 수가 올해는 무려 3만 5,850여 대로 늘었다. 거리 곳곳 보이지 않는 데가 없을 정도다. 편의성도 편의성이지만, 공유경제 개념이 집약된 사업인 양 정책 수혜를 200% 입었다는 평가다.
규모가 커졌고 이에 따른 사고 건수 증가도 눈에 두드러지면, 규제로 테두리를 둘러 문제의 확률을 통제하는 게 상식이다. 그런데 법은 정반대로 갔다. 킥보드 제조업체들과 이해관계에 놓인 게 아니냐는 의심이 차라리 더 상식적이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전동 킥보드에 위험 날개를 선사한 도로교통법 개정안은 지난 5월 홍의락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 윤재옥 국민의힘 의원, 이찬열 국민의힘 전 의원이 대표 발의한 관련 법안 3건이 통합돼 만들어졌다. 20대 국회 마지막 본회의가 열린 5월 20일 184명이 투표에 참여, 183명이 찬성해 의결됐다.
정부도 힘을 썼다. 앞서 3월 대통령 직속인 4차산업혁명위원회는 ‘제5차 규제·제도혁신 해커톤’을 개최, 업계 관계자들을 불러 열띤 토론을 펼쳤다. 이때 전동 킥보드 등 개인형 이동장치의 자전거화를 위한 규제 완화 방안이 도출됐고, 관련 법안 통과에 힘을 모으기로 했던 것.
갈 길을 미리 정해놓고는 다른 길은 거들떠도 안 본 느낌이다.
실제로 최근 JTBC 보도에 따르면 당시 개정안을 의결한 의원들이 전동 킥보드를 타본 경험이 없음은 물론, 자전거와의 차이를 모르는 이도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문제의 소지가 있는 사안을 문제의식 없이 맞이한 꼴이다.
이렇듯 모르는 분야임에도 필드 한 번 안 나가보고 추진력만 귀신같이 발휘하는 걸 우리는 ‘탁상행정’이라 일컫는다. 가공된 청사진에 취한 나머지 검증도 않는 것. 이번 경우 신 비즈니스 모델 발굴 같은 성과에의 욕망, 나아가 이 새로운 탈것이 4차 산업혁명을 앞당길 것만 같은 환상에 집단적으로 매몰됐던 건 아닐까.
무지의 소산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최근 경찰청은 규제가 풀리는 12월 10일부터 전동 킥보드 이용자가 급증할 것을 우려, 보도자료를 내고 안전수칙을 지켜달라고 당부했다. ▲가능하면 자전거도로로 통행 ▲자전거도로가 없는 곳에서는 도로 우측 가장자리 통행 ▲자전거용 인명 보호 장구 착용 ▲음주운전 시 범칙금 3만원 ▲야간 통행 시 등화장치를 켜거나 발광 장치 착용 등이다.
보행자를 다치게 하면 중과실 사고에 해당, 보험·합의 여부와 무관하게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2천만 원 이내 벌금에 처한다고도 전했다.
단, 오토바이조차 인도 위를 당연한 듯 횡행하는 보행 시국에 킥보드 타는 이가 조심조심, 인도 주행을 ‘지양’해줄지는 의문. 촉법소년에 해당하는 13살이 중과실 사고를 내면 또 어떻게 처벌할 건가. 무엇보다, 애초에 없었어야 할 피해들이 아닌가?
문제의 근원, 개정안을 다시 개정하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다. 여론이 워낙 싸늘해서일까. 새 개정안들은 속속 발의 중이다. 보호 장구와 면허의 필수화, 운전 가능 연령을 다시 만 16세 이상으로 올리고 제한속도를 20km로 낮추는 등의 내용이다.
모르는 건 잘못이 아니다. 단, 모르면서 밀어붙인 건 명백한 과오다. 그것도 거금의 혈세가 쓰이는 자리에서. 답은 나왔다. 우선 규제를 하루 빨리 강화-적용하되, 상식선을 넘어서는 수준의 법안이 어떻게 브레이크 한 번 없이 여기까지 왔는지 복기와 반성과 책임도 뒤따라야 한다.
중요한 결정을 할 때는 이런저런 검토를 다각도로 해주길 바라며, 이는 우리의 ‘바람’ 이전에 ‘기본’이어야 했다는 점도 잊지 말자. ⓒ erazerh
* 이 글은 여기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