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질구레하게 명멸하다 꺼져가는 것들에 부쳐
감독: 벨라 타르(Bela Tarr)
∨ 헝가리의 대평원을 배경으로 한 7시간 18분짜리 영화.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의 동명 소설이 원작
벨라 타르 감독의 영화를 보다 보면, 분명 작은 마을 한 곳과 몇몇 사람만 나오는데도 마치 우주 저편 어딘가를 목격하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앞서 본 <토리노의 말>(2012)에 이어 <사탄탱고>(1994)도 이런 식이다. 오히려 더하다. 왜?
일단 <사탄탱고>에서는 7시간 18분의 러닝 타임 내내 영화적 사건이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영화라는 규격이 담보하는 최소한의 운동성과 이에 동반된 디폴트 값 수준의 기대마저 사뿐히 즈려 밟는다. 말이 7시간이지 상업영화 사상 3번째로 긴 438분 동안 이러는데, 이건 참선 강요에 가깝지 않은가. 지금 보고 있는 게 이 세상 콘텐츠가 아니라는 각성. 이 낯섦을 소화하기 위해서는 보다 거대한 이해의 틀, 즉 우주적 관념이 필요하겠다 싶다.
이를테면 행성과 그다음 행성과 또 그다음 행성에서의 어떤 이벤트들을 찍고 연결해 드러내는 게 일반 영화 연출의 구조라면, <사탄탱고>는 그 별들에 도무지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행성과 행성 사이, 무한히 넓고 깊은 암흑 구간을 훑기만 하는 모양새. 그 침묵의 시간을 함께 견디고 있음을 감지하는 것 외에 내가 이 작품을 구조적으로 이해할 방법은 없다.
<사탄탱고>의 7시간, 그 면면을 보자. 단 한 번의 번뜩이는 순간도 맞이한 적 없을 너절한 사물-풍경, 무능과 무기력이 DNA에 새겨진 듯한 사람들, 삶의 다음 챕터로 넘어갈 의지와 이유의 완전 부재, 그 틈으로 스며든 잡스러운 술수와 미혹, 따위가 흑백의 롱테이크로 이어진다. 교회에서 울려 퍼진 종소리는 가짜며, 마을의 시간은 반복을 반복한다. 애초에 드러낼 가치가 없었으므로 아무도 카메라에 담지 않았던 그런 것들.
그러니까 이건 7시간이 아니라 700시간으로 늘릴 수도 있었던, 하찮지만 영겁에 가까운 연쇄 소멸들의 축약본인 셈이다. 그렇다. 축약. 벨라 타르는 군상들의 넋 나간 얼굴 클로즈업만으로도 수십 시간은 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물론 그랬어도 별다른 위화감은 없었을 거다.(다시 말하지만 <사탄탱고>의 숏들은 이미 우주의 암흑과 닮았다)
대신 최종 숏에서 벨라 타르는 관찰자 역할을 해온 알코올 중독자 의사로 하여금 집안 창문에 나무를 대고 못을 박아 모든 빛을 차단케 만든다. 보이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종의 '액자'로서의 창문을 비가시적이게 만듦으로써, 세계에 더는 볼 게 남지 않았음을 선언하는 셈이다. 멸망의 엔딩. 단, 이 멸망은 '결과'가 아니라 '상태'적 속성을 갖는다. 별들은 볼품없고, 이벤트 따위를 기다리기에 우주는 압도적으로 지루하다는 현재진행형 적막감. 7시간 18분마저 '맛보기' 수준으로 찌그러뜨리는 영겁의 무엇.
이렇게 보니 엔딩의 달인, 친절한 벨라씨. 혹시 감상 전 러닝 타임이 7시간이나 된다며 툴툴거렸다면 불만은 고이 접어두자. 우리는 인류사를 빼곡하게 메워왔을 층층의 시시함, 그 일부를 우연히 뚫린 구멍을 통해 스쳐 지나듯 만났을 뿐이다.
그렇게 영화는, 카메라는 눈을 감았다. 단, 보든 말든 시간은 흐른다. 이제 <사탄탱고>가 만들어진 지도 30년이 다 됐다. 그사이 우리는, 나는, 당신은 찬란했나? 찬란한 적이 있었던가. 애초에 찬란이란 게 존재는 하는가. 뭐, 다 괜찮다. 어차피 전부 다 자질구레하게 명멸하다 꺼져갈 거니까. 그게 영화, 우주, 우주가 품은 모든 것들의 숙명이다.
물론 영화도 이 글도, 목적은 위로가 아니라 냉소다. 자조(自嘲)인 것이다. ⓒ erazerh
▲영화 공식 소개 = 헝가리의 대평원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 어딜 보나 지평선뿐인 이곳에서 주민들은 띄엄띄엄 멀리 떨어져 살아간다. 기계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살아온 이들은 이 마을을 벗어나고 싶다는 강한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
이를 위해 그들은 다른 이들을 상대로 한 도둑질과 속임수의 환상 속에서 살아간다. 그러나 자신감이 부족한 그들은 이 초라한 해결책에도 동요하게 되고 결국 계획을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만다. 사실 그들이 기다리는 건 자신들을 이끌고 구원해줄 메시아, 지난 과오를 사면해 줄 구세주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