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razerh May 24. 2024

엔딩에서 왜 그랬어요? 진짜 이유를 말해봐요

[마더]와 [헤어질 결심]의 그녀들에게

※ 『최종 S의 비밀』은 영화(들)의 마지막 숏(Shot), 신(Scene) 혹은 시퀀스(Sequence)에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이에 <마더>와 <헤어질 결심>의 결말 등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



영화의 일반적 엔딩, 주인공을 비롯한 주요 인물들은 자신의 최종 지위와 상태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악을 응징했거나 수수께끼는 모두 풀렸어! 했거나 비장한 최후를 맞았거나 혹은 예측을 초과한 경악스러운 결말에서조차 주인공은 '자아전시'를 해댄다. 슈퍼히어로 무비에서 최종 승자가 건네는 농담과 <미스트>(2008)에서의 처참한 절규는, 안에 담은 정서는 다를지언정 영화의 스타일을 완성하며 관객한테 각인되겠다는 목표는 같은 셈이다.


그리고 여기 다른 유형의 엔딩들이 있다. 자신의 모습과 위치를 블러(blur) 처리하고 싶은 자들의 등장. 마지막 감정을 홍보하기는커녕 목구멍으로 삼키려는 듯, 최선을 다해 '숨는' 것이다. 자기변호를 두 번 세 번 해도 모자랄 최종장에서 드러내는 숨바꼭질의 욕망, 그들은 왜 숨는 걸까? 그것도 전에 없는 창조적 방법으로.




# 첫 번째 숨바꼭질 | 마더 - 역광


<마더>의 클로징 신(scene)


관광버스에 오른 도준 엄마가 멍하니 있기를 잠시, 자기 허벅지에 망각의 침을 놓는다. 이어지는 침묵의 카운트다운. 5, 4, 3, 2, 1. 심장이 뛰는 듯 외화면에서 사운드트랙이 둥둥 울리고 엄마는 자리에서 일어나 춤을 춘다. 슬슬 다른 사람들과 뒤섞이는 그녀, 무리와 구분되지 않겠다 싶더니 이내 그들과 한 몸이 된다. 카메라는 피사체를 잃고 방황한다. 격정적 댄스를 통한 관광버스와의 동기화. 영화 <마더>(2009, 감독 봉준호)의 클로징 신(scene)이다.


<마더>에는 충돌하는 두 세계가 있다. 하나는 봉준호 작품에 늘 등장해온 '부조리가 자연화된 사회구조'고, 다른 하나는 도준 엄마와 도준의 '어미-새끼 관계'다. 전작들이라면 ①후자(가족)를 잡아먹으려는 전자(구조)와 ②그 위압에 휘둘리지 않는 유체적 템포의 주인공들과 ③그 무덤덤함에 오히려 발가벗겨진, 구조의 후진성과 뻔뻔함이 두드러졌을 것이다. 봉준호 영화의 매력은 거기에 있었다.


예컨대 봉준호란 이름을 최초로 알린 단편 <지리멸렬>(1994)에서 위선자 3인이 TV 토론을 펼치는데, 그중 한 명 때문에 곤란을 겪은 신문배달원은 TV 속 그를 알아보지 못한다. 그저 소음공해, TV는 꺼질 뿐이다. 토론은 토론으로 평가받을 기회조차 부여받지 못하는 것. 봉준호의 인물들은 이처럼 세속적 위계에 붙들리지 않음으로써 위계의 조악함을 되레 더 잘 폭로하는 좌표를 종종 차지해왔다.


도준 엄마와 도준. <마더>


<마더>는 다르다. ①후자(가족)를 잡아먹으려는 전자(구조)는 나오지만, 도준 엄마가 그 부조리한 세계에 들러붙고 말았다. 봉준호가 '아들의 상징계 진입'이란 꿈을 가난한 엄마한테 미끼로 던졌는데 마더가 그걸 물어버린 형국. 그러니까 <가난 – 엄마의 아들 살해(미수) – 아들 지능 저하 – '바보' 소리에 대응 지시 – 아들의 '쌀떡녀' 아정 살해 – 엄마의 또 다른 살인>의 과정 안에서 엄마는 부조리의 일개 부품이 되고, 죄 없는 종팔에게 살인자 딱지가 머무르도록 만든다.


종으로 떨어진 자들이 횡으로 서로를 폐기하는 메커니즘. 불안은 영혼을 잠식했고, 매서운 최종 응시를 보낼 '송강호의 눈' 같은 장치는 이 세계에 더는 필요하지 않다. 게다가 그 죄들을 아들한테 들킨 엄마로서는 모든 게 발가벗겨졌다. 잊자. 내가 다 잊자. 망각을 위한 제의(祭儀). 관광버스에 오른 도준 엄마가 멍하니 있기를 잠시, 자기 허벅지에 침을 놓는다. 이어지는 침묵의 카운트다운. 5, 4, 3, 2, 1.


마더는 머더로써 임무를 완수했고, 종팔은 교도소 밖으로 영영 나올 수 없을 것이며, 비밀은 비밀이어야 한다. 이제 그녀(들)는 주체적 개인이 아니라 역광을 받는 불규칙한 윤곽 안의 무엇이 됐다. 꼭꼭 숨겠다는 주술의 완성. 가난을 잡아먹은 가난(들)은 이렇게 페이드아웃(fade-out) 한다.




# 두 번째 숨바꼭질 | 헤어질 결심 - 실종


<헤어질 결심>의 마지막. 서래는…


서래는 바다에 와서는 땅을 파고 들어앉는다. 이윽고 만조가 찾아오자 그녀는 모래로 물로 뒤덮이며, 묻힌 흔적도 없이 묻힌다. 뒤늦게 도착한 해준이 그녀 이름을 간절하게 불러보지만 두 사람은 영영 만날 수 없을 것이다. 광활한 바다를 앞에 두고 좁은 땅으로 파고드는 이 자연 밀실 자살은, 영화 <헤어질 결심>(2022, 감독 박찬욱)의 최종 시퀀스다.


<헤어질 결심>은 묘한 영화다. 초중반까지만 해도 이 작품이 분류될 자리는 거의 정해진 듯했다. 최근 남편을 잃은 젊은 여자(서래)와 그 여자를 맴도는 형사-남자(해준), 수사를 핑계 삼아 훔쳐보고 이끌리고. 단아한 팜므파탈과 말끔하지만 파멸할 형사, 로맨스거나 누아르거나 또는 둘 다거나. 기껏해야 박찬욱표 냉소가 곁들어진 파멸극 정도가 아니겠나, 싶을 때 어, 어? 마침내, 미결(未決). 영화는 분류표를 걷어차고 안갯속으로 침투한다.


영화의 경로는 서래가 스테레오타입에서 탈피할 때마다 조금씩 구부러진다. 그녀는 훔쳐보기 구도 안에 놓였고, 증거를 남기며, 사람을 이용하거나 심지어 죽이지만 팜므파탈 규격에 딱 끼워지지는 않는다. "내가 그렇게 나쁩니까?"는 악녀 딱지를 찢는 반격의 멘트다. 나아가 자신한테서 '독한 년'이 아닌 '몸이 꼿꼿한 사람'을 발견한 남자는 진심으로 끌어안기까지 한다. "붕괴 이전으로 돌아가요"는 느닷없이 도착한, 그녀만의 이별 통지다.


비련의 남주인공 해준. <헤어질 결심>


물론 스스로가 불쌍한 서래 씨는 여생을 교도소에서 보낼 생각이 없다. 도피의 공간인 바닷가 방문은 필연이었던 셈이다. 바닷가는 죽음을 장렬한 낭만으로 박제하고 싶을 때 곧잘 선정되는 영화적 장소다. <베니스에서의 죽음>(1971), <노킹 온 헤븐스 도어>(1997), <타임 투 리브>(2005), 심지어 박찬욱 본인의 <박쥐>(2009)에서도 그랬다. 하지만 지금 서래에게 필요한 건 낭만이 아닌 실용, 미결사건을 완성할 무대다. 그래서 바다에 와서는 땅을 파고 들어앉는다. 이윽고 만조가 찾아오자 그녀는 모래로 물로 뒤덮이며, 묻힌 흔적도 없이 묻힌다. 시신을 전시하고 쓸쓸함을 과시하던 관습에 안녕이 고해진다.


서래는 이 전무후무한 증발로써 그녀가 감당해야 할 수식어들을 모조리 따돌렸다. 살인 혐의와 행정상의 생사 증빙은 물론, 남편 잡아먹은 (중국)년 따위의 껍질도 벗어젖혔다. '시신' 딱지조차 달라붙지 않을 거다. 어쩌면 인간으로서 이 우주에서 사라지는 가장 완벽한 트릭. 이제 그녀는 오직 해준이 살아있는 동안의 어떤 상념으로만 남게 됐다. 로맨틱하지 않은 절통의 로맨스가 지금 막 시작될 참이다.


사랑이 어떻게 그래요. 사랑은 원래 그렇다. 늘 알 수 없는 무언가였으며 이별 엔딩은 필연이다. 박찬욱은 횡과 종, 시간과 자연이 뒤섞인 영원할 숨바꼭질 엔딩으로써, '설명할 수 없음'의 '설명'에 도달한다.




# 숨바꼭질이 남긴 것


"만약 현실이 아름답다면, 영화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 장 뤽 고다르


주인공이 마지막 좌표나 감정을 분명하게 전달하지 않았다고 해서 엔딩 자체가 흐려지는 건 아니다. 단지 전시 대신 감춤의 제스처, 그 바탕에 깔린 '존재의 현시를 끊어내려는 의지'를 우리가 만날 뿐이다. 이런 유의 클로징은 잘 정돈된 출구 지도를 제공하지는 않지만 전에 없던 길로 관객을 초대한다.


그래서 <마더>에서 엄마의 퇴장 뒤로 우리는 절규를 삼켜야 하는 몸들, 각각 '쌀떡녀'와 '그 새끼'로 호명되던 아정과 종팔의 쓸쓸한 비극성을 비로소 마주한다. <헤어진 결심>이 끝나면 불가해로 펄펄 끓지만 해결책도 섹스도 없는, 사랑의 진짜 '눈멂' 상태를 감지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한 편의 영화 끝에서 만나는 또 다른 길은, 종종 실재의 낯선 측면으로 연결되며 보는 이에게 곱씹을 거리를 제공한다. 영화 바깥에 생성된 나와 영화만의 시간. 영화가 존재하는 이유는, 이런 식으로 몇몇 영화에 의해 증명되고는 한다. 걸작, 유레카. ⓒ erazerh


매거진의 이전글 [라이트하우스] ‘현타’보다 선명한 미래는 없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