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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rgen Nov 10. 2020

시계

나의 물건들과 이야기 나누기 - 사적私的인, 지극히 사적私的인 대화 

(평소 말투를 그대로 사용한 말 글로서 비문이 많습니다. 대화를 완벽한 문어체로 하지 않으니까요. 이해해 주세요.)



시계야, 시계야.

난 아까부터 한참 동안 너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는데 너도 알고 있었니?

넌 누가 바라보건 말건 아랑곳없이 참 무표정한 것 같아. 냉정한 너!

네가 원망스러웠던 때가 많았어. 왜 항상 내가 너에게 맞춰줘야 하지? 네가 나한테 좀 맞춰주면 안돼? 어떤땐 세상이 무너지든 말든 네 보폭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네가 존경스럽기도 했지. 어쩜 그렇게 흔들리지 않니 너는?

너는 내가 평생을 너한테 발 맞추느라고 얼마나 애쓰고 살았는지 알아? 네 걸음에 맞추느라고 느린 내가 헐레벌떡 뛰어야 했고, 답답함에 가슴을 치며 느리게 느리게 숨을 고른 적도 있었지. 너한테 그게 정말 야속해.

내가 헐떡헐떡 숨가쁘게 쫓아가면 네가 좀 기다려주지. 내가 해찰부리느라 걸음이 더뎌지면 너도 좀 잠시 쉬어가도 되잖아.

난 너에게 맞추느라 정말 힘들었어. 주변환경에 눈썹 하나도 까딱하지 않는 네가 정말 얄미워. 그런데 한편으로는 네가 그렇게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어줘서 나의 오늘이 있는 것 같아 고마울 때도 있단다.

내가 원하는 대로 네가 나의 속도에 맞춰줬다면 나는 숨가쁘게 달리다가 심장마비를 일으켰을지도 몰라. 느려터진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한 채 그냥 주저앉았을지도 몰라. 그래도 네가 전혀 흔들림 없이 같은 속도를 유지하고 있어서 나는 숨가빠 죽지도 않았고, 게으름에 파묻히지도 않았어. 그래서 살짝 고맙기도 해. 많은 원망을 했었지만 사실은 고마워. 나를 지켜줬으니까. 지금도 나를 지키고 있으니까.


시계야, 너도 기억하니?

내가 어렸을 적에 우리집 대청마루에서 큰 키를 자랑하며 우뚝 서있었던 너의 할아버지 이야기 들은 적 있지? 내 키보다 컸었다니까. 나는 그 안에 들어갈 수가 없었지만 늑대를 피해서 숨어들어간 아기 염소가 몸을 가릴 수 있을 만큼 컸던 것 같아.

난 너의 할아버지인 그 시계가 좋았어. 밥을주면 씩씩하게 가다가 밥 기운이 떨어지면 슬슬 가다가 결국은 아예 멈춰서 쉬고 있었거든. 대청마루에 덩~덩~ 울리던 소리가 사흘 굶은 사람처럼 작은 소리로 딩~~딩~~거리면 오빠는 태엽을 끝까지 돌려서 다시 시계를 움직이게 했단다. 태업 감는 게 뭐 어려운 것도 아니잖아. 그냥 돌리면 되는건데. 그래도 어른들은 태엽을 조심해서 감아야 한다고 하셨어. 너무 힘껏 끝까지 쌩쌩 돌리면 태엽이 끊어질 수도 있다나.

너의 할아버지는 지금 너처럼 사람들의 감정이 어떠하든지 아랑곳 않고 똑 같은 발검음으로 걷지 않았단다. 매일매일 밥 주는 오빠가 깜빡 잊으면 너의 할아버지는 잠시 쉬어 가셨었지. 한 해가 다 지나가도록 너처럼 그렇게 변함없이 째깍거리지 않았다구,

그 시계도 엄마도 오빠도 다 먼 곳으로 가셨어. 이젠 내 곁에 없네. 나만 덩그러니 혼자 남아 너를 바라본다. 나의 시계를. 나의 시간을.


어느 때였던가, 네 얼굴에 불쑥 숫자만 떠오르던 시계가 있었어. 그 시계가 있기 전에는 네가 가리키는 숫자를 보고 몇 시다, 몇 분이다, 이런 것만 생각했었거든. 체육시간에 달리기를 할 때나 몇 초인가를 따졌지, 우리 생활은 그렇게 달리기 기록처럼 초까지 따지면서 살지 않았다구.

까만 바탕에 빨간 색 불빛으로 시각을 알려주는 그 시계가 나는 참 불편했단다. 눈 깜빡할 사이에 지나가는 그 시각의 앞과 뒤가 너무 궁금했어. 나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그 시각 이전에도 이후에도 존재하고 있는데, 그 시계는 존재의 연속성을 무시해버린 것이야. 잔인한 단절이지.

디지털 시계가 가리키는 숫자의 앞과 뒤가 어디론가 증발돼버린 것 같아서 불안해. 앞뒤도 없이 뚝 떨어져 있는 시간이라니. 마음이 허전하고 충족되지가 않아.


나는 아날로그 시계가 좋아. 내게 필요한 시각의 앞도 뒤도 다 한 눈에 볼 수 있잖아. 네가 한 바퀴 도는 모습을 들여다 보면서 내 생각도 연속적으로 돌아가잖아. 그래서 나는 아날로그 시계가 좋아.

어려서는 너의 속 모습이 정말 궁금했었지. 도대체 누가 네 속에 들어있어서 너를 움직이게 하는지 많이 궁금했었거든. 어른들 얘기로는 톱니바퀴가 있다고 하더라. 여러 개의 톱니바퀴가 맞물리면서 너를 움직이게 하는 거래. 네 안에 너를 움직이게 하는 기계가 있다, 그러나 라디오 안에는 사람이 안 들어있다, 이런 것을 알게 되었어.


어른들 이야기할 때 귀를 쫑긋 기울여보면 그 ‘톱니바퀴’라는 말을 시계 얘기가 아닐 때도 자주 사용하시더라구. 나는 귀동냥으로 알게 됐어. 아, 우리가 살아가는데는 톱니바퀴가 제대로 잘맞물려서 함께 돌아야 죽지 않는 거구나!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지나고 나는 이것저것 제법 많은 책들을 읽었잖아. 그때 어떤 책에서 갑자기 너의 톱니바퀴 이야기를 다시 만나게 되었단다. 어려서 귀동냥으로 듣던 세상의 톱니바퀴를 종이로 만든 책 속에서 다시 만난거야.

토마스 홉스라는 사람이 책을 썼는데 <시민에대하여> 이런 책이야. 그 책에 뭐라고 쓰여있는지 알아? 시민이 권리와 의무를 다하는 것이 시계의 톱니바퀴처럼 잘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야. 그렇지!

<리바이던>이라는 책에서 또 톱니바퀴가 나오는데, 홉스는 사람을 기계처럼 얘기했지. 심장은 태엽이다, 신경은 여러 가닥의 줄이고, 톱니바퀴는 관절이다, 이렇게. 너, 시계의톱니바퀴는 참 여러 곳에서 말이 오가곤 하는구나.


시계야, 네가 내는 규칙적인 소리를 음악으로만든 사람도 있단다. 아니 네 소리를 음악으로 만든 것은 아니고, 그 음악의 틱톡틱톡하는 리듬이 네 소리와 같아서 <시계 교향곡>이라고 했다지. 오스트리아의 요제프 하이든이라는 작곡가가 만든 교향곡 101번이 바로 <시계 교향곡>이야. 2악장에서 2/4박자를 피치카토로 튕기면 틱톡틱톡하는 소리가 마치 너의 소리 같다는 거야. 이렇게 쓰고 있으니 나도 뭔가 팅팅 튕겨보고 싶어지네. 글쓰는 자판을 그렇게 리듬감있게 두드려볼까.


왼쪽 우리집 벽시계,     오른쪽 며느리에게서 선물받은 남편의 회중시계


나는 잊지못할 너의 모습을 또 하나 간직하고 있어. 내가 어렸을 적에 외할아버지는 아주 멋장이셨어. 칼날처럼 주름진 바지를 입으신 양복 차림이셨지. 여름엔 파나마 모자를 쓰시고 치분을 바른 하얀 구두를 신으셨어. 그리곤 너의 할아버지쯤 되는 회중시계를 조끼 주머니에 넣고 다니셨단다. 묵직한 시계가 조끼 앞 주머니에 꼭맞게 들어갔어.

그건 이미 옛날 이야기잖아. 그런데 신기하게도 나는 그 시계를 다시 보게 되었단다. 아니 꼭 그 시계는 아니지만 회중시계를 만난거야. 큰 며느리가 결혼하고 유럽 여행을 갔는데 시아버지 선물로 회중시계를 사왔네. 내것은 아니지만 남편 것이니 내가 늘 볼 수 있지. 그때 외할아버지의 회중시계가 생각나더라.


시계야, 시계야.

너는 참 단순한 기계인데, 네가 품고 있는 숫자들은 그리 단순하지가 않구나. 네 안에 1분 1초가 들어있고, 한 두 시간이 들어있고, 그렇게 한 바퀴를 다 돌고도 멈추지 않고 계속 도는 너의 회전 속에 하루 이틀이 들어있고, 한달 두달, 한해 두해, 우주의 시간이 다 들어있구나.

내 생 이전에도 너는 그 시간들을 품고 있었고, 나의 생 이후에도 너는 여전히 그 시간들 속에 있겠지. 사람들은 ‘시간이 흐른다’라고 말해. 너는 그렇게 흐르는 것이니? 흘러가는 거야? 그래, 모래시계의 모래도 흐르고, 물시계의 물도 흐르지. 그래서 시간을 흐른다라고 표현한 건가? 아, 해시계는 돌아가는건데, 그럼 ‘시간이 돌아간다’는표현을 써도 될까…


너의 흐름을 막으려면 어찌하면 될까? 너를 지나온 길로 되돌려 놓으려면 어찌하면 좋을까?

<오디세이아>에 나오는 페넬로페처럼 꾀를 부려서 시간을 붙들어둘 수 있을까?

오디세우스가 트로이 전쟁에 나간 뒤 이십 년 동안 혼자 남겨진 페넬로페는 구혼자들을 물리치기 위해 시아버지 라에르테스의 수의를 다 짤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했어. 그리곤 낮에는 베를 짜고 밤이 되면 모두 풀어버리는 식으로 시간을 붙들어 두었지. 지금 세상에선 그런 방법이 통할 수가 없잖아.

나는 결국 너를 붙잡아두거나 되돌릴 수는 없겠구나. 없겠구나!


시간에 대한 안타까움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 누구나 다 시간을 생각하면 아쉽고 안타까운 기억이 있을거야.

그런 사람들 가운데 나는 쿠바 사람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라는 사람을 알고 있어. 예술가야. 동성애자인 그에게는 로스라는 애인이 있었는데 먼저 세상을 떠나버렸어. 그 후 토레스는 로스에 대한 그리움을 작품에 담아냈지. <무제 – 완벽한 연인>이라는 작품에 시계 네가 둘이나 등장한단다. 이게 미술작품이라니 좀 황당하지? 그래도 네가 등장한 것이니까 내가 잘 알려줄게.

https://www.moma.org/collection/works/81074

FelixGonzalez-Torres "Untitled" (Perfect Lovers) 1991

Clocks, paint on wall  35.6 x 71.2 x 7 cm


리움 미술관에도 전시되었던 작품이야. 똑같은 시계가 둘이지. 같은 모습으로 같은 시간을 함께 살아가는 연인을 의미한다고 하는구나. 겉으로는 완벽한 연인이지만 건전지의 소모에 차이가 생기면서 멈춰서는 시간은 달라질거야. 완벽한 연인도 결국엔 헤어짐이 있다는 얘기지. 함께 했던 시간들도 결국엔 헤어지는 애틋함을 두 개의 시계로 표현한거야.


밤이면 너의 움직임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 낮에도 너는 그런 소리를 낼텐데 다른 소리 때문에 안 들리는 거겠지. 소리가 안 들린다고 네가 멈춰있는 것은 아니지.

마찬가지로 나의 숨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멈춰있는 것은 아니야. 나는 계속 숨을 쉬고 있고, 특히 내 안의 생각이란 놈은 아무 소리도 안 내면서 움직이거든. 내 생각은 마라톤 코스를 단거리 100미터 선수처럼 달리기도 하고, 100미터를 시계 너의 속도와 똑같이 1분40초로 느리게 달리기도 한단다.

내가 품고있는 생각의 속도는 너의 속도와 무관하지만, 나의 심장은 너의 속도와 깊은 관계가 있어. 너보다 조금만 더 빠르면 되는데, 내 심장은 너의 곱절로 뛸 때가 있거든. 아, 이건 가만 놔두면 안돼. 제지할 수 있는 강력한 존재가 개입을 해야지. 그래서 약을 먹기 시작했다. 이젠 너의 속도보다 1.5배 정도를 유지하고 있어. 괜찮아. 조금만 더 느려지면 되니까.


나는 심장의 속도를 늦추기 위해 자주 소파에 편하게 눕곤 한단다. 소파에 누우면 바로 눈 앞의 벽에 네가 매달려 있지. 나는 가끔 너를 물끄러미 넋 놓고 바라본단다. 나의 시간들을 가늠하면서. 알 수 없는 나의 시간들을 시계야 너는 알고 있는거니?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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