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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젤리츠와 자크 라캉 - 뒤집힌 언어, 어긋난 이미지

by morgen

3부 언어와 기호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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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게오르크 바젤리츠와 자크 라캉 ― 뒤집힌 언어, 어긋난 이미지


거꾸로 선 세계

게오르크 바젤리츠의 그림 앞에 서면, 우리는 익숙한 ‘읽기’의 감각을 잃는다. 인물은 거꾸로 매달려 있고, 풍경은 발밑이 아니라 머리 위에 펼쳐진다.

바젤리츠는 “세상을 전복하려 한 것이 아니라 회화의 질서를 전복하려 했다”고 말한 바 있다. (1983년 테이트 갤러리 인터뷰, 전시 카달로그)

이 발언은 종종 “보는 습관을 전복한다”는 푸코적 사유와 연결되어 인용된다.
이미지를 뒤집음으로써 바젤리츠는 회화를 ‘읽는’ 우리의 습관을 무너뜨린다. 눈은 대상을 확인하려 하지만, 화면은 이를 거부한다. 그 앞에서 우리는 비로소 질문한다. “보는 것이란 무엇인가? 읽는 것이란 무엇인가?”


언어와 기호의 균열

라캉의 정신분석학은 인간이 언어와 기호 속에서 어떻게 규정되는지를 탐구했다. 그는 주체가 언어에 의해 형성되지만, 언어와 주체는 결코 일치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말은 언제나 의미를 빗겨가고, 기호는 결핍을 남긴다.

바젤리츠의 전도된 이미지는 바로 이 균열을 시각화한다. 인물의 형상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의미는 안정적으로 읽히지 않는다. 라캉이 말한 언어와 주체 사이의 어긋남처럼, 이미지와 의미 사이에도 틈이 있다. 바젤리츠는 그 틈을 화면 위에 드러내는 것이다.


뒤집힘이 던지는 질문

바젤리츠의 전도는 단순한 시각적 장난이 아니다. 우리가 언어와 기호를 얼마나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는지를 폭로한다. 그림이 거꾸로 되었을 뿐인데, 우리는 의미를 잃고 길을 헤맨다. 이는 곧 우리의 세계 인식이 얼마나 기호적 습관에 의존하는지를 보여준다.

라캉의 말처럼, 언어는 결코 우리를 완전히 대표하지 않는다. 언어의 틈에서 무의식이 흘러나오듯, 바젤리츠의 뒤집힌 그림은 이미지의 틈에서 불안과 새로운 의미를 흘려보낸다. 우리는 그 불안 속에서 새로운 질문을 듣는다. “보는 것이란 무엇인가, 말하는 것이란 무엇인가?”

바젤리츠1.JPG

2020년 1월 현대미술관, 뮌헨, 독일 ©morgen


그림 1. url을 클릭하여 이미지를 정당하게 감상하세요. 공정 이용(fair use) 작품입니다.

https://museum-ludwig.kulturelles-erbe-koeln.de/documents/obj/05010012/rba_d051454_01

바젤리츠 <거꾸로 된 숲> 1969. 캔버스에 유채, 250x190cm. 루드비히 뮤제움, 쾰른, 독일


바젤리츠는 숲을 통째로 뒤집어 그려냈다. 위로 뻗어야 할 나무들이 캔버스 아래로 쏟아지듯 매달려 있다. 완성된 뒤 단순히 전시에서 돌려 건 것이 아니라, 제작 과정 자체가 ‘전도(inversion)’의 행위였다. 보는 순간 관객은 숲을 ‘읽는 법’을 잃고 혼란에 빠진다.

바젤리츠의 첫 번째 역전 회화 작품으로, 묘사된 대상을 인식하지 못하도록 소재를 뒤집었다. 이러한 방식은 그림을 해석하는 우리의 능력을 교란시켜, 추상화를 보고 있는지, 아니면 단순히 뒤집힌 관습적인 풍경을 보고 있는지 의아하게 만든다. 바젤리츠가 등장했을 당시 지배적이었던 파리와 뉴욕의 몸짓적 추상화, 동구권의 사회주의 리얼리즘과는 다른 길을 끊임없이 모색해 온 그의 노력을 보여주는 징후다. 거꾸로 그리면 ‘무의식적인 손의 언어’만 남고, 관습적 ‘읽기’나 ‘이해’가 배제된다. 바젤리츠는 이러한 방법을 통해 회화의 대상이 아니라, 회화 행위 자체에 집중하려 했다.

라캉은 <세미나 11 정신분석의 네 가지 근본 개념>(옮긴이 맹정현, 이수련. 2008. 새물결)에서 “실재는 언제나 같은 자리에 있다. 그것은 상징계가 실패하는 그 지점에서 나타난다.”고 말했다.

뒤집힌 숲은 바로 그 실패의 순간을 시각화한다. 상징계의 규칙이 무너질 때, 우리는 언어와 기호가 붙잡을 수 없는 실재의 균열을 마주한다.

“그림을 거꾸로 그리면, 나는 주제의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피터 모리츠Peter Moritz와 인터뷰 중 발언. 픽하우스Pickshaus, 1977)

“거꾸로 그리면 내용은 덜 중요해진다. 중요한 것은 회화 그 자체다.” (1983년 테이트 갤러리 인터뷰, 전시 카달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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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미술관> <조선과 서양의 풍속화, 시대의 거울> 출간작가. 북아트강사. 미술관 도슨트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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