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서랍
글쓰다 쉬고싶으면 쓰던 글을 멈춘다. 일어나서 냉장고 열고 물 한 컵 따라 마시고 다시 책상앞에 앉아 또 글을 쓴다. 아까 쓰던 글이 아닌 다른 글을.
아까 쓴 글은 글쓰기 시간의 글쓰기이고, 나중 것은 쉬는 시간의 글쓰기이다. 그렇게 글을 쓰며 잠시 쉬고나면 다시 아까 쓰던 글을 이어서 쓴다.
그림을 그리다가 힘들고 잘 안되면 붓을 던져놓고 일어난다. 거실을 서성거리며 잠시 쉰 후에 다시 책상앞에 앉아 또 그림을 그린다. 아까 그리던 그림이 아닌 다른 그림을.
아까 그리던 그림은 그림 그리는 시간에 그린 것이고, 나중 그리는 것은 쉬는 시간에 그리는 그림이다.
책을 읽다가 눈이 아른거리고 머리가 아파오면 덮어버리고 일어난다. 베란다에 나가 화분을 살펴보고 다시 들어와 책꽂이 앞으로 간다. 잠시후 나는 새로운 책을 읽기 시작한다.
아까 읽던 것은 책읽는 시간에 읽는 책이었고, 나중에 읽는 것은 쉼을 위해 읽는 책이다.
이렇게 어수선하게 말을 늘어놓으니 내가 마치 어른 ADHD 환자인 것 같다. 그런가...?
글쎄 그건 모르겠다. 생활에 아무 문제없이 정상생활을 하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ADHD환자는 아닌 것 같다. 허긴 진단은 의사가 내리는 것이지 내가 내리는 것은 아니지만.
쉰다는 것은 하던 일을 멈춘다는 뜻이니, 내가 조금 전까지 하던 일을 멈춘 것은 분명히 쉼이다. 나는 쉬는 시간을 잘 챙긴다. 그러면 그 쉬는 시간은 어떻게 보내야 하는 걸까? 휴식, 아마도 멍때리기가 최고의 휴식이 될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쉼이 필요하다. 나도 그렇게 쉴 때가 많다. 멍 때리고 있는 시간이 많다. 그런데 뭔가 하기 시작하면 그것에 집중하고, 그 작업의 쉬는 시간에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방금 전에 하던 일과 같은 다른 작업에 또 손을 대는 것이다.
어려운 책 만들다가 진이 빠지면 손은 놓지만 그냥 있지를 못하고 만들던 책 제쳐두고 다른 책 만들던 것을 손에 잡는 식이다. 언제부터 이런 증세가 시작되었던가....... 기억을 더듬어 봐도 그 시점을 알 수가 없다.
공부할 때도 그랬었다. 공부하다가 너무 오래 했으니 좀 쉬어야겠다 하면 그 틈새에 책을 읽었다. 이만큼 쉬었으면 됐다고 읽던 책을 접고 다시 공부에 달라붙었다.
이 이상한 병(?)의 결과는 어떨까?
어느 시점이 되면 한꺼번에 책읽기 다섯 권이 끝나고, 한꺼번에 수필 서 너 편이 완성되고, 한꺼번에 그림 두 세 점이 완성된다. 한 가지 책을 완독하고 그 후에 다른 책을 읽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권의 책을 한꺼번에 읽고 있다. 한 편의 글을 탈고한 후에 다른 글을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몇 편의 글을 번갈아가면 쓰고 있다. 그림도 역시 그렇다. 한 작품 완성하고 새 작품 그리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이 완성도 안됐는데 다른 것을 그리기 시작하여 번갈아가면서 손을 대면 결과는 몇 장의 그림이 끝나게 된다.
이런 병은(병인가 아닌가???) 생활에 아무 지장이 없다. 내가 남편을 만나 사귀던 중에 다른 남자를 또 만나서 놀다가 다시 남편에게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한 남편과의 사랑을 끝내고 다른 남편에게 손을 대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나의 <여러가지 한꺼번에 하는 증세>는 병이 아닌 정상인 것으로 결론내야겠다.
사족; 내 작가의 서랍 속에는 쓰다 만 글들, 완성되지 않은 글들이 여러 편 들어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