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와 테이블에 놓인 노트>
오명은

책 리뷰

by morgen

<도시와 테이블에 놓인 노트> 오명은 지음. 2026. 다반



도시를 산다는 것, 그리고 테이블에 남겨진 기록들

책을 읽으며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이것이다. 도시는 언제나 말이 많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잘 기록되지 않는다는 것. <도시와 테이블에 놓인 노트>는 바로 그 말해지지 않은 층위를 더듬는 에세이다.

이 책에서 도시는 배경이 아니라 생활의 밀도다. 사람들의 발걸음과 기억이 겹겹이 쌓여 만들어진 감각의 공간이다.

저자는 거대한 도시의 구조나 담론을 분석하기보다, 테이블 위에 남겨진 노트처럼 사소하고 개인적인 장면들을 통해 도시를 읽어낸다.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사소한 미시사가 지금은 그 시대의 거대서사로 완성된 이야기들을 풀어놓는다.

식탁, 카페의 테이블, 잠시 멈춰 앉은 자리들 - 이 책에서 테이블은 휴식의 장소이자 사유가 시작되는 지점이다. 나도 지금 카페 테이블에서 이 책의 리뷰를 쓴다.


어느 날 나의 브런치 글에 '좋아요' 흔적을 남긴 "베리티" 작가의 브런치를 방문했다. 그의 브런치 북 "걸어다니는 방"을 한 편 읽고, 뒤로 돌아가 그동안 놓쳤던 글들을 챙겨가며 읽었다. 글은 나를 프라하에 데려다 놓았다. 작가를 따라 "황금소로"를 함께 걷게되었다. 카프카를 따라 걷던 비좁은 골목길을 이번엔 베리티 작가와 함께 걸었다. 때마침 나는 카프카(Franz Kafka,1883-1924) 타계 100년을 맞아 나남출판사에서 발간한 <카프카, 카프카>를 읽고 있던 중이었다. 브런치 북 "걸어다니는 방"은 '起承轉카프카'인 글이다. 많이 반가웠다. 작가의 출간 소식을 듣고 손꼽아 기다리다가 예약구매를 하고 드디어 손에 넣었다.


책 속에서 나는 카프카를 통해 만났던 베리티작가, 베리티작가를 통해 만났던 카프카의 그림자를 찾았다.

1900년대 초 <뉴요커>지의 기자인 재닛 플래너 역시 죽은 뒤에는 자신의 모든 원고를 불태워 달라고 부탁했다. 자신이 “누군가 부단히 방어하지 않는다면, 하찮고 볼품없어 보일 많은 생각과 희망을 일생 동안 기록한 사람”이라는 이유였다. 60쪽.

작가는 당연히 카프카의 '원고를 불태워달라'는 유언을 지키지 않은 친구 막스 브로트의 이야기를 앞세웠다.



관찰과 사유 사이의 느린 속도

이 책의 미덕은 속도에 있다. 빠르게 결론으로 달려가지 않고, 관찰과 생각 사이에 충분한 여백을 둔다. 독자는 ‘아, 나도 이런 장면을 지나왔지’ 하고 자연스럽게 자신의 기억을 불러오게 된다. 도시는 이렇게 개인의 기억과 겹쳐질 때 비로소 구체적인 얼굴을 갖는다.

오명은 작가의 문장은 감정에 과잉되지 않으며, 그렇다고 차갑지도 않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감각 - 피로, 고요, 잠깐의 환기가 절제된 언어로 정리된다. 도시 비평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사적이고, 개인 일기라고 하기에는 세계가 넓다. 이 글들은 그 중간 어딘가에 서 있다.

독자는 작가와 함께 도시를 산책하는 동행자가 된다. 산책길에서 폴 오스터, 찰스 디킨스, 제임스 조이스, 조지 오웰, 가슴을 설레게 했던 여러 작가들을 만난다. 문학가들 뿐만 아니라 음악가, 영화인, 화가, 저널리스트, 패션 디자이너, 시대를 초월하여 예술계의 많은 인사들이 카메오로 등장한다. 마치 옴니버스(Omnibus) 잡지를 읽는 느낌이다.


작가의 노트, 독자의 노트

책 제목 속 ‘노트’는 당연히 작가의 노트라고 생각했었다. 조금 읽어나가다가 든 생각은 ’노트'는 작가의 것이기도 하지만, 독자의 것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의 노트는 완결된 주장이나 교훈이 아니라, 생각이 머물렀던 흔적을 기록했다. 독자에게 무엇을 ‘알게 되었다’기보다는, 무엇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는 감각을 남긴다. 독자의 노트에는 그 감각이 기록될 것이다.


열렬한 웅변은 아니지만 침묵으로 전달하는 고요. 이 도시를 살아가는 누군가의 현재. 말하자면 지쳤던 일상의 피로와의 단절, 혹은 아무도 모르는 숨겨진 고독의 풍경일 수 있다. 34쪽(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일요일의 이른 아침> 설명중)

작가는 이에 이어 "아침의 빛을 구분할 수 있을까."를 생각한다. 독자는 무엇을 생각하게 될까? 독자의 노트에는 그 생각이 쓰여질 것이다. 작가가 묘사한 빛에 드리워진 그림자까지 볼 수 있을까?


도시는 늘 우리를 바쁘게 만들지만, 이 책은 멈추어 앉을 자리를 마련해준다. 지친 도시의 방랑자에게 의자를 살짝 밀어준다. 잠시 커피를 식히며, 테이블 위에 놓인 노트를 들여다보는 시간을 제공한다. 카페 테이블 앞에 앉아 종이노트 위에서 느리게 기어가는 작가의 손가락을 바라보기도 하고, 노트북 자판 위에서 타다닥 튕기며 춤을 추는 작가의 리듬을 듣기도 하는 <도시와 테이블에 놓인 노트>이다.


작가의 도시, 나의 도시

<도시와 테이블에 놓인 노트>는 추억창고의 열쇠 역할을 한다. 지난 날 걸었던 도시들을 불러와 그때의 시간을 펼쳐놓는다. 또한 깊은 곳에 눌려있던 추억의 한 덩어리를 끌어올리는 마중물이기도 하다. 마치 그 시대를 지나온 것처럼 내 머리속에 확실한 그림으로 남아있는 도시 풍경을 불러온다.

호퍼의 젊은 날은 재즈시대를 지났다. 대공황과 인플레이션, 금주법이 요동치던 때였지만, 그는 도시 어느 모퉁이의 평범한 일상을 보내는 사람들에 주목한다. 37쪽.

이쯤에서 내 눈앞엔 에드워드 호퍼의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 Nighthawks>이,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가 펼쳐진다. 나는 어느 새 1920년대 뉴욕의 거리를 걷고있다.


내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던 이야기가 눈에 띠기도 한다.

이란의 카펫 시장은 길에 새로 만든 카펫을 깔아 둔다고 한다. 행인들이 그 위를 밟고 지나가게 하는데 밟을수록 선명한 색상이 나타내는 것을 좋은 카펫으로 쳐준다. 이탈로 칼비노의 소설 <보이지 않는 도시들>에 양탄자의 도시 에우도시아가 소개된다. 43쪽.

<눈 먼 자들의 도시>는 읽었지만 <보이지 않는 도시들>은 읽지 않았었다. 새로운 것을 배웠다.


절제된 문체의 미덕과 한계 (나의 시각)

<도시와 테이블에 놓인 노트>는 도시를 말하지만, 사회를 직접 고발하지도, 구조를 분석하지도 않는다. 저자는 도시 속 사적인 장면들 -테이블에 앉아 적어 내려간 생각, 머무는 시간의 감각을 통해 도시를 느끼게 한다. 작가는 도시를 ‘문제’로 호명하지 않는다. 도시를 살아내는 개인의 리듬에 집중한다. 이 선택은 독자에게 부담 없는 접근을 가능하게 한다. 여유롭게 산책하는 기분을 준다. 산들바람을 음미할 정서적 분위기를 이끈다. 문장은 정제되어 있고 조심스럽다. 감정을 과잉되지 않게 다루며, 의미를 단정 짓지 않는다. 덕분에 독자는 자신의 경험을 투사할 공간을 얻는다. 바로 그 지점에서, 어떤 독자는 아쉬움을 느낄 수도 있다.


도시는 단지 감각의 집합이 아니라 권력, 자본, 배제의 공간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책에서 그러한 퇴적층은 얇다. 저자는 도시의 폭력성을 직접적으로 호출하지 않고, 개인의 사유가 닿는 선에서 멈춘다. 미학적으로는 설득력이 있지만, 비평적으로는 다소 안전한 자리에 머문다는 인상을 준다. 순전히 나의 개인적인 소감일 뿐, 물론 이것은 이 책이 선택한 방식일 것이다. 책의 성격은, 단어(도시)의 개념과 해석, 그를 묘사하는 방법은 수 천 수 만가지가 있으니까.

1920년대 미국의 재즈시대에 대한 시선이 '대공황'의 뒷골목 회색지대에 머문 사람도 있고, 롱 아일랜드의 웨스트 에그에, 또는 이스트 에그에 시선을 둔 사람도 있으니, 도시를 이야기하는 책은 얼마나 다양한 이야기들을 품고 있을까. 이 책은 시대의 문화에 관심있는 독자에게는 보석같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예술가 인명 사전을 보는 듯

책 속 "전설이 된 젊은이들의 거리"에서 런던이 등장한다. 모델 패티 보이드(Patti Boyd)가 배회하던 킹스로드를 소개한다. 런던 거리를 눈앞에 불러온다. 나는 어느새 매캐한 묵은 책 냄새가 좋았던 채링크로스를 걷고 있다. <채링크로스 84번지>가 아니어도 그 거리의 풍경이 그립다. "그저 서점에서 자는 사람"에서는 파리의 고서점 "세익스피어 앤 컴퍼니"에 발을 들여놓는다. 작가는 제레미 머서의 <시간이 멈춰 선 파리의 고서점>을 소개하며 나를 파리로 끌고간다.


와우! 세익스피어 앤 컴퍼니라니! 세익스피어 앤 컴퍼니라는 이름이 등장하는 순간, 그곳을 드나들던 수많은 사람들이 떠오른다. 제임스 조이스, 헤밍웨이, 피츠제럴드, 거트루드 스타인… 그 이름들만으로도 파리의 공기가 달라진다. 게다가 작가가 "방탕한 카페 생활자"라고 소개한 <뉴요커>의 재닛 플래너가 드나들던 카페 마고, 카페 플로르까지 끼어든다. 나는 잠시 읽던 책을 내려 놓는다. 읽다간 멈추고 서가에 꽂혀있는 책들을 몇 권 꺼내어 휘리릭 책장을 날려보고, 다시 <도시와 테이블에 놓인 노트>를 펼쳐든다. 이쯤되면 나의 책 리뷰는 그 시절 파리의 예술가들 인명사전이 될 수 밖에 없다. 인명사전은 작가가 책에서 미리 쓰기 시작했다.

카페 드 마고(Deux Magots)에 터잡고 드나들던 폴 베를렌, 아르튀르 랭보, 스테판 말라르메, 앙드레 브르통, 피카소, 알베르 카뮈, 페르낭 레제, 베르톨트 브레히트. 카페 드 플로르(de Flore)에는 카페 마고에서 옮겨온 사르트르와 보부아르 때문에 플로르는 실존주의의 상징처럼 되었었다. 영화의 분위기가 좋아서 두 번이나 관람했던 <미드나잇 인 파리>의 화면들이 떠오르기도 한다.

작가는 이 유명인들을 일일이 다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세익스피어 앤 컴퍼니, 카페 마고, 카페 플로르라는 특정 단어를 언급하므로써 독자들은 그 도시에서 숨쉬던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발터 벤야민의 <도시의 산책자>를 인용한 구절을 지나 작가의 말은 이렇게 이어진다.

특정 거리에 몰리는 발걸음에는 이유가 있다. 젊은이들은 자신들을 대변해주고 시대를 반영해 줄 거리를 찾는다. 무의식적으로 스치는 벽보, 에나멜 간판, 카페의 테라스가 기꺼이 떠도는 마음의 거처가 되어준다. 그리고 그 도시는 누군가의 정체성으로 자리 잡는다. 57쪽.


종로에서 듣는 서울의 소리

작가는 종로 거리를 걸으며 '피맛골'을 이야기한다. 슬쩍 웃음이 나왔다. 왜냐면, 서민들이 조선시대에 말을 타고 다니던 고관들을 피해 다녔다는 '피맛골(避馬)'을 읽는 시간에 나는 그 동네 '이마(利馬)빌딩'의 카페에 앉아있었기 때문이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종로 거리를 걷는 작가의 짙은 서정성 문장이 촉촉하다.

다시 거리를 걷는다. 꽃은 떨어졌지만 무성해져 가는 나무들, 빗방울을 튕겨 내고 있는 빌딩, 젖은 보도블록, --- 거리 위로 빗물이 흐르느 소리가 음악처럼 들려온다. 서울의 소리가 들리는 오후였다. 아, 서울 같아! 나도 모르게 한 마디 튀어나왔다. 정말 서울 같아. 96쪽

어느새 나도 비오는 서울 거리를 작가와 함께 걷고있었다.


잠시 종로에 대해 생각해본다. 젊음의 물결이 출렁이는 홍대 거리, 노인들의 집합소 파고다 공원, 한 도시에 공존하는 두 거리들은 우리에게 어떤 기억으로 남을까? 앞으로 30년~50년 후의 노인들은 어느 거리로 몰려갈까? 그때는 파고다공원이 아님이 분명하다. 아마도 홍대앞이 노인들의 느린 산책거리가 될지도 모른다.

지금의 노인들은 왜 파고다공원을 맴돌고 있을까? 그곳은 노인들이 모이는 장소가 아니라, 젊었던 그들이 다시 찾는 장소이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들의 푸르청청했던 시절의 활동무대, 뜨거운 심장이 팔딱팔딱 뛰던 시절에 자신들이 남긴 발자국을 찾아 종로거리를 다시 걷고싶은 마음이리라. 도시란 그런 곳이 아닌가.


‘노트’라는 형식의 전략

제목에 들어 있는 ‘노트’는 이 책의 형식을 정확히 드러낸다. 글들은 완성된 논증이라기보다, 생각의 중간 기록에 가깝다. 그래서 독자는 사유의 결과보다 사유가 발생하는 순간을 목격하게 된다.

관찰 → 감정 → 짧은 사유라는 구조가 이어지면서, 몇몇 글에서는 변주보다 익숙함이 먼저 느껴진다. 이는 독자에게 “이 노트는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게 한다.


작가는 타임머신을 타고 시대를 건너다니며 도시 산책을 한다. 뿐만 아니라 지역의 경계도 없다. 아메리카에서 유럽을 가볍게 넘나든다. 폴 오스터의 발자국을 찾아 브루클린의 골목을 걷는가하면, 에드가 앨런 포의 방을 기웃거린다.

자신의 독창성으로 인해 고통받았던 비운의 천재 에드거 앨런 포의 비틀거림은 거절을 마주하고 상심한 오늘의 작가들에게 말을 건넨다. 인생이 작가에게 레몬을 줄 때, 시고도 씁쓸한 맛을 온전히 감당하며 앞서 걸었던 에드거 앨런 포가 있었다. 209쪽.

나는 옛날옛날 고등학생 때 암송했던 애드거 앨런 포의 "애너벨 리"를 더디게 읊조리며 책장을 넘겼다. 몇 소절은 가물가물하며 기억이 나지 않아 안타깝다. 책을 읽는 중에 아는 이름이 나오면 얼마나 반가운지!


아프리카의 어느 도시에나 책은 흔하지 않다. 책이 없는 그곳에서 아이들은 이야기를 들으며 자란다. 아무런 책도 읽지 못하고 늙은 노인들은 이야기에서 이야기로 이어지며 이런 명언을 만들어냈다. "노인 한 사람이 죽으면 도서관 하나가 불타는 것과 같다"는.

아마두 함파테 바(Amadou Hampâté Bâ, 1900/1901-1991)의 자전적 성장소설 <들판의 아이>는 아이들에게 이야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이렇게 서술한다. "아프리카 전통 이야기꾼들이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는 이 놀이판은 아이들에게 그야말로 살아있는 학교였다." 287쪽. <들판의 아이> 2008. 북스코프. 이희정 역.

<도시와 테이블에 놓인 노트>에는 도시의 이야기들이 멈추지 않고 흐른다. 오명은 작가 역시 이야기, 남아서 오래도록 이어갈, 잊혀지지 않아야 할 이야기의 중요성을 알고 있다.

평소에 무심히 지나치며 놓쳤던 도시 속에 묻혀 있는 낡은 시간들, 켜켜이 쌓인 스토리를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매끄럽지 않다고 주인마저 외면한다면 그곳의 시간은 그저 영원히 깨지 못하고 잠들어 있을 것이다. 94쪽.

디킨스는 자신을 이야기와 풍경을 수집하는 ‘비상업적 여행자’로 정의하며 도시의 구석구석을 다녔다. 산업혁명 이후 초기 자본주의의 바람이 몰아친 런던 뒷골목이야말로 무수한 이야기들이 숨어 있는 장소였다. 219쪽.

영화감독 빔 벤더스는 시인의 입을 빌려 “이야기꾼이 사라지면, 인류는 그 어린 시절을 잃게 될 것이다”라고 선언한다. 살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유년의 꿈으로 다시 돌아가는 일일 것이다. 234쪽.


연재소설에 대한 경험

소설가는 밤이면 거리로 나왔다. 19세기 빅토리아 시대 영국 사람들은 매일 신문의 연재를 기다렸다. 오늘날 넷플릭스 시리즈를 대하듯 그들은 신문을 읽으며 열광하고 수다를 떨었다. 찰스 디킨스는 작품을 완성한 후 연재한 것이 아니라, 연재 중 독자의 반응에 따라 줄거리와 인물을 조정했고 이 방식으로 유명해졌다. 218쪽.

아마도 오명은 작가는 나와 다른 시대를 살아왔을 것이다. 나는 매일 아침 신문 연재소설을 읽던 시대를 살았다. 최인호의 <별들의 고향>을, 황석영의 대하소설 장편 <장길산>을 신문연재로 접했다. 신문사 지인의 말을 듣자면 마감시간까지 소설이 안 올 때는 심장이 쫄아드는 것 같다고 했다. 완성형 소설이 아니라 매일 원고를 받아와야 했던 옛 이야기이다. 찰스 디킨스는 신문 마감 시간을 잘 지켰을까? 아, 방송작가인 오명은 작가는 이 '마감'과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 같다.


책에는 주옥같은 인용구들이 곳곳에 포진하고 있다. 도시, 그 도시에 살던 사람, 그 사람이 쓴 글을 소개하는데 인용구보다 더 좋은 방법은 또 뭐가 있을까? 작가가 적소에 옮겨온 인용구들을 읽으며 여러 권의 책을 한꺼번에 읽은 느낌이다.


<도시와 테이블에 놓인 노트>가 갖는 가치는 분명하다.

이 책은 도시 담론이 점점 더 자극적이거나 거대해지는 흐름 속에서, 사유의 최소 단위를 지키려 한다. 테이블에 앉아 노트를 펼치는 시간을 출발점으로 삼는 태도 자체가 하나의 입장이다. 도시를 견디는 방식, 혹은 잠시 내려놓는 태도를 보여준다. 강한 주장 대신, 독자의 생각을 깨우는 질문으로 남는다.

지금의 도시는 너무 빠르게 말한다. 데이터와 정보, 뉴스와 이미지들이 쉴 새 없이 밀려온다. 그런 시대에 이 책은 그 안에 잠시 앉아 있게 만든다. 어쩌면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바로 그 느림일지도 모른다.

이 화려한 세상에서 보는 책의 흑백 사진들 또한 글 못지않은 매력 포인트이다.


작가 오명은은 방송 다큐멘타리, 교양 프로그램 작가이다.

도시와 예술, 문학을 가로지르며 기록하는 에세이스트. 일상의 장면 속에서 도시의 기억과 시간을 발견하는 글을 써 왔다. 브런치에서 ‘베리티’라는 이름으로 글을 연재하며 독자들과 만나고 있다.


작가는 자신의 브런치에서 "after book" 글을 통하여 도시 산책을 계속하고 있다.

https://brunch.co.kr/@myeun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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