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리뷰
<등대섬> 윤석철 지음. 2026. 나남출판사
대작 <소설 예수>를 통해 2천 년 전 인간 예수의 고뇌와 삶을 복원했던 소설가 윤석철작가가 이번에는 현대의 섬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그는 제도권 교회가 가두어버린 박제된 예수가 아니라, 고통받는 이들 곁에서 함께 숨 쉬고 길을 내어주는 ‘예수의 참 정신’을 일관되게 추구해온 작가다. 신간 <등대섬>은 그 연장선상에서, 오늘날 우리 사회가 잃어버린 구원과 환대의 원형을 집요하게 탐구한다.
이 소설은 이야기보다 먼저 하나의 풍경으로 다가온다. 표지에서부터 바다 냄새가 확 풍겨온다. 거기 등대가 있다. 바다 한가운데, 빛을 비추고 있지만 누구에게 닿는지 알 수 없는 등대.
소설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상징은 '소도(蘇塗)'이다. 삼한시대 죄인이 도망쳐 와도 돌려보내지 않았던 신성한 구역 소도. 현대인들은 외국 땅에서 치외법권 지역인 자국의 공관이라면 더 쉽게 이해할 것 같다.
소설 <등대섬>은 현대 사회에서 소외되거나 상처 입은 이들이 모여드는 '등대섬'이 어떻게 현대판 소도로서 환대와 사랑의 공간이 되는지를 이야기한다.
세상의 잣대로는 낙오되거나 상처 입은 인물들이 등대섬으로 흘러 들어오지만, 이곳은 그들을 정죄하거나 배척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고립된 섬에서 서로의 존재를 긍정하며 새로운 ‘길’을 만들어가는 과정은, 각자도생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더불어 사는 삶’이 무엇인지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맞다. 질문이다! 작가의 질문에 독자는 답을 해야 한다.
<등대섬>은 ‘닿지 않는 신호’에 대한 이야기처럼 읽힌다. 인물들은 서로를 향해 있지만 쉽게 도달하지 못하고, 섬이라는 공간은 그 거리를 더욱 또렷하게 드러낸다. 이곳에서 등대는 단순한 구조물이 아니라, 존재의 방식에 가까운 무엇이 된다. 끊임없이 빛을 보내지만, 의미를 확신할 수 없는 상태.
우리의 일상적인 등대의 개념은 무엇인가. 바닷길을 인도하기도 하고, 위험을 경고하기도 하는 역할을 한다. 소설 속 등대는 어떤 역할을 할 지, 궁금증을 가지고 읽어본다.
작품을 읽으며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것은 작가의 이전 작업이다. <소설 예수>에서 드러났던 질문 ‘구원은 가능한가, 인간은 누구를 향해 살아가는가’는 <등대섬>에서도 변주된 형태로 반복된다. 다만 이번에는 보다 고요하고, 더 고립된 방식으로 제시된다. 전작 7권을 썼으니 작가로서의 역량도 많이 향상되었다. 초보 시절 고개를 빳빳이 들고, 어깨에 힘을 잔뜩 주고, 알고 있는 이론을 독자들에게 전달하고자 애를 쓰던 모습은 사라졌다. 참 이야기꾼으로 <등대섬>을 이야기로 풀어낸다.
문장은 절제되어 있고, 서사는 크게 요동치지 않는다. 대신 장면 하나, 이미지 하나가 오래 머문다. 빠르게 읽히기보다는, 자꾸 멈춰 서게 만드는 종류의 소설이다.
물론 이러한 방식은 독자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 이야기의 전개를 기대한다면 다소 정적인 흐름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느림 속에서 작가는 끝까지 하나의 질문을 놓지 않는다. 그 빛은 과연 누군가에게 닿고 있는가. 혹은, 우리는 애초에 닿을 수 있는 존재였는가.
전작 <소설 예수>가 2천 년 전 “인간 예수”의 삶을 통해 공동체 가치를 물었다면, <등대섬>은 그 물음을 오늘의 현실로 가져왔다. "사람이 오고 가며 서로를 이어야 비로소 길이 된다"는 작가의 철학이 섬이라는 고립된 공간에서 어떻게 연대와 회복으로 발현되는지 주목하며 읽는다.
"등대섬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 목사 현우는 그 경계에 서 있다. 그는 신학적 가르침과 섬사람들의 삶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한다. 삶의 밑바닥을 지나온 사람들 앞에서 신앙의 언어는 자주 힘을 잃고, 현우는 자신이 붙들어 온 믿음과 현실의 삶 사이의 간극을 마주하게 된다. 그의 흔들림은 끝내 이런 질문에 닿는다. 기독교라는 제도 종교의 울타리 밖에서도, 혹은 그것이 사라진 이후에도 우리는 서로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는가.
소설은 또한 섬사람들이 품고 살아온 기억을 통해 한국 현대사의 상처를 조용히 비춘다. 전쟁과 폭력의 시대를 지나온 사람들은 그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삶 속에서 오래도록 삭혀 간다. 마치 작은 항아리에 담아 두듯 기억을 다스리며 살아가는 것이다. 남편과 시아버지를 전쟁 속에서 잃은 황씨 할머니의 긴 침묵과, 광주의 어느 날 이후 한쪽 다리를 잃고 절뚝 거리며 살아온 '그집 김씨'의 이야기는 그렇게 섬의 시간 속에 쌓여 공동체의 기억으로 이어진다." 나남출판사 책 소개 글 중에서.
작가에게 ‘길’은 관념이 아니라 실천이다. “사람이 오고 가며 서로를 이어야 비로소 길이 된다”는 소설 속 철학은, 종교적 교리에 갇힌 구원이 아니라 타자의 고통에 응답하는 구체적인 환대를 통해 증명된다. 등대섬의 인물들이 서로의 상처를 보듬으며 공동체를 회복해가는 모습은, 작가가 평생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예수 정신’의 현대적 변주라 할 수 있다.
현우가 섬을 떠난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이현우 목사님이 사라졌어!"
"들었어요"
"뭐 생각나는 것 없으셔? 무슨 일인지, 어디 갔는지, 혹 들은 얘기라도?"
"없어요."
마음이 어디 먼 곳을 떠도는 사람처럼 미숙은 묻는 말에 건성건성 대꾸했다. 뒤돌아 나오려다 말고 남 집사가 물었다.
"별 일 없지?" 11, 12쪽.
현우는 왜 사라졌을까, 남집사는 왜 미숙에게 현우의 행방을 물었을까?
미숙은 누구인가? 미숙은 섬을 떠나 대처에 나가 악어에게 물리고 다시 섬으로 돌아온 현우의 어릴 적 친구다. 둘이는 큰섬 학교에 같은 배를 타고 다녔다. 미숙에게는 다니엘이라는 아들이 있다.
현우가 사라진 얼마 후, 서울에서 은혜가 등대섬을 찾아온다. 현우의 신학대학교 시절 친구다. 서울의 대형교회 목사의 딸, 은혜는 미국 유학을 가며 현우와 헤어졌다. 등대섬에 온 은혜는 현우를 만나지 못하고 미숙과 다니엘을 만난다.
"누구신지?" 서로 동시에 물었다. 이름이 궁금해서 묻는 말이 아니었다. '나의 그 사람'과 어떤 관계인지 묻는 말이었다.
"먼 길 찾아오셨는데... 그 사람은 떠났어요.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몰라요. 바람이 아주 세고 파도까지 높았던 밤에 배를 몰고 떠났는데.... 혹시 그 사람이 잘못됐을까 걱정이에요. 정말 아무도 몰라요. 어디로 갔는지. 괜찮은지..."
"아줌마, 목사님 애인이세요?"
아이가 현우를 '목사님'이라고 부르자 은혜는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의 아들은 아니라는 생각이 스쳤다. 24쪽
이쯤 스포일러가 되면 독자는 잠깐 로맨스 소설쯤으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이 딸린 고향친구 미숙, 대학시절 여자친구 은혜, 미숙의 아들 다니엘.
<등대섬>은 로맨스 소설이 아니다. 넓고 깊은 "사랑"이라는 큰 강물이 소설을 관통하며 출렁이고 흐르는 이야기이다. 그 사랑은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관계의 근원적인 큰 사랑이다. 섬사람들끼리의 관계, 하느님과 인간과의 관계, 신의 아들이라 칭해지는 인간 예수와 목사 현우와의 관계, 혈연이 아닌 다니엘과 다니엘의 아버지가 된 현우와의 관계, 그 관계들 속에 고여있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등대섬을 밝힌다.
이야기는 왜 현우가 사라짐이, 목사의 떠남이 앞서 나왔을까? 시작은 이현우 목사가 등대섬에 돌아와 등대섬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길을 터준다. 돌아오는 길은 미숙과 다니엘이 현우를 인도한다. 현우는 악어를 압도할 수 있는 가장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고, 남자이고, 목사다.
"미숙아."
겨우 이름을 한 번 불렀을 뿐인데 눈물이 쏟아졌다. --- 자신이 입힌 상처가 아니므로 책임도 없다고 믿었던가. 책임은 원인을 제공한 사람의 몫이라고 여긴 채, 눈 앞에 빤히 보이는 상처를 외면해 온 일이 떠올랐다. 296쪽
이현우 목사는 다니엘에게 '아버지 해 줄 수 있는' 책임을 깨닳은 가장이다.
하느님을 알기 이전부터 함께 하던 등대섬 사람들의 삶의 한 가운데로 돌아오는 현우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예배드리러 오세요!" 목청 큰 사람이 마을을 향해 몇 번 소리치면 그제야 어슬렁어슬렁 뒷짐을 지고 모여들었다. 도시에서는 교회들이 모이든 안 모이든 정해진 시간에 예배를 시작하지만, 등대섬에서는 그럴 수 없었다. "아따, 하느님이 어디 급하게 가신다든가? 조금 더 못 기다려 준대? 참 야박하기는." 37쪽
신약성경 마태복음 25장 1-13절에 보면 등불을 켤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미련한 처녀들이 늦어서 혼인잔치에 들어가지 못하는 장면이 나온다.
"신랑이 오므로 예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대답하여 가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마태25;12-14
예수님을 기다리는 성도들에게 항상 깨어있으라는 말씀으로 해석된다. 오래 전 이 본문의 설교를 듣던 중 나는 의문이 생겼다. 아, 예수님이 저런 분이셨나? 먼저 들어간 사람들이 어서 문을 닫으라고 하더라도, 그때 예수님은 '아니다, 저기 오는 사람들이 있으니 조금 더 기다리자'라고 하실 예수님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한 문장, 몇 개의 단어로 성경말씀의 본뜻을 함부로 재단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예수님은 문을 닫는 분이 아니다. 늦도록 문을 열고 기다리는 분이다.
<등대섬> 느린 노인들의 푸념 "아따, 하느님이 어디 급하게 가신다든가? 조금 더 못 기다려 준대? 참 야박하기는." 이 말에 마태복음의 혼인잔치에 늦게 온 처녀들 이야기가 생각났다. 하느님은, 예수님은 그렇게 야박하신 분은 아니지 않은가?
어느 일요일 아침 아버지는 현우에게 지나가는 말인 듯 교회 얘기를 해주었다.
“우리 등대섬에는 굳이 하느님이 직접 나서서 하실 일은 없어.”
아버지의 말대로 등대섬 사람들은 그렇게 살았다. 교회가 들어올 때 극렬하게 반대한 사람도 없었고, 대단한 경사라고 흥분하는 사람도 없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사람들은 새로 이사 온 이웃 하나 받아들이듯 교회를 맞이했단다.
“교회가 섬 안으로 슬그머니 끼어들어 왔지.” 93쪽
교회는 이렇게 등대섬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지만, 작가는 하느님이 계셔야 할 자리를 '교회'라는 조직과 건물이 대신하게 된 현실을 비판한다. 등대섬 사람들이 "하느님이 직접 나서실 일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들의 삶 자체가 이미 서로를 돌보는 '작은 하느님들'의 실천으로 가득 차 있었음을 암시한다.
서로의 끼니를 걱정하고 상처를 보듬는 평범한 이들의 손길이 곧 신의 현현(顯現)임을 역설한다. 반면, 교회가 '슬그머니 끼어들었다'는 표현은, 주민들의 자생적 공동체에 권위와 형식이 침투했음을 보여준다. 이는 제도권 종교가 오히려 삶의 본질적인 영성을 방해할 수 있다는 경고로 읽힌다.
현우는 교회 강단 위에서 공적인 의례인 설교를 하기보다는 모여서 식사하는 자리에서 친근한 이야기로 접근하곤 했다. 설교는 성경말씀이 아니라 등대섬 사람들의 삶속의 이야기여야 했다.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도 지금 우리처럼 같이 모여 음식을 나누고, 서로서로 지나온 얘기를 들어 주었대요. 어려운 형편을 털어놓고, 위로하고 위로받고... 교회라고 불리기 전부터 그렇게 지냈다고 합니다."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이 맨 처음 함께 모여 식사하다가 교회를 세웠나? 그럼, 같이 밥 먹는 게 교회보다 먼저인 것 같은디. 내 생각으로는." 117쪽
노인의 투박한 말 속에 진리가 있다. 성경이 기록되기 전부터 사람들은 밥을 나누며 '식구'가 되었고, 그 생명의 나눔 자체가 이미 거룩한 의례였다. 현우가 강단 아래로 내려와 등대섬 사람들의 삶 속으로 들어간 것은, 박제된 교리가 아닌 살아있는 애찬의 현장을 회복하려는 몸짓이었다.
교회가 생기고 마을이 생긴 것은 아니다. 마을에 교회가 생긴 것이다. 교회가 생기기 이전부터 마을 사람들의 삶속에는 후에 교회에서 말하는 '친교'나 '애찬' 같은 거창한 용어 대신, 서로의 허기를 살피는 '식구(食口)'라는 단단한 연대가 먼저 자리 잡고 있었다. 함께 먹는 입들이 모여 이룬 소박한 식탁이야말로, 기독교가 지향하는 코이노니아의 가장 순수한 원형이었다.
현우는 십자가가 얼마나 무거운지 새삼 깨달았다. 예수가 메고 처형장을 걸어 올라갔던 그 나무 형틀은 이제 기독교라는 종교를 믿는 모든 이가 각각 자기 어깨에 메고 가야 할 고통의 몫이 되었다.
2천년 동안 차곡차곡 쌓인 역사는 누군가를 일으켜 세우기도 하고, 때로는 눈보라치는 벌판으로 홀로 내몰기도 했다. 169쪽.
기독교가 축복과 번영의 종교로 변질된 시대에, 작가는 다시 '고통의 몫'인 십자가를 소환한다. 예수가 걸었던 길은 안락한 교회 의자에 앉아 얻는 위로가 아니라, 각자의 삶에서 타자의 고통을 짊어지는 연대의 고통임을 강조한다.
2천 년의 역사가 누군가를 "눈보라 치는 벌판으로 내몰기도 했다"는 표현은, 종교가 권력화될 때 발생한 폭력을 반성하게 한다. 결국 참된 신앙은 다시 그 벌판에 선 자 곁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닐까.
작가는 화려한 성전 대신 예수가 졌던 '나무 형틀'을 우리 앞에 가져다 놓는다. 신앙이란 화려한 조명 아래서의 찬양이 아니라, 눈보라 치는 벌판으로 내몰린 이들의 곁을 지키며 각자의 몫인 고통을 짊어지는 지극히 현실적인 투쟁임을 엄중히 선포하고 있다.
<등대섬>은 종교의 담벼락을 넘어 낮은 곳으로 임하는 사랑의 힘을 믿는 이들에게 보내는 위로다. 작가는 세련된 수사보다 진정성 있는 서사로 우리 시대가 잃어버린 이웃의 의미를 되살려낸다. 책장을 덮을 때쯤 독자는 깨닫게 될 것이다. 등대섬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누군가에게 기꺼이 ‘소도’가 되어줄 때 바로 그곳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정작 '소도'가 필요한 사람은 나 자신이기도 하다.
이제 좀 편안한 마음으로 편안한 글을 씁니다.
나에게 <등대섬>의 리뷰는 특별합니다. 글쓴 이가 옆지기이기 때문이죠. '천생연분'인지 '평생웬(원)수'인지 판단하기 어려운 관계로 50년을 함께 지내왔습니다.
출간하였으니 광고도 해야겠죠. 그러나 나는 한 명의 독자가 되어, 50년의 관계를 넘어, 브런치 매거진 "책을 읽다"에 다른 책들 리뷰를 쓰듯이 이 글을 썼습니다. 남의 책(사실 남의 편인 사람이니) 실제로 남의 책 리뷰를 쓰듯이 썼습니다. (곁다리로 끼어서 홍보 - 저의 다른 리뷰 글들도 읽어보세요) <등대섬>의 리뷰가 확실히 객관적이지요?
한 달쯤 후에 북토크의 자리를 마련하려고 합니다. 먼저 <소설 예수>의 북토크에 오셨던 분들께 다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한 가지 확실히 약속할게요. 그때처럼 긴 시간동안 진행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작가의 말은 줄이고, 독자의 질문을 많이 받는 시간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늙으면 입은 다물고 지갑은 열라"는 시쳇말을 잘 따르는 의미에서 말은 줄이고, 선물은 풍성하게 마련할 예정입니다. 이 정도면 대단한 유혹 아닙니까?
지난 번엔 바이올린을 하는 동생 덕분에 전문 연주자들을 모시고 콘서트를 했었는데 <등대섬> 북토크에도 작은 콘서트를 마련할 예정입니다.
<등대섬> 많은 관심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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