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연재를 모두 마치고 나니, 무엇보다 먼저 떠오르는 것은 그림이 아니라 시간이다. 이 글들을 쓰기 위해 내가 머물렀던 수많은 밤과 새벽, 화면 속에서 확대하고 또 확대해 보던 이미지들, 문장을 고치다 지워버리기를 반복했던 순간들. 어쩌면 <그림 속 철학, 철학 속 그림> 연재는 그림에 대한 글이 아니라, 그림 앞에 머무른 시간에 대한 기록이었는지도 모른다.
왜 작품 이미지를 함께 올리지 않았나?
스스로에게 수없이 던졌던 질문이다. 그림을 보여주지 않고 그림에 대해 말하는 일이 과연 가능할까. 이미지 없는 미술 글은 반쪽짜리가 아닐까.
저작권 문제는 생각보다 복잡했고, 공정 이용의 경계는 모호했다. 무료로 공개된 이미지라 해도 출처와 사용 조건을 일일이 확인해야 했고, 조심스러워졌다. 무엇보다도, 내가 쓰는 글이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림 속 철학, 철학 속 그림> 외의 내가 발행한 다른 글에서는 이미지를 함께 올렸었다. 사진 저작권을 얻은 것이 아니어도 감상에 편하도록 이미지를 해당 글에 함께 올리며 출처를 밝히는 것으로 최소한의 예의를 보였다. 그러나, 이번 브런치북 연재는 사정이 다르다. 멤버십 글로 발행했기 때문이다. 다만 적은 소득이라도 글에 대한 이익이 있으면 Fair use 이미지를 Public domain처럼 마음대로 사용할 수는 없다. 나의 양심이다.
가장 단순하면서도 어려운 선택을 했다. 보여주지 않고 말하기. 물론 아쉬움은 컸다. 어떤 작품은 실제 크기와 질감, 물성, 침묵 같은 것을 직접 보아야만 전달되기 때문이다. 화면 속 이미지조차 충분하지 않은데, 그것마저 제시하지 않는다는 것은 스스로 제약을 거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끝까지 같은 방식을 유지했다. 일종의 고집이었고, 동시에 약속이었다. 사진 촬영이 허락된 미술관에서 직접 촬영한 사진이나 공공장소에 노출된 작품들은 이미지를 그대로 사용했다.
글만으로도 이미지에 닿을 수 있는가? 그 가능성을 시험해 보고 싶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결핍이 또 다른 가능성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독자들이 스스로 이미지를 찾아보거나, 기억 속의 그림을 떠올리거나, 혹은 전혀 다른 이미지를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지는 눈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기억과 감각 속에서도 존재한다.
철학책과의 씨름
연재는 철학과 예술을 병치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특정 철학자의 사유와 예술 작품을 연결하여 하나의 대화를 만들어보려는 시도였다. 이러한 방식은 독자에게 길을 제시한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동시에 분명한 한계를 드러냈다.
철학의 개념은 본래 복잡한 맥락 속에서 형성되고, 예술 작품 역시 단일한 의미로만 해석될 수 없다. 한 편의 글 안에서 두 영역을 동시에 다루다 보니 핵심 개념 중심의 해석으로 수렴되는 경우가 많았다. 철학이 작품을 설명하는 도구처럼 보이거나, 작품이 철학의 사례처럼 읽히는 위험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다.
오래 전에 읽고 방치해두었던 옛 철학책들을 다시 훑어본 것은 이번 연재 글쓰기가 내게 준 큰 선물이다. 어려웠던 내용을 다시 읽으며 조금 더 이해하게 되었다.
철학책을 읽으며 가장 어려웠던 점은 철학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의 부족이다. 대부분의 근현대 철학책들은 독자를 철학에 대한 지식을 갖춘 사람으로 여기고, 아니, 독자가 철학에 대해 훤하든 일자무식이든 상관도 않고(정말 배려심 1도 없음),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소크라테스, 이런 사람들의 이론들을 고서에서 인용해가면서 책을 써나간다. 자신의 새로운 이론 그 이전의 이론과 개념들을 다 들춰가며 책을 쓴다.
"ㅇㅇㅇ의 ㅇㅇㅇ책에서는" "ㅇㅇㅇ가 말했던 것처럼"으로 시작하여 그것에 대한 비평과 그에 이은 자신의 논지를 쓰는 스타일이다. 책의 foot note에 빼곡히 열거된 책들의 십분의 일, 백분의 일도 못읽은 나에게는 가시덤불을 헤치는 독서였다.
또한 불편했던 점은 '번역문'이었다. 내가 한글 독해력이 그렇게 부족한 줄 몰랐었다. 철학적 개념의 이해보다 더 어려웠던 부분은 번역한 한글 문장의 해독이었다. 나의 책들이 거의 다 옛날 책이라서 그럴 수도 있다. 요즘엔 번역이 아주 매끄럽고 쉽게 된 책들이 많다.
<그림 속 철학, 철학 속 그림> 연재글 쓰면서 참고한 철학책들. 화가들 책은 정리하지 못하여 다음 기회에...
임의적인 작품 선택과 형식적인 아쉬움
작품 선택 자체가 언제나 임의적이었다. 다른 철학자와 다른 예술가를 연결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 연재는 하나의 가능한 지도일 뿐, 유일한 경로를 제시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작업을 계속하게 한 이유는 단순했다. 생각은 고립되어 존재하지 않으며, 이미지 역시 혼자 존재하지 않는다.
언어와 감각, 이성과 직관, 과거와 현재, 인간과 기술이 서로를 통과하며 의미를 만들어낸다. 철학과 예술의 만남은 두 영역을 결합하는 일이 아니라, 서로의 한계를 드러내는 일이었다.
이미 브런치 매거진 그림감상 쪽에 발행했던 작품들은 배제했다. 프란시스 베이컨과 질 들뢰즈, 알베르트 자코메티와 장 폴 싸르트르, 이런 결합은 연재글에 발행하지 않았다.
형식적 측면에서도 아쉬움은 남는다.
브런치라는 플랫폼의 특성상 글은 독립적으로 소비되는 경우가 많지만, 이 연재는 전체를 통해 하나의 흐름을 이루도록 구성되었다. 일부 독자는 특정 글만 읽었을 가능성이 있고, 그 경우 전체 맥락이 충분히 전달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특히 몇 편을 멤버십 콘텐츠로 발행하면서 연재의 연속성이 부분적으로 끊어진 점은 가장 아쉬운 대목이다. 멤버십 독자가 아닌 분들은 중요한 연결 고리를 건너뛰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전체 구조를 온전히 경험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글을 지속하기 위한 현실과 더 많은 사람에게 열려 있어야 한다는 바람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연재를 끝까지 쓰게 한 힘은 독자들이었다.
댓글 한 줄, 짧은 공감 표시, 아무 말 없이 반복해서 남겨지는 방문 기록들. 조용한 흔적들이 나의 글이 누군가에게 도달하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어떤 분은 미술관에 가고 싶어졌다고 했고, 어떤 분은 철학이 이렇게 읽힐 줄 몰랐다고 했고, 어떤 분은 아무 말 없이 매번 공감만 남겼다. 침묵조차 하나의 대화처럼 느껴졌다.
이 연재를 시작한 이유를 다시 생각해 본다.
나는 그림을 통해 철학을 설명하려 했던 것이 아니라, 철학을 통해 그림을 다시 보고 싶었던 것 같다. 그 과정에서 결국 나 자신을 다시 보게 되었다. 무엇을 아름답다고 느끼는지, 무엇에 불안을 느끼는지, 무엇을 이해하려 애쓰는지, 무엇 앞에서 침묵하는지.
그림은 언제나 질문을 되돌려준다. 당신은 무엇을 보고 있는가. 당신은 어디에 서 있는가. 당신은 어떤 세계를 살고 있는가. 연재는 끝났지만, 그림은 끝나지 않는다. 철학도 끝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려는 시도는 끝나지 않는다.
연재를 마치며
어쩌면 가장 중요한 것은 해석이 아니라, 멈추어 바라보는 시간일지도 모른다. 어떤 작품 앞에서 걸음을 늦추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소비자가 아니라 목격자가 된다. 이미지와 우리는 같은 시간 속에 존재한다. 그것이면 충분하다.
만약 이 글을 통해 단 한 사람이라도 미술관에서 작품 앞에 조금 더 오래 머물렀다면, 익숙한 이미지 속에서 낯선 질문을 발견했다면, 철학이 삶과 멀리 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면, 이 연재는 이미 제 역할을 다한 것이다.
보이지 않는 이미지들을 함께 상상하고, 게재된 url을 클릭하여 이미지를 감상하고, 말로만 이루어진 그림들을 끝까지 읽어 준 모든 독자들께 깊이 감사드린다. 연재 글들은 그림에 대한 글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함께 보려는 시도였는지도 모른다. 언젠가 또 다른 그림 앞에서, 또 다른 질문이 시작될 것이다. 그때 우리는 다시 생각하게 될 것이다. 이미지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우리는 그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그림 속 철학, 철학 속 그림>을 다시 훑어본다.
1부. 현대 철학과 현대 미술의 교차점
2부. 실존주의적 경계
3부. 언어와 기호의 관계
4부. 역사성과 윤리
5부. 기술과 이미지, 인간 이후
다음 글에서는 선과 형태 대신 색을 따라가 보려 한다.
색은 단순한 시각적 요소가 아니라 기억과 감정, 역사와 문화가 스며든 또 하나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곧 시작될 〈색의 우주 - 색으로 읽는 세계의 기억>에서 그 이야기를 이어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