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이후에도 세계는 계속되는가
5부 기술과 이미지, 인간 이후
26화 임마누엘 칸트와 토마스 사라세노 -인간 이후에도 세계는 계속되는가
우리는 언제부터 땅을 당연한 기반으로 여겼을까.
발 딛고 서 있는 이 땅이 인간의 소유일까? 인간이 중심일까? 인간의 세계라고 믿게 된 것은 언제부터일까?
토마스 사라세노의 작업 앞에 서면, 그 확신이 흔들린다. 공중에 떠 있는 구조물, 바람에 의지하는 비행체, 거대한 거미줄 같은 네트워크, 인간이 아니라 거미나 미생물의 관점에서 재구성된 세계. 사라세노의 작품은 땅 위에서 만들어졌지만, 땅을 떠나기를 꿈꾼다. 이상하게도 한 철학자를 떠올리게 한다. 인간 이성의 한계를 규정하면서 동시에 인간의 보편성을 주장했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
칸트에게 세계는 인간의 인식 구조를 통해 구성된다. 우리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알 수 없고, 오직 우리의 감각과 이해 능력을 통해서만 경험한다. 즉 세계는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이 “구성한 것”이다.
칸트는 <판단력 비판>에서 아름다움은 사물의 속성이 아니라 그 사물을 바라보는 우리의 판단 방식에 있다고 아름다움을 설명한다.
어떤 것이 아름다운가 아름답지 않은가를 판별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인식을 위하여 그 표상을 오성에 의해서 객체에 관련시키는 것이다. --- 쾌 불쾌의 감정에 대한 관계는 전혀 객체에 있어서의 어떤 것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관계에 있어서는 주관은 표상에 의하여 촉발되는 그대로 자기 자신을 느끼는 것이다. ---판단에 있어서 오로지 주관(주관의 감정)에만 관계한다면, 그러한 한에 있어서 판단은 언제나 미(적)감적이다. 41-42쪽.
자연은 우리를 위해 존재하지 않지만, 우리는 자연을 마치 목적을 가진 것처럼 경험한다. 이것을 칸트는 “목적 없는 합목적성”이라고 불렀다. 여기에는 결정적인 전제가 있다. 판단하는 주체는 인간이다. 자연은 아름답지만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은 인간이다. 자연은 거대하지만 거대함 앞에서 경외를 느끼는 것도 인간이다("숭고"). 칸트의 철학은 여전히 인간 중심적이다.
그러한 자연의 질서를 발견하는 것은 오성의 한 직무이거니와, 오성은 이 직무를 그의 필연적 목적, 즉 원리들의 통일을 자연에 도입하려는 목적을 위하여 의도적으로 수행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목적을 판단력이 자연에 대하여 부여하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오성은 이 점에 관해서는 자연에 대하여 어떠한 법칙도 지정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26쪽
(오성(悟性)은 감성이나 이성과 구별되는 지력(知力)을 뜻함. 칸트 철학에서는 대상을 구성하는 개념 적용의 능력을 말함.)
<영원한 평화> 임미누엘 칸트 지음, 백종현 옮김. 2013. 아카넷
<판단력 비판> 임마누엘 칸트 지음, 이석윤 역. 2017 (주)박영사
사라세노는 바로 그 중심을 흔든다. “인류세(Anthropocene)"라는 개념을 비판한다. 지구를 인간의 시대가 아니라 다양한 존재들의 얽힘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프로젝트 "에어로센(Aerocene)" 은 화석 연료를 사용하지 않는 비행을 실험한다. 태양열과 공기의 흐름만으로 떠오르는 비행체는 인간의 지배가 아니라 자연의 조건에 의존한다.
비행의 주체가 인간이 아니라 공기와 태양과 온도라면 어떨까. 그 순간 우리는 더 이상 '비행하는 존재'가 아니라 '떠 있는 존재'가 된다. 칸트의 인간 중심적 주체는 사라세노의 세계에서는 분산된다.
토마스 사라세노 <에어로센 - 세상을 바꾸기 위해 세계를 돌다> 2015.12.4~11.
그랑팔레 COP21(유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 본회의장, 파리, 프랑스.
지정학적 갈등으로 분열된 세상에서, 에어로센(Aerocene)은 참여와 협력을 촉구한다. 예술, 과학, 교육의 경계를 넘나들며, 공유된 지식을 위한 개방적인 플랫폼을 구축한다. 이를 통해 지구와 그 물리적, 자연적, 사회적 상호작용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추구한다. 우리가 지구에서 움직이고, 함께 살아가는 새로운 방식을 제시한다.
"에어로센"은 태양열과 공기의 흐름만으로 떠오르는 비행체 프로젝트다. 엔진도, 연료도, 조종 장치도 없다. 비행은 인간의 통제가 아니라 자연 조건에 의해 이루어진다. 칸트는 자연을 바라보며 “목적 없는 합목적성”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자연은 어떤 의도를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인간을 위해 설계된 것이 아니다.
에어로센 비행체는 바로 그 상태를 물질화한다. 비행체는 날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날게 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태양과 공기다. 인간은 설계자가 아니라 조건의 일부가 된다. 이 작품은 자연을 도구로 사용하는 기술이 아니라 자연과 협력하는 기술을 보여준다.
칸트가 미학적 판단에서 발견한 자연의 질서를 사라세노는 생태적 실천으로 확장한다.
목적이란 어떤 개념이 대상의 원인(그 대상을 가능케 하는 실재적 근거)으로 간주되는 한에 있어서 그 개념의 대상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떤 개념이 그 객체에 관해서 가지는 인과성이 합목적성(목적태 forma finalis)이다. 그러므로 단지 대상의 인식만이 아니라 대상 그 자체(대상의 형식 또는 현존)가 결과로서 오직 그 결과의 개념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으로 생각될 때에, 우리는 하나의 목적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61-62쪽. <판단력 비판>
사라세노의 행성적 공동체 논의와 연결된다. 자연을 목적처럼 경험한다는 설명이다.
2024.6.25 ~ 9.29. 리움미술관, 서울
서울에서 용산구의 여러 지역사회와 협력하여 수거한 5,000개 이상의 비닐봉투를 통해 환경 문제에 대한 관심과 변화를 담은 메시지를 표현했다.
사라세노가 반복해서 다루는 존재는 거미다. 거미줄은 단순한 구조물이 아니라 환경을 감지하는 감각 기관이며 진동을 통해 세계를 읽는 네트워크다. 인간이 시각 중심의 존재라면 거미는 진동 중심의 존재다. 칸트가 말한 감각의 선험적 형식 -공간과 시간- 은 인간에게만 해당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거미에게 세계는 빛이 아니라 떨림으로 구성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묻게 된다. 세계는 하나인가, 아니면 존재마다 다른가. 칸트는 보편적 인간을 전제했지만, 사라세노는 다종적 세계를 제시한다.
토마스 사라세노 <생명의 그물> 2023, 폰다치오네 마테라 바실리카에 영구설치. 마테라, 이탈리아.
토마스 사라세노 <생명의 그물> 2021. 서펜타인 갤러리, 런던, 영국
서펜타인 갤러리와 어큐트 아트, 토마스 사라세노, 아라크노필리아가 협업한 프로젝트, "Webs of Life". 세계에서 유일하게 채식주의자인 거미, 바기라 키플링기(Bagheera kiplingi)를 모티브로 한 증강 현실(AR) 작품.
거미줄 연구 작업 — 감각의 선험적 형식에 대한 질문
사라세노는 실제 거미와 협력하여 복잡한 거미줄 구조를 만들고 이를 전시한다. 또한 진동을 소리로 변환하여
거미의 감각 세계를 인간에게 들려준다. 칸트는 인간이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이 공간과 시간이라는 선험적 형식에 의해 규정된다고 보았다. 우리는 이 틀 밖에서 세계를 경험할 수 없다.
거미에게 세계는 시각이 아니라 진동으로 구성된다. 빛보다 떨림이 중요하다. 세계는 존재마다 다른 감각 구조 속에 존재하는 것일까? 칸트가 보편적 인간 인식을 전제했다면 사라세노는 다종적 인식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칸트의 <영원한 평화>는 국가 간 전쟁을 넘어서는 보편적 질서를 꿈꾼다. 모든 인간이 지구라는 공통의 표면을 공유한다고 말했다. 지구는 구형이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를 피할 수 없다. 결국 공존할 수밖에 없다.
사라세노의 작업은 이 사상을 인간 너머로 확장한다. 지구를 공유하는 존재는 인간만이 아니다. 동물, 식물, 미생물, 대기, 물, 심지어 먼지까지 모두 같은 행성 위에서 연결되어 있다. 그의 프로젝트는 국가가 아니라 행성적 공동체를 상상한다. 칸트의 평화가 인간 사회의 평화라면 사라세노의 평화는 생태적 평화다.
우주적 숭고와 공동 거주
<구름 도시>는 공중에 떠 있는 미래 도시를 상상한 구조물이다. 거대한 다면체들이 연결되어 중력에서 벗어난 새로운 거주 공간을 제안한다. 칸트는 인간이 같은 지구 표면을 공유한다는 사실에서 보편적 공존의 가능성을 찾았다. 저서 <영원한 평화> 에서 지구의 구형성 때문에 인간은 서로를 피할 수 없다고 말한다.
사라세노는 이 사상을 수직으로 확장한다. 지구 표면이 아니라 대기와 우주까지 포함한 공간에서의 공동 거주. 국가가 아니라 행성적 공동체, 인간 중심의 영토 개념을 해체하고 지구 자체를 하나의 공유 공간으로 재구성한다.
토마스 사라세노 <움직임 속의 고요함 — 구름 도시들> 2016 (설치 전경,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
사진: © 스튜디오 토마스 사라세노
클라우드 시티 프로젝트는 우리를 새로운 시대로 이끌어, 대기권에 떠 있는 도시를 통해 환경 문제뿐 아니라 심오한 사회학적 동기에 의해 움직이며, 보다 보편적인 인간 상호 연결성을 장려한다.
영원한 평화를 위한 제3 확정 조항 "세계시민법은 보편적 우호의 조건들에 국한되어 있어야만 한다."
서로 교제를 청할 수 있는, 모든 사람에게 있는 권리는 방문의 권리이다. 그것은 지구 표면의 공동 점유의 권리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인간은 구면(球面)인 지상에서 무한히 널리 흩어져 살 수는 없고, 결국은 서로 곁하여 있는 것을 인내하지 않으면 안 되며, 그러나 근원적으로는 어느 누구도 지구의 어떤 곳에 있을 권리를 타인보다 더 갖지 않는다. --- 멀리 떨어져있는 세계 지역들이 서로 평화적으로 관계맺고, 이러한 관계들이 마침내 공법화되며, 그렇게 해서 인류는 마침내 세계시민적 체제에 점점 가까이 다가설 수 있다. 132-133쪽 <영원한 평화>
토마스 사라세노 <구름 도시> 2011. 함부르크 중앙역.
클라우드 시티즈(Cloud Cities)는 인간과 환경의 얽힘을 전체적으로 탐구하는 항공 촬영 프로젝트로, 정신적, 사회적, 환경적 생태학을 향한 발걸음을 제시한다. 구름을 세포처럼 떠다니는 도시이자 상상 속의 떠다니는 정원으로 비유함으로써, 이 작품은 오늘날 도시 사회에서 영토, 국가적, 인종적, 정치적 경계가 갖는 의미를 재고한다. 무한한 건축이라는 유토피아적 이론을 제안한다. 도시 생태학이라는 개념에 물리적 현실성을 부여한다.
<판단력 비판>에서 칸트는 인간이 자연의 압도적 규모 앞에서 느끼는 감정을 “숭고”라고 설명했다. 폭풍, 산맥, 무한한 우주, 그 앞에서 우리는 작아지지만, 동시에 우리의 이성이 자연보다 위대하다고 느낀다. 자연은 우리를 압도하지만 우리의 이성은 그것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라세노의 작업 앞에서 느끼는 감정은 다르다. 자연을 넘어서는 인간의 위대함이 아니라 자연 속으로 사라지는 인간의 미세함이다. 거대한 설치물 위를 조심스럽게 걸어가는 관람객은 주체가 아니라 하나의 입자처럼 보인다. 작품은 인간을 중심에 두지 않는다. 숭고의 새로운 형태다. 인간의 위대함이 아니라 인간의 탈중심화를 이야기한다.
자연의 대상들에 관한 미감적 판단의 연역은 우리가 자연에 있어서 숭고하다고 부르는 것에 적응될 것이 아니라, 단지 미에만 적응되면 된다. 135쪽. <판단력 비판>
자연이 숭고하다 함은 단지 비본래적 의미에 있어서만 그렇게 불린 것이요, 본래적인 의미에 있어서는 숭고는 단지 심적 태도에만, 또는 차라리 인간의 자연적 본성에 있어서 심적 태도에 대한 기초 구실을 하는 어떤 것에만 부여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대상은 숭고하다는 것을 떠나서 다른 점에서 보면 본시 몰형식적이며 비합목적적인 것이므로 이러한 대상을 포착하면 그와 같은 심적 태도의 기초를 의식할 수 있는 가연이 주어질 뿐이다. 136쪽.<판단력 비판>
칸트는 인간 이성의 우월성을 이야기한다. '자연은 우리에게 위대하게 보이지만, 우리 안의 이성은 그보다 더 위대하다'는 것이다. 사라세노의 작업은 이 개념(인간 이성의 우월성)을 전복한다.
독일 뒤셀도르프 K21 미술관에 설치된 <궤도 안 In Orbit>은 공중에 매달린 거대한 그물 구조 위를 관람객이 직접 걸어 다니는 작품이다. 발 아래에는 수십 미터의 공간이 펼쳐지고, 몸은 흔들리는 구조물 위에서 균형을 잡아야 한다.
칸트는 자연의 압도적 규모 앞에서 느끼는 감정을 “숭고”라고 했다. 이 경험이 인간의 육체적 무력함과 이성의 위대함을 동시에 드러낸다고 보았다.
<궤도 안 In Orbit>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조금 다르다. 여기서 우리는 자연을 지배하는 존재가 아니라 불안정한 환경 속에 놓인 생명체가 된다. 이성의 승리가 아니라 신체의 취약성이 먼저 드러난다. 칸트의 숭고를 전복한다. 인간이 자연보다 위대하다는 확신 대신 인간도 하나의 물질적 존재에 불과하다는 감각을 남긴다.
우리가 자연을 역학적으로 숭고하다고 판정하자면, 자연은 공포를 일으키는 것으로서 표상되지 않으면 안 된다(비록 그와 반대로 공포를 일으키는 대상이 모두 우리의 미감적 판단에 있어서 숭고하다고 생각되지는 않지만), 왜냐하면 (개념을 떠난) 미감적 판단에 있어서는 장애에 대한 우세는 단지 저항의 크기에 따라서만 판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111쪽.<판단력 비판>
토마스 사라세노 <궤도 안 In, Orbit> 2013 - 2024. 기획: 마리온 에커맘, 수잔네 마이어-뷔저.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미술관, 뒤셀도르프, 독일.
2,500제곱미터 규모의 그물 구조물 안에 공기로 채워진 다섯 개의 "구체"가 배치되어 있다. 이 설치물은 초현실적인 풍경, 구름 바다, 또는 무중력 행성들이 떠다니는 우주 공간을 연상시킨다. 방문객들은 설치물을 타고 올라가 탐험할 수 있다. 용감하게 안으로 들어간 사람들은 아래에 있는 박물관 방문객들을 마치 모형 세계를 거니는 작은 인형들처럼 관찰할 수 있다. 반대로 슈텐데하우스의 광장과 메자닌에서는 그물 안에 있는 사람들이 마치 하늘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작가는 새로운 VR(가상 현실) 작품을 통해 '궤도 속'의 상호작용 요소를 더욱 발전시켰다.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거의 백만 명에 달하는 방문객을 맞이한 미술관(K21)은 K21에 설치된 거미줄 모양의 설치 미술 작품을 철거하기로 결정했다. 원래 1년 동안만 전시될 예정이었었는데, 큰 인기를 얻으며 계속 전시되었지만, 세월의 흐름에 따라 손상이 누적되어 전면적인 보수가 필요하게 되었다. 설치 미술 작품은 현재 철거됐다.
칸트는 인간의 판단 능력을 철학의 중심에 두었다. 사라세노의 작업은 묻는다. 판단하는 존재가 인간뿐이라면
우리는 세계를 얼마나 제한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어쩌면 인간 이후의 시대에 필요한 것은 새로운 기술이 아니라 새로운 감각일지도 모른다.
다른 존재의 관점에서 세계를 상상하는 능력, 중심이 아닌 위치에서 사고하는 능력, 지배가 아니라 공존을 선택하는 능력. 그것이 인간 이후에도 인간이 존재할 수 있는 방식일 것이다.
사라세노의 작품은 미래의 비전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잃어버린 세계의 감각을 보여준다. 칸트는 인간 이성의 한계를 규정함으로써 근대 철학의 토대를 만들었다. 사라세노는 그 토대 위에서 인간 중심 세계의 경계를 다시 그린다. 둘 사이에는 200년의 시간이 있지만 공통된 질문이 있다.
우리는 어떤 세계 속에서 살고 있는가. 그 세계는 누구의 것인가. 어쩌면 인간 이후의 시대는 인간이 사라진 시대가 아니라 인간이 중심이 아닌 시대일 것이다.
아르헨티나 출신의 현대미술가로, 건축·과학·생태학을 결합한 작업으로 알려져 있다.
베를린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MIT 연구소 등과 협력하여 예술과 과학의 경계를 넘는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그의 작업은 거미 연구, 공중 구조물, 태양열 비행체 등 비인간 존재와 환경을 중심에 둔다. 특히 “에어로센(Aerocene)” 프로젝트는 화석 연료 없는 비행을 통해 새로운 생태적 미래를 제안한다.
사라세노는 예술가라기보다 “행성적 실험가”에 가깝다. 그의 작품은 물질적 대상이라기보다 관계와 조건의 시스템이다.
칸트는 근대 철학을 결정적으로 전환시킨 독일의 철학자다. 인간이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 자체를 분석함으로써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인간이 대상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인식이 대상을 규정한다는 획기적인 인식론적 전환”를 이끌었다. 대표 저작인 <순수이성 비판>, <실천이성 비판>, <판단력 비판>은 인식, 윤리, 미학을 통합하는 철학 체계를 형성한다.
<판단력 비판>에서는 아름다움과 숭고, 자연과 예술의 관계를 분석했으며, <영원한 평화>에서는 국가 간 전쟁을 넘어서는 국제 질서를 제안했다. 칸트는 인간 이성의 능력을 신뢰했지만 동시에 그 한계를 분명히 규정했다.
그의 철학은 인간 중심 근대 사유의 정점이자 출발점이다.
올라퍼 엘리아슨 (Olafur Eliasson, 1967- )
빛, 물, 기후 현상 등을 이용해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탐구한다.
대표작 <날씨 프로젝트>는 인공 태양을 통해 자연 경험이 얼마나 문화적으로 구성되는지 보여준다.
올라퍼 엘리아슨 <날씨 프로젝트> 2003.10.16 ~ 2004. 3.21. 테이트 모던 터빈 홀, 런던, 영국.
터빈 홀을 위한 유니레버 연례 커미션 시리즈의 네 번째 작품인 "날씨 프로젝트"에서 올라퍼 엘리아슨은 이 보편적인 주제를 경험, 매개, 재현에 대한 아이디어를 탐구한다.
인간 중심 지각을 흔든다는 점에서 사라세노와 유사하다.
27화 <그림 속 철학, 철학 속 그림> 에필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