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함께 커피를 마시는 이웃 아주머니가 있었어요. 그 분은 화분을 정성들여 가꾸는 일을 취미로 삼았어요.
어느 날 그 분이 끓여주는 커피 생각이 나서 찾아갔지요. 전기 포트가 아닌 가스 불에 커피를 끓여 커피 색깔의 커다란 머그 컵에 가득 따라 부으면 우리는 중요한 것 보듬듯이 두 손으로 커피잔을 감싸안으며 손도 녹이고 향기도 즐기고 그러면서 마셨지요.
날씨가 끄느름한 어느 날 그 커피 생각이 간절해서 그 분을 또 찾아갔지요. 뜻밖에도 그 아주머니는 훌쩍훌쩍 울고 있었어요. 캐나다에 계신 친정어머니께서 암으로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대요. 친정어머니의 마지막을 보지못한 슬픔에 자꾸만 눈물을 닦아내고 있던 그 분이 어느 정도 진정이 된 듯 가스 레인지에 커피 물을 올려놓은 후, 마침 활짝 핀 아마릴리스 화분 곁으로 갔어요.
“이것 봐. 얘가 우리 어머니 돌아가신 소식을 듣고 나를 위로하려고 이렇게 꽃을 피웠어. 내가 이 꽃으로 얼마나 위로를 받는지 알아?”
진홍빛으로 화들짝 웃고 있는 아마릴리스도, 그 아름다움에 스스로의 슬픔을 위로 받을 줄 아는 아주머니도, 그 둘이 다 아름다워 보였어요.
그 분은 화분을 아주 좋아했어요.
“나는 꽃꽂이는 싫어. 꽃꽂이는 꽃이 시들어가는 걸 보게 되는데 화분은 꽃이 피어나는 걸 볼 수 있잖아.”
나도 그 말에 수긍을 했어요. ‘그래, 생명은 피어날 때가 아름다운 것이지.’
물론 꽃꽂이에서도 봉오리가 피어나고,화분에서도 꽃은 시들어가지만 꽃의 수명은 현저히 다르거든요.
그 무렵 우리는 굉장히 어려운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었어요.
철이 없어서인지, 젊음의 패기(이제 생각하니 젊은게 아니라 어렸어요. 30세가 안됐으니) 때문인지, 아무튼 겁없이 덜컥 사표를 던지고 밑천도 없이 시작한 사업은 회사 창립일을 열흘도 채 못 넘기고 대통령이 암살당하는 사건의 소용돌이 속에서 발 뻗을 자리를 못 찾고 헤매었지요. 대통령 암살사건 그 후에 사회 전반적인 경기 침체, 그 터널을 벗어날 때까지 견뎌내야 할 자금 부족, 사방을 둘러봐도 우리가 도와줘야 할 사람들만 있고 우리를 지원해 줄 사람은 하나도 없는 어려운 생활 속에서 참으로 암담한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겨우겨우 넘겨가고 있었어요.
그렇게 겨울을 다 벗어나지 못한 겨울의 끝 무렵에, 새 봄의 시작은 아직 이른 것 같은 그 때에, 나는 아파트 길가 양지바른 곳에서 철 이르게 올망졸망한 꽃 화분을 늘어놓은 꽃 장사를 발견했어요.
잔뜩 심통이 난 꽃샘 바람에 프리뮬러가 파르르 떨고 있었어요. 나는 프리뮬러를 따뜻이 보호해 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요. ‘우리집으로 데려가야지’하는 생각에 그 화분을 샀지요.
아이들 과자값 정도의 적은 돈으로 나는 ‘봄’을 사들였어요. 어깨에 무겁게 걸치고 있던 겨울의 누더기를 벗어던지고 화려한 봄을 즐겼지요. 이웃 아주머니와 커피를 마실 때의 화제도 바뀌었고요. 살기 힘들다는 푸념은 어느덧 사라져버렸어요. 돈 몇푼만 주면 얼마든지 가장 좋은 상태로 피어있는 꽃을 볼 수 있는데 왜 손에 흙을 묻히고 고생이냐고 우리를 비웃는 사람들을 오히려 비웃으며 우리는 꽃 기르기에 열중했어요.
아주 작은 부주의 때문에 꽃나무 줄기가 조금이라도 꺾이면 그것이 내살인양 아팠고, 물에 담가둔 줄기에 뿌리가 내려서 새로 화분을 만들 땐 그것이 마치 내 생명인 것같다는 이야기를 하며 우리는 자주 함께 커피를 마시곤 했지요.
그 아주머니와 헤어진 이후로 나는 꽤 여러 번 이사를 했어요. 차츰차츰 우리는 제법 많은 화분을 기르게 되었지요. 이사할 때 마다 겹쳐서 실을 수 없는 화분이 짐스럽긴 했지만 물건이 아닌 생명이라 생각하니 함부로 떼어놓을수가 없더군요.
우리는 항상 아파트에 살아서 베란다에 화분을 배열할 때 마다 나는 갈등을 겪곤 했어요. 화분이 지닌 생명을 인정해 주는 것과, 그것을 즐기는 인간 중심의 이기주의와의 사이에서 나는 선뜻 무엇을 선택하지 못하고 망설이며 고민을 하게 됐지요. 결국에는 인간 중심의 이기주의를 택하게 되지만 언제나 마음은 편치 못했어요.
베란다에 화분을 어떻게 배열해야 좋을까요? 왜 그렇게 쉬운 문제 때문에 고민했는지 이해를 못하실 거에요. 키가 큰 것은 뒤에, 그 보다 작은 것은 그 앞에, 더 작은 것은 또 그 앞에, 이런 식으로 놓아야만 우리가 거실에 앉아서 볼 때 커다란 화분과 작은 화분이 잘 어우러져 멋진 실내 정원이 되지요.
키가 큰 것들은 대부분 잎의 푸르름을 즐기는 것들이고, 꽃을 보기 위한 화분들은 그보다 키가 작은 것들이에요. 유두화나 동백처럼 큰 것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꽃 화분들은 큰 나무들의 앞쪽을 차지하게 되지요. 이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고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아요.
그러나 제한된 아파트 유리창을 통해 한정된 햇빛만을 받아야 하는 그 식물들에겐 이런 식의 배열은 옳지않아요. 꽃들에겐 햇빛이 절대적으로 필요한데, 햇빛이 가장 잘 드는 유리창 바로 앞에는 커다란 화분들이 가로막고 서서 그 소중한 햇빛을 독차지하고 있으니 작은 꽃 화분들은 얼마나 억울하겠어요?
왜 사람들은 자기가 바라보는 입장만 생각하고 식물들이 잘 자랄 수 있는 조건들은 무시하느냐고 키 작은 화분들은 끊임없이 외칠 거에요.
‘우리가 향해야 할 곳은 당신네 사람들 쪽이 아니고 저 태양 쪽이에요. 저 앞의 키 큰 화분들 때문에 우리는 햇빛을 쬘 수가 없어요. 키 작은 우리들이 앞 자리이고 키 큰 쟤네들은 뒷자리인 게 옳지 않나요? 그렇게 놨다고요? 아니 아직도 어디가 앞인지 모르세요? 앞은 당신들 쪽이 아니고 저 밖을 향한 유리창 쪽, 햇빛이 들어오는 쪽이 우리들의 앞이라니까요. 우리는 사람을 바라보고 사는 게 아니고 태양을 바라보며 살지요. 당신네 인간들은 너무 이기적이에요. 자기 쪽에서만 생각하는 이기주의자들이라구요.’
우리들 중 누가 화분들을 바꿔놓을 수 있을까요?
키 작은 것은 바깥 유리창 쪽으로, 키큰 것은 거실 쪽으로, 그래서 우리들이 보면 키 큰 화분들이 우리 앞에 있어 그 뒤쪽의 작은 화분들에 꽃이 피었는지 어떤지도 알 수 없는, 사람들 쪽에서 보면 잘못 배열된 위치로 누가 먼저 화분을 바꿔놓을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