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꽃들에게 지은 죄 2

by morgen


<우리가 꽃들에게 지은 죄 2>


날씨가 제법 춥다.

바깥이 추우면 안도 춥고, 바깥이 따뜻하면 안에서도 덜 추운 것이 맞는 법인데 우리집은 바깥이 추울 때는 안의 난방을 더 많이 하고, 바깥이 안추울 때는 보통의 난방으로 거의 일정한 실내온도를 따뜻하게 유지하고 산다.

그 온도의 수치는 공개하기에 좀 부끄러울 정도의 높은 겨울 실내온도이다.

그래서 지금 90노모에게 몸 녹일 전기제품을 마련해드리고 전체온도를 낮출까 많이 생각중이다.

그만큼 우리집 실내온도는 내가 용납할 수 없이 높아서………


외출에서 돌아오면 방긋웃는 꽃송이들이 나를 맞는다. 지금 피어있는 꽃은 활짝 핀 덴드로비움과 목을 쭈욱 내뽑고 피어난 꽃기린.

이름을 잘 모르지만 석곡 한 종류가 진분홍빛으로 피어있다. 계화나무와 레몬트리도 그 향을 한껏 자랑한다. 계화나무는 초겨울 선선할 때 피는데 아직 조금 남아있고, 레몬은 지중해성 기후에서 일년에 다섯 번까지도 수확한다.

추위를 뚫고 돌아온 집에서 이렇게 나를 맞는 꽃들이 얼마나 고마운지.

그러나 곧 그 꽃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든다.

동설목은 겨울에 피는 꽃이지만 겨울을 잘 느끼지 못하는 우리집에서 지금꽃을 피우지 못하고 있다.

화분에 물을 줄 때마다 꽃을 피우지 못하는 식물들에게, 철모르고 꽃을 피어낸 식물들에게, 모두에게 다 그저 미안할 뿐이다. 나는 화분 가꾸기에 마음을 많이 쏟는다. 마음을 두는 만큼 내가 식물들에게 잘 못하고 있다는 생각도 겹쳐서 들곤한다.

좌 꽃기린, 우 레몬

때맞춰 정성껏 물을 주고, 흙이 굳은 것 같으면 작은 화분이지만 숟가락으로 흙을 뒤엎어 갈아주고, 한정된 흙 속에서 살고 있으니 필요한대로 영양제도 주면서 키우는데 이것만으로 식물들에게 다 잘해주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나는 가끔 나의 화분들, 거기서 사는 식물들에게 그저 미안한 마음이 든다.

식물은 제 철에 따라 햇빛도 쬐고 비도 맞고, 추운 겨울에 떨기도 해야 건강히 자라는 것은 자연의 섭리이다. 다년생 화초들의 봄 꽃은 40일 정도의 겨울잠을 자야 좋은 꽃이 핀다고 한다.

나무들은 추위가 시작되면 다음해에도 계속 살기 위해 잎을 다 떨궈버리는데, 그 원리를 무시하고 따뜻한 겨울환경 속에서 추위도 모른 채 지나도록 하는 것, 이것이 내가 식물들에게 저지르는 만행이다.


가끔 방문객들이 오면 잎이 푸르고 싱싱한 나무나, 때아닌 꽃이 아름다운 화분들을 보고 아주 좋아하며 잘 가꾼다고 칭찬까지 한다. 순전히 사람의 입장에서만 그런 것이다.

아열대 기후에 익숙한 식물들이 아니고서는 따뜻한 아파트 실내에서 겨울나는 나무나 화초들은 그 따뜻한 환경이 얼마나 열악한 것인지, 사람들은 생각하지 않는다. 한 여름에 푸르고 싱싱한 잎을 보곤 감탄하지 않더라도, 추운 겨울실내에서 싱싱한 잎을 보면 감탄한다. 식물들의 생태환경이야 어떻든 사람의 눈을 즐겁게 해주는 것이 좋은것이다.

이름 모를 석곡의 진분홍꽃 몇 송이는11월 초에 개화하여 지금까지 피어있으니 참 이상한 일이다.

우리 가족은 그 꽃을 보며 이런 말장난을 한다. “얘는 자기가 생화인 걸 잊어버렸나? 정말 지가 무슨 조화인 줄아나봐.”

시들지 않는 꽃이 고맙다가도 걱정이 되고, 강한 생명력을 느끼기보다는 오히려 지지 않는 그 꽃을 불안한 마음으로 살펴보곤 한다.

덴드로비움

레몬 열매는 콩알만큼 자랐다. 몇개는 꽃잎이 말끔히 떨어졌고, 몇 개는 말라붙은 꽃잎이 그대로 부스스한 모습으로 붙어있는데 그냥 놔두고 보는중이다. 처음 우리집에 온 해에는 열매를 맺지 못했다. 다 내 잘못이다. 꽃은 많이 피었었는데… 그 향기에 우리는 얼마나 행복했었던가.

문제는 꽃이 질 무렵에 생겼다.

후줄근하게 말라가는 꽃이 지저분하여 시들기 시작한 꽃은 다 따버리고 나무를깔끔하게 잘 정리했다. 꽃이 자연적으로 낙화할 때까지 그대로 두어야 열매가 맺는다는 것을 생각지 않고보기 좋은 상태가 지난 것을 미리 다 제거해버린 것이다.

이 또한 얼마나 인간중심적인 사고방식인가. 꽃들의 생태리듬을 뚝 끊어버렸으니 얼마나 미안한 일인가.

지금 레몬 나무는 말라서 지저분한 꽃이 가지 여기저기에 붙어있지만 나는그냥 그대로 두고 본다. 내 눈에 띠지 않을 정도로 작은 열매가 그 꽃에 붙어있으리라는 기대감 때문에.

몇 개의 열매는 콩알만큼 큰 상태인데,다 크려면 아직도 멀었는데, 레몬나무에 노란 열매가 매달려있는 모습을 미리부터 그려보곤한다.

열매가 노랗게 익기 시작하면 나는 누군가에게 말 걸기를 할 것이다. 사진을 찍어서 보여주고, 레몬처럼 상큼한 인사말을 건네고, 레몬이 꽃피고 열매 맺고 익어가는 시간의 타래를 풀어놓아야지. 말걸기의 시초는 레몬이 노란 빛을 띠기 시작할 무렵이 핑계가 좋을 것 같으니…

지중해성 기후에서 생육이 적합한 레몬 한 그루 화분에 심어두고 그 나무에겐 고문을 하며, 내 마음은 꿈을 꾸며 그런 시간을 보내고 있다.

강낭콩 씨앗을 심고 가꾸는 손녀.

머지않아 봄이 오고 꽃이 피면, 목적없는 일에 시간을 절대로 투자하지 않는 이웃들에게도 우리집 식물들에게서 얻는 여유를 나눠줘야겠다.

“주말에 시간 있으세요? 우리집에 와서 차 함께 마셔요.”

“무슨 일 있으신가요?”

“아니요, 아무일도 없어요. 그냥… 꽃이 피어서.”


꽃들은 꽃잎을 열고, 나는 마음을 열고 입을 열고 대문을 활짝 열어두는 봄이 되면 좋겠다. 그것이 나의 화분들에게, 나의 식물들에게 조금이나마 미안한 마음을 씻는 일이 될 것 같다.

계절을 잊고 혹사당하는 철모르는 우리집 화분들, 겨울이나 봄이나 사람에 의해 갖추어진 기온은 똑같지만 해바라기하는 시간이 달라지고, 창을 통해 들어오는 볕이 달라지니 그들도 봄을 느낄 것이다. 인공의 조건이 감당할 수 없는 부분을 그들의 생체 시계는 세포에 새겨져 있어 때가 될 때마다 신호를 보내줄 것이다.


오늘, 우리집 식물들은 <입춘>이라는 메시지를 다 받은 것일까?

좌 부켄베리아, 우 호야

(개화기에 촬영하여 그 시기가 다 다릅니다.)


<행복해지는 약>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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