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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니에드만 May 08. 2018

2. <동아일보> 논술 합격문 검토記

언론사 준비생을 위한 가이드 [2] 역사적 맥락에 대한 검토를 잊지 말자

앞선 글에선 2014년 <조선일보> 논술과 관련해 ‘추상적인 논제를 대하는 법’에 대해 주로 이야기했습니다. 시험장에서 논제가 주어졌을 때, 성급하게 달려들기보다 각도를 달리해 스스로 문제를 재설정하고 논증하는 편이 더 유리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이번에 검토해볼 논술은 2014년 <동아일보>다. 논제는 ‘2014 대한민국의 애국에 대해 논하라’였다. <동아일보> 역시 일정한 출제 경향을 갖고 있다. 과거 사례를 보자. 2013년 ‘공짜점심의 비용’, 2016년엔 ‘4차 산업혁명과 교육 개혁’, 2017년엔 ‘문재인 김정은 트럼프 시진핑’ 이었다. (1600자, 90분이 주어졌던 걸로 기억한다)      

<조선일보>와 마찬가지로 현안에 대한 구체적 입장을 묻기보다 여러 갈래로 생각할 수 있는 큰 화두를 던지는 것이 공통점이라 할 수 있겠다. 이처럼 다소 추상적이고 광범위한 논제가 주어질 경우, 그 대응 전략에 대해서는 앞선 글에서 논했다. 이번 글에선 채점자들의 구미를 당기게 하는 논리 전개의 일정한 패턴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채점자들은 응시자들이 현안에 대해 구체적 수치까지 암기해가며 공부한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스터디를 조직해 논술과 작문 공부를 한다는 점, 그렇게 현안마다 한 편의 완벽한 자기 글을 가지고 있다는 점, 그래서 어떤 주제가 나오든 기존에 연습했던 글을 현장에서 바로 토해낸다는 점도 알고 있다.

      

실제로 내가 입사한 뒤 채점위원이었던 한 선배에게 물어보니 전체의 팔할이 그런 글(예상이 가능한 글)이었다고 했다. 또 이런 부류의 글은 눈속임이 어느 정도 있다고 해도 외워서 썼다는 점과 짜깁기를 영리하게 했다는 점 등이 금방 눈에 띄었다고도 전해줬다. 물론 채점 기준이 다른 신문사도 있다. 아주 구체적인 논제를 던지를 곳이 대개 그러하다. 이 경우엔 스터디에서 완성해놓은 글을 토대로 유연하게 대처하는 편이 훨씬 현명할 것이다.      

그럼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와 같이 다소 추상적인 논제, 정확히 말하면 스스로 문제를 설정하고 논거와 대안을 제시해야하는 부류의 논술에서는 어떤 식의 논리 전개가 합격으로 가는 지름길이 돼 줄 수 있을까? 난 그것이 ‘역사적 맥락에 대한 검토’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당신의 글과 다른 지원자들의 글을 차별화해주는 핵심 요소가 될 것이다.      


현안은 매일 새로 생겨난다. ‘갑툭튀’로 보이는 사건도 잘 뜯어보면 과거에 유사한 성격을 가진 사건의 연장선상에서 존재한다. 현재나 미래도 마찬가다. 다만 기사를 읽게 될 독자를 포함한 기자들 모두가 현안에 파묻혀 정신없이 살다보니, 그 물밑을 흐르는 거대한 맥락을 놓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현상을 ‘전무후무하다’, ‘유례가 없다’고 성급하게 결론내린다. 언론은 특히 ‘최초’, ‘최고’, ‘단독’ 같이 독자의 눈을 사로잡는 말들을 너무 쉽게 즐겨 사용한다. 실제 사후에 되짚어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가 대다수인데도.         

요약컨대 눈앞에 당면한 요란한 현상이 우리 눈을 흐리게 해 본질을 보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본질은 아주 단순한데, 본질을 보아내기가 그렇게 어려운 것이다. 본질을 알면 현상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질 것이고 미래에 대한 예측과 대비도 가능해지지만 인간의 인지 조건이 그리 성실하진 못한 것 같다.

      

이 일을 기자들이 해야한다. 독자들은 각자의 생업에 종사하느라 미처 보지 못하거나, 볼 수 없을 역사적 맥락을 드러내 본질을 짚어주는 기사가 좋은 기사다. 기자들은 늘 이 본질에 대한 갈증을 느낀다. 매일 지면을 메우는 데 하루를 바치고 퇴근하는 순간이 되면, 그런 욕구가 가장 높게 차오른다.(그래서 실제로 더 깊이 있는 공부를 하고 싶다며 대학원으로 돌아가는 기자들도 많다)

   

때문에 채점위원들이 좋아하는 논술은 논제에 맞는 역사적 맥락을 건드려주는 글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역사적 맥락의 사실 여부가 아주 정확할 순 없을 것이다. 현장에선 사전이나 모바일 검색이 제한된다는 것은 채점자들도 알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 논제가 이 시점에 출제된 이유에 대한 역사적 숙고가 글에 나타나 있느냐 여부다. 그 진단이 다소 어설퍼도 좋다. 있는 것과 없는 것은 당신의 글과 다른 글을 질적으로 확연하게 차이나게 만들어줄 것이다.      

말이 길었다. 내가 2014년에 쓴 답안을 보자. 미리 고백건대, 상당히 부끄럽다. 그래도 일단 읽어주시길. 냉혹한 비판이 이어질 것이다.      


논제 : ‘2014년 대한민국의 애국에 대해 논하라’     


제목 : 광화문을 바라보며 베버를 생각한다      


한국 사회에 ‘근대’는 갑작스레 강제적으로 삽입됐다. 급격한 산업화와 민주화 과정 탓에 이를 이끌어 가는 우리 근대인과, 그들이 구축한 근대사회에 대한 성찰도 자연히 부재했다. 서구 근대화 300년 투쟁에 비하면 우리의 근 50년은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한국 근대화에 대한 언어와 담론이 사라진 곳에 들어찬 것이 성찰없는 열정과 무차별적인 헌신이다. 여기에선 말이 말과 부딪혀 습합하지 못한다. 한국 사회의 미래 비전에 대한 건설적인 담론 형성 역시 난망한 일이다. 오로지 자신이 옳다는 신념윤리만이 출몰한다. 이것이 2014년 이념 갈등과 인정투쟁으로 갈기갈기 찢긴 대한민국의 현주소다.

     

사회학계 거장 막스 베버는 근대사회를 맞이하는 근대인의 시민윤리로써 ‘책임윤리에 정초한 개인주의’를 제안했다. 그는 이러한 개인들이 만들어내는 자율적 결사체를 꿈꿨다. 그래야만 현대 문명국가를 건설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한국사회는 어떤 모습인가? 정반대다. ‘신념윤리에 기초한 집단주의’가 만연하다. 한국의 산업화는 개인적 의견을 모두 집단의 논리 뒷전으로 돌렸고, 그렇게 개인을 지워갔다. 개인 역시 자신의 의견을 표출하기 보다는 집단의 논리에 맞춰 자기 자신을 조정해갔다. 개인의 생활윤리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사회적 윤리를 창안할 기회를 갖지 못한 것이다. 여기에 전대미문의 대참사가 발생했다. 국가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우리들 앞에 던져진 것이다. 

    

이에 집단들이 행동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속한 집단이 내세우는 의견이 진리인 것처럼 생각하는 이들이 늘어갔다. 신념윤리로 가득 찬 집단에게 외부의 의견이 성찰의 대상이 될 리 만무하다. 침묵의 나선 효과가 발생한다. 큰 목소리가 진리다. 더 크게 말하는 것이 집단의 이름값을 드높이는 양 선전된다. 이 폐쇄적 공동체는 건강한 시민사회와 융화되지 못하고 고립되어갔다. 그렇게 사회적 갈등은 자연스레 심화됐다.  

   

물론 저마다의 애국이 있을 것이고, 그것을 이뤄내는 각자의 방법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애국은 정의할 수 없고, 외려 그것 때문에 더 가치있는 개념일 수 있다. 민주주의는 본래 시끄러움을 내장한 체제이고 그것을 원동력으로 진전된 해결책을 도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상기컨대, 역사적 사례를 살펴보면 쇼비니즘의 창궐은 경제적 무력감과 열패감이 동반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지금 한국사회도 혹시 그렇지 않은가. 

    

2014년 광화문을 바라보며 다시 베버를 생각한다. 100여 년 전 앞을 내다보며 제시했던 베버의 시민윤리 즉 ‘책임있는 개인들의 자발적 결사체’를 말이다. 우리는 토론할 준비가 되어있는가. 우리 자신으로 바로 설 수 있는가. 내 자신의 진지한 성찰에서 우러나온 미래 비전에 대한 의견이 아닌 집단의 논리에 함몰된 신념의 덫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지는 않은가. 혹 이 정치적 소용돌이는 경제적 열패감의 다른 비정상적 표출은 아닌가. 성찰 없인 애국도 없다.     


한 마디로 자평해보겠다. 지적 허세가 가득 낀 기름진 글이다.(당시에 지적 허영이 심했다는 점을 인정한다) 지금 쓰라면 절대 이런 느끼한 글은 쓰지 않을 것이다(이 부분에 대해선 차후에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문단마다 논리 연결도 촘촘하지 못했다. 


앞선 <조선일보> 논술 검토기에서 지적한 것처럼 구체적 사례 하나 제시하지 못했다. 사유가 빈곤하니 어휘로 간신히 승부를 보려는 의도도 엿보였을 것이다. 그래서 적잖이 부끄럽다. 그럼에도 이 글이 합격할 수 있었던 데에는 역사적 맥락을 언급한 것에 있었다고 난 판단한다.

      

결국 ‘애국’이 키워드였다. 아마도 많은 수험생들은 당시 광장에서 벌어지고 있었던 이념 투쟁의 구체적 사례를 나열하면서 논증했을 것이다. 이것도 훌륭한 논술이 될 수 있다. 다만 내가 주목했던 것은 왜 이 시점에 ‘애국’을 생각해봐야하는 것인지, 나라를 사랑한다는 말의 역사적 맥락은 대체 어디에 있는지 하는 점이었다.

      

내가 지적한 역사적 맥락의 사실 관계가 정확한지는 확신할 수 없다. 다만 일단 ‘말이 되게 썼다’는 점, 그래서 대강 납득은 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점, 설익고 어설펐을 것이 채점자들에게 탄로났겠지만 어떻게든 물밑 맥락을 보아내려 노력했다는 점이 점수를 받았을 것이라 판단한다. 그러니 당신도 어떤 주제의 논술을 쓰든, 현상에만 주목하지 말고 그 현상이 나온 역사적 흐름을 조금이라도 언급해주길 바란다.      

*참고로 <동아일보>는 아주 독특하고 참신한 글을 좋아하는 것 같다. 이는 순전히 내 느낌이다. 그러니 논증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독특하고 참신한 글을 좋아하지 않을 신문사가 어디있겠냐만, <동아일보>는 독창성에 더 점수를 높게 주는 것으로 보인다. 현업에서 전해 들은 바 역시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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