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누군가와 함께하는가
골프 수업이 있는 날이었다. 전 날에 문자를 받았음에도 완전히 잊고 있었다. 원래 약속은 까먹지 않는 데도 머릿속에 여유가 아예 없었다. 연습시간을 삼십 분 남겨놓고 취소하는 것은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몸을 이끌고 골프장으로 향했다. 분명히 괜찮은 모습으로 웃으면서 인사했는데 무슨 일이 있냐고 묻는 말에 그냥 몸이 조금 좋지 않다고 했다. 나의 슬픔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고 무던히도 노력했지만 어쩔 수 없나 보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몸 상태는 최악이었다. 몸보다 마음이 더 아팠을 뿐.
수업을 시작하니 자세에 대해 열심히 설명하는 것 같은데 하나도 들리지가 않았다. 마치 단어들이 나를 피해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것 같았다. 정신이 어떻게 되었나 싶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말하기를 멈추더니 “한 번 해보세요"라고 했다. 아, 나는 정말로 아무것도 듣지를 못했다. “죄송합니다, 뭘 하라고 하셨죠?”라는 말에 잠깐 놀란 기색을 보이더니 이내 다시 설명을 시작했다. 여전히 들리지 않았다. 나만 음소거 상태의 세상을 사는 것만 같았다. 더 이상의 연습은 무의미하다고 느껴서 그만 두기로 했다. “죄송합니다, 오늘 몸상태가 너무 안 좋아서 못 할 것 같아요. 수업 횟수 차감해주세요. 다음에 다시 올게요.” 무슨 말을 했던 것 같은데 아마 “푹 쉬세요"같은 형식적인 인사가 아니었을까. 나를 안쓰럽다는 듯이 바라봤던 것으로 기억한다. 걱정하던 것뿐인데 나는 그 눈빛이 싫었다.
오늘 시카고에는 첫눈이 왔다. 쌓일 만한 눈도 아니었고, 아스팔트에 닿으면 바로 사라질 정도로 미약했지만 여전히 눈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건 가을의 종말을 의미했다. 며칠 전만 해도 단풍 물이 아직 들지 않았다고 했었는데 어느새 낙엽이 지고 겨울이 성큼 다가오고 있다. 나무는 겨울을 버티기 위해 잎을 떨어트릴 수밖에 없다. 뿌리 깊은 나무는 같은 자리를 지키겠지만 매 년 떨어지는 낙엽을 어느 누가 걱정이나 할까. 그런 낙엽에게는 아무런 힘이 없다. 이내 바람에 날려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다. 쓸어서 치워버려야 될 존재가 되는 건 너무 슬프기에.
가을이 너무 짧기만 하다. 아직 가을을 떠나보낼 채비를 마치지 못했다. 집에 돌아오는 길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고. 비바람이 세게 몰아쳐서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언젠가 당신에게 빨간 불빛이 좋다고 한 적 있다. 운전을 하는데 그때와 같이 불빛이 가득했다. 나는 빨간 불빛에 대해 사실 아무런 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 빨간 불빛이 좋다던 말은 그저 당신과 함께하는 모든 시간이 좋다는 말이었다.